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식 중폭격기는 1941년 일본 육군의 요구로 개발된 미쓰비시의 중폭격기이다. 튼튼한 기체와 우수한 방어 무장, 급강하 폭격 능력, 긴 항속 거리를 특징으로 하며, 97식 중폭격기의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동체를 길게 하고 팽창형 방향타를 채택했다. Ki-67-I을 주력으로 다양한 파생형이 존재하며, 수평 폭격, 어뢰 폭격, 특공 공격 등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육군 항공대의 주력 폭격기로 활약했으나, 종전과 함께 635기가 생산된 후 잔존 기체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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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식 중폭격기
개요
1945년 구마모토 공항 겐군 비행장에 있는 제170 폭격 비행대의 미쓰비시 Ki-67
유형
중형 폭격기
제작 국가
일본
제작사
미쓰비시 항공기
최초 비행
1942년 12월 27일
도입
1944년 10월
퇴역
1945년 8월
주요 운용국
일본 제국 육군 항공대
기타 운용국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
생산 대수
767대
파생형
미쓰비시 Q2M
명칭
별칭
(히류)
참고 사항
2. 개발 배경 및 특징
Ki-67은 1941년 일본 육군이 나카지마 Ki-49 "폭풍룡"의 후계기를 요구하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 만주-시베리아 국경에서 소련과의 분쟁 가능성에 대비하여 고속 쌍발 중폭격기로 설계되었으며, 우수한 방어 무장과 전투 손상에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요구되었다.[1][2] 또한 급강하 폭격 공격을 수행하고 저고도로 탈출할 수 있도록 기동성이 뛰어나야 했다.[1][2]
Ki-67은 미쓰비시의 수석 엔지니어인 오자와 규노조가 이끄는 팀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전금속 구조의 중익 단엽기로, 접이식 꼬리바퀴 착륙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자동 밀폐 연료 탱크와 장갑이 장착되었는데,[2][3] 이는 미국 전투기 및 폭격기에서는 흔했지만 일본 항공기에서는 부족한 특징이었다. 18기통 공랭식 왕복 엔진 2개를 갖춘 Ki-67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튼튼하고 손상에 강한 일본 항공기 중 하나였다.
Ki-67의 폭탄 탑재량은 1,070 kg (2,360 lb)으로 내부 폭탄창에 탑재되었으며, 이는 미국 기준으로는 중폭격기에 해당한다. 고속 다이빙에서 뛰어난 기동성, 우수한 지속 상승률, 그리고 뛰어난 기민성(우수한 선회율, 작은 선회 반경, 저속에서도 선회 가능)을 보였다. Ki-67의 기동성은 매우 뛰어나서 일본은 이 설계를 야간 전투기로 설계된 미쓰비시 Ki-109 쌍발 엔진 전투기의 기반으로 사용했으며, 이후에는 주간 중전투기로도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일본 해군은 이 설계를 레이더를 장착한 Mitsubishi Q2M1 "''타이요''" 대잠수함전 항공기의 기반으로도 사용했다.
Ki-67의 무장에는 20 mm (.79 in) Ho-5 기관포를 장착한 상부 포탑과 함께 꼬리, 기수 및 빔 위치에 12.7 mm (.50 in) Ho-103 기관총이 포함되었다.
항공 격멸전에 적합한 97식 중폭격기 (키21) 이후의 중폭격기에 대한 운용 사상에서, 본 기 역시 중폭으로 칭해지면서 동시대 · 동클래스의 다른 국가의 기체와 비교해 폭탄 탑재량은 낮지만, 강력한 엔진에 의한 양호한 비행 성능, 급강하 폭격에 견디는 기체 강도, 장대한 항속 거리에 의해 대전 후기 실전 투입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4식 중폭격기(키67)
전후, 미국군에 접수되어 동국군의 국적 표식이 그려진 4식 중폭격기(키67). 왼쪽은 육군 항공대의 P-51
2. 1. 특징 (일본어 위키에서 추가)
97식 중폭격기의 결점이었던 종 안정성 불량을 개선하기 위해, 후방 동체를 길게 하여 주익과 수평 꼬리 날개 사이의 간격을 넓혔다.[7] 팽창형 방향타 면(단면을 두껍게 한 방향타)에 의해 작은 방향타가 잘 작동했으며,[10][11] 운동 성능은 단발기 수준이라고 평가되었고, 폭탄을 탑재하지 않은 상태라면 곡예 비행도 가능하다고 했다. 중폭격기임에도 불구하고 급강하 폭격용 급강하 속도계가 장비되어 600km/h 이상을 나타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프로펠러는 스미토모 금속이 독일 VDM사로부터 라이선스 생산권을 얻은 전동식 거버너를 갖춘 정속 4엽 프로펠러가 선정되었다. 긴 항속 거리를 가진 것이 장점 중 하나였으며, 미쓰비시 설계진은 1식 육상 공격기의 경험을 Ki-67 설계에 담았다.
방어 무장은 97식 중폭, 100식 중폭보다 강화되어, 호5 20mm기관포 1문(후상방 포탑), 호103 12.7mm 기관포 4문(기수, 좌우 동체, 미부)을 장비했다. 방탄 장비는 조종석, 사수석에 16mm 두께의 방탄 강판, 조종석 전면에 12mm 두께 방탄 강판, 윈드실드에 70mm 두께의 방탄 유리를 설치했다. 연료 탱크는 방화 대책으로 자동 방루 연료 탱크 및 액층 소화 장치를 갖추었다.
3. 운용
Ki-67은 수평 폭격과 어뢰 폭격에 사용되었다(기체 하부에 어뢰 1기를 장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 육군 및 해군 항공대가 타이완과 류큐 열도에 대한 공격에서 미국 제3함대를 상대로 사용했다. 이후 오키나와, 중국 본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가라후토, 사이판과 티니안의 B-29 폭격기 비행장에 사용되었다.
일본의 항복을 지켜본 기체가 되었다. 4식 중폭격기는 패전 직후, 참모 차장가와베 토라시로][중장을 필두로 하는 항복 전권단이 필리핀에서 연합군과 회담하여 최고 지휘관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한 항복 요구 문서를 수령하고, 연합군의 진주 상세 및 전군 무장 해제를 중앙에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8월 20일, 오키나와의 이에지마에서 해군의 1식 육공의 파생형・1식 대형 육상 수송기 (녹십자 기)로 도쿄로 비행하던 중 시즈오카현의 덴류강 하구에서 기체 불량으로 불시착했다. (전권단은 지역 주민에 구조) 그 대체로 인근의 하마마츠 육군 비행장에 있던 4식 중폭격기를 급거 사용했기 때문에 (21일 아침에 출발하여 조후 육군 비행장에 무사히 도착) 4식 중폭격기는 일본의 항복을 지켜본 기체가 되었다.
4식 중폭격기는 중점 생산 기종이 되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을 고려한 분할 제조 방식이 채용되었다. 생산은 오부 비행장의 미쓰비시 중공업 지타 공장뿐만 아니라 가카미가하라 비행장의 가와사키 항공기 기후 공장 등에서 행해졌지만, 일본 본토 공습의 격화로 인해 각지의 군수 공장이 차례로 괴멸되었고, 동해 난카이 지진에 의한 주쿄 공업 지대의 괴멸 및 공장의 소산 등의 혼란으로 제조는 진척되지 않아, 종전까지 생산된 것은 635기였다.
Ki-67 ''74-148'' (제74 비행 전대 소속). (마쓰모토 비행장, 일본, 1945년.)
3. 1. 운용 (일본어 위키에서 추가)
일본 육군 항공대는 연합군 함정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력이 필요했기에, 4식 중폭격기는 항공 어뢰를 탑재하는 뇌격기로도 사용되었다.[14]
1944년 1월, 육군은 미쓰비시에 생산 중인 4식 중폭격기 100기에 뇌격 장비를 탑재하도록 명령했다. 451호기 이후 기체는 후방의 12.7mm 기관포가 쌍열로 변경된 을형(키67을)이 되었다.[15]
육군 뇌격대 훈련은 도요하시 해군 항공대와 하마마츠 육군 비행 학교에서 실시되었다. 1944년 10월 대만 해전을 시작으로, 필리핀 전투, 규슈 해전,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해군 지휘하에 운용된 육군 뇌격대가 출격하여 4식 중폭격기는 주력으로 활약했다.[16]
해군에서는 해군 지휘하의 육군 뇌격대를 "야스쿠니 부대"라고 불렀고, 4식 중폭격기 "비룡"을 "'''야스쿠니'''"라는 명칭으로 불렀지만, 이는 비공식적인 통칭이었다.
1944년 12월, 비행 제7전대기가 가토리 해군 비행장에서 출격하여 사이판 섬 야간 폭격을 했다. 1945년 2월에는 비행 제110전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를 상대로 야간 폭격을 성공시켰다.
1944년 봄, 육군은 4식 중폭격기를 특공기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17] 1945년 4월에 완성된 특공 폭탄 "벚꽃탄"은 4식 중폭격기에 장착되어 오키나와 전투에 사용되었다.[21][22]
4. 파생형
'''Ki-67-I''': 시제품.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장착한 여러 모델 19대가 생산되었다.
'''Ki-67-Ia "히류" 육군 4식 중폭격기 1형''': 주력 생산 모델이다. 대다수(420대 이상)가 육상 기반 어뢰 폭격기로 공장에서 개조되었다. 미쓰비시에서 587대, 가와사키에서 91대, 타치카와 제1 육군 조병창에서 1대가 생산되었다.
'''Ki-67-Ib''': 후기 생산 모델로, 꼬리 기관총 포탑이 강화되어 2 × 20mm 기관포가 장착되었다.
'''Ki-67-I KAI''': 미쓰비시 Ha-104 루 엔진을 장착한 실험 모델로 3대가 생산되었다.
'''Ki-67-I AEW 변형''': 조기 경보 레이더 "타키 1 모델 II"를 장비한 기체로 1대가 생산되었다.
'''Ki-67 "토고"''': 육군 특공기 4형으로, 가미카제용 Ki-67 I의 개량형이다. 무장과 포탑이 없고, 동체 격실에 800kg 폭탄 2발을 탑재했다.
'''Ki-67 "유도 미사일 모선"''': 유도 미사일 탑재용 실험 기종으로 1대가 생산되었다.
'''Ki-67 장거리 폭격기 변형''': 날개를 넓히고 포탑을 제거한 형태. 계획만 존재했다.
'''Ki-67 지상 공격 변형''': 3개의 원격 제어 지상 발사 5 × 30° 20mm 캐논, 꼬리 위치에 20mm 방어 캐논, 측면 및 상단 위치에 13.2mm 기관총 3정, 장거리 비행을 위한 더 많은 연료 용량을 갖춘 버전이다. 특히 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B-29 기지에 대한 지상 공격을 위해 설계되었으나 계획만 존재했다.
'''Ki-67-II''': 시제품으로, Ki-67-I의 개조 버전이다. 2개의 미쓰비시 Ha-214 엔진을 장착했으며, 2대가 생산되었다.
'''Ki-67 글라이더 예인기''': 표준 Ki67-I이 테스트에서 "마나즈루"(두루미) 수송 글라이더를 견인하는 데 사용되었다.
'''"야스쿠니"''': Ki-67-I의 해군 어뢰 폭격기 버전이다.
'''Ki-69''': 중무장 호위 전투기 모델. 계획만 존재했다.
'''Ki-97''': 수송 모델. 계획만 존재했다.
'''Ki-109''': 야간 전투기 시제품 2대가 제작되었다.
'''Ki-109''': 주간 전투기 시제품으로, 기수에 고정 75mm 88식 중(重) 캐논 1문과 꼬리에 이동식 12.7mm 호-103 1형 기관총 1정을 장착했다. 2대가 생산되었다.
'''Ki-109 육군 중(重) 전투기 요격기''': 시리즈의 첫 번째 비 시제품 모델이다. 상단 및 측면 위치에 총기 위치가 없고 폭탄창 격실도 없었다.
'''Ki-112''': 나무로 제작된 폭격기 호위 전투기. 8 x 12.7mm와 1 x 20mm로 무장. 계획만 존재했다.
'''Ki-167 "사쿠라단"''': 특공 버전으로, 승무원 객실 뒤 동체에 2,900kg의 성형 작약 열화 폭탄 1개를 장착했다. 9대가 생산되었다.[4]
'''Q2M1 "타이요"''': Ki-67-I의 해군 변형으로, 대잠수함전용으로 계획되었다.
4. 1. 파생형 (일본어 위키에서 추가)
전파 경계기 탑재형: 야간 뇌격 시 탐색을 위해 타키1호전파 경계기를 장착한 기체이다. 오른쪽 날개 앞부분에 야기식 안테나를, 후방 동체 양쪽에 수파 안테나를 설치했다.[24]
전파 고도계 탑재형: 야간 뇌격 시 해수면으로부터 정확한 고도를 측정하기 위해 전파 고도계 타키13호를 장착한 기체이다. 육군 항공 심사부 비행 실험부는 이 기체가 작전 비행에 충분히 사용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제98전대장 타카하시 타로 소좌는 전파 고도계 덕분에 많은 생명을 구했다며 감사를 표했다. 육군 항공 본부에 따르면 유효 측고 거리는 200 - 20 m였으며, 제98전대에서는 숙련을 통해 400 - 10 m까지 사용 가능했다.[24]
쿠7 글라이더 예인기: 화포를 탑재 가능한 대형 군용 글라이더쿠7을 예인하기 위해 개조한 기체이다.[24]
장거리 폭격 개조형: 이오지마 함락 후, 사이판섬·테니안섬의 B-29 기지를 무착륙 폭격할 목적으로 계획된 장거리 폭격기이다. 날개 끝을 연장하고, 경량화를 위해 동체 측면 총좌를 폐지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24]
무선 유도탄 발사 모기형: 이호 1형 갑 무선 유도탄을 탑재한 사식 중폭(키67) 1944년 중반부터 개발된 대함 미사일 '''이호 1형 갑 무선 유도탄'''(키147)의 발사 및 유도 모기로 개수된 기체이다. 이호 1형 갑은 800kg 폭탄을 탄두에 갖춘 미사일(유도 장치 부착 로켓)이었다. 시험 결과 불량으로 실용화되지 못했지만, 가와사키 항공기가 개발한 이호 1형 을 무선 유도탄(키148)은 150발이 양산되었다. 이호 1형 갑/을 무선 유도탄은 원격 조종되는 무인 병기 "대함 미사일"이었다.[24]
유도 폭탄 발사 모기형: 대함 유도 폭탄 '''이호 1형 병 자동 추적 유도탄'''의 발사 모기로 개수된 기체이다. 이호 1형 병은 자동 추적식 유도 폭탄이었지만, 실험 중 종전을 맞아 실전 투입되지 못했다.[24]
"토"호기: 대함 선체 공격에 사용되는 기체로, 탄미를 절단한 해군 80번 철갑 폭탄 2발을 내장했다. 기수·등 부분 총좌 방풍을 금속제 커버로 교체하고, 승무원 수를 2~3명으로 줄였다. 기수에 착발식 신관이 장비되었으나 공기역학적으로 악영향을 줬다. 최소 15기가 개조되어 후가쿠대에 배치, 필리핀에서 실전 투입되었다.[25][26]
벚꽃탄기(키167): 벚꽃탄 탑재 특공 전용기이다. 계획 번호는 '''키167'''이며, '''육군 시제 공격기''',[27] 통칭 '''벚꽃탄기'''(사쿠라단키)로 불렸다. "벚꽃탄"은 직경 1.6m, 무게 2.9t의 대함용 대형 폭탄(먼로 효과를 의도한 성형 작약탄)이다. 기체 상부가 부풀어 오른 형태로 개조되었으며, 방어 화기 철거, 연료 감소, 승무원 4명으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기체가 너무 무거워 운동성이 저하되어 특공 공격이 곤란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9기 이상이 완성되었다.[7]
5. 제원
4식 중폭격기 제원[5]
항목
내용
승무원
8명 (정 조종사, 부 조종사, 폭격수 겸 전방 사수, 통신수, 후상방 사수, 좌측 동체 사수, 우측 동체 사수, 미부 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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