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년 안티오키아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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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26년 안티오키아 지진은 표면파 규모 Ms 7.0으로 추정되며, 18개월간 여진이 이어진 대규모 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인해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25만에서 3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도시의 많은 건물과 셀레우시아 피에리아 항구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지진 이후 발생한 화재와 사회적 혼란 속에서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누스 1세 황제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도시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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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이코 지진은 599년에 발생하여 건조물 붕괴 피해를 입었고, 쇼토쿠 태자가 지진을 예측했으며, 이마무라 아키츠네는 일본 최초의 대지진으로 평가했다.
526년 안티오키아 지진 | |
---|---|
지도 정보 | |
지진 정보 | |
이름 | 526년 안티오키아 지진 |
발생 시각 | 526년 5월 20일 ~ 29일 사이 (추정) |
발생 시간 | 오전 중 |
위치 | 동로마 제국 시기 시리아 안티오키아 인근 |
깊이 | 알려지지 않음 |
규모 | 7.0 Ms |
최대 진도 | 수정 메르칼리 진도 계급 VIII-IX |
사상자 | 250,000 ~ 300,000명 이상 |
해일 | 기록 없음 |
산사태 | 기록 없음 |
지질학적 정보 | |
단층 | 알려지지 않음 |
종류 | 알려지지 않음 |
기타 정보 | |
국가 | 동로마 제국 (현재의 튀르키예와 시리아) |
2. 지질학적 특성
안티오키아는 아프리카판, 아라비아판, 아나톨리아판 3개의 판이 만나는 삼중합점 부근에 위치하며, 사해 변환 단층, 동아나톨리아 단층, 키프로스호와 같은 주요 단층들의 영향을 받는 복잡한 지질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18][4] 이 도시는 플리오세부터 현재까지 충적 퇴적물로 채워진 아미크 분지의 일부인 안타키아 분지에 위치해 있다.[18][4] 이러한 지질학적 특성으로 인해 지난 2천 년 동안 여러 차례 큰 지진이 발생했다.[18][4]
2. 1. 위치
안티오키아는 아프리카판과 아라비아판 사이의 주 변환 단층인 사해 변환 단층 북쪽 끝, 아나톨리아판과 아라비아 판이 만나는 동아나톨리아 단층 서남쪽 끝, 아나톨리아판과 아프리카 판이 만나는 키프로스호가 합쳐지는 삼중합점 인근에 있다. 안티오키아는 아미크 분지의 일부인 안타키아분지에 있으며, 이 분지는 플리오세부터 현재까지 쌓인 충적 퇴적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2천 년간 안티오키아 지역은 여러 차례 큰 지진의 영향을 받았다.[18]2. 2. 단층
안티오키아 지역은 아프리카판과 아라비아판의 주 변환 단층인 사해 변환 단층의 북쪽 끝이자 아나톨리아판과 아라비아판이 서로 부딪히는 동아나톨리아 단층의 서남쪽 끄트머리, 아나톨리아판과 아프리카판이 서로 부딪히는 키프로스호 3개 경계가 서로 만나는 삼중합점 바로 인근에 있다. 안티오키아는 아미크 분지의 한 부분인 안타키아분지에 있는데, 이 분지는 플리오세부터 현재까지 퇴적된 충적 퇴적물로 쌓여 있다. 지난 2천년간 안티오키아 지역은 여러 차례 큰 지진의 영향을 받았다.[18]2. 3. 퇴적 분지
안티오키아 지역은 아프리카판과 아라비아판의 주 변환 단층인 사해 변환 단층의 북쪽 끝이자 아나톨리아판과 아라비아판이 서로 부딪히는 동아나톨리아 단층의 서남쪽 끄트머리, 아나톨리아판과 아프리카판이 서로 부딪히는 키프로스호 3개 경계가 서로 만나는 삼중합점 바로 인근에 있다. 안티오키아는 아미크 분지의 한 부분인 안타키아분지에 있는데, 이 분지는 플리오세부터 현재까지 퇴적된 충적 퇴적물로 쌓여 있다. 지난 2천 년간 안티오키아 지역은 여러 차례 큰 지진의 영향을 받았다.[18]3. 지진
526년 안티오키아 지진의 추정 규모는 표면파 규모 기준 Ms7.0이다.[1] 지진 직후 며칠 동안 화재가 발생하여 피해가 커졌으며, 바람의 영향으로 더욱 악화되었다.[3] 화재는 매우 격렬하여 도시 전체를 황폐화시켰다고 묘사되었다.[5]
콘스탄티누스 1세가 오론테스 강의 섬에 지은 팔각형 교회인 도무스 아우레아를 포함하여 안티오키아의 많은 건물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산 근처에 지어진 집들만이 살아남았다.[3]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유프라시우스도 술가죽 부대 제작자가 사용하던 역청 가마솥에 빠져 사망했다.[6]
셀레우시아 피에리아 항구에서는 0.7m에서 0.8m의 융기가 추정되었으며, 그 후 항구가 매립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7]
이 지진의 사망자 수는 25만 명에서 30만 명 사이로 추정되며, 예수 승천 대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주변 시골에서 온 많은 방문객이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희생자가 매우 많았다.[3][8]
지진의 영향은 지역 정부와 필수 서비스의 붕괴로 인한 무법 상태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많은 생존자들이 도시 폐허를 탈출했지만,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른 생존자나 도시 외곽에 사는 주민들에게 습격당해 소지품을 강탈당하고 살해당했다.[5]
한편, 안티오키아는 로마 제국 시대 서기 115년 12월 13일에도 규모 7.5의 대지진으로 26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황제 트라야누스도 지진으로 부상을 입었다.[14]
3. 1. 여진
지진 이후 18개월간 여진이 이어졌다.[17][3]3. 2. 진도
지진의 추정 규모는 표면파 규모 기준 Ms7.0이다.[15] 이후 18개월간 여진이 이어졌다.[17] 지진의 진도는 수정 메르칼리 진도 계급 기준 안티오키아에서 VIII-IX,[15][17] 안티오키아 교외인 다프네와 셀레우시아 피에리아는 VII로 추정된다.4. 피해
526년 안티오키아 지진은 안티오키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건물은 산 주변에 지어진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 크게 파괴되었고, 화재가 며칠 동안 계속되면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가 있던 대성당Domus Aurea (Antioch)|도무스 아우레아영어도 소실되었다. 추정 사망자는 25만~30만 명에 달하는데, 그리스도 승천일 축제를 위해 주변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방문했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13]
이전에도 안티오키아는 115년 12월 13일 대지진(규모 7.5)으로 26만 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보았고, 당시 황제 트라야누스도 부상을 입었다.[14] 이 때는 지진 후 발생한 쓰나미가 피해를 더 키웠다.
4. 1. 건물 피해
오론테스강 하중도에 건설된 콘스탄티누스 1세의 거대한 팔각교회인 도무스 아우레아를 비롯해 안티오키아의 많은 건물이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산 가까이에 지어진 집만 겨우 남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피해 대부분은 지진 이후 발생한 며칠간의 화재로 발생했으며, 바람이 매우 거세 화재 피해가 더 커졌다.[17] 화재는 문자 그대로 불의 비가 쏟아질 정도로 매우 강력해서 안티오키아를 완전히 황폐화시켰다고 묘사되었다.[19]
대교회는 지진 발생 7일 만에 화재로 소실되었다.[17]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에우프라시우스도 지진 희생자 중 한 명인데, 그는 와인스킨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가마솥 위에 떨어져 머리만 타지 않은 채로 사망했다.[20]
4. 2. 인명 피해
지진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는 25만 명에서 30만 명 사이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25만 명이라고 보고 있다.[17] 주님 승천 대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안티오키아 주변 시골에서 시내로 사람들이 매우 많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사망자 수가 매우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22]희생자 중에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에우프라시우스도 있었는데, 그는 와인스킨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가마솥 위에 떨어져 머리만 타지 않은 채로 사망했다.[20]
지방 정부와 필수적인 행정력이 붕괴되면서 무법천지가 되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생존자 중 많은 이들이 가족과 소지품을 챙겨 폐허가 된 도시를 떠났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다른 희생자나 도시 외곽에 사는 주민들에게 소지품을 강탈당하고 살해당하거나 그러한 도적이 되었다.[19]
4. 3. 항구 피해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항구에서는 약 0.6-0.7 m의 융기 현상이 발생했으며, 이후 항구에 침적 현상이 발생해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21]4. 4. 사회적 혼란
지진과 함께 지방 정부와 필수적인 행정 서비스가 붕괴되면서 무법천지가 되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19] 많은 생존자가 가족과 소지품을 챙겨 폐허가 된 도시를 탈출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다른 생존자나 도시 외곽에 사는 주민들에게 습격당해 소지품을 강탈당하고 살해당했다.[19]5. 여파
526년 안티오키아 지진의 여파는 다방면에 걸쳐 나타났다. 존 말라라스의 《연대기》는 이 시기 안티오키아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는 주요 1차 사료이다.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생존자를 구하기 위한 필사적인 구조 활동이 이루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스티누스 1세 황제는 지진 소식에 깊이 애도하며, 즉각적인 구호 조치와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한 지원을 명령했다. 유스티누스 1세는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안티오키아 재건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특히, 기독교 성지 재건에 힘썼으며, 그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 역시 도시 재건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도시 행정 시스템 복구와 혼란을 틈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처벌하는 등 사회 질서 회복에도 힘썼다.
528년 11월, 안티오키아에 또 다른 대지진이 발생하여 526년 지진 이후 재건된 건물들 상당수가 다시 파괴되었다. 다행히 528년 지진의 사상자 수는 526년 지진보다 훨씬 적었다.[17]
5. 1. 구조 활동
존 말라라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화재가 잦아들자 사람들은 잔해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잔해에 갇혔으나, 구조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부상이 악화되어 며칠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최대 30일 가까이 잔해에 파묻혔지만 살아남아 구조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잔해 속에서 아기가 태어나 엄마와 함께 살아남았다는 보고도 있다.[19] 지진 발생 3일째 되는 날에는 안티오키아 북부 상공 구름 속에 십자가가 나타나 이를 본 사람들이 한 시간 동안 울며 기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19]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스티누스 1세 황제는 지진 소식에 왕관과 자주색 클라미스를 벗고 교회에 들어가 애도했다. 황제는 즉각적인 구호 조치를 명령하고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해 충분한 돈을 주고 사절을 도시에 파견했다.[22] 대교회와 여러 건물의 재건 작업은 동부관구 출신 에프라임이 감독했으며, 에프라임은 이 노력을 통해 안티오키아의 칼케돈 기독교 총대주교가 되었다.[23][24]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해 기독교 성지 재건에 중점을 두고 원조를 늘렸다. 그는 루피누스 대성당 건너편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세웠고, 같은 지역에 성 코스마스와 다니안 순교교회도 세웠다.[19] 테오도라 황후도 대천사 미카엘 봉헌교회 건축을 의뢰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기둥으로 아나톨리우스 대성당 건축을 지원했다.[19]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도시 행정력 복원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황제의 지원 아래 호스피스에 있는 목욕탕과 수조 외에도 여러 시설이 수리되어 주민들이 안티오키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황제는 지진과 지방정부의 붕괴로 발생한 혼란 속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사람들을 찾아내 기소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19]
5. 2. 황제의 대응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유스티누스 1세 황제는 지진 소식에 왕관과 자주색 클라미스를 벗고,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 없이 교회에 들어가 안티오키아의 파괴를 애도했다. 황제는 즉각적인 구호 조치를 명령하고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해 충분한 돈을 주고 사절을 도시에 파견할 준비를 했다.[22] 대교회와 여러 건물의 재건 작업은 동부관구 출신 에프라임이 감독했으며, 에프라임은 이 노력을 통해 에우프라시우스를 이어 안티오키아의 칼케돈 기독교 총대주교가 되었다.[23][24]유스티누스 1세는 통치 8년 9개월만에 자신의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19]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시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해 기독교 성지 재건에 중점을 두고 안티오키아로 보내는 원조를 더욱 늘리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 황제는 루피누스 대성당으로 알려진 건물 건너편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세웠다. 같은 지역에 성 코스마스와 다니안 순교교회도 세워졌다.[19]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도 도시 재건을 도왔다. 테오도라는 대천사 미카엘 봉헌교회의 건축을 의뢰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기둥으로 아나톨리우스 대성당 건축을 지원했다.[19]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도시 행정력 복원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황제의 지원 아래 호스피스에 있는 목욕탕과 수조 외에도 여러 시설이 수리되어 주민들이 안티오키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황제는 지진과 지방정부의 붕괴로 발생한 혼란 속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사람들을 찾아내 기소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처벌은 각 개인의 파벌 선호도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19]
5. 3. 종교적 변화
안티오키아 출신 존 말라라스가 저술한 《연대기》는 지진을 서술한 주요 1차 자료이다. 지진 발생 3일째 되는 날, 안티오키아 북부 상공 구름 속에 십자가가 나타나 이를 본 사람들이 한 시간 동안 울며 기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9]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유스티누스 1세 황제는 지진 소식에 왕관과 자주색 클라미스를 벗고,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 없이 교회에 들어가 안티오키아의 파괴에 대해 애도했다. 황제는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해 충분한 돈을 주고 사절을 도시에 파견했다.[22] 대교회와 여러 건물의 재건 작업은 동부관구 출신 에프라임이 감독했으며, 에프라임은 이 노력을 통해 칼케돈 기독교 총대주교가 되었다.[23][24]
유스티누스 1세는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19] 유스티니아누스는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해 기독교 성지 재건에 중점을 두고 원조를 늘렸다. 황제는 루피누스 대성당 건너편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세웠다. 같은 지역에 성 코스마스와 다니안 순교교회도 세워졌다.[19]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도 도시 재건을 도왔다. 테오도라는 대천사 미카엘 봉헌교회의 건축을 의뢰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기둥으로 아나톨리우스 대성당 건축을 지원했다.[19]
5. 4. 행정 복구
존 말라라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유스티누스 1세 황제는 지진 소식에 왕관과 자주색 클라미스를 벗고 애도했다. 황제는 즉각적인 구호 조치를 명령하고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해 충분한 돈을 주고 사절을 도시에 파견할 준비를 했다.[22] 동부관구 출신 에프라임은 대교회와 여러 건물 재건 작업을 감독했으며, 이 노력을 통해 에우프라시우스를 이어 안티오키아의 칼케돈 기독교 총대주교가 되었다.[23][24]유스티누스 1세는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19]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시 안티오키아 재건을 위해 기독교 성지 재건에 중점을 두고 안티오키아로 보내는 원조를 더욱 늘리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 황제는 루피누스 대성당 건너편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세웠다. 같은 지역에 성 코스마스와 다니안 순교교회도 세워졌다.[19] 테오도라 황후도 도시 재건을 도왔다. 테오도라는 대천사 미카엘 봉헌 교회의 건축을 의뢰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기둥으로 아나톨리우스 대성당 건축을 지원했다.[19]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도시 행정력 복원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황제의 지원 아래 호스피스에 있는 목욕탕과 수조 외에도 여러 시설이 수리되어 주민들이 안티오키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황제는 지진과 지방 정부의 붕괴로 발생한 혼란 속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사람들을 찾아내 기소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처벌은 각 개인의 파벌 선호도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19]
5. 5. 528년 지진
528년 11월에 안티오키아에서 대지진이 다시 발생했지만, 526년 지진에 비해 사상자는 훨씬 적었다.[17] 이 지진으로 526년 지진 이후 세워졌던 건물들 중 상당수가 파괴되었다.[3]참조
[1]
웹사이트
Comments for the Significant Earthquake
https://www.ngdc.noa[...]
NOAA National Centers for Environmental Information
2022-03-2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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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 catalogue of strong earthquakes in Italy 461 BC to 1997 and Mediterranean area 760 BC to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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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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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The historical earthquakes of Syria: an analysis of large and moderate earthquakes from 1365 B.C. to 1900 A.D.
http://www.earth-pri[...]
20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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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The Chronicle of John Malalas, A Translation
Australian Association of Byzantine Studies
[6]
서적
Chronicle: known also as the Chronicle of Zuqnin, 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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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rpool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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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Seleucia Pieria: an ancient harbour submitted to two successive uplif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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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Natural Disasters in the Chronographia of John Malalas : Reflections on their Function --An Initial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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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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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ledge
201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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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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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논문
The Syriac life of John of Tella and the frontier ''Politeia''
https://web.archive.[...]
20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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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Comments for the Significant Earthqu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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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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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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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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