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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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현직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가 압도적인 지지 속에 재선에 성공한 선거이다. 공화당 후보로 나선 쿨리지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경제 호황을 바탕으로 54.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승리했다. 민주당은 103차 투표까지 가는 난항 끝에 존 W. 데이비스를 후보로 선출했으나, 쿠 클럭스 클랜(KKK) 비난 결의안을 둘러싼 당내 분열과 후보의 낮은 인지도로 인해 28.8%의 득표율로 참패했다. 로버트 M. 라폴레트가 이끄는 진보당은 16.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쿨리지의 압승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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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
선거 정보 | |
선거 이름 |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국가 | 미국 |
국기 연도 | 1912년 |
유형 | 대통령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20년 |
선거일 | 1924년 11월 4일 |
차기 선거 |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차기 선거 연도 | 1928년 |
투표율 | 48.9% % |
투표율 변화 | 감소 0.3 pp |
후보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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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이름 | 캘빈 쿨리지 |
소속 정당 | 공화당 |
출신 주 | 매사추세츠주 |
러닝메이트 | 찰스 G. 도스 |
선거인단 투표수 | 382 |
승리 주 | 35 |
득표수 | 15,723,789 |
득표율 | 54.0% |
후보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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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이름 | 존 W. 데이비스 |
소속 정당 | 민주당 |
출신 주 | 웨스트버지니아주 |
러닝메이트 | 찰스 W. 브라이언 |
선거인단 투표수 | 136 |
승리 주 | 12 |
득표수 | 8,386,242 |
득표율 | 28.8% |
후보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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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이름 | 로버트 M. 라폴레트 |
소속 정당 | 진보당 |
연합 정당 | 사회당 농민-노동자당 무소속 연맹 |
출신 주 | 위스콘신주 |
러닝메이트 | 버턴 K. 휠러 |
선거인단 투표수 | 13 |
승리 주 | 1 |
득표수 | 4,831,706 |
득표율 | 16.6%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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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책 | |
선거 전 대통령 | 캘빈 쿨리지 |
선거 전 소속 정당 | 공화당 |
선거 후 대통령 | 캘빈 쿨리지 |
선거 후 소속 정당 | 공화당 |
추가 정보 | |
필요한 선거인단 수 | 266 |
총 선거인단 수 | 531 |
2. 후보 선출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여러 정당에서 후보를 선출하며 치열한 경쟁을 예고했다.
공화당은 1924년 6월 12일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클리블랜드에서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린 전당대회[5]에서 쿨리지는 1065표를 얻어, 로버트 M. 라 폴레트 시니어(34표)와 하이럼 존슨(10표)을 제치고 재선 후보로 확정되었다.[5] 부통령 후보로는 프랭크 오렌 로우든이 지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찰스 G. 도스가 대신 지명되었다.[6]
민주당은 1924년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뉴욕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했다.[4] 윌리엄 깁스 맥아두 전 미국 재무부 장관과 앨 스미스 뉴욕 주지사가 유력 후보였으나, 금주법 찬반, 쿠 클럭스 클랜(KKK)에 대한 입장 등으로 당내 분열이 심각했다.[4] 맥아두는 금주법 찬성론자("드라이")와 KKK 지지자들의 지지를, 스미스는 금주법 반대론자("웨트")와 KKK 반대 진보파의 지지를 받았다. KKK를 공개 비난하자는 제안은 단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결국 103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존 W. 데이비스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4] 부통령 후보로는 찰스 W. 브라이언 네브래스카 주지사가 선출되었다.
위스콘신 주지사 로버트 M. 라폴레트 시니어는 진보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다. 민주당 내 개혁파 역시 진보당에 합류했다. 라 폴레트는 노동 조합의 오랜 옹호자이자 대기업의 열렬한 반대자로, 대규모 산업 국유화, 부유층 증세, 노동자 단체 교섭권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1] 전국 유권자 투표의 16% 이상을 득표했으나, 선거인단에서는 위스콘신 주만 확보했다.[1]
미국 공산당은 1919년 결성 이후 처음으로 대선에 참가했다. 대통령 후보는 윌리엄 Z. "빌" 포스터, 부통령 후보는 벤자민 기틀로우였다. 금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허먼 프레스턴 패리스, 부통령 후보로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메리 캐롤라인 블레임을 지명했다.
2. 1. 공화당
1924년 6월 12일, 공화당 전당대회는 압도적인 지지로 쿨리지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클리블랜드에서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5] 현직 대통령인 쿨리지를 재선 후보로 쉽게 결정했다.[5] 1923년 워런 G. 하딩 대통령이 사망함에 따라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승계했기 때문에, 쿨리지는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5]
투표 회 | 1 |
---|---|
캘빈 쿨리지 | 1065 |
로버트 M. 라 폴레트 시니어 | 34 |
하이럼 존슨 | 10 |
전 일리노이 주지사 프랭크 오렌 로우든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사퇴했고,[6] 저명한 공화당원이자 실업가인 찰스 G. 도스가 그를 대신하여 지명되었다.[6]
2. 2. 민주당
1924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뉴욕에서 열렸다. 윌리엄 깁스 맥아두 전 미국 재무부 장관과 앨 스미스 뉴욕 주지사가 유력 후보였으나, 당내 분열로 인해 103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존 W. 데이비스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4] 데이비스는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전 하원의원, 전 미국 법무 차관, 전 주영 미국 대사를 역임한 인물이었다.당시 민주당은 금주법 찬반, 쿠 클럭스 클랜(KKK)에 대한 입장 등으로 인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맥아두는 주로 남부, 서부, 소도시 중서부 출신의 농촌 개신교 대의원들과 금주법 찬성론자("드라이")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일부는 KKK 지지자이기도 했다. 반면 스미스는 금주법 반대론자("웨트"), 로마 가톨릭교 신자와 다른 소수 민족, 북동부와 도시 지역 중서부의 대의원, 그리고 KKK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대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KKK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자는 제안은 단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는데, 이는 당내 분열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분의 2 규칙 때문에 맥아두와 스미스 모두 지명에 필요한 표를 얻지 못하고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100번이 넘는 투표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당대회로 기록되었으며, 윌 로저스는 "나는 어떤 조직화된 정당의 당원이 아니다. 나는 민주당원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결국 103번째 투표에서 타협 후보로 존 W. 데이비스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동생인 찰스 W. 브라이언 네브래스카 주지사가 선출되어, 당의 농촌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존 W. 데이비스 | 찰스 W. 브라이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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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 ![]() |
주영 미국 대사 (1918–1921) | 제20대 네브래스카 주지사 (1923–1925) |
2. 3. 진보당
로버트 M. 라폴레트 시니어 위스콘신 주지사는 공화당을 탈당해 진보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하였다. 민주당 내 개혁파 역시 보수파 데이비스 후보에 반발하며 진보당에 합류하였다.1924년 진보당 후보 | |||||||||||||||||||||||||||||
로버트 M. 라 폴레트 | 버튼 K. 휠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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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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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콘신 주 미국 상원 의원 (1906–1925) | 몬태나 주 미국 상원 의원 (1923–1947) |
라 폴레트는 노동 조합의 오랜 옹호자이자 대기업의 열렬한 반대자로, 20년 이상 위스콘신 정치계를 지배한 열정적인 웅변가였다. 급진적인 농부, 미국 노동 총연맹(AFL) 노동 조합,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라 폴레트는 담배 공장 및 기타 대규모 산업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또한 부유층에 대한 증세와 공장 노동자의 단체 교섭권을 강력하게 지지했다.[1] 노동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 선전하고 전국 유권자 투표의 16% 이상을 득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에서 자신의 고향인 위스콘신 주만 확보했다.[1]
2. 4. 기타 정당
미국 공산당은 1919년에 결성되어 이 대통령 선거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대통령 후보는 1919년 철강 파업을 지도했던 윌리엄 Z. "빌" 포스터였으며, 부통령 후보는 벤자민 기틀로우였다. 포스터는 1928년·1932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며, 1924년부터는 의장으로서 당을 지도했다. 기틀로우는 후에 '우익' 반대파로서 공산당을 떠났고, 전향하여 반공 활동에 종사했다.금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활동가인 허먼 프레스턴 패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메리 캐롤라인 블레임을 각각 지명했다.
3. 선거 운동
캘빈 쿨리지는 "쿨리지처럼 쿨하게(Keep Cool with Coolidge)"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경제 호황과 안정을 강조하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6] 민주당은 전당대회 후유증으로 분열된 모습을 보였고, 존 W. 데이비스는 솔리드 사우스(켄터키 제외)와 오클라호마주에서만 승리하는 데 그쳤다.[9] 자유주의적 성향의 민주당원들이 로버트 M. 라폴레트에게 투표하면서 데이비스는 일반 투표에서 쿨리지에게 25.2% 포인트 차이로 뒤졌다.[6]
라폴레트는 진보적인 정책을 내세우며 선전했지만, 위스콘신주 외 지역에서는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는 전국, 특히 중서부와 극서부의 18개 주에서 득표 분포를 변화시켰고, 12개 주에서 데이비스보다 많은 표를 얻었으며, 위스콘신에서는 선거인단 1명을 확보했다.[6]
쿠 클럭스 클랜(KKK) 문제는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는데, 데이비스와 라폴레트는 KKK를 비판했지만 쿨리지는 흑인 단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6] ''뉴욕 타임스''는 "쿨리지 씨는 잘못된 정책 및 정치적 이유로 침묵을 지키거나 클랜을 용인하고 있다"고 언급했다.[6] 찰스 G. 도즈는 KKK를 비판했지만, 피오렐로 라 과디아 하원의원은 "도즈 장군은 클랜을 칭찬하는 척하며 비난했다"고 비판했다.[6][7]
1924년 미국 시민권법으로 모든 아메리카 원주민이 시민으로 인정되어 투표가 허용된 첫 번째 대통령 선거였다. 총 투표수는 증가했지만, 라폴레트의 영향력으로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득표수가 줄었다.[5]
4.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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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1924년 미국 시민권법에 따라 모든 아메리카 원주민이 시민으로 인정되어 투표가 허용된 첫 번째 대통령 선거였다.[5]
캘빈 쿨리지는 54.0%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다. 존 W. 데이비스는 28.8%의 득표율로, 민주당 역사상 최저 득표율을 기록했다. 로버트 M. 라폴레트는 16.6%의 득표율로 선전했지만, 위스콘신주에서만 승리했다.[9]
총 투표수는 230만 표 증가했지만, 라폴레트 후보의 영향으로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득표수가 줄었다. 데이비스는 1920년 제임스 M. 콕스가 얻은 표보다 75만 표를, 쿨리지는 1920년 워런 G. 하딩이 얻은 표보다 42만 5천 표를 덜 얻었다.[5]
쿨리지는 일반 투표에서 데이비스를 25.2% 차이로 이겼는데, 이는 1824년 이후 두 번째로 큰 격차이자 지난 세기 최대 격차였다. 데이비스의 28.8% 득표율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낮게 기록되었다.[5]
라폴레트와 데이비스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쿠 클럭스 클랜을 비판했지만, 쿨리지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는 "쿨리지 씨는 잘못된 정책 및 정치적 이유로 침묵을 지키거나 클랜을 용인하고 있다"고 언급했다.[6][7]
"기타" 표는 5백만 표에 육박했는데, 이는 라폴레트가 4,832,614표를 얻은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라폴레트는 위스콘신주에서 선거인단 1명을 확보했다.[5]
금주당은 득표율이 급감하며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했다.[5]
쿨리지와 데이비스의 대도시 순득표수는 하딩보다 적었다.[6] 쿨리지는 35개 주, 데이비스는 12개 주에서 승리했다. 전 남부 연합의 모든 주(오클라호마 제외)는 데이비스, 연합/남북 전쟁 이후의 모든 주(위스콘신과 오클라호마 제외)는 쿨리지에게 투표했다. 이는 단 하나의 전 남부 연합 주도 점령하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된 마지막 사례이다.[9]
공화당은 1952년까지 매사추세츠와 로드아일랜드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고, 뉴욕시에서 선전한 마지막 선거였다.[5] 데이비스는 48개 주 중 20개 주에서 단 하나의 카운티도 확보하지 못했다.[5]
쿨리지의 득표 중 4.43%는 전 남부 연합 11개 주에서 나왔으며, 해당 지역에서 27.94%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라폴레트는 4.80%를 기록했다.
대통령 후보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선거인단 득표수 |
---|---|---|---|---|
캘빈 쿨리지 | 공화당 | 15,723,789 | 54.0 | 382 |
존 W. 데이비스 | 민주당 | 8,386,242 | 28.8 | 136 |
로버트 M. 라폴레트 | 진보당 | 4,831,706 | 16.6 | 13 |
허먼 P. 파리스 | 금주당 | 55,951 | 0.2 | 0 |
윌리엄 Z. 포스터 | 공산당 | 38,669 | 0.1 | 0 |
길버트 네이션스 | 미국당 | 24,325 | 0.1 | 0 |
기타 | - | 60,750 | 0.2 | 0 |
합계 | 29,121,432 | 100% | 531 | |
당선 필요 득표수 | 266 |
승리 격차가 5% 미만인 주는 다음과 같다(선거인단 30명):[5]
승리 격차가 5%에서 10% 사이인 주는 다음과 같다(선거인단 69명):[5]
- '''웨스트버지니아, 5.38%'''
- '''네바다, 5.48%'''
- '''뉴멕시코, 5.50%'''
- '''오클라호마, 5.59%'''
- '''애리조나, 5.79%'''
- '''미주리, 5.79%'''
- '''테네시, 9.21%'''
- '''미네소타, 9.92%'''
분기점 주는 다음과 같다:[5]
- '''네브래스카, 17.51%''' (쿨리지 승리의 분기점 주)
- '''뉴욕, 26.63%''' (데이비스 승리의 분기점 주)
- '''펜실베이니아, 51.00%''' (라 폴레트 승리의 분기점 주)
4. 1. 주별 결과
쿨리지는 35개 주에서 승리하며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데이비스는 전통적인 민주당 강세 지역인 솔리드 사우스 11개 주와 오클라호마 주에서만 승리했다. 라폴레트는 위스콘신 주에서 승리했다.[9]5. 분석 및 영향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모든 아메리카 원주민이 시민으로 인정되어 투표가 허용된 첫 번째 선거였다. 쿨리지는 데이비스를 일반 투표에서 25.2% 차이로 이겼는데, 이는 1824년 이후 두 번째로 큰 격차이자 지난 세기 최대 격차였다. 데이비스의 28.8% 득표율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낮았지만, 존 브레킨리지가 1860년 남부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스티븐 더글러스와 표가 분산되었을 때를 제외하면, 선거인단에서는 다른 여러 후보가 더 낮은 성적을 거두었다.[5] 총 투표수는 230만 표 증가했지만, 라폴레트 후보의 막강한 흡인력 때문에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득표수가 줄었다.
KKK에 대해 라폴레트와 데이비스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비판했지만 쿨리지는 흑인 단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는 "쿨리지 씨는 잘못된 정책 및 정치적 이유로 침묵을 지키거나 클랜을 용인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찰스 G. 도즈는 8월 23일 KKK를 비판했지만 그의 발언은 피오렐로 라 과디아 하원의원의 비판을 받았는데, 그는 "도즈 장군은 클랜을 칭찬하는 척하며 비난했다"고 말했다.[6][7]
"기타" 표는 5백만 표에 육박했는데, 이는 라폴레트가 4,832,614표를 얻은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1912년 루즈벨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후보는 전국, 특히 중서부와 극서부의 18개 주에서 득표 분포를 변화시켰다. 라폴레트 표는 전국 각 주에 분포되어 있었지만, 그 세력이 가장 강했던 곳은 동북 중부와 서북 중부 지역이었다. 12개 주에서 라폴레트의 표는 데이비스의 표보다 많았다. 이 중 위스콘신주에서는 라폴레트가 공화당 표도 이겨 선거인단 1명을 확보했다.
라폴레트 후보를 중심으로 제3 정당 표가 대부분 통합되면서 금주당은 4년 전 얻었던 득표율의 3분의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는 금주당이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한 것을 의미했다.
쿨리지의 12개 대도시 순득표수는 하딩보다 적었고, 쿨리지는 1,308,000표를 얻은 반면 하딩은 1,540,000표를 얻었다.[6] 데이비스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 지역인 솔리드 사우스 (켄터키 제외)와 오클라호마에서만 승리했다.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가까운 경쟁자보다 26.2% 앞선 워런 G. 하딩만이 여러 후보 간의 경쟁에서 이 범주에서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다(현직 제임스 먼로는 18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일한 후보였고 따라서 모든 표를 얻었다).
데이비스와 라폴레트를 합한 전국 득표수는 쿨리지보다 250만 표가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개 주(4개의 경계 주와 9개의 서부 주)에서 쿨리지는 과반수를 얻었다. 전 남부 연합의 모든 주(오클라호마 제외)는 데이비스에게 투표했고, 연합/남북 전쟁 이후의 모든 주(위스콘신과 오클라호마 제외)는 쿨리지에게 투표했다. 이는 단 하나의 전 남부 연합 주도 점령하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된 마지막 사례로 남아 있다.
이것은 공화당이 1952년까지 매사추세츠주와 로드아일랜드주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다. 공화당은 뉴욕시를 장악할 정도로 잘했는데, 이는 그 이후로 반복하지 못한 성과이며, 또한 매사추세츠주 서퍽 카운티, 미네소타주 램지 카운티, 콜로라도주 코스틸라 카운티, 몬태나주 디어로지 카운티,[10] 또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시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이기도 하다. 데이비스는 48개 주 중 20개 주에서 단 하나의 카운티도 확보하지 못했다. 이번 선거는 공화당이 플로리다, 오클라호마, 테네시를 제외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다. 또한 공화당이 위스콘신을 제외하고 승리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 선거(1920년과 함께)는 남북 전쟁 이후 전국 투표율이 50% 미만이었던 유이한 선거이다.
5. 1. 미국의 정치 지형 변화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보수화 경향과 진보주의 세력의 공존을 보여주었다. 공화당의 캘빈 쿨리지는 경제 호황과 안정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압승을 거두었다.[5] 반면, 민주당은 당내 분열과 진보주의 세력의 이탈로 인해 존 W. 데이비스 후보가 역대 최저 득표율을 기록하며 참패했다.[6]로버트 M. 라폴레트가 이끈 진보당은 16.6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양당 체제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알렸다.[8] 특히, 라폴레트는 중서부와 극서부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얻었으며, 위스콘신주에서는 승리하기까지 했다.[8]
이번 선거는 모든 아메리카 원주민이 시민으로 인정받아 투표에 참여한 첫 번째 대통령 선거였다. 그러나, 투표율은 50% 미만으로 저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National General Election VEP Turnout Rates, 1789-Present
http://www.electproj[...]
CQ Press
[2]
서적
The High Tide of American Conservatism: Davis, Coolidge and the 1924 Election
Emerald
2010
[3]
웹사이트
Voter Turnout in Presidential Elections
https://www.presiden[...]
2020-12-08
[4]
논문
William Gibbs McAdoo and the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of 1924
Southern Historical Association
1972
[5]
서적
The Presidential Vote, 1896-1932 – Google Books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34
[6]
서적
Political Parties In American History, Volume 3, 1890-present
G. P. Putnam's Sons
1974
[7]
뉴스
General 'Opposed to' Klan; But Dawes Says But Many Join It in Interest of Law and Order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24-08-24
[8]
서적
The Presidential Vote, 1896-1932
[9]
서적
The Presidential Vote, 1896–1932
[10]
간행물
How the Red and Blue Map Evolved Over the Past Century
http://www.americama[...]
America Magazine
2016-06-29
[11]
웹사이트
1924 Presidential General Election Data - National
http://uselectionatl[...]
2013-03-18
[12]
웹사이트
Voter Turnout in Presidential E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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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1924 Presidential General Election Data - 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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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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