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영국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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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9년 영국 총선은 1974년 총선 이후 노동당 소수 정부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분노의 겨울"로 불린 노사 분규, 그리고 불신임 투표 가결로 인해 조기 실시되었다.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경제 문제 해결과 노조 권력 축소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선거 운동을 펼쳤고, 노동당은 국민보건서비스 유지와 완전 고용을 강조했다. 선거 결과 보수당이 과반수를 확보하며 승리했고, 마거릿 대처는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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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영국 총선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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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1979년 영국 총선 |
국가 | 영국 |
선거 유형 | 의회 선거 |
이전 선거 | 1974년 10월 영국 총선 |
이전 선거 연도 | 1974년 10월 |
다음 선거 | 1983년 영국 총선 |
다음 선거 연도 | 1983년 |
선거일 | 1979년 5월 3일 |
투표율 | 76.0% (3.2%p) |
개표 결과 | 보수당: 339석 노동당: 269석 자유당: 11석 |
선거 결과 | |
총 의석수 | 635석 |
과반 의석수 | 318석 |
유권자 수 | 41,095,649명 |
투표율 | 75.97% |
선거 전/후 정권 | |
선거 전 총리 | 제임스 캘러헌 |
선거 전 정당 | 노동당 |
선거 후 총리 | 마거릿 대처 |
선거 후 정당 | 보수당 |
보수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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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마거릿 대처 |
대표 취임일 | 1975년2월 11일 |
대표 선거구 | 핀칠리 |
이전 선거 의석수 | 277석 |
획득 의석수 | 339석 |
의석 변화 | 62석 |
득표수 | 13,697,923표 |
득표율 | 43.9% |
득표율 변화 | 8.1%p |
노동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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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제임스 캘러헌 |
대표 취임일 | 1976년4월 5일 |
대표 선거구 | 카디프 남동부 |
이전 선거 의석수 | 319석 |
획득 의석수 | 269석 |
의석 변화 | 50석 |
득표수 | 11,532,218표 |
득표율 | 36.9% |
득표율 변화 | 2.3%p |
자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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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데이비드 스틸 |
대표 취임일 | 1976년7월 7일 |
대표 선거구 | 록스버러, 셀커크, 피블스 |
이전 선거 의석수 | 13석 |
획득 의석수 | 11석 |
의석 변화 | 2석 |
득표수 | 4,313,804표 |
득표율 | 13.8% |
득표율 변화 | 4.5%p |
기타 | |
해산일 | 1979년 4월 7일 |
공시일 | 1979년 4월 7일 |
선거 제도 | 단순 소선거구제 |
선거 전 의석수 (보수당) | 282 |
선거 전 의석수 (노동당) | 306 |
선거 전 의석수 (자유당) | 14 |
2. 배경
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단 1석 차이로 간신히 과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어진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면서 과반수를 잃게 되었다. 해럴드 윌슨 수상의 뒤를 이어 취임한 제임스 캘러헌 수상은 자유당과의 연정을 통해 정부를 유지했다. 1978년 10월까지 노동당의 지지율은 이전 총선보다 하락했지만, 보수당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캘러헌 수상은 세금 감면과 함께 다음 해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전망으로 선거를 1년 늦추는 결정을 내렸다.[2]
하지만 '불만의 겨울'이라고 불린 그해 겨울, 전국적으로 파업이 이어지면서 노동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마저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문제로 지지를 철회하자, 의회는 선거를 5개월 앞두고 단 1표 차이(311:310)로 내각 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결국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다.[2]
불신임 투표가 통과되면서 제임스 캘러헌 수상은 총선을 위해 의회 해산을 발표해야 했다. 주요 날짜는 다음과 같다.
날짜 | 내용 |
---|---|
4월 7일 (토) | 의회 해산(제47대 의회) 및 선거운동 공식 시작; 635석을 놓고 2,576명의 후보자가 출마 |
5월 2일 (수) | 선거운동 공식 종료 |
5월 3일 (목) | 투표일 |
5월 4일 (금) | 보수당이 43석의 과반수로 집권 |
5월 9일 (수) | 제48대 의회 개원 |
5월 15일 (화) | 국회 개회식 |
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1석 차이로 겨우 과반을 차지했지만, 이후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여 과반수를 잃었다. 해럴드 윌슨 수상에 이어 취임한 제임스 캘러헌 수상은 자유당과의 연정을 통해 정부를 유지했다. 1978년 10월까지 노동당의 지지율은 하락했지만 보수당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캘러헌 수상은 세금 감면과 이듬해 불황 극복 전망을 이유로 선거를 1년 늦췄다.[2]
마거릿 대처는 1975년 보수당 당권 경쟁에서 에드워드 히스를 누르고 승리하여, 1975년 2월 보수당 지도자가 되었다. 히스는 10년 동안 당을 이끌었지만, 출마한 네 번의 선거 중 세 번을 패배했다.
데이비드 스틸은 1976년 자유당 당수 제러미 소프를 대신했다. 소프는 동성애 혐의와 전 애인을 살해 음모 혐의로 인해 사임했다. 토프 사건은 1974년 2월 총선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던 자유당의 득표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3. 선거 운동
하지만 '분노의 겨울'이라 불리는 1978년 겨울부터 1979년 겨울까지 전국적으로 파업이 이어지면서 노동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SNP)마저 1978년 스코틀랜드 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의회는 1979년 3월 28일 1표 차이(311:310)로 내각 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결국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다.[2]
노동당은 복지와 고용 문제를, 보수당은 2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경제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내세웠다. 자유당은 전 대표였던 제레미 소프가 동성애 의혹과 그로 인한 연인 살해 의혹으로 사임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3]
1959년 이후 처음으로 주요 정당의 새 지도자 3명이 경쟁하는 선거였다. 세 정당 모두 소득세 감면을 주장했지만, 자유당만이 소득세 최저세율 20%, 최고세율 50%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3]
전직 노동당 의원이자 방송인인 브라이언 월든은 주요 정당 대표들에게 텔레비전 토론을 제안했다. 제임스 캘러헌은 즉각 수락했지만, 마거릿 대처는 "며칠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결국 대처는 선거가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토론을 거절했고, 토론은 무산되었다.[4][5]
3. 1. 정당별 공약
1979년 영국 총선에서는 주요 정당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경쟁했다. 각 정당은 경제, 사회, 노동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약을 제시했다.
브라이언 월든이 주요 정당 대표들에게 텔레비전 토론을 제안했으나, 마거릿 대처는 선거가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여 무산되었다.[5]
3. 1. 1. 보수당
마거릿 대처는 1974년 10월 총선 패배 4개월 후인 1975년 2월, 전임 지도자 에드워드 히스를 누르고 보수당 당권 경쟁에서 승리하여 당 지도자가 되었다. 히스는 10년 동안 당을 이끌었지만 출마한 네 번의 선거 중 세 번을 패배했다.[2]
보수당은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선거 운동을 벌이며 인플레이션 억제와 증가하는 노조의 권력 축소(대규모 파업을 지지하는 노조)를 약속했다. 또한 "노동당은 일하지 않는다(Labour Isn't Working)" 포스터를 제작한 광고 회사 새치 앤 새치(Saatchi & Saatchi)를 고용했다.
보수당의 선거 운동은 이전에 보수당에 투표한 적이 없는 전통적인 노동당 유권자, 초선 유권자, 그리고 1974년 자유당에 투표했던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데 집중되었다. 대처의 자문관인 고든 리스(Gordon Reece)와 티모시 벨(Timothy Bell)은 ''더 선''의 편집장인 래리 램과 발표 내용을 조율했다. ''더 선''은 레지 프렌티스(Reg Prentice), 리처드 마쉬, 조지 브라운 경(Lord George-Brown), 알프레드 로번스(Alfred Robens), 챌폰트 경(Lord Chalfont) 등 실망한 전직 노동당 장관들이 대처 지지로 전환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는 일련의 기사를 실었다. 대처는 카디프(Cardiff)에서 선거 운동을 시작하면서 노동당이 극단적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노동당 유권자들에게 명시적으로 지지를 요청했다.[7] 강력한 노동당 지지 도시에서 선거 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것은, 노동당과 보수당 모두 이전에 확실한 노동당 유권자로 여겼던 숙련된 육체 노동자(NRS 사회 계층 C2)에게 호소하려는 대처의 전략 중 일부였다. 그녀는 이들 중 많은 수가 노조의 권력을 줄이고 주택 매입권(Right to Buy)을 제정한다는 그녀의 약속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9년 4월 29일, 보수당은 런던에서 보수당 노조원들을 위한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글래스고 헤럴드(Glasgow Herald)''는 이 집회를 "놀라운 집회"라고 부르며 "미국 대통령 스타일 잔치의 호들갑"에 비유했고, "영국 총선에서 이와 같은 것은 전에 없었다"고 말했다. 룰루, 몰리 위어(Molly Weir), 나이젤 데이븐포트(Nigel Davenport)를 포함한 여러 유명인사들이 대처와 보수당을 지지하기 위해 등장했고, 에릭 사이크스(Eric Sykes)와 레스 도슨(Les Dawson)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지지 메시지를 보냈다. 또한 전 노동당 국회의원 에디 그리피스가 전 당에 맞서 보수당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8]
선거 결과 분석 결과, 보수당은 숙련된 노동 계급(C2)에서 11%, 비숙련된 노동 계급(DE)에서 9%의 지지율 변화를 얻었다.
1970년대 후반 대처의 이민에 대한 입장(1950년대와 1960년대 아시아와 아프리카-카리브해 국가들에서의 대규모 이민 이후)은 고조되는 인종차별적인 공론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야당 대표로서 대처는 국민전선(NF)이 이민자들의 범람에 대한 경고로 많은 수의 보수당 유권자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전략은 NF의 주장을 약화시키기 위해 많은 NF 유권자들이 해결해야 할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국민전선은 비교적 소규모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고 의회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대처는 1978년 1월 노동당의 이민 정책을 비판하여 NF로부터 보수당으로 유권자를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녀의 수사는 NF를 희생하여 보수당 지지율 증가로 이어졌다. 좌파 비평가들은 그녀를 인종차별에 아첨했다고 비난했다. 사회학자 마크 미첼과 데이브 러셀은 대처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반박하며 인종이 대처리즘(Thatcherism)의 중요한 초점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양대 정당 모두 이민 정책에 대해 유사한 입장을 취했고, 1981년 영국 국적법을 초당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녀의 정부는 이민을 제한하기 위한 정책을 통과시키거나 제안하지 않았고, 인종 문제는 총리로서 그녀의 주요 연설에서 결코 강조되지 않았다. 대처는 이민과 관련된 문제를 포함하여 NF 유권자들이 느끼는 우려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고, 총리직 초기에 불만스러운 인종 관계 기간을 주재했지만, 그녀의 지도부 아래 보수당은 1983년 총선을 앞두고 적극적으로 소수 민족 유권자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9]
크리스 패튼(Chris Patten)과 아담 리들리(Adam Ridley)이 초안을 작성하고 앵거스 모드(Angus Maude)가 편집한 보수당의 선거 공약은 1979년 4월 11일에 발표되었다. 이 공약은 다섯 가지 주요 정책을 약속했다.
#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노동 조합 운동의 권리와 의무 사이에 공정한 균형을 맞춤으로써 우리 경제 및 사회 생활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 "열심히 일하는 것이 보상되고 성공이 보상되며 확장되는 경제에서 진정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도록 유인책을 복원하기 위해"
# "의회와 법치를 수호하기 위해"
# "사람들이 주택 소유자가 되도록 돕고, 자녀 교육 수준을 높이고, 복지 서비스를 노인, 병자, 장애인, 그리고 실제로 필요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가족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 "영국의 방위를 강화하고 동맹국들과 협력하여 점점 더 위협적인 세계에서 우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10]
3. 1. 2. 노동당
제임스 캘러헌은 1976년 4월 해롤드 윌슨의 갑작스러운 사임 이후 노동당 총리가 되었다. 1977년 3월까지 노동당은 두 번의 보궐선거 패배로 1974년 10월 선거에서 얻었던 3석의 과반수를 잃고 소수 정부가 되었다. 1977년 3월부터 1978년 8월까지 캘러헌은 자유당과의 자유-노동 협약을 통해 정부를 운영했다. 캘러헌은 1978년 가을 총선을 치르는 것을 고려했지만,[2] 곧 있을 감세와 1979년 경제 회복 가능성이 여론조사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총선을 다음 해로 미루었다. 발표된 여론조사는 그가 승리할 수 있음을 시사했지만, 노동당이 MORI에 의뢰한 비공개 여론조사는 두 주요 정당의 지지율이 거의 비슷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곧 사건들이 노동당 정부를 압도했고, 캘러헌의 총선 연기 결정이 큰 실수였음을 증명했다. 1978년 겨울부터 1979년 겨울까지 "분노의 겨울"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노사 분규로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파업이 발생하여 노동당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고 보수당 야당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이 1978년 스코틀랜드 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불신임 투표가 실시되었고, 1979년 3월 28일 한 표 차이로 가결되어 캘러헌은 총선을 치러야 했다. 이전 총선이 1974년 10월에 치러졌으므로, 불신임 투표가 없었다면 노동당은 1979년 가을까지 집권할 수 있었다.
1959년 이후 처음으로 주요 정당의 새 지도자 3명이 등장한 선거였다. 세 주요 정당은 모두 소득세 감면을 주장했다. 노동당과 보수당은 구체적인 소득세 기준을 명시하지 않았다.[3]
캘러헌은 대놓고 마거릿 대처의 성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크리스천 캐릴이 나중에 쓴 것처럼) "야당 대표가 말하는 것은 여자가 말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 어리석게 들린다는 것을 비꼬는 데 능숙했다".
전직 노동당 의원이자 방송인인 브라이언 월든이 주요 두 정당 대표가 텔레비전 토론 두 차례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이 토론은 LWT에서 제작하여 ITV에서 1979년 4월 22일과 29일에 방영될 예정이었다. 제임스 캘러헌은 월든의 제안을 즉각 수락했지만, 마가렛 대처는 초대에 대한 답변을 "며칠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글래스고 헤럴드''에 따르면, 대처의 일부 고문들은 그녀가 이러한 토론에서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고 우려하여, 정책 문제가 덜 중요해지는 "대통령식 '그녀 또는 나' 선거 운동"으로 이어질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거절의 위험은 대처가 노동당으로부터 수상과의 대결을 "두려워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4] 자유당의 주장으로 그들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스틸도 LWT로부터 참여하도록 초대받았고,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대처는 선거가 대통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토론 참여 제안을 거절했고, 따라서 토론은 열리지 않았다.[5]
노동당 선거운동은 국민보건서비스와 완전 고용에 대한 지지를 거듭 확인하고, 보수당이 국가에 입힐 것이라고 믿는 피해에 초점을 맞췄다. 초기 선거 방송에서 캘러헌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여러분이 고려해야 할 질문은 우리가 모든 것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노동당 선거운동이 끝날 무렵, 캘러헌은 보수당 정부가 "세계 불황 속에서 기업들이 파산하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그냥 방관할 것이며", 보수당은 "너무 큰 도박"이라고 주장했다.
노동당의 선거 공약집인 ''노동당 방식이 더 나은 방식''은 4월 6일에 발표되었다.[6] 캘러헌은 다음 5가지 우선순위를 제시했다.3. 1. 3. 자유당
1976년 데이비드 스틸은 동성애 혐의와 전 애인을 살해 음모 혐의로 인해 사임한 제러미 소프를 대신하여 자유당 당수가 되었다. 소프 사건은 1974년 2월 총선에서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여겨졌던 자유당의 득표율 하락으로 이어졌다.[3]
세 주요 정당 중 자유당은 소득세 최저세율 20%, 최고세율 50%를 적용하겠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했다.[3]
자유당의 주장으로 그들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스틸도 LWT로부터 텔레비전 토론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고, 제안을 수락했다.[5]
4. 선거 결과
정당 | 의석수 |
---|---|
보수당 | 339 |
노동당 | 269 |
자유당 | 11 |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 5 |
스코틀랜드 국민당 | 2 |
웨일스당 | 2 |
사회민주노동당 | 1 |
통합 얼스터 연방주의자당 | 1 |
얼스터민중연맹당 | 1 |
무소속 | 1 |
합계 | 635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보수당 | 13,697,923 | 43.9% |
노동당 | 11,532,218 | 36.9% |
자유당 | 4,313,804 | 13.8% |
스코틀랜드 국민당 | 504,259 | 1.6% |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 254,578 | 0.8% |
국민전선 | 191,719 | 0.6% |
웨일스당 | 132,544 | 0.4% |
사회민주노동당 | 126,325 | 0.4% |
북아일랜드연합당 | 182,892 | 0.3% |
밴가드연맹진보당 | 92,262 | 0.3% |
민주연합당 | 70,795 | 0.2% |
환경당 | 39,918 | 0.1% |
통합 얼스터 연방주의자당 | 39,856 | 0.1% |
얼스터민중연맹 | 36,989 | 0.1% |
공산당 | 16,858 | 0.1% |
1979년 영국 총선에서 5.2%의 득표율 변동은 1945년 이후 최대 규모였다.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43석의 과반 의석을 확보하여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1979년 보수당의 승리는 1997년 노동당 승리 이전까지 18년간 지속된 보수당 집권의 시작을 알렸으며, 15년 만에 네 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후 영국 정치에 안정기를 가져왔다. 보수당은 이후 1983년 영국 총선, 1987년 영국 총선에서 대처 총리 하에, 그리고 2019년 영국 총선에서 보리스 존슨 총리 하에 더 많은 의석을 얻었지만, 1979년의 43.9% 득표율은 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지지율 급락으로 11석 중 9석을 잃었다. 자유당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으며, 스캔들에 휘말렸던 제러미 소프 전 당수는 노스데번에서 보수당에 의석을 내주었다.
5. 영향
1979년 총선에서 5.2%의 득표율 변동은 1945년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 선거를 통해 마가렛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43석의 다수당을 확보하며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1979년 보수당의 승리는 1997년 노동당의 승리까지 18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1980년대 전체를 포함한다. 이는 15년 만에 네 번의 정권 교체가 있었던 후 영국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시기를 나타낸다. 보수당은 1983년과 1987년에 대처 총리 집권 하에, 그리고 보리스 존슨 총리 집권 하에 2019년에 더 많은 의석을 얻었지만, 1979년에 기록한 43.9%의 득표율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선거는 야당이었던 보수당이 전체 다수당을 차지한 가장 최근의 선거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은 지지율 급락으로 11명의 국회의원 중 9명을 잃었다. 자유당은 실망스러운 선거 결과를 맞이했으며, 스캔들에 휘말렸던 전 당수 제러미 소프는 노스데번에서 보수당에 의석을 내주었다.
대규모 노동조합 파업으로 영국 사회가 마비되었던 “불만의 겨울” 직후 실시된 총선거에서 하원의 노동당 캘러헌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근소한 차이로 가결(1979년 3월 28일)되었다. 이 총선거에서 노동당은 마가렛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 패배하였고, 대처는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이후 노동당은 1997년까지 18년 이상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6. 평가
캘러핸은 1976년 4월 해롤드 윌슨의 갑작스러운 사임 이후 노동당 총리가 되었다. 1977년 3월, 노동당은 보궐선거 패배로 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서 얻었던 3석의 과반수를 잃고 소수 정부가 되었다. 1977년 3월부터 1978년 8월까지 캘러핸은 자유당과의 자유-노동 협약을 통해 정부를 운영했다.[2] 캘러핸은 1978년 가을 총선을 고려했지만, 곧 있을 감세와 1979년 경제 회복 가능성이 여론조사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총선을 다음 해로 미루었다.[2]
그러나 1978년 겨울부터 1979년 겨울까지 "분노의 겨울"이라 불리는 일련의 노사 분규로 전국적인 파업이 발생하여 노동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1978년 스코틀랜드 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불신임 투표가 실시되었고, 1979년 3월 28일 한 표 차이로 가결되어 캘러핸은 총선을 치러야 했다.
마거릿 대처는 1975년 보수당 당권 경쟁에서 에드워드 히스를 누르고 당 지도자가 되었다. 히스는 10년 동안 당을 이끌었지만 출마한 네 번의 선거 중 세 번을 패배했다.
데이비드 스틸은 제러미 토프의 사임 이후 1976년 자유당 당수가 되었다. 토프 사건은 1974년 2월 영국 총선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던 자유당의 득표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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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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