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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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에 개봉한 영화로, 마가렛 미첼의 동명 소설을 각색했다. 비비안 리, 클라크 게이블, 레슬리 하워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등이 출연했으며,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스칼렛 오하라의 삶과 사랑을 그린다. 개봉 당시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제12회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8개 부문을 수상했다. 하지만 흑인 묘사와 노예 제도 미화 논란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 흥행작 중 하나로 꼽히며, 미국 영화 연구소(AFI) 선정 100대 영화에서 6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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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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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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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원제 | Gone with the Wind |
감독 | 빅터 플레밍 |
각본 | 시드니 하워드 |
원작 |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제작 | 데이비드 O. 셀즈닉 |
출연 | 클라크 게이블 비비언 리 레슬리 하워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음악 | 맥스 스타이너 |
촬영 | 어니스트 헬러 |
편집 | 할 C. 커 제임스 E. 뉴컴 |
제작사 | 메트로-골드윈-메이어 |
배급사 | 로우스 |
개봉일 | 1939년 12월 15일 (애틀랜타 초연) |
상영 시간 | 221분 234–238분 (서곡, 인터미션, 앙트랙트, 퇴장 음악 포함) |
제작 국가 | 미국 |
언어 | 영어 |
제작비 | $385만 달러 |
흥행 수입 | 3억 9천만 달러 이상 |
배급 수입 (일본) | 1억 3336만 엔 (1952년 공개 시) 1억 9326만 엔 (1961년 재개봉 시) 3억 1771만 엔 (1967년 재개봉 시) |
추가 정보 | |
영화 정보 (일본) | 1939년의 영화 |
영화 정보 (대한민국) | 1940년 1월 17일 (미국) 1957년 3월 25일 (대한민국) 1972년 12월 23일 (재개봉) 1995년 5월 5일 (재개봉) |
후편 | 스칼렛 (CBS 4부작 드라마) |
2. 줄거리
비비언 리는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았고, 클라크 게이블은 레트 버틀러 역을 연기했다.[1] 레슬리 하워드는 애슐리 윌크스 역을,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멜라니 해밀턴 역을 맡았다.[1] 스칼렛 역의 캐스팅은 영화 제작 전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미국 전역에서 오디션이 열렸으며, 에벌린 키스는 스칼렛의 동생 수엘렌 역에 캐스팅 됐다.[1] 스칼렛 역의 후보로는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마거릿 설리번, 노마 시어러, 라나 터너, 프랜시스 디, 수전 헤이워드 등이 있었다.
1861년 미국 남북 전쟁 직전, 스칼렛 오하라는 조지아 주에 있는 가족의 면화 농장인 타라에서 부모, 두 자매, 그리고 많은 흑인 노예와 함께 살고 있다. 스칼렛은 애슐리 윌크스에게 매혹되지만, 그는 사촌 멜라니 해밀턴과 결혼할 예정이다. 트웰브 오크스에서 열린 약혼 파티에서 스칼렛은 애슐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손님인 렛 버틀러의 관심을 끈다. 파티는 링컨 대통령이 남부와 싸울 자원 봉사자를 요청했다는 소식으로 혼란에 빠지고, 남부 남성들은 서둘러 입대한다. 스칼렛은 애슐리에 대한 질투심으로 멜라니의 남동생 찰스와 결혼하지만, 남편은 남부 연합군 복무 중 사망한다. 스칼렛의 어머니는 그녀를 애틀랜타에 있는 해밀턴의 집으로 보내고, 스칼렛은 애도 복장으로 자선 바자회에 참석하여 봉쇄 돌파선 운영자인 레트와 왈츠를 춘다.
게티스버그 전투 이후 전쟁의 흐름은 남부연합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스칼렛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8개월 후 북군이 애틀랜타 전투에서 도시를 포위하자 멜라니는 스칼렛의 도움으로 출산하고, 레트는 그들이 도시를 탈출하도록 돕는다. 레트는 싸우러 가기로 선택하고, 스칼렛은 타라로 돌아간다. 그녀는 아버지, 자매, 이전 노예인 매미와 포크를 제외하고 타라가 버림받은 것을 발견한다. 스칼렛은 어머니가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아버지가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라가 북부군에 의해 약탈되고 들판이 방치된 상황에서, 스칼렛은 그녀와 가족의 생존을 보장하겠다고 맹세한다.
남부 연합의 패배 후, 오하라 가족은 목화밭에서 일한다. 애슐리가 돌아왔지만, 그는 타라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칼렛이 애슐리에게 도망가자고 애원하자 그는 그녀에 대한 욕망을 고백하고 키스하지만, 멜라니를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스칼렛의 아버지는 그의 땅에서 카펫배거를 쫓아내려 하지만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타라에 부과된 재건주의자 세금을 낼 수 없는 스칼렛은 여동생 수엘렌의 약혼자이자 중년의 부유한 잡화점 주인 프랭크 케네디를 속여 그와 결혼한다. 프랭크, 애슐리, 레트 및 기타 여러 공범자들은 스칼렛이 혼자 운전하다가 공격을 받은 후 판잣집을 야간 급습하고, 이 과정에서 프랭크가 죽는다. 프랭크의 장례식 직후 레트는 스칼렛에게 청혼하고 그녀는 수락한다.
레트와 스칼렛 사이에는 보니 블루라는 딸이 있었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를 그리워하며 더 이상 자녀를 갖거나 레트와 침대를 공유하는 것을 거부한다. 어느 날 프랭크의 공장에서 애슐리의 여동생 인디아는 스칼렛과 애슐리가 포옹하는 것을 본다. 인디아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날 저녁 소문을 들은 레트는 스칼렛에게 애슐리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멜라니는 스칼렛을 지지한다. 집으로 돌아온 스칼렛은 아래층에서 술에 취한 레트를 발견하고 애슐리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레트는 스칼렛에게 강제로 키스하고 그날 밤 그녀와 잘 의사가 있다고 말하며 스칼렛을 침실로 데려간다.
다음날 레트는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고 이혼을 제안하지만, 스칼렛은 거부한다. 레트가 런던으로 장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스칼렛은 자신이 임신했다고 알렸지만, 말다툼 끝에 계단에서 넘어져 유산한다. 회복하는 동안 보니가 조랑말과 함께 울타리를 뛰어 넘으려다 사망한다. 스칼렛과 레트는 멜라니가 임종하는 자리에 있고, 스칼렛이 애슐리를 위로하는 동안 레트는 애틀랜타를 떠날 준비를 한다. 스칼렛은 애슐리가 아니라 렛을 사랑했음을 깨닫고 레트에게 머물기를 간청하지만, 레트는 그녀를 거절하고 아침 안개 속으로 걸어간다. 스칼렛은 언젠가 레트를 되찾겠다고 맹세하며 타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3. 등장 인물
배우 역할 비비언 리 스칼렛 오하라 클라크 게이블 레트 버틀러 레슬리 하워드 애슐리 윌크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멜라니 해밀턴 토마스 미첼 제럴드 오하라 바바라 오닐 엘렌 로빌라드 에블린 키스 수엘렌 오하라 앤 러더퍼드 캐린 오하라 조지 리브스 스튜어트 타틀턴 프레드 크레인 브렌트 타틀턴 해티 맥대니얼 매미 오스카 폴크 포크 버터플라이 맥퀸 프리시 빅터 조리 조나스 윌커슨 에버렛 브라운 빅 샘 하워드 힉먼 존 윌크스 알리시아 레트 인디아 윌크스 랜드 브룩스 다른 등장인물|찰스 해밀턴 캐롤 나이 프랭크 케네디 로라 호프 크루 피티패트 해밀턴 이모 에디 앤더슨 피터 삼촌 해리 데이븐포트 미드 박사 리오나 로버츠 미드 부인 제인 다웰 메리웨더 부인 오나 먼슨 벨 왓링 폴 허스트 북부군 탈영병 캐미 킹 보니 블루 버틀러 J. M. 케리건 조니 갈러거 재키 모란 필 미드 릴리안 켐블-쿠퍼 런던에서 보니의 간호사 마르첼라 마틴 캐슬린 칼버트 미키 쿤 보 윌크스 어빙 베이컨 상병 윌리엄 베이크웰 기마 경찰 이자벨 쥬얼 에미 슬래터리 에릭 린든 절단 수술 환자 워드 본드 톰 역, 북부군 대장 클리프 에드워즈 회상하는 군인 야키마 캐넛 반란자 루이스 진 하이드트 보 윌크스를 붙잡고 있는 배고픈 군인 올린 하울랜드 카펫배거 사업가 로버트 엘리엇 북부군 소령 메리 앤더슨 메이블 메리웨더
3. 1. 주요 인물
비비언 리는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았고, 클라크 게이블은 레트 버틀러 역을 연기했다.[1] 레슬리 하워드는 애슐리 윌크스 역을,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멜라니 해밀턴 역을 맡았다.[1] 스칼렛 역의 캐스팅은 영화 제작 전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미국 전역에서 오디션이 열렸으며, 에벌린 키스는 스칼렛의 동생 수엘렌 역에 캐스팅 됐다.[1]
배우 | 역할 |
---|---|
비비언 리 | 스칼렛 오하라 |
클라크 게이블 | 레트 버틀러 |
레슬리 하워드 | 애슐리 윌크스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멜라니 해밀턴 |
토머스 하워드 | 제럴드 오하라 |
바버라 오닐 | 수엘렌 오하라 |
토마스 미첼 | 제럴드 오하라 |
바바라 오닐 | 엘렌 로빌라드 |
에블린 키스 | 수엘렌 오하라 |
앤 러더퍼드 | 캐린 오하라 |
조지 리브스 | 스튜어트 타틀턴 |
프레드 크레인 | 브렌트 타틀턴 |
해티 맥대니얼 | 매미 |
오스카 폴크 | 포크 |
버터플라이 맥퀸 | 프리시 |
빅터 조리 | 조나스 윌커슨 |
에버렛 브라운 | 빅 샘 |
하워드 힉먼 | 존 윌크스 |
알리시아 레트 | 인디아 윌크스 |
랜드 브룩스 | 다른 등장인물|찰스 해밀턴 |
캐롤 나이 | 프랭크 케네디 |
로라 호프 크루 | 피티패트 해밀턴 이모 |
에디 앤더슨 | 피터 삼촌 |
해리 데이븐포트 | 미드 박사 |
리오나 로버츠 | 미드 부인 |
제인 다웰 | 메리웨더 부인 |
오나 먼슨 | 벨 왓링 |
폴 허스트 | 북부군 탈영병 |
캐미 킹 | 보니 블루 버틀러 |
J. M. 케리건 | 조니 갈러거 |
재키 모란 | 필 미드 |
릴리안 켐블-쿠퍼 | 런던에서 보니의 간호사 |
마르첼라 마틴 | 캐슬린 칼버트 |
미키 쿤 | 보 윌크스 |
어빙 베이컨 | 상병 |
윌리엄 베이크웰 | 기마 경찰 |
이자벨 쥬얼 | 에미 슬래터리 |
에릭 린든 | 절단 수술 환자 |
워드 본드 | 톰 역, 북부군 대장 |
클리프 에드워즈 | 회상하는 군인 |
야키마 캐넛 | 반란자 |
루이스 진 하이드트 | 보 윌크스를 붙잡고 있는 배고픈 군인 |
올린 하울랜드 | 카펫배거 사업가 |
로버트 엘리엇 | 북부군 소령 |
메리 앤더슨 | 메이블 메리웨더 |
3. 2. 오하라 가문
오하라 가문은 조지아주에 타라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1] 농장 주인은 토마스 미첼이 연기한 제럴드 오하라[1]이고, 그의 아내는 바바라 오닐이 연기한 엘렌 로빌라드이다.[1] 이들 부부에게는 세 딸이 있는데, 비비안 리가 연기한 스칼렛 오하라, 에블린 키스가 연기한 수엘렌 오하라, 앤 러더퍼드가 연기한 캐린 오하라이다.[1]스칼렛 오하라 역을 뽑기위한 오디션이 미국 전역에서 열렸으며, 에벌린 키스는 스칼렛의 동생 수엘렌 역에 캐스팅 됐다.[1] 스칼렛 역의 후보로는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마거릿 설리번, 노마 시어러, 라나 터너, 프랜시스 디, 수전 헤이워드 등이 있었다.
오하라 가문에는 집안일을 하는 하인들도 있었다.[1] 해티 맥대니얼은 매미 역을, 오스카 폴크는 포크 역을, 버터플라이 맥퀸은 프리시 역을 맡았다.[1] 들판에서는 빅터 조리가 감독관 조나스 윌커슨 역을, 에버렛 브라운이 빅 샘 역을 연기했다.[1]
3. 3. 기타 인물
에벌린 키스는 스칼렛의 동생 수엘렌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스칼렛 역에는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마거릿 설리번, 노마 시어러, 라나 터너, 프랜시스 디, 수전 헤이워드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다.;타라 농장
;조지아주 오하라 농장
- 토마스 미첼 (Gerald O'Hara 역)
- 바바라 오닐 (Ellen Robillard 역, 그의 아내)
;스칼릿의 구혼자들:
- 조지 리브스 (Stuart Tarleton 역 (브렌트 타틀턴으로 크레딧))[1]
- 프레드 크레인 (Brent Tarleton 역 (스튜어트 타틀턴으로 크레딧))[1]
;집안일을 하는 하인들
;들판에서:
- 빅터 조리 (조나스 윌커슨 역, 감독)
- 에버렛 브라운 (빅 샘 역, 감독)
;트웰브 오크스 농장
;근처 윌크스 농장
;애틀랜타에서
- 로라 호프 크루 (피티패트 해밀턴 이모 역)
- 에디 앤더슨 (피터 삼촌 역, 그녀의 마부)
- 해리 데이븐포트 (미드 박사 역)
- 리오나 로버츠 (미드 부인 역)
- 제인 다웰 (메리웨더 부인 역)
- 오나 먼슨 (벨 왓링 역)
;조연
- 폴 허스트 (북부군 탈영병 역)
- 캐미 킹 (보니 블루 버틀러 역)
- J. M. 케리건 (조니 갈러거 역)
- 재키 모란 (필 미드 역)
- 릴리안 켐블-쿠퍼 (런던에서 보니의 간호사 역)
- 마르첼라 마틴 (캐슬린 칼버트 역)
- 미키 쿤 (보 윌크스 역)
- 어빙 베이컨 (상병 역)
- 윌리엄 베이크웰 (기마 경찰 역)
- 이자벨 쥬얼 (에미 슬래터리 역)
- 에릭 린든 (절단 수술 환자 역)
- 워드 본드 (톰 역, 북부군 대장)
- 클리프 에드워즈 (회상하는 군인 역)
- 야키마 캐넛 (반란자 역)
- 루이스 진 하이드트 (보 윌크스를 붙잡고 있는 배고픈 군인 역)
- 올린 하울랜드 (카펫배거 사업가 역)
- 로버트 엘리엇 (북부군 소령 역)
- 메리 앤더슨 (메이블 메리웨더 역)
4. 제작
소설 출판 전, 루이스 B. 메이어(Louis B. Mayer)와 어빙 탈버그(Irving Thalberg)가 있는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etro-Goldwyn-Mayer, MGM), RKO 픽처스(RKO Radio Pictures)의 팬드로 S. 버먼(Pandro S. Berman), 그리고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의 데이비드 O. 셀즈닉(David O. Selznick) 등 여러 할리우드 임원과 스튜디오에서 영화 제작을 거절했다.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의 잭 L. 워너(Jack L. Warner)는 줄거리를 읽은 후 판권 구입을 고려했지만, 당시 그의 최고 스타였던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가 관심이 없었고, 20세기 폭스(20th Century-Fox)의 다릴 F. 자눅(Darryl F. Zanuck)은 충분한 돈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셀즈닉은 그의 스토리 편집자 케이 브라운(Kay Brown, Kay B. Barrett)과 사업 파트너 존 헤이 휘트니(John Hay Whitney)가 영화 판권 구입을 촉구한 후 마음을 바꿨다. 1936년 7월, 출판 한 달 후 셀즈닉은 마가렛 미첼로부터 5만 달러에 판권을 구입했다.[3][4][5]
== 기획 및 각색 ==
1936년 5월,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출간된 직후,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 뉴욕 지사 대표이자 스토리 담당이었던 케이 브라운은 영화화 가능성을 간파하고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에게 영화화 판권 구매를 제안했다. 브라운의 끈질긴 설득과 친구 존 헤이 휘트니의 지원, 그리고 경쟁을 싫어하는 셀즈닉의 성향 덕분에 결국 5만 달러에 판권 계약이 성립되었다.
셀즈닉은 시드니 하워드를 고용하여 각본 작업에 착수했다. 하워드는 초기 6시간 분량의 각본을 작성했으나, 셀즈닉과 함께 수정을 거듭하며 상영 시간을 줄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하워드의 각본은 헤이즈 코드에 의해 검열되어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후 F. 스콧 피츠제럴드 등 여러 작가가 각색에 참여했지만,[144][145] 최종적으로 셀즈닉이 직접 각본을 마무리했다.
영화 역사가 조앤 예크에 따르면, 하워드의 초기 제출본은 너무 길어 최소 6시간 분량의 영화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한다.[16] 셀즈닉은 하워드가 수정 작업에 참여하길 원했지만, 하워드는 뉴잉글랜드를 떠나길 거부했고, 결국 여러 작가들이 수정 작업을 맡게 되었다.[16] 촬영 시작 3주 후, 셀즈닉은 조지 큐커 감독을 해고하고 빅터 플레밍을 기용했다. 플레밍은 시나리오에 불만을 품었고, 셀즈닉은 벤 헥트에게 5일 안에 전체 시나리오를 다시 쓰도록 지시했다.[17] 헥트는 하워드의 원고를 바탕으로 시나리오 전반부를 수정했고, 셀즈닉은 후반부를 직접 작업하려 했으나 일정이 지연되자 하워드가 복귀하여 2부의 주요 장면을 다시 작업했다.[17]
1939년 영화 개봉 당시, 최종 시나리오가 하워드의 버전과 매우 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크레딧에 하워드의 이름만 표시된 것은 그의 죽음을 기리는 제스처였을 수도 있다.[16] 1939년 10월 메모에서 셀즈닉은 영화의 작가 크레딧에 대해 언급하며, 영화 속 대부분의 대사가 자신의 것이며, 독창적인 대사는 시드니 하워드, 벤 헥트, 존 반 드루텐의 일부 대사뿐이라고 밝혔다.[18]
헥트의 전기 작가 윌리엄 맥아담스에 따르면, 셀즈닉과 플레밍은 헥트에게 즉시 영화 작업을 요청했고, 헥트는 소설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일 동안 하루 18~20시간씩 작업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19] 셀즈닉은 음식 섭취가 작업 속도를 늦출 것을 우려하여 점심 식사를 허락하지 않고 바나나와 소금에 절인 땅콩을 제공했다.[19]
맥아담스는 헥트가 얼마나 많은 시나리오를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스크린 작가 조합에 제출된 공식 크레딧에는 시드니 하워드가 유일한 스크린 크레딧을 받았고, 다른 네 명의 작가(조 스월링, 올리버 H. P. 가렛, 바바라 키온, 벤 헥트)는 각각 처리, 구성, 대사에 기여한 것으로 추가되었다고 언급했다.[19]
한편, 셀즈닉은 1938년 6월 전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와 협상하여 영화에서 쿠 클럭스 클랜에 대한 언급이나 흑인에 의한 폭력 장면을 포함하지 않고, 흑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워너 브라더스는 셀즈닉에게 베티 데이비스와 에롤 플린을 주연으로 하는 더 높은 투자 제안을 했지만, 셀즈닉은 루이스 B. 메이어의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와 손잡고 클라크 게이블을 캐스팅하는 대신 세계 배급권과 7년간 이익의 절반을 주기로 결정했다.[144][145]
== 캐스팅 ==
스칼렛 오하라 역의 캐스팅은 영화 제작 전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미국 전역에서 오디션이 열렸다.[3] 이 전대미문의 스칼렛 찾기는 당시 “스칼렛 피버(Scarlett Fever)”라고 불렸다.[146] 1,400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90명이 스크린 테스트를 거쳤으며, 비용은 9만 2000달러에 달했다.[54]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마가렛 설리번, 노마 시어러, 라나 터너, 프랜시스 디, 수전 헤이워드 등이 스칼렛 역 후보로 거론되었다.[6][7][8][9] 1937년 라디오 방송에서 진행된 스칼렛 콘테스트 상위 6인에는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미리엄 홉킨스, 마가렛 셜러반, 조앤 크로포드, 바버라 스탠윅이 올랐다.[144][145]
원작자 마가렛 미첼이 가장 승인한 배우는 미리엄 홉킨스였으나, 홉킨스는 30대 중반으로 나이가 많다고 여겨졌다.[6][7][8] 최종 후보는 폴릿 고다르, 진 아서, 조앤 베넷, 그리고 비비안 리로 압축되었다.[10][144][145] 고다르가 거의 역할을 따낼 뻔했지만, 찰리 채플린과의 결혼 논란으로 셀즈닉은 마음을 바꿨다.[3] 결국 비비안 리가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최종 발탁되었고, 1939년 1월 13일에 공식 발표되었다.[12][13][54][144][145]
렛 버틀러 역에는 셀즈닉이 처음부터 클라크 게이블을 원했지만, 게이블은 MGM과 계약되어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3] 게리 쿠퍼도 고려되었지만, 새뮤얼 골드윈이 출연을 허락하지 않았다.[6] 워너는 배급권 대신 베티 데이비스, 에롤 플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를 주연으로 출연시키는 패키지를 제안했으나,[7] 셀즈닉은 결국 MGM과 계약을 맺고 게이블을 캐스팅했다.[3][6]
애슐리 윌크스 역에는 제프리 린, 멜빈 더글러스도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지만, 레슬리 하워드가 캐스팅되었다.[144][145] 멜라니 해밀턴 역에는 조앤 폰테인이 고려되었으나, 폰테인의 추천으로 언니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캐스팅되었다.[148] 하빌랜드는 워너 브라더스와 전속 계약을 맺었기에 총수인 잭 L. 워너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꼭 연기하고 싶었던 하빌랜드는 잭 L. 워너의 부인에게 부탁하여 허락을 받았다.[144][145]
배우 | 역할 |
---|---|
비비언 리 | 스칼렛 오하라 |
클라크 게이블 | 레트 버틀러 |
레슬리 하워드 | 애슐리 윌크스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멜라니 해밀턴 |
토머스 하워드 | 제럴드 오하라 |
바버라 오닐 | 수엘렌 오하라 |
할리우드가 남부 사투리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자, 제작진은 수잔 마이릭과 윌 A. 프라이스를 고용하여 배우들의 남부 사투리를 지도했다.[14][15]
== 촬영 및 편집 ==
1939년 1월 26일부터 7월 1일까지 주요 촬영이 진행되었고, 1939년 11월 11일까지 후반 작업이 계속되었다.[7] 사전 제작에 প্রায় 2년을 보낸 조지 큐커 감독은 촬영 시작 3주도 채 되지 않아 해고되었다.[7] 큐커는 시드니 하워드의 각본을 따르지 않고, 빠른 촬영을 원하는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해임되었다.[20] 셀즈닉은 이미 큐커가 자신의 다른 작품 연출에 수용적이지 않다는 점에 불만을 가졌고, 루이스 B. 마이어는 큐커를 MGM 감독으로 교체하려 했다.[18][21]
비비안 리와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큐커의 해고 소식에 애틀랜타 바자르 장면 촬영 당일, 셀즈닉에게 찾아가 간청했지만 소용없었다.[17] 결국, 클라크 게이블과 친분이 있던 빅터 플레밍이 감독으로 교체되었다.[17] 플레밍은 템포를 높여 명료함과 장대함에 중점을 두어 촬영을 진행했다. 하지만, 비비안 리는 플레밍의 연출 방식에 갈등을 겪었고, 몰래 큐커를 찾아가 연기 지도를 받았다.[17]
플레밍 감독은 과로로 인해 일시적으로 제작에서 물러났고, 그 기간 동안 샘 우드 감독이 일부 장면을 연출했다.[7] 최종적으로 큐커는 18일, 플레밍은 93일, 우드는 24일 동안 촬영을 진행했다.[7]
촬영 감독 리 가르메스는 제작 초기에 해고되고, 어니스트 할러로 교체되었다.[23] 가르메스는 영화의 첫 3분의 1을 촬영했지만, 크레딧을 받지 못했다.[23]
애틀랜타 화재 장면은 셀즈닉 인터내셔널 스튜디오의 낡은 세트를 불태워 촬영했다.[3] 당시 추정 제작비는 385만 달러로, 벤허(1925) 다음으로 가장 비싼 영화였다.[26]
셀즈닉은 편집에도 깊이 관여하여, 할 C. 칸과 함께 하루 23시간, 때로는 50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작업했다. 최종 편집본은 3시간 42분 (222분) 분량이었다.
헤이스 오피스는 버틀러의 마지막 대사인 "damn"의 사용에 대해 5,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28] 미국 영화 협회 이사회의 제작 규정 수정으로 인해 대사 사용이 허가되었다.[28]
== 기술적 특징 ==
맥스 스타이너가 작곡한 영화 음악은 휴고 프리드호퍼, 모리스 드 팩, 베르나르트 카운, 아돌프 도이치, 레지널드 바셋 등 다섯 명의 편곡자가 참여했다.[29] 스타이너는 12주 동안 음악 작업에 매달렸으며, 이는 그가 단일 작품에 쏟은 가장 긴 시간이었다.[29] 총 2시간 36분 분량으로, 그가 작곡한 가장 긴 음악이기도 하다.[29]
음악에는 두 가지 주요 사랑 테마가 사용되었다. 하나는 애슐리와 멜라니의 부드러운 사랑을 표현하고, 다른 하나는 애슐리를 향한 스칼렛의 열정을 나타낸다.[29] 특이하게도 스칼렛과 렛트의 사랑 테마는 없다.[29] 스타이너는 스티븐 포스터의 곡("루이지애나 벨", "돌리 데이", "링고 디 밴조", "아름다운 꿈꾸는 이", "옛 친구들", "케이티 벨")을 포함한 민요와 애국가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29] 특히 "케이티 벨"은 스칼렛 테마의 기반이 되었다.[29] 헨리 클레이 워크의 "조지아를 통과하며 행진", "딕시", "개리오웬", "보니 블루 플래그"도 주요하게 사용되었다.[29] 영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테마는 오하라 농장인 타라를 나타내는 선율이다.[29] 1940년대 초 "타라의 테마"는 맥 데이비드의 노래 "나의 진정한 사랑"의 음악적 기초가 되었다.[29] 총 99개의 개별 음악이 사용되었다.[29]
제시간에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스타이너는 프리드호퍼, 도이치, 하인츠 로엠헬드에게 작곡에 대한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29] 추가적으로 프란츠 왁스만과 윌리엄 액스트의 두 개의 짧은 큐는 MGM 라이브러리의 악보에서 가져왔다.[29]
4. 1. 기획 및 각색
1936년 5월,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출간된 직후,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 뉴욕 지사 대표이자 스토리 담당이었던 케이 브라운은 영화화 가능성을 간파하고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에게 영화화 판권 구매를 제안했다. 브라운의 끈질긴 설득과 친구 존 헤이 휘트니의 지원, 그리고 경쟁을 싫어하는 셀즈닉의 성향 덕분에 결국 5만 달러에 판권 계약이 성립되었다.셀즈닉은 시드니 하워드를 고용하여 각본 작업에 착수했다. 하워드는 초기 6시간 분량의 각본을 작성했으나, 셀즈닉과 함께 수정을 거듭하며 상영 시간을 줄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하워드의 각본은 헤이즈 코드에 의해 검열되어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후 F. 스콧 피츠제럴드 등 여러 작가가 각색에 참여했지만,[144][145] 최종적으로 셀즈닉이 직접 각본을 마무리했다.
영화 역사가 조앤 예크에 따르면, 하워드의 초기 제출본은 너무 길어 최소 6시간 분량의 영화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한다.[16] 셀즈닉은 하워드가 수정 작업에 참여하길 원했지만, 하워드는 뉴잉글랜드를 떠나길 거부했고, 결국 여러 작가들이 수정 작업을 맡게 되었다.[16] 촬영 시작 3주 후, 셀즈닉은 조지 큐커 감독을 해고하고 빅터 플레밍을 기용했다. 플레밍은 시나리오에 불만을 품었고, 셀즈닉은 벤 헥트에게 5일 안에 전체 시나리오를 다시 쓰도록 지시했다.[17] 헥트는 하워드의 원고를 바탕으로 시나리오 전반부를 수정했고, 셀즈닉은 후반부를 직접 작업하려 했으나 일정이 지연되자 하워드가 복귀하여 2부의 주요 장면을 다시 작업했다.[17]
1939년 영화 개봉 당시, 최종 시나리오가 하워드의 버전과 매우 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크레딧에 하워드의 이름만 표시된 것은 그의 죽음을 기리는 제스처였을 수도 있다.[16] 1939년 10월 메모에서 셀즈닉은 영화의 작가 크레딧에 대해 언급하며, 영화 속 대부분의 대사가 자신의 것이며, 독창적인 대사는 시드니 하워드, 벤 헥트, 존 반 드루텐의 일부 대사뿐이라고 밝혔다.[18]
헥트의 전기 작가 윌리엄 맥아담스에 따르면, 셀즈닉과 플레밍은 헥트에게 즉시 영화 작업을 요청했고, 헥트는 소설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일 동안 하루 18~20시간씩 작업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19] 셀즈닉은 음식 섭취가 작업 속도를 늦출 것을 우려하여 점심 식사를 허락하지 않고 바나나와 소금에 절인 땅콩을 제공했다.[19]
맥아담스는 헥트가 얼마나 많은 시나리오를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스크린 작가 조합에 제출된 공식 크레딧에는 시드니 하워드가 유일한 스크린 크레딧을 받았고, 다른 네 명의 작가(조 스월링, 올리버 H. P. 가렛, 바바라 키온, 벤 헥트)는 각각 처리, 구성, 대사에 기여한 것으로 추가되었다고 언급했다.[19]
한편, 셀즈닉은 1938년 6월 전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와 협상하여 영화에서 쿠 클럭스 클랜에 대한 언급이나 흑인에 의한 폭력 장면을 포함하지 않고, 흑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워너 브라더스는 셀즈닉에게 베티 데이비스와 에롤 플린을 주연으로 하는 더 높은 투자 제안을 했지만, 셀즈닉은 루이스 B. 메이어의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와 손잡고 클라크 게이블을 캐스팅하는 대신 세계 배급권과 7년간 이익의 절반을 주기로 결정했다.[144][145]
4. 2. 캐스팅
스칼렛 오하라 역의 캐스팅은 영화 제작 전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미국 전역에서 오디션이 열렸다.[3] 이 전대미문의 스칼렛 찾기는 당시 “스칼렛 피버(Scarlett Fever)”라고 불렸다.[146] 1,400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90명이 스크린 테스트를 거쳤으며, 비용은 9만 2000달러에 달했다.[54]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마가렛 설리번, 노마 시어러, 라나 터너, 프랜시스 디, 수전 헤이워드 등이 스칼렛 역 후보로 거론되었다.[6][7][8][9] 1937년 라디오 방송에서 진행된 스칼렛 콘테스트 상위 6인에는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미리엄 홉킨스, 마가렛 셜러반, 조앤 크로포드, 바버라 스탠윅이 올랐다.[144][145]원작자 마가렛 미첼이 가장 승인한 배우는 미리엄 홉킨스였으나, 홉킨스는 30대 중반으로 나이가 많다고 여겨졌다.[6][7][8] 최종 후보는 폴릿 고다르, 진 아서, 조앤 베넷, 그리고 비비안 리로 압축되었다.[10][144][145] 고다르가 거의 역할을 따낼 뻔했지만, 찰리 채플린과의 결혼 논란으로 셀즈닉은 마음을 바꿨다.[3] 결국 비비안 리가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최종 발탁되었고, 1939년 1월 13일에 공식 발표되었다.[12][13][54][144][145]
렛 버틀러 역에는 셀즈닉이 처음부터 클라크 게이블을 원했지만, 게이블은 MGM과 계약되어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3] 게리 쿠퍼도 고려되었지만, 새뮤얼 골드윈이 출연을 허락하지 않았다.[6] 워너는 배급권 대신 베티 데이비스, 에롤 플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를 주연으로 출연시키는 패키지를 제안했으나,[7] 셀즈닉은 결국 MGM과 계약을 맺고 게이블을 캐스팅했다.[3][6]
애슐리 윌크스 역에는 제프리 린, 멜빈 더글러스도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지만, 레슬리 하워드가 캐스팅되었다.[144][145] 멜라니 해밀턴 역에는 조앤 폰테인이 고려되었으나, 폰테인의 추천으로 언니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캐스팅되었다.[148] 하빌랜드는 워너 브라더스와 전속 계약을 맺었기에 총수인 잭 L. 워너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꼭 연기하고 싶었던 하빌랜드는 잭 L. 워너의 부인에게 부탁하여 허락을 받았다.[144][145]
배우 | 역할 |
---|---|
비비언 리 | 스칼렛 오하라 |
클라크 게이블 | 레트 버틀러 |
레슬리 하워드 | 애슐리 윌크스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멜라니 해밀턴 |
토머스 하워드 | 제럴드 오하라 |
바버라 오닐 | 수엘렌 오하라 |
할리우드가 남부 사투리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자, 제작진은 수잔 마이릭과 윌 A. 프라이스를 고용하여 배우들의 남부 사투리를 지도했다.[14][15]
4. 3. 촬영 및 편집
1939년 1월 26일부터 7월 1일까지 주요 촬영이 진행되었고, 1939년 11월 11일까지 후반 작업이 계속되었다.[7] 사전 제작에 প্রায় 2년을 보낸 조지 큐커 감독은 촬영 시작 3주도 채 되지 않아 해고되었다.[7] 큐커는 시드니 하워드의 각본을 따르지 않고, 빠른 촬영을 원하는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해임되었다.[20] 셀즈닉은 이미 큐커가 자신의 다른 작품 연출에 수용적이지 않다는 점에 불만을 가졌고, 루이스 B. 마이어는 큐커를 MGM 감독으로 교체하려 했다.[18][21]비비안 리와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큐커의 해고 소식에 애틀랜타 바자르 장면 촬영 당일, 셀즈닉에게 찾아가 간청했지만 소용없었다.[17] 결국, 클라크 게이블과 친분이 있던 빅터 플레밍이 감독으로 교체되었다.[17] 플레밍은 템포를 높여 명료함과 장대함에 중점을 두어 촬영을 진행했다. 하지만, 비비안 리는 플레밍의 연출 방식에 갈등을 겪었고, 몰래 큐커를 찾아가 연기 지도를 받았다.[17]
플레밍 감독은 과로로 인해 일시적으로 제작에서 물러났고, 그 기간 동안 샘 우드 감독이 일부 장면을 연출했다.[7] 최종적으로 큐커는 18일, 플레밍은 93일, 우드는 24일 동안 촬영을 진행했다.[7]
촬영 감독 리 가르메스는 제작 초기에 해고되고, 어니스트 할러로 교체되었다.[23] 가르메스는 영화의 첫 3분의 1을 촬영했지만, 크레딧을 받지 못했다.[23]
애틀랜타 화재 장면은 셀즈닉 인터내셔널 스튜디오의 낡은 세트를 불태워 촬영했다.[3] 당시 추정 제작비는 385만 달러로, 벤허(1925) 다음으로 가장 비싼 영화였다.[26]
셀즈닉은 편집에도 깊이 관여하여, 할 C. 칸과 함께 하루 23시간, 때로는 50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작업했다. 최종 편집본은 3시간 42분 (222분) 분량이었다.
헤이스 오피스는 버틀러의 마지막 대사인 "damn"의 사용에 대해 5,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28] 미국 영화 협회 이사회의 제작 규정 수정으로 인해 대사 사용이 허가되었다.[28]
4. 4. 기술적 특징
맥스 스타이너가 작곡한 영화 음악은 휴고 프리드호퍼, 모리스 드 팩, 베르나르트 카운, 아돌프 도이치, 레지널드 바셋 등 다섯 명의 편곡자가 참여했다.[29] 스타이너는 12주 동안 음악 작업에 매달렸으며, 이는 그가 단일 작품에 쏟은 가장 긴 시간이었다.[29] 총 2시간 36분 분량으로, 그가 작곡한 가장 긴 음악이기도 하다.[29]음악에는 두 가지 주요 사랑 테마가 사용되었다. 하나는 애슐리와 멜라니의 부드러운 사랑을 표현하고, 다른 하나는 애슐리를 향한 스칼렛의 열정을 나타낸다.[29] 특이하게도 스칼렛과 렛트의 사랑 테마는 없다.[29] 스타이너는 스티븐 포스터의 곡("루이지애나 벨", "돌리 데이", "링고 디 밴조", "아름다운 꿈꾸는 이", "옛 친구들", "케이티 벨")을 포함한 민요와 애국가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29] 특히 "케이티 벨"은 스칼렛 테마의 기반이 되었다.[29] 헨리 클레이 워크의 "조지아를 통과하며 행진", "딕시", "개리오웬", "보니 블루 플래그"도 주요하게 사용되었다.[29] 영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테마는 오하라 농장인 타라를 나타내는 선율이다.[29] 1940년대 초 "타라의 테마"는 맥 데이비드의 노래 "나의 진정한 사랑"의 음악적 기초가 되었다.[29] 총 99개의 개별 음악이 사용되었다.[29]
제시간에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스타이너는 프리드호퍼, 도이치, 하인츠 로엠헬드에게 작곡에 대한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29] 추가적으로 프란츠 왁스만과 윌리엄 액스트의 두 개의 짧은 큐는 MGM 라이브러리의 악보에서 가져왔다.[29]
5. 한국판 성우진
5. 1. KBS (1992년 2월 3일)
송도영이 비비언 리가 연기한 스칼렛 오하라 역을, 유강진이 클라크 게이블이 연기한 레트 버틀러 역을 맡았다. 김세한은 애슐리 윌크스(레슬리 하워드) 역을, 이향숙은 멜라니 해밀턴(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역을 연기했다. 정기항은 애슐리의 아버지(하워드 힉맨) 역을, 노민은 제랄드 오하라(토머스 미첼) 역을 맡았다. 임수아는 유모(해티 맥대니얼) 역을 연기했다.설영범은 조나스 윌커슨(빅터 조리), 음악가, 군인 역을, 박은숙은 흑인 시녀(버터플라이 맥퀸) 역을 맡았다. 최옥희는 스칼렛의 엄마(바바라 오닐)와 고모(로라 홉 크류즈) 역을, 성선녀는 미드의 부인(레오나 로버츠)과 메리웨더(제인 다웰) 역을 연기했다. 이정구는 프랭크(캐롤 나이에)와 간호사(에디 캔들러) 역을, 이종구는 미드(해리 대번포트) 역을 맡았다. 이봉준은 빅 샘(에버렛 브라운)과 해설을 담당했다.
성병숙은 캐서린(마셀라 마틴), 보니(캐미 킹 콘론), 스칼렛의 작은 동생(앤 루더포드) 역을, 전기병은 스칼렛의 큰 동생(에벌린 키스) 역을 맡았다. 백순철은 찰스(랜드 브룩스), 미드의 아들(잭키 모란), 스튜어트(조지 리브스) 역을 연기했다. 김준은 폴크(오스카 폴크)와 브렌트(프레드 크레인) 역을, 김종환은 초대 손님(데일 반 시켈) 역을 맡았다.
5. 2. SBS (2004년 3월 26일)
2004년 3월 26일에 SBS에서 방영되었다. KBS와 동일하게 송도영(스칼렛), 유강진(레트), 김세한(애슐리) 등이 참여했고, 멜라니 역은 윤소라가 맡았다. 황원은 제럴드 오하라(토머스 미첼)를, 안경진은 마미(해티 맥대니얼)를 연기했다. 송두석은 미드 박사(해리 데이븐포트)역을 맡았다. 우정신은 보니(캐미 킹 콘론)와 어린 하녀, 스칼렛 동생(에벌린 키스)을 연기했다. 이외에도 강연숙, 이진화, 김혜경, 이종혁, 황윤걸, 최원형, 김영진, 양석정 등이 참여했다.5. 3. 일본어 더빙판
{{일본어 더빙 정보|제목=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닛폰 테레비판 1= 1975년 10월 8일(전편), 15일(후편) 『수요 로드쇼』에서 무삭제 방송으로 첫 방영[150][178]되었다. 1979년 10월 3일과 10월 10일, 1983년 11월 16일과 11월 23일에 「지금 되살아나는 영원한 초대작『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제목으로 재방송되었다.
|닛폰 테레비판 2= 1988년 1월 1일 『금요 특별 로드쇼』에서 무삭제 방송되었으며, 워너 발매 스페셜 에디션 DVD(4매입)에 수록[143]되었다.
|JAL 기내판= 1986년 애틀랜타 직항편 개통 기념으로 제작되었다.
|소프트판= 워너 홈 비디오 발매 VHS・DVD・BD에 수록되었다.
|도쿄 TV판= 2000년 1월 3일 『20세기 명작 시네마』에서 첫 방송되었다.
|PD판= 퍼블릭 도메인판이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러 차례 일본어 더빙판이 제작되어 TV 방송 및 DVD/Blu-ray 등에 수록되었다.[143]
역할 | 배우 | 일본어 더빙 | |||||||
---|---|---|---|---|---|---|---|---|---|
일본 TV 방송망(日本テレビ) 75년판 | 일본항공(JAL) 기내판 | 일본 TV 88년판 | 소프트판 | 도쿄TV(テレビ東京)판 | 퍼블릭 도메인 DVD(PD)판 | ||||
스칼렛 오하라 | 비비안 리 | 栗原小巻 | 鈴木弘子 | 戸田恵子 | 日野由利加 | 田中美佐子 | 日野由리카 | ||
렛트 버틀러 | 클라크 게이블 | 近藤洋介 | 仲村秀生 | 江守徹 | 大塚明夫 | 渡辺謙 | 内田直哉 | ||
애슐리 윌크스 | 레스리 호워드 | 滝田裕介 | 納谷六朗 | 荻島真一 | 原康義 | 井上倫宏 | 村治学 | ||
멜라니 해밀턴 | 올리비아 드 해빌랜드 | 谷育子 | 沢田敏子 | 香野百合子 | 平淑恵 | 岡本茉利 | 堀江真理子 | ||
제럴드 오하라 | 토마스 미첼 | 神田隆 | 池田勝 | 織本順吉 | 今西正男 | 山野史人 | 島香裕 | ||
엘렌 오하라 | 中西妙子 | 富田恵子 | 谷育子 | 吉野佳子 | 宇乃音亜季 | ||||
맘미 | 해티 맥대니얼 | 中村たつ | 麻生美代子 | 中村たつ | 青木和代 | 神保共子 | 桂木黎奈 | ||
수엘렌 오하라 | 이브린 키스 | 執行佐智子 | 芝夏美 | 勝生真沙子 | 田中敦子 | ||||
캐린 오하라 | 久住真理子 | さとうあい | 岡本茉利 | 佐々木優子 | 恒松あゆみ | ||||
피티 팻 숙모 | 中村紀子 | 秋元千賀子 | 杉田郁子 | 斉藤昌 | 山本与志恵 | 村上아카네 | |||
미드 박사 | 해리 다벤포트 | 横森久 | 石井敏郎 | 久米明 | 大木民夫 | 久米明 | |||
미드 부인 | 川路夏子 | 矢野陽子 | 稲葉まつ子 | 田中結子 | |||||
멜리웨더 부인 | 제인 다웰 | 沼波輝枝 | 竹口安芸子 | 久保田民絵 | |||||
찰스 해밀턴 | 関根信昭 | 野島昭生 | 坂東尚樹 | ||||||
프랭크 케네디 | 原田清人 | 広瀬正志 | 中田浩二 | 福田信昭 | 小山力也 | ||||
벨 왓링 | 오나 맨슨 | 横尾まり | 小沢寿美恵 | 高畑淳子 | 駒塚由衣 | ||||
포크 | 藤本譲 | 田口昻 | 沢木郁也 | 池田勝 | |||||
피터 할아버지 | 及川広夫 | 平林尚三 | 辻村真人 | 宝亀克寿 | |||||
스튜어트 탈턴 | 조지 리브스 | 野島昭生 | 神谷和夫 | 宮本充 | |||||
브렌트 탈턴 | 古川登志夫 | 堀秀行 | 松本保典 | ||||||
캐슬린 칼버트 | 来路史圃 | 사사키 유우코 | |||||||
존 윌크스 | 北村弘一 | 小山武宏 | |||||||
인디아 윌크스 | 알리시아 레트 | 山田礼子 | 幸田直子 | 沢海陽子 | |||||
프리시 | 山本嘉子 | 滝沢ロコ | 井上瑤 | 安達忍 | 川田妙子 | ||||
조너스 윌커슨 | 阪脩 | 阪脩 | 小島敏彦 | ||||||
북군 대위 톰 | 워드 본드 | 中庸助 | 小山武宏 | ||||||
보 윌크스 | 渕崎ゆり子 | 小暮英麻 | |||||||
보니 버틀러 | 藤枝成子 | 사사키 유우코 | 永迫舞 | ||||||
필 미드 | 谷口節 | 미야모토 미츠루 | |||||||
조니 갤러거 | 키타무라 코우이치 | 타카라가메 카츠토시 | |||||||
빅 샘 | 大山高男 | 銀河万丈 | 菅原正志 | 楠見尚己 | |||||
伍장 | 어빙 베이컨 | 塚田正昭 | 岩田安生 | ||||||
역할 불명 기타 | #REDIRECT | 大久保正信 新田勝江 国坂伸 前川哲男 井口恭子 加藤正之 | 幹本雄之 関俊彦 片岡富枝 | 사이토 마사시 伊井篤史 코지마 토시히코 시마 카오루 호리코시 마키 星野充昭 | 堀越真己 津田英三 田原アルノ | 사와우미 요우코 타나카 아츠코 石塚理恵 松谷彼哉 竹村叔子 金子由之 水野龍司 코지마 토시히코 코야마 타케히로 마츠모토 야스노리 佐藤淳 後藤敦 호시노 미츠아키 伊藤昌一 佐々木敏 廣田行生 岩崎ひろし | 渡辺浩司 間宮康弘 石上裕一 小松史法 園部好徳 高橋圭一 鈴木貴征 森口芽衣 さわやまゆか 市川智英 | ||
내레이터 | #REDIRECT | 鈴木瑞穂 | 아소 미요코 | 横内正 | 有本欽隆 | 若山弦蔵 | 시마 카오루 | ||
- | 소프트판 | 닛테레판 1 | 닛테레판 2 | 도쿄TV판 | JAL 기내 상영판 | PDDVD판 |
---|---|---|---|---|---|---|
연출 | 사토 토시오 | 코바야시 모리오 | 사토 토시오 | 사콘지 히로시 | 하타노 치가코 | |
번역 | 키하라 타케시 | 누카다 야에코 | 하라 히토미 | |||
조정 | 쿠마쿠라 토오루 | 마에다 히토노부 | 오노 아츠시 | 타카쿠 타카오 | 야마다 아키히로 | |
효과 | 넘겨주기 | 아시다 키미오 쿠마미미 츠토무 | 릴레이션 | 에비스 히로카즈 아카자와 유우지 | ||
선곡 | 넘겨주기 | 시게 히데히코 | 히가시카미 베푸세이 | 넘겨주기 | 넘겨주기 | 넘겨주기 |
녹음 | 사카이 신이치 | 스즈키 요시츠구 | ||||
프로듀서 | 오가와 마사히로 키지마 히사유코 | 오쿠다 세이지 타리미즈 야스키 | 후카자와 미키히코 와타나베 카즈토 | 츠바키 준 츄죠 히로미치 | ||
제작 | 도호쿠 신샤 | 일본텔레비전 도호쿠 신샤 | 도쿄TV 도호쿠 신샤 | 덴츠 글로비전 | 맥스스타 | |
1975년 일본 TV 초판은 33.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비디오리서치 조사, 간토 지역).[150][178] 일본 TV는 방송권을 6억 엔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8]
6. 평가 및 영향
이 영화는 여러 저명한 업계 설문 조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50년, 25년 이상 영화 업계에 종사한 200명 이상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버라이어티''의 설문 조사에서 지난 5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영화로 선정되었다.[99] 1977년에는 미국영화연구소(AFI) 회원들의 투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선정되었다.[7] AFI는 또한 1998년 "100대 영화" 목록에서 이 영화를 4위에 올렸고,[100] 2007년 10주년 기념판에서는 6위로 순위가 하락했다.[101] 영화 감독들은 2012년 10년마다 실시되는 ''사이트 앤 사운드'' 설문 조사에서 이 영화를 322위로 평가했고,[102] 2016년에는 미국감독조합 회원들의 투표에서 9위의 "감독 업적"으로 선정되었다.[103] 2014년에는 할리우드 리포터가 할리우드 지역의 모든 스튜디오, 기획사, 홍보 회사 및 제작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광범위한 설문 조사에서 15위를 차지했다.[104]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89년 미국 의회도서관이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영화로 선정하여 국립영화등록부에 보존하기 위해 선정된 25편의 창립 영화 중 하나였다.[105][106]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이후 제작한 모든 작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비교되어, 그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44][145] 1944년에 셀즈닉은 이 작품의 모든 권리를 MGM에 매각했다.[144][145] 현재는 다른 MGM 작품(1986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워너미디어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역대 흥행 수입에서 2020년 현재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1위이다.[152]
- 이 작품을 평생 최고의 영화로 꼽는 사람도 많고 비디오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세계 어딘가의 도시에서 상영되지 않는 날이 없다”고까지 말해졌다. 원래는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지구의 자전과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항상 지구상 어딘가에서 쉬지 않고 영원히 상영될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던 말이다.
- 원작에는 인종차별 문제와 노예 제도의 묘사에 대해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영화화에 즈음하여 그러한 부분은 크게 생략되었고,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몇몇 흑인 노예가 생략되었다. 셀즈닉은 “나는 어떤 반흑인 영화도 만들고 싶지 않다. 우리 영화에서는 흑인의 묘사에 최대한 주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80]
- 미국에서 유명한 대사는 마지막 장면 전에 렛이 떠나면서 하는 작별 인사다. 스칼렛에게 “당신이 가 버리면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면 좋겠어요?”라고 묻자 렛은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솔직히 말해서, 상관없어)”[181]라고 돌아서면서 말한다. 영어의 “''damn''”은 원래 강한 욕설이기 때문에 제작 당시에는 영화에서 금지어로 간주되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로 생각되었다. 셀즈닉은 미국 영화 협회에 5000달러의 벌금을 내고 사용을 허가받았다.[144][145] 2005년, 반대로 미국 영화 협회는 이것을 “미국 영화 명대사 베스트 100” 1위로 선정했다.
- 유럽에서는 1940년에 개봉되었다. 런던의 리츠 시네마에서는 4년 29주간 장기 상영되었다.[150] 독일이 점령한 국가에서는 반전 영화로 상영이 금지되었지만, 종전 후인 1945년이나 46년에 파리, 암스테르담, 빈 등에서 공개되었을 때는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군중이 수 시간 전부터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 이 작품은 사실 태평양 전쟁 전에 수입되었지만, 군부로부터 “반전 영화”라는 낙인이 찍혀 그때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반송되었다. 그 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상하이 등에서 본 사람, 몰래 수입된 필름을 본 영화 관계자들은 그 화려함과 훌륭함에 “이런 영화를 만드는 나라와 전쟁을 해도 이길 수 없다”라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50] 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국극장에서 상영하게 되고, 66년에 무대화, 70년에는 뮤지컬로 제작한 극작가 키쿠타 카즈오는 상하이에서 본 적이 있다. 영화 평론가이자 영화 포스터도 그린 노구치 히사미츠도 상하이에서 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작품을 만든 미국과 전쟁을 한다니 정신 나간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영화 평론가인 야마모토 쿄코도 상하이에서 너무 재미있어서 3번이나 보았고, 당시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큰 화제가 되었고, 상하이에서도 3개월간 장기 상영되었다고 한다. 오즈 야스지로와 도쿠가와 유메고에도 싱가포르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그 평판이 소문을 타고 도쿄에 필름을 공수하여 군 관계자만을 위한 시사회가 열렸다.[182] 타카미네 히데코도 군 관계자, 영화 관계자들과 함께 “육군이 남방에서 압수한 필름으로 감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83] 또 도쿄대학교에서도 전쟁 중에 상영회가 있었지만, 아직 전반부 중에 공습 경보가 울려 중단되었다고 에자키 레오나가 학생 시절 에피소드를 공개하고 있다.[184]
- 75년의 「수요 로드쇼」 이후의 반향은 크게, 동 프로그램의 해설자이자 영화 평론가인 미즈노 하루오에게는 시청자로부터 많은 편지가 보내졌다. 그중 한 통의 두꺼운 편지가 눈에 띄었던 미즈노는 읽어보니, 규슈에서 아내와 고등학생 딸과 셋이서 사는 남성 시청자로부터 온 편지였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요약).
이 편지를 읽은 미즈노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하며,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2020년 5월에 발생한 미니애폴리스 반인종차별 시위가 확대되었을 때, 그 달부터 시작된 워너 미디어 계열 정액제 동영상 배포 서비스 “HBO Max”가 본 작품의 배포를 일시 중지하는 사건도 있었다.[186][187][188] HBO Max는 해설 영상을 본편 시작 전에 추가한 뒤, 본 영화의 배포를 같은 해 6월 24일에 재개했다.[189][191]
== 상업적 성공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개봉 당시 전 세계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8] 뉴욕 캐피털 극장에서만 12월 말 일일 평균 1만 1천 명의 관객을 기록했으며,[35] 개봉 4년 만에 미국 전역에서 약 6천만 장의 티켓을 판매하여 당시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66][67] 1940년 4월 런던에서 블리츠 기간 중 개봉하여 리체스터 광장의 리틀 리츠에서 4년간 상영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68] 1943년 말 MGM이 배급을 중단할 때까지 전 세계 배급으로 3,200만 달러의 총 임대 수익(스튜디오가 박스오피스 총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록하며 그 시점까지 최고 수익 영화가 되었다.[8][17] 1952년 9월 일본에서 개봉하여 최고 매출 외국 영화가 되었다.[69][70]

1939년 12월 15일, 로우스 그랜드 극장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는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애틀랜타에 모였다.[26] 이는 윌리엄 B. 하츠필드(윌리엄 B. 하츠필드) 시장이 주최한 3일간의 축제의 절정이었으며, 영화 배우들이 탄 리무진 퍼레이드, 리셉션, 수천 개의 남부연합기, 그리고 의상 무도회가 포함되었다.[26] 유리스 D. 리버스(유리스 D. 리버스) 조지아 주지사는 12월 15일을 주의 공휴일로 선포했다.[26] 짐 크로우 법으로 인해 하티 맥대니얼을 포함한 흑인 배우들은 시사회에 참석하지 못했다.[33] 클라크 게이블은 맥대니얼이 시사회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했지만, 맥대니얼은 그를 설득하여 참석하게 했다.[33]
이 영화는 여러 차례 재개봉되었다. 1942년, 1947년, 1954년에 재개봉되었으며,[7][17] 1954년 재개봉은 영화가 와이드스크린으로 상영된 최초의 경우였다.[37] 1961년 개봉은 남북 전쟁 시작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고,[38] 1967년 재개봉을 위해 영화는 70mm로 확대되었다.[7] 1971년, 1974년, 1989년에 추가로 재개봉되었고,[40] 1989년 50주년 기념 재개봉에서는 완벽한 오디오 및 비디오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40] 1998년, 타임 워너 소유의 뉴라인 시네마에 의해 미국 극장에서 한 번 더 개봉되었다.[41]
1947년 재개봉 당시 미국과 캐나다에서 5백만 달러의 임대 수익을 올리며 그 해 10대 히트작 중 하나가 되었다.[36][71] 1967년 재개봉은 업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재개봉이 되었으며, 6,800만 달러의 박스오피스 총수익을 기록했다.[77] MGM은 이 개봉으로 4,100만 달러의 임대 수익을 올렸다.[78]
모든 개봉을 통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2억 장 이상의 티켓이 판매된 것으로 추산되며,[66] 이 지역에서 다른 어떤 영화보다 많은 극장 관객을 동원했다.[81] 영국에서 약 3,500만 장, 프랑스에서 1,60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했다.[82][83][84] 총계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3억 9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86] 2007년 터너 엔터테인먼트는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33억 달러에 해당한다고 추산했으며,[8] 《기네스 세계 기록》은 2014년 34억 4천만 달러로 평가하여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영화로 기록했다.[87]
한국에서는 1957년에 개봉하여, 전쟁 후 재건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1952년 9월 4일, 도쿄 유라쿠자(有楽座)를 시작으로 전국 로드쇼 개봉을 했다.[157][158] 당시 일반적인 로드쇼 티켓 가격이 200엔이었던 것에 비해, 유라쿠자에서는 전석 지정석으로 600엔, 500엔, 300엔의 고액 요금을 책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히트를 기록했다.[158] 전쟁으로 폐허가 된 타라 농장에서 꿋꿋하게 일어서는 여주인공 스칼렛의 모습은, 전쟁으로 짓밟혔지만 부흥을 위해 살아온 당시 일본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158]
== 비평적 평가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개봉 당시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7] 제작 가치, 기술적 성취, 야심 찬 규모는 보편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가 너무 길고 극적으로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50][51] 뉴욕 타임스의 프랭크 S. 누전트는 역사상 가장 야심찬 영화 제작이었지만,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름답게 이야기된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평가했다.[50] 네이션의 프란츠 홀레링은 영화가 업계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지만, 영화 예술에서는 사소한 성취에 불과하다고 평했다.[51]
영화는 원작 소설에 충실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지만,[50] 이 점은 긴 상영 시간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52] 베라이어티의 존 C. 플린은 셀즈닉이 "너무 많은 것을 남겼다"고 비판하며, 이야기 후반부의 반복적인 장면과 대화가 잘렸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52] 맨체스터 가디언은 영화의 유일한 심각한 결점은 이야기에 시간과 비용을 정당화할 만한 서사적 품질이 부족하다는 것이며, 스칼렛의 "무의미한 결혼"과 "가정 불화"에 초점을 맞춘 후반부는 불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맨체스터 가디언은 "이야기가 중간 지점에서 짧게 잘리고 정리되었고, 개인적인 드라마가 중심 주제—구 남부의 붕괴와 황폐화—의 영화적 처리에 종속되었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정말 위대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53]
대부분의 칭찬은 캐스팅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비비언 리의 스칼렛 역 연기가 주목받았다. 누전트는 그녀를 "영화의 중심"이라고 묘사하며, "예술과 자연에 의해 그 역할에 완벽하게 맞춰져서 다른 여배우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50] 홀레링은 그녀의 "외모와 움직임"이 "완벽하다"고 평가했다.[51] 플린 또한 리가 그 역할에 신체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애틀랜타에서의 탈출이나 스칼렛이 양키 탈영병을 죽이는 장면과 같이 용기와 결의를 보이는 장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했다.[52] 리는 1939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54] 클라크 게이블의 렛 버틀러 역 연기에 대해 플린과 누전트는 미첼의 개념과 가장 가까운 인물 묘사라고 평가했지만,[52][50] 홀레링은 게이블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51]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멜라니 역 연기는 "돋보이는" 배우로 지목되었고, 누전트는 "우아하고, 위엄 있고, 부드러운 인물 묘사의 보석"이라고 묘사했다.[51][52][50] 해티 맥대니얼의 매미 역 연기는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누전트는 그녀가 비비안 리 다음으로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했다고 평가했고,[50] 플린은 리와 게이블의 연기에 이어 세 번째로 좋은 연기라고 평가했다.[52]

해티 맥대니얼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여 최초의 흑인 오스카 수상자가 되었다.[61] 하지만, 시상식이 열린 앰배서더 호텔은 흑인 출입 금지를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맥대니얼은 특별히 허가된 흑인 손님으로 입장해야 했다.[61] 그녀와 에스코트는 방 뒤편의 별도 테이블에 앉도록 강요받았다.[61]
제1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카데미상 수상 및 후보 지명 횟수 신기록을 세웠다.[55][56] 총 13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어 8개 부문(작품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미술상, 편집상)에서 수상했으며, 장비 및 컬러 활용에 대한 2개의 명예상을 추가로 받았다.[55][56]
상 | 수상자(들) | 결과 | |||
---|---|---|---|---|---|
작품상 |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 ||||
감독상 | 빅터 플레밍 | ||||
남우주연상 | 클라크 게이블 | ||||
여우주연상 | 비비안 리 | ||||
여우조연상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
해티 맥대니얼 | |||||
각색상 | 시드니 하워드}} | ||||
음악상 | 맥스 스타이너 | (Samuel Goldwyn Studio Sound Department) | |||
기술상 | 돈 머스그레이브와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에서 조정된 장비 사용을 개척한 공로 |
흑인 사회에서는 영화 개봉 이후 흑인 묘사와 노예 제도 문제의 "미화"에 대해 비판했다.[62] 칼튼 모스는 공개 서한에서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이 "미국 역사와 흑인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던 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같은 대상에 대한 후면 공격"이라고 지적하며, 이 영화를 "남부 반동 세력의 여전히 살아있는 대의를 위한 향수 어린 동정심 호소"라고 묘사했다.[63] 멜빈 B. 톨슨은 "''국가의 탄생''은 너무나 노골적인 거짓말이어서 바보라도 간파할 수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너무나 미묘한 거짓말이어서 수백만 명의 백인과 흑인 모두 진실로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썼다.[64]
개봉 당시 흑인 사회의 여론은 크게 엇갈렸다. 일부에서는 이 영화를 "흑인 미국에 대한 테러의 무기"이자 흑인 관객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했고,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열렸다.[61] 말콤 엑스는 나중에 "버터플라이 맥퀸이 연기를 할 때, 나는 카펫 아래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고 회상했다.[6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흑인 사회는 맥대니얼의 업적을 진보의 상징으로 인식했다.[61]
1970년대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아서 M. 슐레징거 주니어는 할리우드 영화가 일반적으로 시간이 지나도 잘 유지되며 예상치 못한 깊이 또는 완전성을 드러낸다고 믿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우 시간이 그것을 좋게 다루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91] 리처드 쉬켈은 영화의 질을 측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시청자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묻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 영화는 이 점에서 실패한다고 주장했다.[92] 스탠리 카우프만 또한 이 영화를 대부분 잊을 수 있는 경험으로 여겼다.[93] 쉬켈과 슐레징거는 모두 이것을 "서투르게 쓰여졌다"는 점으로 돌리며, 대사를 "화려한" 그리고 "엽서 같은" 감각을 지닌 것으로 묘사했다.[91][92] 쉬켈은 또한 이 영화가 재시청 가치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대중 예술로서 실패한다고 믿는다.[92]
앤드류 사리스는 예술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제작된 가장 사랑받는 오락"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94] 주디스 크리스트는 이 영화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여전히 할리우드 조립 라인에서 나온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오래가는 대중 오락"이라고 평가했다.[95]
이 영화에 대한 비평적 인식은 그 후 몇 년 동안 바뀌었는데, 그 결과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의 10년 단위 비평가 설문조사에서 235위를 차지했고,[102] 2015년 BBC가 조사한 62명의 국제 영화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미국 영화 중 97위로 평가했다.[96]
{{인용구 상자
| title = AFI 100년… 시리즈
| source = 미국 영화 연구소[90]
| quote =
- AFI 100년…100 영화 – 4위
- AFI 100년…100 열정 – 2위
- AFI 100년…100 영화 명대사:
- * "솔직히 말해서, 내가 신경 쓰지 않아." – 1위
- * "어쨌든, 내일은 또 다른 날이야!" – 31위
- * "하느님이 증인이시라면, 저는 다시는 굶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 59위
- AFI 100년의 영화 음악 – 2위
- AFI 100년…100 환호 – 43위
- AFI 100년…100 영화 (10주년 기념판) – 6위
- AFI 10대 10대 영화 – 4위 서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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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과 재평가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개봉 당시부터 흑인 묘사와 노예 제도 문제의 "미화"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62] 흑인 극작가 칼튼 모스는 공개 서한에서 이 영화가 "남부 반동 세력의 여전히 살아있는 대의를 위한 향수 어린 동정심 호소"라고 비판했다.[63] 흑인 사회의 여론은 엇갈렸는데, 일부는 영화를 "흑인 미국에 대한 테러의 무기"로 규정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61] 반면, 해티 맥대니얼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은 흑인 사회에서 진보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61][63] 그러나 미국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는 맥대니얼을 엉클 톰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61]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 시작했다. 아서 M. 슐레징거 주니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의 깊이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가했고,[91] 리처드 쉬켈은 잊을 수 없는 이미지와 대화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92] 스탠리 카우프만 역시 대부분 잊을 수 있는 경험이라고 평가했다.[93]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디스 크리스트는 이 영화가 "할리우
6. 1. 상업적 성공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개봉 당시 전 세계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8] 뉴욕 캐피털 극장에서만 12월 말 일일 평균 1만 1천 명의 관객을 기록했으며,[35] 개봉 4년 만에 미국 전역에서 약 6천만 장의 티켓을 판매하여 당시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66][67] 1940년 4월 런던에서 블리츠 기간 중 개봉하여 리체스터 광장의 리틀 리츠에서 4년간 상영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68] 1943년 말 MGM이 배급을 중단할 때까지 전 세계 배급으로 3,200만 달러의 총 임대 수익(스튜디오가 박스오피스 총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록하며 그 시점까지 최고 수익 영화가 되었다.[8][17] 1952년 9월 일본에서 개봉하여 최고 매출 외국 영화가 되었다.[69][70]1939년 12월 15일, 로우스 그랜드 극장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는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애틀랜타에 모였다.[26] 이는 윌리엄 B. 하츠필드(윌리엄 B. 하츠필드) 시장이 주최한 3일간의 축제의 절정이었으며, 영화 배우들이 탄 리무진 퍼레이드, 리셉션, 수천 개의 남부연합기, 그리고 의상 무도회가 포함되었다.[26] 유리스 D. 리버스(유리스 D. 리버스) 조지아 주지사는 12월 15일을 주의 공휴일로 선포했다.[26] 짐 크로우 법으로 인해 하티 맥대니얼을 포함한 흑인 배우들은 시사회에 참석하지 못했다.[33] 클라크 게이블은 맥대니얼이 시사회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했지만, 맥대니얼은 그를 설득하여 참석하게 했다.[33]
이 영화는 여러 차례 재개봉되었다. 1942년, 1947년, 1954년에 재개봉되었으며,[7][17] 1954년 재개봉은 영화가 와이드스크린으로 상영된 최초의 경우였다.[37] 1961년 개봉은 남북 전쟁 시작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고,[38] 1967년 재개봉을 위해 영화는 70mm로 확대되었다.[7] 1971년, 1974년, 1989년에 추가로 재개봉되었고,[40] 1989년 50주년 기념 재개봉에서는 완벽한 오디오 및 비디오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40] 1998년, 타임 워너 소유의 뉴라인 시네마에 의해 미국 극장에서 한 번 더 개봉되었다.[41]
1947년 재개봉 당시 미국과 캐나다에서 5백만 달러의 임대 수익을 올리며 그 해 10대 히트작 중 하나가 되었다.[36][71] 1967년 재개봉은 업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재개봉이 되었으며, 6,800만 달러의 박스오피스 총수익을 기록했다.[77] MGM은 이 개봉으로 4,100만 달러의 임대 수익을 올렸다.[78]
모든 개봉을 통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2억 장 이상의 티켓이 판매된 것으로 추산되며,[66] 이 지역에서 다른 어떤 영화보다 많은 극장 관객을 동원했다.[81] 영국에서 약 3,500만 장, 프랑스에서 1,60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했다.[82][83][84] 총계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3억 9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86] 2007년 터너 엔터테인먼트는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33억 달러에 해당한다고 추산했으며,[8] 《기네스 세계 기록》은 2014년 34억 4천만 달러로 평가하여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영화로 기록했다.[87]
한국에서는 1957년에 개봉하여, 전쟁 후 재건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1952년 9월 4일, 도쿄 유라쿠자(有楽座)를 시작으로 전국 로드쇼 개봉을 했다.[157][158] 당시 일반적인 로드쇼 티켓 가격이 200엔이었던 것에 비해, 유라쿠자에서는 전석 지정석으로 600엔, 500엔, 300엔의 고액 요금을 책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히트를 기록했다.[158] 전쟁으로 폐허가 된 타라 농장에서 꿋꿋하게 일어서는 여주인공 스칼렛의 모습은, 전쟁으로 짓밟혔지만 부흥을 위해 살아온 당시 일본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158]
6. 2. 비평적 평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개봉 당시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7] 제작 가치, 기술적 성취, 야심 찬 규모는 보편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가 너무 길고 극적으로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50][51] 뉴욕 타임스의 프랭크 S. 누전트는 역사상 가장 야심찬 영화 제작이었지만,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름답게 이야기된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평가했다.[50] 네이션의 프란츠 홀레링은 영화가 업계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지만, 영화 예술에서는 사소한 성취에 불과하다고 평했다.[51]영화는 원작 소설에 충실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지만,[50] 이 점은 긴 상영 시간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52] 베라이어티의 존 C. 플린은 셀즈닉이 "너무 많은 것을 남겼다"고 비판하며, 이야기 후반부의 반복적인 장면과 대화가 잘렸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52] 맨체스터 가디언은 영화의 유일한 심각한 결점은 이야기에 시간과 비용을 정당화할 만한 서사적 품질이 부족하다는 것이며, 스칼렛의 "무의미한 결혼"과 "가정 불화"에 초점을 맞춘 후반부는 불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맨체스터 가디언은 "이야기가 중간 지점에서 짧게 잘리고 정리되었고, 개인적인 드라마가 중심 주제—구 남부의 붕괴와 황폐화—의 영화적 처리에 종속되었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정말 위대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53]
대부분의 칭찬은 캐스팅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비비언 리의 스칼렛 역 연기가 주목받았다. 누전트는 그녀를 "영화의 중심"이라고 묘사하며, "예술과 자연에 의해 그 역할에 완벽하게 맞춰져서 다른 여배우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50] 홀레링은 그녀의 "외모와 움직임"이 "완벽하다"고 평가했다.[51] 플린 또한 리가 그 역할에 신체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애틀랜타에서의 탈출이나 스칼렛이 양키 탈영병을 죽이는 장면과 같이 용기와 결의를 보이는 장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했다.[52] 리는 1939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54] 클라크 게이블의 렛 버틀러 역 연기에 대해 플린과 누전트는 미첼의 개념과 가장 가까운 인물 묘사라고 평가했지만,[52][50] 홀레링은 게이블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51]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멜라니 역 연기는 "돋보이는" 배우로 지목되었고, 누전트는 "우아하고, 위엄 있고, 부드러운 인물 묘사의 보석"이라고 묘사했다.[51][52][50] 해티 맥대니얼의 매미 역 연기는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누전트는 그녀가 비비안 리 다음으로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했다고 평가했고,[50] 플린은 리와 게이블의 연기에 이어 세 번째로 좋은 연기라고 평가했다.[52]
해티 맥대니얼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여 최초의 흑인 오스카 수상자가 되었다.[61] 하지만, 시상식이 열린 앰배서더 호텔은 흑인 출입 금지를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맥대니얼은 특별히 허가된 흑인 손님으로 입장해야 했다.[61] 그녀와 에스코트는 방 뒤편의 별도 테이블에 앉도록 강요받았다.[61]
제1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카데미상 수상 및 후보 지명 횟수 신기록을 세웠다.[55][56] 총 13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어 8개 부문(작품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미술상, 편집상)에서 수상했으며, 장비 및 컬러 활용에 대한 2개의 명예상을 추가로 받았다.[55][56]
상 | 수상자(들) | 결과 | |||
---|---|---|---|---|---|
작품상 |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 ||||
감독상 | 빅터 플레밍 | ||||
남우주연상 | 클라크 게이블 | ||||
여우주연상 | 비비안 리 | ||||
여우조연상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
해티 맥대니얼 | |||||
각색상 | 시드니 하워드}} | ||||
음악상 | 맥스 스타이너 | (Samuel Goldwyn Studio Sound Department) | |||
기술상 | 돈 머스그레이브와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에서 조정된 장비 사용을 개척한 공로 |
흑인 사회에서는 영화 개봉 이후 흑인 묘사와 노예 제도 문제의 "미화"에 대해 비판했다.[62] 칼튼 모스는 공개 서한에서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이 "미국 역사와 흑인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던 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같은 대상에 대한 후면 공격"이라고 지적하며, 이 영화를 "남부 반동 세력의 여전히 살아있는 대의를 위한 향수 어린 동정심 호소"라고 묘사했다.[63] 멜빈 B. 톨슨은 "''국가의 탄생''은 너무나 노골적인 거짓말이어서 바보라도 간파할 수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너무나 미묘한 거짓말이어서 수백만 명의 백인과 흑인 모두 진실로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썼다.[64]
개봉 당시 흑인 사회의 여론은 크게 엇갈렸다. 일부에서는 이 영화를 "흑인 미국에 대한 테러의 무기"이자 흑인 관객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했고,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열렸다.[61] 말콤 엑스는 나중에 "버터플라이 맥퀸이 연기를 할 때, 나는 카펫 아래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고 회상했다.[6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흑인 사회는 맥대니얼의 업적을 진보의 상징으로 인식했다.[61]
1970년대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아서 M. 슐레징거 주니어는 할리우드 영화가 일반적으로 시간이 지나도 잘 유지되며 예상치 못한 깊이 또는 완전성을 드러낸다고 믿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우 시간이 그것을 좋게 다루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91] 리처드 쉬켈은 영화의 질을 측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시청자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묻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 영화는 이 점에서 실패한다고 주장했다.[92] 스탠리 카우프만 또한 이 영화를 대부분 잊을 수 있는 경험으로 여겼다.[93] 쉬켈과 슐레징거는 모두 이것을 "서투르게 쓰여졌다"는 점으로 돌리며, 대사를 "화려한" 그리고 "엽서 같은" 감각을 지닌 것으로 묘사했다.[91][92] 쉬켈은 또한 이 영화가 재시청 가치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대중 예술로서 실패한다고 믿는다.[92]
앤드류 사리스는 예술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제작된 가장 사랑받는 오락"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94] 주디스 크리스트는 이 영화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여전히 할리우드 조립 라인에서 나온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오래가는 대중 오락"이라고 평가했다.[95]
이 영화에 대한 비평적 인식은 그 후 몇 년 동안 바뀌었는데, 그 결과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의 10년 단위 비평가 설문조사에서 235위를 차지했고,[102] 2015년 BBC가 조사한 62명의 국제 영화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미국 영화 중 97위로 평가했다.[96]
{{인용구 상자
| title = AFI 100년… 시리즈
| source = 미국 영화 연구소[90]
| quote =
- AFI 100년…100 영화 – 4위
- AFI 100년…100 열정 – 2위
- AFI 100년…100 영화 명대사:
- * "솔직히 말해서, 내가 신경 쓰지 않아." – 1위
- * "어쨌든, 내일은 또 다른 날이야!" – 31위
- * "하느님이 증인이시라면, 저는 다시는 굶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 59위
- AFI 100년의 영화 음악 – 2위
- AFI 100년…100 환호 – 43위
- AFI 100년…100 영화 (10주년 기념판) – 6위
- AFI 10대 10대 영화 – 4위 서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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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 논란과 재평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개봉 당시부터 흑인 묘사와 노예 제도 문제의 "미화"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62] 흑인 극작가 칼튼 모스는 공개 서한에서 이 영화가 "남부 반동 세력의 여전히 살아있는 대의를 위한 향수 어린 동정심 호소"라고 비판했다.[63] 흑인 사회의 여론은 엇갈렸는데, 일부는 영화를 "흑인 미국에 대한 테러의 무기"로 규정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61] 반면, 해티 맥대니얼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은 흑인 사회에서 진보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61][63] 그러나 미국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는 맥대니얼을 엉클 톰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61]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 시작했다. 아서 M. 슐레징거 주니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의 깊이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가했고,[91] 리처드 쉬켈은 잊을 수 없는 이미지와 대화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92] 스탠리 카우프만 역시 대부분 잊을 수 있는 경험이라고 평가했다.[93]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디스 크리스트는 이 영화가 "할리우드 조립 라인에서 나온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오래가는 대중 오락"이라고 평가했다.[95]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종 및 노예 제도 묘사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 2017년에는 오르페움 극장에서 상영이 중단되었고,[112][113] 2020년에는 HBO Max에서 일시적으로 삭제되었다가 역사적 맥락에 대한 해설과 함께 다시 서비스되었다.[117] HBO Max 대변인은 이 영화가 "당시의 산물"이며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편견"을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117] 영화의 삭제는 정치적 올바름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영화 평론가들과 역사가들은 HBO가 검열에 가담했다고 비판했다.[118]
이 영화는 남북전쟁 신화와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영속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07]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영화 속 흑인 노예들이 대부분 충실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며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지적했다.[65] 이 영화는 흑인 강간범 신화와 재건 시대의 쿠 클럭스 클랜의 명예롭고 방어적인 역할을 조장하는 "퇴행"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08]
부부 강간을 묘사한 장면은 비판을 받았는데,[123][124] 강압적인 성관계에 대한 개념을 강화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27] 그러나 일부 여성 관객들은 이 장면을 로맨스 판타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128]
일본 제국에서는 태평양 전쟁 이전에 수입되었으나 "반전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되지 못했다.[150] 그러나 상하이 등지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50]
영화 속 대사인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솔직히 말해서, 내가 신경 쓰지 않아)"[181]는 미국 영화 명대사 베스트 100 1위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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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I 100년…100 영화 –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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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직히 말해서, 내가 신경 쓰지 않아." – 1위
- * "어쨌든, 내일은 또 다른 날이야!" – 3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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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I 10대 10대 영화 – 4위 서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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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 문화적 영향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 개봉 이후 수많은 매체에서 언급, 풍자, 극화, 분석되어 왔다.[107][129][130] 스칼릿 오하라 역 배우 선정을 다룬 1980년 TV 드라마 《스칼릿 오하라 전쟁》,[131] 벤 헥트의 각본 재작업을 극화한 론 허친슨의 2007년 희곡 《달빛과 목련》,[132] 영화를 패러디한 《캐롤 버넷 쇼》의 스케치 "바람과 함께 가다!(Went with the Wind!)"[17] 등은 대중문화 속에서 이 영화의 지속적인 존재감을 보여준다. 1988년에는 영화의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전설의 제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제작되었다.[133] 1990년 미국 우편청은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의 포옹 장면을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134]마가렛 미첼은 속편 요청에 쇄도했지만, 스칼렛과 렛트의 운명에 대한 생각이 없다며 거절했다.[17] 미첼 사후, 1994년에 알렉산드라 리플리의 소설 스칼렛을 바탕으로 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스칼렛''이 제작되었다. 조앤 왈리와 티모시 달튼이 각각 스칼렛과 렛트 역을 맡아 스칼렛이 아일랜드로 거처를 옮기는 이야기를 그린다.[136]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영화로 꼽히며, 비디오 시대 이전에는 "세계 어딘가에서 상영되지 않는 날이 없다"고까지 일컬어졌다.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지구의 자전과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항상 지구상 어딘가에서 쉬지 않고 영원히 상영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렛 버틀러가 스칼렛에게 남긴 마지막 대사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솔직히 말해서, 상관없어)[181]은 미국 영화 명대사 베스트 100 1위에 선정되었다. 당시 금지어였던 "damn"을 사용하기 위해 셀즈닉은 미국 영화 협회에 5000달러의 벌금을 냈다.[144][145]
유럽에서는 1940년에 개봉되었으며, 런던의 리츠 시네마에서는 4년 29주간 상영되었다.[150]
태평양 전쟁 전 일본에서는 "반전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었지만, 상하이 등지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훌륭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50] 극작가 키쿠타 카즈오는 상하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고, 영화 평론가 노구치 히사미츠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작품을 만든 미국과 전쟁을 한다니 정신 나간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1975년 텔레비전 방영 이후, 영화 평론가 미즈노 하루오는 시청자로부터 영화 속 대사 "내일에 희망을 걸고!"가 자살을 결심했던 가족을 구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185] 미즈노는 이 편지를 읽고 "어떤 어려운 이론을 말하는 예술 영화보다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영화야말로 영원한 걸작"이라고 말했다.[185]
2020년 미니애폴리스 반인종차별 시위 당시, 워너 미디어의 정액제 동영상 배포 서비스 "HBO Max"는 이 영화의 배포를 일시 중지했다가,[186][187][188] 해설 영상[189][190]을 추가한 후 재개했다.[189][191]
7. 수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제12회 아카데미상에서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8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55][56] 작품상, 감독상(빅터 플레밍), 여우주연상(비비언 리), 여우조연상(해티 맥대니얼), 각색상(시드니 하워드/Sidney Howard영어), 촬영상(컬러)( 어니스트 홀러/Ernest Haller영어와 레이 레나한/Ray Rennahan영어), 미술상(라이얼 휠러), 편집상(할 C. 칸과 제임스 E. 뉴컴)을 수상했다. 특히 해티 맥대니얼은 흑인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남우주연상 후보에는 클라크 게이블이, 여우조연상 후보에는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음악상(맥스 스타이너), 음향상(토머스 T. 몰턴), 시각효과상(잭 코스그로브/Jack Cosgrove (special effects artist)영어, 프레드 알빈/Fred Albin영어, 아서 존스/Arthur Johns영어) 부문에도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영화 제작에 기여한 공로로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William Cameron Menzies영어에게 특별상이, 돈 머스그레이브와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에게 기술상이 수여되었다.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어빙 G. 탈버그 상을 수상했다.
상 | 수상자(들) | 결과 |
---|---|---|
작품상 |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 수상 |
감독상 |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 | 수상 |
남우주연상 |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 | 후보 |
여우주연상 | 비비언 리(Vivien Leigh) | 수상 |
여우조연상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Olivia de Havilland) | 후보 |
해티 맥대니얼(Hattie McDaniel) | 수상 | |
각색상 | 시드니 하워드/Sidney Howard영어(Sidney Howard) | 수상 |
미술상 | 라이얼 R. 휠러(Lyle R. Wheeler) | 수상 |
촬영상(컬러) | 어니스트 홀러/Ernest Haller영어(Ernest Haller)와 레이 레나한/Ray Rennahan영어(Ray Rennahan) | 수상 |
편집상 | 할 C. 칸(Hal C. Kern)과 제임스 E. 뉴컴(James E. Newcom) | 수상 |
음악상 | 맥스 스타이너(Max Steiner) | 후보 |
음향상 | 토머스 T. 몰턴(Thomas T. Moulton)(Samuel Goldwyn Studio Sound Department) | 후보 |
시각효과상 | 잭 코스그로브/Jack Cosgrove (special effects artist)영어(Jack Cosgrove), 프레드 알빈/Fred Albin영어(Fred Albin)과 아서 존스/Arthur Johns영어(Arthur Johns) | 후보 |
명예상 |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William Cameron Menzies영어(William Cameron Menzies)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에서 극적인 분위기를 강화하기 위해 컬러를 탁월하게 활용한 공로 | 명예상 |
기술상 | 돈 머스그레이브(Don Musgrave)와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에서 조정된 장비 사용을 개척한 공로 | 명예상 |
'''제5회 뉴욕 영화비평가 협회상'''
- 수상
: 여우주연상:비비언 리
- 후보
: 작품상
: 감독상:빅터 플레밍
'''내셔널 보드 오브 리뷰상'''
- 수상
: 톱 10 영화
: 연기상:비비언 리
'''포토플레이상'''
- 수상
: 명예상:데이비드 O. 셀즈닉
'''미국 국립 영화등기부'''
- 등재(1989년)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 수상(1989년)
: Favorite All-Time Motion Picture
'''DVD Exclusive Awards'''
- 후보(2005년)
: 종합 베스트 DVD, 클래식 부문:워너
'''새틀라이트상'''
- 수상(2009년)
: 최우수 종합 DVD:70주년 기념 버전
- 후보(2009년)
: 최우수 클래식 DVD:70주년 기념 버전
'''미국 영화 연구소 지정'''
- 1998 AFI's 100년... 100대 영화 #4
- 2002 AFI's 100년... 100대 열정 #2
- 2005 AFI's 100년... 100대 영화 인용:
- * "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1
- *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31
- * "As God is my witness, I'll never be hungry again!" #59
- 2005 AFI's 100년 영화평점 #2
- 2006 AFI's 100년... 100대 환호 #43
- 2007 AFI's 100년... 100대 영화 (10th Anniversary Edition) #6
- 2008 AFI's 10 Top 10 #4 서사 영화
7. 1. 제12회 아카데미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제12회 아카데미상에서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8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55][56] 작품상, 감독상(빅터 플레밍), 여우주연상(비비언 리), 여우조연상(해티 맥대니얼), 각색상(시드니 하워드/Sidney Howard영어), 촬영상(컬러)( 어니스트 홀러/Ernest Haller영어와 레이 레나한/Ray Rennahan영어), 미술상(라이얼 휠러), 편집상(할 C. 칸과 제임스 E. 뉴컴)을 수상했다.[144] 특히 해티 맥대니얼은 흑인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151]남우주연상 후보에는 클라크 게이블이, 여우조연상 후보에는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음악상(맥스 스타이너), 음향상(토머스 T. 몰턴), 시각효과상(잭 코스그로브/Jack Cosgrove (special effects artist)영어, 프레드 알빈/Fred Albin영어, 아서 존스/Arthur Johns영어) 부문에도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영화 제작에 기여한 공로로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William Cameron Menzies영어에게 특별상이, R. D. 매스그레이브에게 기술상이 수여되었다.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어빙 G. 탈버그 상을 수상했다.
1940년 2월 29일, 제1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가 수상자 명단을 미리 발표하는 사태로 인해, 이후 시상식에서 봉인된 봉투를 사용하는 시스템이 채택되는 계기가 되었다.
상 | 수상자(들) | 결과 | |
---|---|---|---|
작품상 |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 ||
감독상 |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 | ||
남우주연상 |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 | ||
여우주연상 | 비비언 리(Vivien Leigh) | ||
여우조연상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Olivia de Havilland) | ||
해티 맥대니얼(Hattie McDaniel) | |||
각색상 | 시드니 하워드}}(Sidney Howard) | ||
미술상 | 라이얼 R. 휠러(Lyle R. Wheeler) | (Ray Rennahan) | |
편집상 | 할 C. 칸(Hal C. Kern)과 제임스 E. 뉴컴(James E. Newcom) | ||
음악상 | 맥스 스타이너(Max Steiner) | ||
음향상 | 토머스 T. 몰턴(Thomas T. Moulton)(Samuel Goldwyn Studio Sound Department) | (Arthur Johns) | |
기술상 | 돈 머스그레이브(Don Musgrave)와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에서 조정된 장비 사용을 개척한 공로 |
7. 2. 기타 수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다섯 개 이상의 아카데미상을 차지한 최초의 작품이다. 당시 17개의 경쟁작이 출품되었고, 이 작품은 13번째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스테이지코치》에 동시에 출연한 토머스 미첼에게 남우조연상을 주지 않았고, 최우수 음악상도 다른 곳에 돌아갔다. 2011년 3월 22일 방영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화”에서 Best In Film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도 선정되었다.이 영화는 10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8개의 정기상, 1개의 명예상, 1개의 기술상)
'''제12회 아카데미상'''
- 수상
: 작품상: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감독상:빅터 플레밍
: 여우주연상:비비안 리
: 여우조연상:해티 맥대니얼
: 각색상:시드니 하워드/Sidney Howard영어
: 촬영상(컬러):어니스트 홀러/Ernest Haller영어、레이 레나한/Ray Rennahan영어
: 미술상:라이얼 휠러
: 편집상:할 C. 칸、제임스 E. 뉴컴
: 특별상:윌리엄 캐머런 멘지스/William Cameron Menzies영어(극적인 색채 사용에 대해)
: 기술상:R. D. 매스그레이브(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에서 조정된 장비 사용의 선구자에게)
- 후보
: 남우주연상:클라크 게이블
: 여우조연상: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음악상:맥스 스타이너
: 시각효과상:잭 코스그로브/Jack Cosgrove (special effects artist)영어、프레드 알빈/Fred Albin영어、아서 존스/Arthur Johns영어
: 음향상:토머스 T. 몰턴
'''제5회 뉴욕 영화비평가 협회상'''
- 수상
: 여우주연상:비비안 리
- 후보
: 작품상
: 감독상:빅터 플레밍
'''내셔널 보드 오브 리뷰상'''
- 수상
: 톱 10 영화
: 연기상:비비안 리
'''포토플레이상'''
- 수상
: 명예상:데이비드 O. 셀즈닉
'''미국 국립 영화등기부'''
- 등재(1989년)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 수상(1989년)
: Favorite All-Time Motion Picture
'''DVD Exclusive Awards'''
- 후보(2005년)
: 종합 베스트 DVD, 클래식 부문:워너
'''새틀라이트상'''
- 수상(2009년)
: 최우수 종합 DVD:70주년 기념 버전
- 후보(2009년)
: 최우수 클래식 DVD:70주년 기념 버전
'''미국 영화 연구소 지정'''
- 1998 AFI's 100년... 100대 영화 #4
- 2002 AFI's 100년... 100대 열정 #2
- 2005 AFI's 100년... 100대 영화 인용:
- * "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1
- *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31
- * "As God is my witness, I'll never be hungry again!" #59
- 2005 AFI's 100년 영화평점 #2
- 2006 AFI's 100년... 100대 환호 #43
- 2007 AFI's 100년... 100대 영화 (10th Anniversary Edition)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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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動画サービスが『風と共に去りぬ』配信停止 人種差別理由に
https://www.afpbb.co[...]
AFP通信
2020-06-10
[188]
웹사이트
映画「風と共に去りぬ」を配信停止 人種差別表現めぐり
https://www.asahi.co[...]
2020-06-11
[189]
웹사이트
「風と共に去りぬ」配信再開 奴隷制の問題、冒頭に追加
https://www.asahi.co[...]
2020-06-25
[190]
웹사이트
米HBO、「風と共に去りぬ」配信を再開 時代背景の説明を添付
https://jp.reuters.c[...]
2020-06-25
[191]
웹사이트
HBO Max Restores ‘Gone With the Wind’ With Disclaimer Saying Film ‘Denies the Horrors of Slavery’
https://variety.com/[...]
2020-06-24
[192]
기타
[19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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