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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나카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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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706년에 태어난 인물로, 후지와라노 무치마로의 아들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관료였다. 그는 734년 조정에 출사하여 고모인 고묘 황후의 후원을 받으며 권력을 키워나갔다. 757년에는 자신의 사위인 오이 왕(준닌 천황)을 옹립하고, 자미내상과 태보를 역임하며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그러나 고켄 천황과의 불화와 도쿄(승려)와의 갈등으로 인해 764년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나카마로가 추진한 정책 중 일부는 폐지되었지만, 양로율령 등은 수정되어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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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64년 사망 - 이광필 (당나라)
    이광필은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환관의 모함과 정치적 불안으로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기도 했으며, 사후 무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기본 정보
이름후지와라노 나카마로
개명에미노 오시카츠
별칭나카마로
나카마루
에미 대신
시대나라 시대
출생게이운 3년 (706년)
사망덴표호지 8년 음력 9월 18일 (764년10월 21일)
관위정1위, 태사 (태정대신)
주군쇼무 천황
고켄 천황
준닌 천황
씨족후지와라 남가
아버지후지와라노 무치마로
어머니사다히메 (아베노 미우시의 손녀)
형제자매도요나리
나카마로
오토마로
고세마로
남전
배우자후지와라노 우히라코 (후지와라노 후사사키의 딸)
오토모노 이누카이의 딸
요코 여왕 (닛타베 친왕의 왕녀)
나가키노 이라츠메 (기노 마로의 딸)
자녀마타리
마사키
구니마로
아사가리
고유마로
하시오
사쓰오
가라카치
시츠도
마후미
도쿠이치
지주
도시
가쿠
기타
로마자 표기Fujiwara no Nakamaro

2. 생애

734년 종5품 대학소윤(大學少允)으로 처음 조정에 출사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737년 천연두로 아버지와 세 형제를 잃었으나, 고모인 고묘 황후의 후원으로 743년 민부경(民部卿), 746년 식부경(式部卿)을 거쳐 749년 고켄 천황 즉위 후 다이나곤으로 승진했다.[87] 고묘 황태후를 위해 설치된 시비추다이(紫微中臺)의 장관인 시비료(紫微令)에 임명되어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다.[87]

744년 아사카 친왕의 급서에 나카마로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755년 다치바나노 모로에가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실각하면서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했다. 756년 쇼무 천황 붕어 후 757년 후나도왕(道祖王)이 폐위되고 나카마로의 사위인 오이왕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나카마로는 자미내상(紫微内相)에 올라 후히토가 착수한 양로율령을 시행했다. 758년 준닌 천황이 즉위하자 그를 옹립한 나카마로는 권력의 정상에 올라 독자적인 정치를 해나가 부역의 경감, 평준서(平準署) 창설 등의 덕치를 베푸는 한편 관직 명칭을 당풍으로 개정하는 등 개혁 정치를 펴나갔다. 같은 해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발발하고, 12월에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오노노 다모리 등이 당의 혼란상을 보고하였다. 다자이후에 방비를 강화하도록 명하는 한편에서 신라와의 외교 분쟁을 빌미로 소위 신라정토계획(신라 정벌 계획)이라는 전쟁 준비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 상황(上皇)이었던 고켄 천황과의 불화와 전쟁 동맹군으로 끌어들이려던 발해의 미온적인 태도로 무산되고 말았다.

760년 나카마로는 황족 외의 인사로서는 처음으로 대사(大師), 즉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지만, 고모이자 정치적 후견인인 고묘 황태후가 사망하자 점차 사양길에 들어서기 시작해 고켄 상황과의 불화로 그의 정치적 입지가 더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764년 준닌 천황고켄 상황에 의해 제압되어 폐위되자 나카마로는 교토를 탈출해 아들인 후지와라노 시카치가 태수로 있는 에치젠국으로 도주해 재기를 꾀했지만 정부군에 패배해 처자식과 함께 비와호에서 배를 타고 도망가려다 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그의 일족은 6번째 아들 후지와라노 요시오만 남기고 멸족당했다. 그가 추진했던 정책 중 관명의 당화(唐化) 정책은 폐지되어 기존 관명 제도로 회귀했지만, 양로율령 등의 다른 정책은 일부 수정되어 다음 정권에 의해 지속되었다.[87]

2. 1. 초기 생애와 출사

706년 후지와라 남가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무치마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4] 어렸을 때 다이나곤 아베노 스쿠나마로에게 산술을 배우면서 출중한 재능을 드러냈다.[54] 734년 종5품 대학소윤(大學少允)으로 처음 조정에 출사했다.[86]

2. 2. 권력 장악 과정

734년 종 5품의 대학소윤(大學少允)으로 처음 조정에 출사한 나카마로는 737년 천연두로 아버지와 세 형제를 잃었으나, 고모인 고묘 황후의 후원으로 743년 민부경(民部卿), 746년 식부경(式部卿)을 거쳐 749년 고켄 천황 즉위 후 다이나곤으로 승진했다.[87] 고묘 황태후를 위해 설치된 시비추다이(紫微中臺)의 장관인 시비료(紫微令)에 임명되어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다.[87]

744년 아사카 친왕의 급서에 나카마로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755년 다치바나노 모로에가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실각하면서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했다. 756년 쇼무 천황 붕어 후 757년 후나도왕(道祖王)이 폐위되고 나카마로의 사위인 오이왕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나카마로는 자미내상(紫微内相)에 올라 후히토가 착수한 양로율령을 시행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다치바나노 모로에의 아들 나라마로가 757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밀고로 발각되어 관련자 443명이 처형당했다. 이 과정에서 나카마로의 형인 도요나리도 좌천당했다.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72]

2. 3. 준닌 천황 옹립과 정책 추진

757년 쇼무 천황의 유언으로 태자가 된 후나도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사위인 오이 왕(준닌 천황)을 태자로 세웠다.[70] 758년 준닌 천황 즉위 후, 자미내상(紫微内相)에 올라 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착수한 양로율령을 시행했다.[87] 태보(우대신)에 임명되었으며,[73] 부역 경감, 평준서(平準署) 창설 등 덕치를 베푸는 한편,[87] 관직 명칭을 당풍으로 개정하는 등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87] 759년 신라의 무례를 빌미로 신라정토계획(신라 정벌 계획)을 세웠으나,[74] 고켄 천황과의 불화와 발해의 미온적인 태도로 무산되었다.[87]

2. 4. 몰락과 최후

760년 나카마로는 황족 외의 인사로서는 처음으로 대사(大師), 즉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지만,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고모 고묘 황태후가 사망하면서 점차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고켄 상황이 승려 도쿄를 총애하면서 상황과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87]

764년 준닌 천황이 고켄 상황에 의해 제압되어 폐위되자, 나카마로는 교토를 탈출하여 아들인 후지와라노 시카치가 태수로 있던 에치젠국으로 도주하여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정부군에 패배하여 처자식과 함께 비와호에서 배를 타고 도망가려다 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했다.[87] 그의 일족은 6번째 아들 후지와라노 요시오만 남기고 멸족당했다. 그가 추진했던 정책 중 관명의 당화(唐化) 정책은 폐지되어 기존 관명 제도로 회귀했지만, 양로율령 등의 다른 정책은 일부 수정되어 다음 정권에 의해 지속되었다.[87]

764년 당시 나카마로는 준닌 천황의 신임을 받는 신하였으며, 전 고켄 천황과 그녀의 측근 승려 도쿄와 대립하고 있었다. 준닌 천황과 고켄 천황 세력 간의 갈등에서 나카마로는 체포되어 살해당했으며,[10] 그의 아내와 자녀들 또한 살해당했다.[11] 곧이어 준닌 천황은 폐위되었고, 고켄 천황은 5년간 다시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10]

이러한 나카마로의 세력 확장에 불만을 품은 다치바나노 모로에의 아들 나라마로는 오토모노 후마로 등과 함께 나카마로를 살해하고 덴무 천황의 손자에 해당하는 황족을 옹립하려는 반란을 기도했으나, 가미치 푸타쓰 등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었다. 나라마로 일파는 체포되었고, 443명이 처벌받는 대사건이 되었다. 나라마로와 후마로를 비롯하여 새 황제 옹립 후보로 거론되었던 미치쿠니왕과 기황왕도 체포되어 고문 끝에 옥사하였고, 반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우대신 후지와라 도요나리는 좌천되었다(다치바나 나라마로의 난). 이로써 나카마로는 태정관의 수장에 취임하여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72]

760년 고묘 황태후가 붕어하면서 나카마로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다만, 황태후의 건강 악화를 알고 있던 나카마로가 자신의 지위 안정을 위해 황태후 붕어에 앞서 태사에 임명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태사 임명은 효겸 상황준닌 천황이 참석한 자리에서 선명의 형태로 발표하고, 나중에 준닌 천황으로부터 정식 절차를 거쳐 임명받는 이중 절차를 밟아 상황과 천황으로부터 신임을 받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75]

762년 1월, 나카마로는 아들 마사키를 히가미 시오야키와 함께 참의에 임명하였으나, 6월에는 상장·상시를 맡아 나카마로와 상황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정실 후지와라노 요시히라를 잃었다. 이어 7월과 9월에는 나카마로의 심복이자 의정관이었던 참의 기이마로와 중납언 이시카와 토시아시도 잃으면서 나카마로의 정치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나카마로는 12월에 두 아들 쿠니유마로, 아사가리와 사위 후지와라노 오토사다를 이시카와 토시아시의 동생 이시카와 토요나리와 함께 참의에 임명하고, 동시에 백벽왕(후의 광인 천황)을 참의를 거치지 않고 중납언으로 발탁하고, 나카토미노 키요마로도 참의에 임명하여 정권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1년 안에 친족 4명을 참의에 임명한 나카마로의 인사는 잠재된 반대파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한편, 이 무렵 병이 든 효겸 상황은 자신을 간호한 도쿄를 곁에 두고 총애하게 되었다. 나카마로는 준닌 천황을 통해 효겸 상황에게 도쿄와의 관계를 간하는 것을 권유했다. 이것이 효겸 상황을 격노하게 만들었고, 상황은 출가하여 니가 되는 동시에 천황으로부터 중대한 일과 상벌의 대권을 빼앗겠다고 선언했다. 763년에는 도쿄를 소승도로 삼았다.

효겸 상황·도쿄와 준닌 천황·나카마로의 대립은 깊어졌고, 위기감을 느낀 나카마로는 764년 자신을 도독사기내삼관근강탄파파마등국병사사에 임명하고 군사력 장악을 꾀했다. 그러나 반란의 밀고가 있어, 상황파에 선제공격을 받아 천황 곁에 있어야 할 어새와 역령을 빼앗기자, 나카마로는 헤이조쿄를 탈출했다. 아들 카가치가 국사를 맡고 있던 에치젠국에 들어가 재기를 도모했지만, 관군에 막혀 실패했다. 나카마로는 오미국 고시마군(현: 시가현 고시마시)의 미오에서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관군에 공격받아 패배했다. 패배한 나카마로는 처자식과 비와호에 배를 띄워 도망치려 했지만, 관병인 이시무라 이시다테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향년 59세였다.

3. 평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어렸을 때 아베노 스쿠나마로에게 산술을 배우며 재능을 보였다. 734년 조정에 출사한 후, 고모인 고묘 황후의 후원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749년에는 시비추다이(紫微中臺)의 장관인 시비료(紫微令)에 올라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다.[87] 744년 아사카 친왕의 암살 배후로 의심받기도 했으며, 755년에는 좌대신 다치바나노 모로에를 실각시키고 권력 다툼에서 승리했다.

758년 준닌 천황을 옹립하고 권력의 정점에 올라 독자적인 정치를 펼쳤다. 부역 경감, 평준서(平準署) 창설 등 덕치를 베푸는 한편 관직 명칭을 당나라 풍으로 바꾸는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760년 황족 외 인사로는 처음으로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나, 고묘 황태후 사후 고켄 상황과의 불화로 정치적 입지가 악화되었다. 764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비와호에서 처형당했다.

3. 1. 긍정적 평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뛰어난 학식과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를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唐|당중국어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일본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3. 2. 부정적 평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권력욕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황실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신라 정벌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74]

759년에는 신라가 일본 사절에게 무례를 행했다는 이유로 신라 정벌을 준비하게 했다. 군선 394척, 병사 4만 700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원정 계획이었으나, 효켄 상황과 나카마로의 불화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74]

4. 기타

764년 준닌 천황이 고켄 상황에 의해 제압되어 폐위되자 나카마로는 교토를 탈출해 아들인 후지와라노 시카치가 태수로 있는 에치젠국으로 도주해 재기를 꾀했지만 정부군에 패배해 처자식과 함께 비와호에서 배를 타고 도망가려다 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했다.[76] 그의 일족은 6번째 아들 후지와라노 요시오만 남기고 멸족당했다. 요시오는 어릴 적부터 불도 수행에 힘썼다는 이유로 사형을 면하고 오키노쿠니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사면되어 간무 천황 시대에 다이가쿠노카미와 온묘노카미를 역임했다.[76]

헤이안 시대 초기 사이초구카이와 논쟁을 벌였던 법상종의 고승 도쿠이치는 『존비분맥』에 나카마로의 막내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존비분맥』에는 후시오와 도쿠이치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함께 실려 있다. 도쿠이치는 당나라에 건너갔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견당사로 당나라에 간 경험이 있는 후시오와 후대에 동일시된 것으로 보인다.[76]

신고케이운 2년(768년) 5월, 그의 에치젠노쿠니의 전답 200ha이 사위 후지와라노 미쓰네의 전답 100ha과 함께 사이류지에 기부되었다.[77]

나카마로가 추진해왔던 정책 중 관명의 당화 정책은 폐지되어 기존 관명 제도로 회귀했지만, 양로율령 등의 다른 정책은 일부 수정되어 다음 정권에 의해 지속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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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Fujiwara no Nakamaro https://books.google[...] 2005
[3]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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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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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서적 藤原仲麻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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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논문 「光明・仲麻呂政治体制」再論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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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서적 公卿補任
[82] 서적 公卿補任
[83] 서적 公卿補任
[84] 서적 公卿補任
[85] 문서 다만 모는 양후여왕이라는 설도 있다
[86] 문서 천연두
[87] 문서 일단 겉으로는 고묘 황태후의 가정기관 체제였지만, 시비츄다이는 유사시 병권을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장관인 시비료는 다이나곤(大納言)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태정관의 대신들이 가지는 나라 안팎의 여러 군사권을 관장하고, 태정관이나 중무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조칙을 행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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