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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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위기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면서 발생한 국제적 위기이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합병하려는 시도는 세르비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세르비아를 지원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지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중재에 나섰지만, 결국 러시아가 물러서면서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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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민족주의 고조, 독립 선언 등으로 해체되었으며, 그 결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여러 국가가 새롭게 등장하거나 영토가 변경되었다.
보스니아 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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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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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
명칭 | 보스니아 위기 |
발생일 | 1908년 ~ 1909년 |
원인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
결과 | 유럽의 긴장 고조, 제1차 세계 대전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 |
교전 세력 | |
합병 주도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지 세력 | 독일 제국 |
반대 세력 | 세르비아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이탈리아 왕국 영국 프랑스 |
관련 조약 및 합의 | |
베를린 조약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점령 승인 |
부흐라우 협상 |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의 비밀 합의 |
주요 인물 | |
프란츠 요제프 1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
알렉산더 이즈볼스키 | 러시아 외무장관 |
알로이스 폰 에렌탈 |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장관 |
배경 |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팽창 정책 |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 추구 |
범슬라브주의 | 세르비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 야망 |
오스만 제국의 약화 |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 상실 |
경과 | |
1908년 10월 5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발표 |
국제 사회의 반발 | 특히 세르비아와 러시아 제국의 강력한 반발 |
부흐라우 협상 폭로 | 러시아의 굴욕적인 외교적 패배 |
독일의 지원 |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독일의 확고한 지지 |
전쟁 위기 고조 | 발칸 반도에서의 긴장 격화 |
1909년 3월 31일 | 세르비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병 승인 |
영향 | |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 | 발칸 반도의 불안정성 심화 |
범슬라브주의 운동 강화 |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고취 |
국제 관계의 악화 | 강대국 간의 불신 심화 |
2. 배경
1878년 베를린 조약에 따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지만,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이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발칸반도를 분할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러일 전쟁을 계기로 남하 정책의 중심축을 극동에서 발칸반도로 옮긴 러시아 제국과의 이해 관계 조정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1903년 친(親)러시아적인 카라조르제비치 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권력을 잡은 세르비아 왕국은 1906년 돼지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다. 아드리아해로 가는 출구를 요구하고 있던 세르비아 왕국은 세르비아인 다수가 거주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진출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1870년대 중반 발칸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폭력적인 반란이 연이어 발생하였고, 오스만 제국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대응 또한 계속되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는 오스만 제국에 개입하기를 원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합의를 통해 1877년 부다페스트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서 러시아는 베사라비아를 합병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튀르키 전쟁에서 러시아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배를 승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제국은 전쟁을 선포했고, 터키군을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몰아냈다. 그러나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다른 열강들이 1841년의 런던 해협 협약을 시행하려 하면서 러시아군은 유럽에서 완전히 터키군을 몰아내지 못했다. 이 협약은 전쟁 시 콘스탄티노플 해협을 군함에 폐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산 스테파노 조약을 통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군대가 공동 점령한다고 선언했으나, 이는 부다페스트 협약의 내용을 일부 어긴 것이었다.
산 스테파노 조약은 1878년 베를린 조약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베를린 조약 제29조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및 노비 파자르 산자크 지역에 특별 권리를 받았다. 제25조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주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점령하고 관리한다"고 명시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노비 파자르 산자크 지역 전체에 군사 및 무역 도로를 가질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했다.
보스니아인이 지배하는 노비 파자르 산자크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를 분리하여 두 국가의 지리적, 정치적 연합을 막았다. 또한 산자크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점령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는 테살로니키로의 확장을 위한 발판을 제공했다. 당시 보스니아 인구는 무슬림, 가톨릭, 정교회 기독교인으로 종교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오스만 제국과 함께 노비 파자르 산자크를 공동 점령했다. 베를린 조약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단독 점령을 허용했지만, 이 지역의 최종 처분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았다. 1881년 세 황제 동맹 조약에서 독일과 러시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할 오스트리아의 권리를 지지했다. 그러나 1897년,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1903년 세르비아의 알렉산데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이 쿠데타로 암살당하고 친러시아 카라조르제비치 가가 왕위에 올랐다. 권력은 보스니아로의 확장에 크게 관심이 있는 세력으로 이동했다. 새로운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노비 파자르 산자크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넘겨받기를 원했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간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의 패배와 국내 불안으로 인해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원 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10]
190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부 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통해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입지를 강화하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외무부 장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와의 거래를 통해, 러시아 해군 함정에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의 이 지역 합병을 제안했다.[11]
2.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입장
1878년 베를린 조약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을 추진했다. 특히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가 남하 정책의 중심을 극동에서 발칸반도로 옮기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와의 이해관계 조정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15]1903년 세르비아 왕국에서 친러시아적인 카라조르제비치 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1906년 돼지 전쟁으로 인해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아드리아해 진출을 원했던 세르비아는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진출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1877년 부다페스트 협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가 베사라비아를 합병하는 대가로, 러시아-튀르키 전쟁에서 러시아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배를 승인했다.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군대의 공동 점령하에 놓였으나, 1878년 베를린 조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노비 파자르 산자크 지역에 대한 특별 권리를 인정받았다.
1881년 세 황제 동맹 조약에서 독일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권리를 지지했다. 그러나 1897년 러시아는 합병 지지를 철회했다.
1903년 세르비아에서 쿠데타로 알렉산데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이 암살되고 친러시아계 카라조르제비치 가가 들어서면서,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로의 확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지만, 러일 전쟁 패배로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원 능력은 약화되었다.[10]
190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통해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와의 부흐라우 성 회담을 통해, 러시아 해군 함정에 다르다넬스 해협 접근권을 제공하는 대가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에 대한 러시아의 묵인을 얻어내려 했다.[11] 1908년 9월 16일, 모라비아의 부흐라우 성에서 두 사람은 비밀 회담을 가졌으나, 회의록은 작성되지 않았다.[12]

2. 2. 세르비아 왕국의 입장
1903년 세르비아 왕국에서 친(親)러시아적인 카라조르제비치 가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세르비아 왕국은 대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우며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 했다. 아드리아해로 가는 출구를 원했던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진출을 노렸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16]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에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1906년 돼지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는 이미 악화된 상태였다.2. 3. 러시아 제국의 입장
1878년 베를린 조약 이후, 러시아 제국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협력하여 쇠퇴하던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영토를 분할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15]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는 남하 정책의 중심을 극동에서 발칸 반도로 옮기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이해관계 조정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을 묵인하는 대신,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의 통항권을 얻고자 했다. 1908년 7월 2일, 러시아 외무 장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 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에게 서한을 보내 베를린 조약의 상호 변경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11] 1908년 9월 16일, 이즈볼스키와 에렌탈은 모라비아의 부흐라우 성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에 "우호적이고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로 합의했고, 그 대가로 러시아가 군함의 해협 통과를 추진할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12]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로 러시아의 해협 통항권 확보 계획은 무산되었다.[13] 이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1908년 7월 2일 러시아 제국의 외무부 장관 알렉산데르 이즈볼스키(Alexander Izvolsky)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부 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Alois Lexa von Aehrenthal)에게 서한을 보냈다.[11] 이 서한에서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보스포루스 해협 통과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1908년 9월 16일,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과 알렉산데르 이즈볼스키는 모라바에 있는 부흘라우(Buchlau) 성에서 회담을 가졌다.[11]
1908년 7월, 오스만 제국에서 청년 튀르크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을 결정했다.
1908년 10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음을 선언했다.[11] 이는 불가리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1908년 10월 5일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공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강하게 비난했다.
4. 보스니아 위기
1908년 10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음을 선언했다. 이는 불가리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공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강하게 비난했다.[17]
이러한 배경에는 1908년 7월 2일 알렉산데르 이즈볼스키 러시아 제국 외무부 장관과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무부 장관 사이에 오간 서한이 있었다. 이 서한에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에 관심을 표명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의 보스포루스 해협 통과에 관심을 보였다. 1908년 9월 16일, 두 장관은 모라바에 위치한 부흘라우(Buchlau) 성에서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의 명분으로 세르비아를 지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18] 이로 인해 발칸 반도는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1909년 2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에 대한 보상금으로 2200000오스만 리라를 지불하는 내용의 조약에 동의했다.[19]
하지만 독일 제국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세르비아에 압력을 가하게 했고, 결국 세르비아는 병합을 승인하면서 전쟁 위기는 해소되었다.[19]
5. 결과와 영향
보스니아 위기는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의 협력 관계를 붕괴시키고, 양국 간의 대립을 심화시켰다.[20]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 제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세르비아에서는 대세르비아주의가 강화되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반오스트리아 정서가 확산되어 "청년 보스니아(Young Bosnia)" 운동(Mlada Bosnabos)이 대두되었다.[21]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남슬라브족 운동을 지원하며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운 오스트리아와 대립했다.
삼국 동맹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이레덴타 지역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지만, 받지 못했다. 이는 1915년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14]
보스니아 위기는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약소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의 역사, 특히 일제강점기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5. 1. 제1차 세계 대전으로의 연관성
보스니아 위기로 인해 발칸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암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13]1908년 보스니아 합병 당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통해 발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17] 그러나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하며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오스트리아에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은 외교적 위기 상황, 즉 '보스니아 위기'가 약 반 년간 지속되었다.[18]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쟁 준비 부족을 이유로 개전을 포기했고, 1903년 3월,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세르비아에 압력을 가하면서 세르비아는 결국 합병을 승인하게 되었고, 전쟁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19]
이러한 외교적 패배로 인해 러시아의 이즈볼스키는 강등되어 프랑스 대사가 되었고, 중앙 강대국에 대한 앙심을 품게 되었다.[13] 러시아 외교관 de Schelking은 이즈볼스키가 '보스포루스 공자'라는 별명으로 조롱당했다고 언급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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