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볼라 사이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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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 볼라 사이클론은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 해안에 상륙한 강력한 사이클론으로, 기록상 가장 치명적인 열대 저기압이자 현대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이다. 이 사이클론은 최대 풍속 185km/h, 중심 기압 960hPa로 발달했으며, 약 6m 높이의 폭풍 해일로 인해 360만 명 이상이 피해를 입고 최소 30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사이클론 발생 이후 파키스탄 정부의 미흡한 대처는 동파키스탄의 불만을 고조시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재해 이후 방글라데시는 사이클론 경보 시스템과 대피 시설을 개선하고 국제 협력을 통해 재난 대비 시스템을 강화했으며, 기후 변화에 따른 사이클론 발생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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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볼라 사이클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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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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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일 | 1970년 11월 8일 |
소멸일 | 1970년 11월 13일 |
인도 기상청 정보 | |
최대 풍속 | 100 m/s |
최저 기압 | 960 hPa |
합동 태풍 경보 센터 정보 | |
최대 풍속 | 130 m/s |
영향 | |
연도 | 1970년 |
피해액 | 86,400,000 달러 |
사망자 수 | 300,000–500,000명 (기록상 가장 치명적인 열대 사이클론) |
영향 지역 | 동파키스탄 및 인도 |
시즌 정보 | |
시즌 | 1970년 북인도양 사이클론 시즌 |
사이클론 이름 | |
한국어 | 1970년 볼라 사이클론 |
일본어 | 1970年ボーラ・サイクロン |
최대 풍속 (일본어) | |
최대 풍속 | 57 m/s |
최대 풍속 (두번째) | 67 m/s |
최저 기압 (일본어) | |
최저 기압 | 966 hPa |
피해액 (일본어) | |
피해액 (1970년) | 86,400,000 미국 달러 |
피해액 (2019년 화폐 가치 환산) | 569,290,000 미국 달러 |
사이클론 종류 (일본어) | |
사이클론 종류 | 열대 사이클론 |
사이클론 등급 | cat3 |
인명 피해 (일본어) | |
사망자 수 | 30만–50만 명이 사망 (역사상 최악의 사이클론 피해) |
영향 지역 (일본어) | |
영향 지역 | 인도, 동파키스탄 |
사이클론 정보 (일본어) | |
활동 기간 | 1970년 11월 7일 ~ 11월 13일 |
사이클론 종류 (한국어) | |
사이클론 종류 | 열대 |
해역 | 북인도양 |
최대 풍속 (한국어) | |
3분 최대 풍속 | 100 m/s |
1분 최대 풍속 | 115 m/s |
인명 피해 (한국어) | |
사망자 수 | 30만~50만 명 |
2. 발생 및 경로
1970년 11월 1일,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노라 열대폭풍은 11월 4일 태국만에서 소멸하였으나, 잔여물이 11월 8일 벵골만에서 새로운 열대 저기압의 발달에 기여했다.[9][10] 이 저기압은 북상하며 점차 발달하여, 인도 기상청은 11월 9일에 열대성 저기압으로 상향 조정했다.[11] 11월 11일에는 심각한 사이클론으로 발달하여 뚜렷한 눈이 형성되었고, 최대 풍속 185km/h, 중심 기압 960hPa에 도달하며 최성기를 맞았다.[12] 11월 12일 저녁, 사이클론은 동파키스탄 (현 방글라데시) 해안에 상륙했다.[11] 상륙 당시 지역 만조와 겹쳐 약 6m 높이의 폭풍 해일이 발생하여 델타 지대의 섬들에 거주하던 벼 수확 노동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71] 사이클론은 상륙 후 약화되기 시작했지만, 11월 13일에도 인도 아가르탈라 남남동쪽 100km 지점에서 사이클론의 세력을 유지했다.[72] 이후 급속히 약화되어 11월 13일 저녁 아삼 주 남부에서 소멸했다.[11][72]
1970년 11월 12일, 치타공 기상 관측소는 시속 144km의 강풍을 기록했고, 항구에 정박한 선박은 시속 222km의 돌풍을 기록했다.[10] 벵골 만에서는 10m 높이의 폭풍 해일이 발생했으며, 치타공 항구에서는 평균 해수면보다 4m나 높은 해일이 덮쳤다.[10][23]
3. 피해 상황
파키스탄 라디오는 치타공 인근 13개 섬에서 생존자가 없다고 보도했고,[24] 항공 촬영 결과 몰라 섬 남쪽 절반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 확인되었다.[24] 몰라 섬, 하티아 섬 등지의 벼농사 지대가 파괴되었고,[24] 치타공과 몽글라 항의 여러 해상 선박, 치타공과 콕스바자르 공항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25]
360만 명 이상이 사이클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총 피해액은 8,640만 달러(2024년 기준 7억 100만 달러)로 추산된다.[26] 특히 해안가 지역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주택의 85%가 파괴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85] 어업 부문에서는 어선 9,000척이 파괴되고 어부 7만 7천 명 중 4만 6천 명이 사망하는 등, 지역 어업 생산량의 65%가 파괴되었다.[10] 농업 부문에서도 6,300만 달러 상당의 농작물과 가축 28만 마리가 손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10]
폭풍 이후 3개월 동안, 인구의 75%가 구호 식량을 지원받았고, 15만 명 이상이 식량의 절반을 지원에 의존했다.[86] 또한, 수질 오염으로 인해 콜레라와 장티푸스 발생률이 증가했다.[27] 파키스탄-SEATO 콜레라 연구소는 두 차례 의료 구호 조사를 실시하여[87] 피해 지역의 의료 지원 필요성을 파악하고 장기적인 구호 및 복구 계획을 수립했다.[87] 조사 결과, 사망률은 14.2%에서 16.5% 사이로 추정되었으며,[88][90] 특히 타주무딘 우파질라에서는 46.3%의 사망률을 기록했다.[90] 10세 미만 어린이의 사망자 수가 전체 사망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여,[91] 어린이, 노인, 병약자가 사이클론과 폭풍 해일에 가장 취약했음이 드러났다.[91]
북인도양은 열대 저기압 분지 중 가장 활동이 적지만, 벵골 만 연안은 열대 저기압의 영향에 특히 취약하다. 볼라 사이클론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폭풍으로 인해 최소 30만 명이 사망했으며, 최대 50만 명에 달할 수도 있다.[3][10][4]
볼라 사이클론은 기록상 가장 치명적인 열대 저기압이며, 현대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자연 재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파키스탄-SEATO 콜레라 연구소는 두 차례의 의료 구호 조사를 실시했는데, 첫 번째 조사는 11월에, 두 번째 조사는 2월과 3월에 이루어졌다. 첫 번째 조사의 목적은 피해 지역의 긴급 의료 지원 필요성을 파악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조사는 더욱 자세하게 장기적인 구호 및 복구 계획의 기초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두 번째 조사에서는 해당 지역 인구의 약 1.4%를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
첫 번째 조사 결과, 피해 지역 대부분의 지표수는 우물에서 끌어올린 물과 비슷한 염분 함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다람 지역의 물은 염분 함량이 최대 0.5%에 달해 거의 마실 수 없었다. 사망률은 14.2%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24만 명의 사망자 수에 해당한다. 사이클론 관련 질병은 대체로 경미한 부상에 국한되었지만, "사이클론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이는 생존자들이 폭풍 해일을 견디기 위해 나무에 매달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지와 가슴의 심한 찰과상이었다. 초기에는 폭풍 후 몇 주 동안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조사 결과 폭풍 피해 지역에서 콜레라, 천연두 또는 기타 질병의 유행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 번째 조사 결과는 쌀 수확을 하는 10만 명의 이주 노동자, 폭풍으로 인해 완전히 가족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지난 석 달 동안 지역 밖으로 이주한 사람들 등 여러 집단이 포함되지 않아 상당한 과소평가일 가능성이 높다. 조사 결과, 전체 사망자 수는 최소 22만 4천 명이었다. 가장 큰 피해는 타주무딘에서 발생했는데, 사망률이 46.3%에 달했고, 이는 해당 타나에서만 약 7만 7천 명의 사망자 수에 해당한다. 피해 지역 전체의 평균 사망률은 16.5%였다.
결과는 15~49세 성인 남성의 생존율이 가장 높았고,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사이클론 이전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했던 10세 미만의 어린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어린이, 노인, 그리고 병든 사람들이 사이클론과 폭풍 해일로 인해 사망할 위험이 가장 높았음을 시사한다. 폭풍 후 몇 달 동안 중년층의 사망률은 사이클론 피해 지역보다 다카 근처의 대조군 지역에서 더 낮았다. 이는 폭풍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음을 반영한다.우파질라 이전 인구 사망자 수 사망률 칼라파라 (Kalapara) 88,000명 8,000명 9% 암탈리 (Amtali) 41,000명 2,000명 5% 갈라치파 (Galachipa) 319,000명 45,000명 14% 차르 파손 (Char Fasson) 171,000명 38,000명 22% 랄모한 (Lalmohan) 104,000명 23,000명 22% 타주무딘 (Tazumuddin) 167,000명 77,000명 46% 하티야 (Hatiya) 219,000명 18,000명 8% 람가티 (Ramgati) 217,000명 24,000명 11% 사다르 (Noakhali Sadar) 35,000명 6,000명 17% 합계 1,361,000명 241,000명 17.7%
3. 1. 방글라데시 (동파키스탄)
1970년 11월 12일, 치타공 기상 관측소는 시속 144km의 강풍을 기록했고, 항구에 정박한 선박은 시속 222km의 돌풍을 기록했다.[10] 벵골 만에서는 10m 높이의 폭풍 해일이 발생했으며, 치타공 항구에서는 평균 해수면보다 4m나 높은 해일이 덮쳤다.[10][23]
파키스탄 라디오는 치타공 인근 13개 섬에서 생존자가 없다고 보도했고,[24] 항공 촬영 결과 몰라 섬 남쪽 절반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 확인되었다.[24] 몰라 섬, 하티아 섬 등지의 벼농사 지대가 파괴되었고,[24] 치타공과 몽글라 항의 여러 해상 선박, 치타공과 콕스바자르 공항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25]
360만 명 이상이 사이클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총 피해액은 8,640만 달러(2024년 기준 7억 100만 달러)로 추산된다.[26] 특히 해안가 지역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주택의 85%가 파괴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85] 어업 부문에서는 어선 9,000척이 파괴되고 어부 7만 7천 명 중 4만 6천 명이 사망하는 등, 지역 어업 생산량의 65%가 파괴되었다.[10] 농업 부문에서도 6,300만 달러 상당의 농작물과 가축 28만 마리가 손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10]
폭풍 이후 3개월 동안, 인구의 75%가 구호 식량을 지원받았고, 15만 명 이상이 식량의 절반을 지원에 의존했다.[86] 또한, 수질 오염으로 인해 콜레라와 장티푸스 발생률이 증가했다.[27] 파키스탄-SEATO 콜레라 연구소는 두 차례 의료 구호 조사를 실시하여[87] 피해 지역의 의료 지원 필요성을 파악하고 장기적인 구호 및 복구 계획을 수립했다.[87] 조사 결과, 사망률은 14.2%에서 16.5% 사이로 추정되었으며,[88][90] 특히 타주무딘 우파질라에서는 46.3%의 사망률을 기록했다.[90] 10세 미만 어린이의 사망자 수가 전체 사망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여,[91] 어린이, 노인, 병약자가 사이클론과 폭풍 해일에 가장 취약했음이 드러났다.[91]
3. 2. 인도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 광범위한 강우를 가져왔으며, 11월 8일부터 9일까지 곳곳에 매우 많은 비가 내렸다.[11][72] 포트 블레어는 11월 8일에 130mm의 강우량을 기록했고, 여러 곳에서 홍수가 발생했다.[11][72] 서벵골과 아삼 남부에서도 광범위한 강우가 있었다.[11][72] 이 비로 인해 두 주 모두에서 주택과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으며, 가장 큰 피해는 최남단 지역에서 발생했다.[11] 콜카타에서 쿠웨이트로 향하던 5,500톤급 화물선인 MV 마하자그미트라(Mahajagmitra)호는 11월 12일 폭풍으로 침몰하여 선원 50명 전원이 사망했다.[11][28] 이 배는 침몰하기 전에 조난 신호를 보내고 허리케인급 강풍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11][28]
4. 원인 분석
4. 1. 자연적 요인
4. 2. 사회적 요인
1970년 당시 동파키스탄은 인도-파키스탄 간의 마찰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13] 인도와 동파키스탄 기상 당국 간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며,[13] 많은 인구가 폭풍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다.[14]동파키스탄의 폭풍 경보 시스템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으며,[15] 파키스탄 기상청은 11월 12일 취약한 해안 지역에 "위험 대비"를 촉구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폭풍이 해안에 접근함에 따라 파키스탄 라디오에서 "심각한 위험 신호"가 방송되었으나, 생존자들은 이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고 말했다.[16]
1960년 10월 동파키스탄에서 최소 16,000명의 사망자를 낸 두 차례의 파괴적인 사이클론 이후,[17] 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재난 대비 시스템을 개발하고자 했다. 당시 국립 허리케인 센터 소장이었던 고든 던은 1961년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중앙 정부는 던이 제시한 모든 권고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다.[13]
인도 정부는 벵골 만의 선박으로부터 사이클론에 관한 기상 정보를 수신했지만, 인도-파키스탄 관계 악화로 인해 파키스탄 정부가 이 정보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73] 현지 주민 대다수는 속수무책으로 폭풍에 휘말렸으며,[74] 기상 경보 시스템은 적절하게 운영되지 않아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75] 파키스탄 기상청은 11월 12일 피해 예상 지역에 "위험 대비"를 촉구했고, 파키스탄 라디오는 "중대한 위험 신호"를 방송했지만, 생존자들은 고조에 대한 경고는 없었고 주민들도 인식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76] 해당 지역 주민 90%가 사이클론 접근을 인지했지만, 피난 시설로 대피한 사람은 1%에 불과했다.
1960년 10월, 동파키스탄에서 최소 1만 6천 명의 사망자를 낸 두 개의 사이클론 발생 이후,[77] 파키스탄 정부는 미국에 재해 대비 시스템 구축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 해양대기국 산하 국립 허리케인 센터 소장 고든 던은 상세한 연구를 실시하여 1961년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정부는 던의 권고를 모두 실행하지 않았다.[73]
5. 당시의 대응과 한계
5. 1. 파키스탄 정부의 대응
폭풍이 해안을 강타한 다음 날, 파키스탄 군정(gunboat) 3척과 병원선 1척이 의료진과 물자를 싣고 치타공에서 하티아, 산드위프, 쿠투브디아 섬으로 출발했다.[25] 파키스탄 육군(Pakistani Army) 팀은 사이클론 상륙 후 이틀 만에 많은 피해 지역에 도착했다.[30] 야히아 칸 대통령은 중국 방문 후 귀국길에 동파키스탄을 방문하여 피해 지역을 항공 시찰하고 구호 활동을 독려했으며, 재난 발생 일주일 후인 11월 21일을 전국적인 애도의 날로 선포하고 모든 깃발을 반기로 게양하도록 명령했다.[94][95]그러나 구호 활동은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사이클론 발생 후 10일 동안 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구호 활동에 군용 수송기 1대와 농약 살포기(crop-dusting) 3대를 배정했다.[33] 중앙 정부는 인도 정부가 인도 영토 통과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파키스탄(West Pakistan)에서 군용 헬리콥터를 이전할 수 없다고 밝혔으며, 인도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29] 이로 인해 구호 물품 수송 및 배분 과정에서 지연과 혼선이 발생했다. 야히아 칸은 구호 활동에서 정부에 "작은 사고"와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한계 내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31][92] 그는 재난의 규모에 대한 오판이 있었다고 말했다.[92]
동파키스탄의 정치 지도자들은 중앙 정부의 초기 대응에 대해 심각한 비판을 가했다. 폭풍이 지난 10일 후 동파키스탄 정치인 11명이 발표한 성명서에서는 정부를 "심각한 태만, 무관심, 완전한 무관심"으로 비난했다.[34] 11월 19일, 학생들은 다카에서 정부의 대응 속도에 항의하는 행진을 벌였고,[38] 마울라나 압둘 하미드 칸 바샤니는 11월 24일 5만 명의 군중 앞에서 집회를 열어 대통령의 무능력을 비난하고 사퇴를 요구했다.[35] 아와미 연맹 지도자 방반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사이클론으로 인한 파괴를 "홀로코스트"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고 군사 정권의 대응을 "범죄적 과실"이라고 비난했다.[39]
파키스탄 적십자사는 영국 적십자사가 기증한 뗏목 20척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인해 중앙 정부와 무관하게 운영되기 시작했다.[40] 한 살충제 회사는 이미 국내에 있던 농약 살포기 2대에 대한 허가를 받기 위해 이틀을 기다려야 했다.[16]
''파키스탄 옵서버''는 1971년 1월, 구호 기관에서 제공한 텐트가 생존자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새 집을 짓기 위한 보조금이 불충분하다고 보도했다. 또한 "구호 조정 없음"과 같은 제목의 1면 기사를 정기적으로 게재하며 정부의 구호 활동을 비판했다.[41] 동파키스탄에서 가장 추운 시기인 1월에 ''이테파크''의 편집장이 이끄는 국가 구호 및 재건위원회는 폭풍으로 인해 수천 명의 생존자가 "하늘 아래에서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41]
1971년 3월,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간의 갈등이 고조됨에 따라 구호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두 정부 기관의 다카 사무소는 총파업과 아와미 연맹에 의한 동파키스탄 정부 업무 금지로 최소 2주 동안 폐쇄되었다. 현장에서는 구호 활동이 계속되었지만 장기 계획은 축소되었다.[36]
5. 2. 국제사회의 지원
1970년 볼라 사이클론 피해 복구를 위해 인도, 미국, 영국, 캐나다, 소련, 중국, 일본 등 여러 국가가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45][48][41][54][106][109][98] 특히 인도는 양국 간의 좋지 않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지원을 제공한 국가 중 하나였다.[45] 미국은 1,000만 달러의 보조금과 함께 담요, 텐트 등 구호 물품을 지원하고 헬리콥터를 파견했다.[48][49] 영국 해군은 Intrepid와 Triumph를 중심으로 한 작전 부대를 파견하여 헬리콥터와 상륙정을 이용해 구호 활동을 지원했다.[48][35]국제 연합, 유니세프, 적십자사 연맹 등 국제기구도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45][55][56] 세계 은행은 피해 지역 재건을 위한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57][58]
CARE는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물자 배분 방식에 대한 우려로 지원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40] 파키스탄 정부의 대응 지연과 미국 의회의 지원금 지급 지연 등 여러 문제점도 있었다.[36]
5. 3. 한국의 지원
6. 정치적 영향과 방글라데시 독립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볼라 사이클론에 대한 중앙 정부의 부실한 대응과 구호 노력에 대한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실망감에 기인한 바가 컸다.[42][43][104] 볼라 사이클론의 부실한 대처와 그 파괴적인 여파로 인해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의 좌파 정당들은 1970년 파키스탄 총선을 보이콧했다.[42] 폭풍으로 인해 9개의 국회 의석과 18개의 주 의회 의석에 대한 선거는 1월 18일까지 연기되어야 했다.[43][104]
중앙 정부의 구호 노력은 동파키스탄의 불만을 더욱 악화시켜 저항 운동을 확대시켰다.[36] 자금 지원이 더디게 이루어졌고, 피해 지역으로의 물자 수송도 느렸다.[36][105] 1971년 3월 긴장이 고조되면서 폭력에 대한 우려로 외국인들이 대피했다.[36] 이러한 상황은 3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고, 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방글라데시가 건국되었다.[105] 이는 자연재해가 내전을 초래한 한 예이다.[105]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그 후 학살로 이어졌다.[44]
6. 1. 동파키스탄의 불만 고조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볼라 사이클론에 대한 중앙 정부의 부실한 대응과 구호 노력에 대한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실망감에 기인한 바가 컸다.[42][43][104] 폭풍으로 인해 9개의 국회 의석과 18개의 주 의회 의석에 대한 선거는 1월 18일까지 연기되어야 했다.[43][104]중앙 정부의 구호 노력은 동파키스탄의 불만을 더욱 악화시켜 저항 운동을 확대시켰다.[36] 자금 지원이 더디게 이루어졌고, 피해 지역으로의 물자 수송도 느렸다.[36][105] 1971년 3월 긴장이 고조되면서 폭력에 대한 우려로 외국인들이 대피했다.[36] 이러한 상황은 3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고, 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방글라데시가 건국되었다.[105] 이는 자연재해가 내전을 초래한 한 예이다.[105]
6. 2.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발발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배경에는 볼라 사이클론에 대한 부실한 대처가 있었다.[42] 이로 인해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의 좌파 정당들은 총선을 보이콧했다.[42] 폭풍으로 인해 연기되었던 9개의 국회 의석과 18개의 주 의회 의석에 대한 선거는 1월 18일에 치러졌다.[43]중앙 정부의 더딘 구호 노력은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고, 저항 운동을 확대시켰다.[36] 1971년 3월, 긴장이 고조되면서 외국인들이 대피했고,[36] 상황은 1971년 방글라데시 학살로 이어졌다.[44]
정부의 구호 활동 부실은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반정부 운동이 활발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105] 3월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무력 충돌을 우려한 외국인들이 해외로 탈출했고,[105] 상황은 악화되어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105] 이 전쟁은 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방글라데시가 건국되었다.[105] 이는 자연재해가 내전을 초래한 한 예이다.[105]
7. 교훈과 현재의 노력
7. 1. 재난 대비 시스템 강화
1970년 볼라 사이클론 이후, 방글라데시는 사이클론 경보 시스템과 대피 시설을 개선했다.[60][121] 1966년 적신월사는 사이클론 경보 시스템 개발을 지원하기 시작했고,[121] 이는 1972년 방글라데시 정부와 방글라데시 적신월사가 운영하는 사이클론 대비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60][121] 이 프로그램은 사이클론 위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해안 지역 응급 구조대원들에게 훈련을 제공한다.[60][121]1970년 사이클론 이후 30년 동안 방글라데시 해안 지역에는 200개가 넘는 사이클론 대피소가 건설되었다.[61][122] 1991년 방글라데시 사이클론 발생 시, 사이클론 대비 프로그램 자원봉사자들은 상륙 2~3일 전에 주민들에게 사이클론을 경고했다.[61][62][122]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떠나 대피소와 다른 벽돌 구조물로 피난했고, 다른 사람들은 고지대로 피신했다.[61][62][122] 1991년 사이클론으로 13만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지만, 이는 사이클론 대비 프로그램이 발송한 경고 덕분에 1970년 폭풍보다 훨씬 적었다.[61][62][122]
유엔총회는 재해를 입은 국가에 대한 원조 제공 능력을 향상시키는 제안을 채택했다.[120]
7. 2. 국제 협력의 중요성
국제적십자적신월사연맹은 1970년 11월 볼라 사이클론과 유사한 재해가 다른 “재해 취약 국가”를 강타할 경우에 대비한 긴급 계획을 수립했다. 적십자 관계자는 동파키스탄에 파견된 일부 구호대원들이 훈련 부족이었다고 언급하며, 해당 기구는 전문가 명단을 다시 작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엔총회는 피해국에 대한 구호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제안을 채택했다.[120]1966년, 적신월사는 벵골 삼각주 주민들을 위해 사이클론 경보 시스템 구축을 지원하기 시작했다.[121] 11월 20일 유엔총회는 파키스탄 정부에 대한 동정을 표명하고, 유엔 전문기구, 각국 정부 및 비정부기구의 파키스탄에 대한 단기 구호와 장기적인 복구·개발 지원을 결의했다. 이는 1972년 대사이클론 준비 계획(Cyclone Preparedness Programme)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방글라데시 정부와 방글라데시 적신월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 계획의 목적은 일반 시민들의 사이클론에 대한 위험 인식을 향상시키고, 방글라데시 연안 지역의 재난 대응 요원에 대한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다.[121]
1970년 사이클론 이후 30년 동안 방글라데시 연안에는 200개가 넘는 사이클론 대피소가 건설되었다. 1991년 방글라데시 사이클론이 상륙했을 때, 대사이클론 준비 계획의 자원봉사자들은 상륙 2~3일 전에 주민들에게 경고를 발령했다.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택에서 대피소나 기타 석조 건축물로 대피했고, 나머지는 고지대로 대피했다. 1991년 사이클론은 13만 8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지만, 이는 1970년에 비해 훨씬 적은 수치이며, 그 이유 중 일부는 대사이클론 준비 계획 덕분일 것이다.[122]
7. 3. 지속적인 노력의 필요성
기후 변화로 인해 강력한 사이클론 발생 빈도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취약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재난 대비 및 대응 노력이 필요하다.[120][121] 특히, 취약 계층에 대한 보호와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1966년, 적신월사는 벵골 삼각주 주민들을 위해 사이클론 경보 시스템 구축을 지원하기 시작했다.[121] 1970년 12월, 국제적십자적신월사연맹은 이번 사이클론과 유사한 재해가 다른 “재해 취약 국가”를 강타할 경우에 대비한 긴급 계획을 수립했다.[120] 적십자 관계자는 동파키스탄에 파견된 일부 구호대원들이 훈련 부족이었다고 언급하며, 해당 기구는 전문가 명단을 다시 작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엔총회는 피해국에 대한 구호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제안을 채택했다.[120] 11월 20일 유엔총회는 파키스탄 정부에 대한 동정을 표명하고, 유엔 전문기구, 각국 정부 및 비정부기구의 파키스탄에 대한 단기 구호와 장기적인 복구·개발 지원을 결의했다.[121]
1970년 사이클론 이후 30년 동안 방글라데시 연안에는 200개가 넘는 사이클론 대피소가 건설되었다.[122] 이는 1972년 대사이클론 준비 계획(Cyclone Preparedness Programme)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방글라데시 정부와 방글라데시 적신월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121] 1991년 방글라데시 사이클론이 상륙했을 때, 대사이클론 준비 계획의 자원봉사자들은 상륙 2~3일 전에 주민들에게 경고를 발령했다.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택에서 대피소나 기타 석조 건축물로 대피했고, 나머지는 고지대로 대피했다. 1991년 사이클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3만 8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지만, 이는 1970년에 비해 훨씬 적은 수치이며, 그 이유 중 일부는 대사이클론 준비 계획 덕분일 것이다.[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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