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로마는 1927년 로마를 연고로 창단된 이탈리아의 축구 클럽이다. 세리에 A에서 3번 우승했으며, 코파 이탈리아에서 9번,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2번 우승했다. 또한, 2021-22 시즌에는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3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세리에 A 상위권을 유지하며, 프란체스코 토티를 비롯한 많은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다. 홈 구장은 스타디오 올림피코이며, 라이벌 팀인 SS 라치오와 데르비 델라 카피탈레 경기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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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로마 - 스타디오 올림피코 스타디오 올림피코는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다목적 경기장으로, 1960년 하계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AS 로마와 SS 라치오의 홈 구장으로 사용되고, 주요 국제 스포츠 이벤트와 문화 행사가 개최되는 장소이다.
AS 로마 - 스타디오 나치오날레 PNF 스타디오 나치오날레 PNF는 파시스트 정권 시기에 건설된 로마의 경기장으로, 1934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을 포함한 3경기가 개최되었으며, 이탈리아의 우승 이후 1953년 철거되어 현재는 스타디오 플라미니오가 위치해 있다.
AS 로마는 역사에서 3번의 세리에 A 우승을 하는 등 이탈리아 축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이었던 1941-42 시즌 로마는 멋진 모습과 좋은 경기를 펼치면서 첫 우승을 하였지만, 전쟁으로 리그가 중단되고 다시 재개되었을 때, 로마는 첫 번째로 우승하였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로마의 두 번째 우승은 디노 비올라 구단주가 팀을 경영할 때 닐스 리에트홀름 감독의 지휘 아래 로마가 세리에 A에서의 2번째 우승을 거두었을 때이다. 이 시즌에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 컵 결승에도 올라갔지만, 승부차기에서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세리에 A 3번째 우승은 2000년대 초반에 이루었다. 2000-2001 시즌, 우승제조기로 불리는 이탈리아인 명감독 파비오 카펠로의 지휘 아래 세리에 A 3번째 우승을 한다. 하지만, 카펠로는 로마의 팬들에게 그리 사랑받지 못한 감독이었다.
1927년 여름, 파시스트당의 이탈로 포시[165]에 의해 이탈리아 축구 선수권에 참가하고 있던 로마를 본거지로 하는 로만, SS 알바-아우다체, 포르티투도=프로 로마 SGS의 3개 클럽이 합병하여 AS 로마가 설립되었다[164]。합병의 목적은, 당시 강호였던 북이탈리아의 클럽의 라이벌이 되는 수도의 강호 클럽을 만드는 것이었다[165]。SS 라치오는, 클럽 회원이며 이탈리아 축구 연맹 간부였던 바카로 장군의 개입으로 로마의 주요 클럽 중 유일하게 합병에서 제외되었다.
'''창단 초기 (1927년~1940년)'''
20세기 초 로마에는 여러 중소 클럽들이 있었으나, 이탈리아 북부 클럽들의 강세에 대항하기 위해 1927년 여름, SS 라치오를 제외한 SS 알바-아우다체 로마, 포르티투도-프로 로마 SGS, 로만 FC가 통합하여 AS 로마를 창단했다.[2][4] 초대 구단주는 이탈로 포스키였으며,[2][3] 초대 감독은 피에트로 피셀리와 조셉 킹이 임시로 맡았다. 통합으로 인해 많은 선수들이 팀에서 나오게 되었고, 초기에는 알바의 모토벨로드로모 아피오 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다가 1929년에 캄포 테스타치오 경기장을 건설하여 이전했다.[5][2]
1930–31 세리에 A 시즌, 로마는 리그 2위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2]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주장 아틸리오 페라리스, 귀도 마세티,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로돌포 볼크 등이 있었다.[6] 1934-35 시즌 구단주 레나토 세사도티는 주장 아틸리오 페라리스에게 라치오와의 더비전에서 3:3으로 비긴 책임을 덮어씌워 팀 훈련 참가를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페라리스는 1934년 FIFA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하여 우승을 거두었고, 그 후 로마와 마찰이 생겨 팀을 떠나 라치오로 이적하였다.
이후 팀이 침체기에 빠지자, 로마는 '검은 해적'이란 별명을 가진 아르헨티나 태생 공격수 엔리케 구이이타를 영입하였다. 루이지 바르베시노 감독 하에, 로마는 1935-36 세리에 A 시즌 첫 우승을 할 뻔했지만, 볼로냐 FC에게 승점 1점 차로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첫 우승과 침체기 (1941년~1979년)'''
AS 로마는 1941-42 시즌 알프레드 샤퍼 감독과 18골을 넣은 아메데오 아메데이의 활약으로 첫 스쿠데토를 획득했다.[9] 당시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 중이었고, 로마는 스타디오 나치오날레 PNF에서 경기를 치렀다.[10]
1942년 첫 스쿠데토 우승 당시의 로마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로마는 5시즌 연속 세리에 A 하위권에 머물렀고, 결국 1950-51 시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2][11] 하지만 쥐세페 비아니 감독의 지휘 아래 즉시 세리에 A로 승격했다.[2]
세리에 A 복귀 후, 로마는 에지스토 판돌피니, 디노 다 코스타, 헬게 브로니 등을 영입하며 상위권 클럽으로 안정되었다.[2]제시 카버 감독 아래 1954-55 시즌에는 우디네세가 승부조작으로 강등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2] 이후 10년 동안 리그 상위 4위 안에는 들지 못했지만, 컵 대회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1960-61 시즌에는 결승전에서 버밍엄 시티를 4-2로 꺾고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 우승하며 첫 국제 대회 우승을 기록했다.[12] 몇 년 후 1963-64 시즌에는 토리노를 1-0으로 꺾고 첫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13]
1964-65 시즌은 후안 카를로스 로렌소 감독이 구단의 재정 문제를 발표하며 어려운 시기를 겪었으나, 팬들의 모금과 프랑코 에반젤리스티 회장 선출로 파산을 면했다. 1968-69 시즌에는 두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2] 지아코모 로시는 1969년 은퇴할 때까지 모든 대회에서 45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38년 동안 유지되었다.[14]
'''명암의 공존기 (1979년~1999년)'''
AS 로마의 새로운 성공은 1979-80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으로 시작되었다.[2] 1980-81 시즌에는 유벤투스 FC에 근소한 차이로 밀려 리그 2위를 기록했다.[16] 닐스 리에트홀름 감독 체제에서, 1982-83 시즌에 41년 만에 두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로마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18]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브루노 콘티, 아고스티노 디 바르톨로메이, 로베르토 프루쪼, 파울루 로베르투 팔캉 등이 있었다.[17]
1983-84 시즌, 로마는 리그 2위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고,[2] 1984년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다.[2] 결승에서 리버풀 FC과 로베르토 프루쪼의 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9][192][193] 1985-86 시즌에는 삼프도리아를 꺾고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하고 리그 2위를 차지했다.[2]스벤예란 에릭손 감독 체제에서는 유벤투스 FC와 우승 경쟁을 펼쳤으나, 종반에 패배하여 리그 우승을 놓치기도 했다. 1987-88 시즌에는 리그 3위를 기록했다.[2]
1990년대에는 1997-98 시즌 리그 4위가 최고 성적이었다.[2] 1991년에는 UEFA컵 결승에서 인테르에게 패배해 준우승했지만,[20] 코파 이탈리아 7번째 우승을 차지했다.[2]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는 삼프도리아에 패하며 준우승했다. 이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토리노에 패배하는 등, 1990년대는 리그에서 평범한 시기를 보냈다.[2]
1990년대 초, 프란체스코 토티가 데뷔하여 팀의 핵심 선수이자 상징적인 주장으로 성장했다.
'''새로운 세기 (2000년~현재)'''
AS 로마는 2000년대 들어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지휘 아래 2000-01 시즌 세리에 A 세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2] 파르마 FC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3:1로 승리하며 유벤투스 FC를 승점 2점 차로 제치고 우승을 확정지었다.[2] 이 우승의 주역은 프란체스코 토티였으며, 알다이르, 카푸, 빈첸초 몬텔라,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이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2][21]
2001년 6월 17일 – 로마-파르마 3–1: 로마는 구단 역사상 세 번째 이탈리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습니다. Curva Sud의 팬들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2001-02 시즌에는 유벤투스 FC에 승점 1점 차로 밀려 준우승을 기록했다.[2] 이후 로마는 2000년대에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에서 여러 차례 준우승을 차지했다. 2003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AC 밀란에 패하고,[2] 2003-04 시즌 세리에 A에서도 AC 밀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22]
2006년 세리에 A 승부 조작 사건(칼초폴리)에 로마는 연루되지 않았고, 2005-06 시즌 최종 순위가 2위로 조정되었다.[27] 같은 시즌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13] 2006-07 시즌과 2007-0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8강에 진출했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패해 탈락했다.[28] 그러나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2회 연속 우승(2006-07, 2007-08)을 차지했고, 2006-07 시즌 초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도 인테르를 꺾고 우승했다.[195]
2013-14 시즌에는 뤼디 가르시아 감독 아래 세리에 A 개막 10연승 신기록을 세우며 2위를 차지했다.[35] 2015-16 시즌에는 에딘 제코를 영입하고,[37][38][39]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 부임 후 세리에 A 3위를 기록했다.
2017-18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 진출하며 유럽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54] 8강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1차전 4-1 패배 후 2차전에서 3-0으로 승리하며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적을 연출했다.[54]
|thumb|2017–18 시즌 로마 팀이 샤흐타르 도네츠크와의 2017–18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을 앞두고 있다.
2021-22 시즌에는 조제 모리뉴 감독 아래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65] 결승전에서 페예노르트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65]
2. 1. 창단 초기 (1927년~1940년)
20세기 초 로마에는 여러 중소 클럽들이 있었으나, 이탈리아 북부 클럽들의 강세에 대항하기 위해 1927년 여름, SS 라치오를 제외한 SS 알바-아우다체 로마, 포르티투도-프로 로마 SGS, 로만 FC가 통합하여 AS 로마를 창단했다.[2][4] 초대 구단주는 이탈로 포스키였으며,[2][3] 초대 감독은 피에트로 피셀리와 조셉 킹이 임시로 맡았다. 통합으로 인해 많은 선수들이 팀에서 나오게 되었고, 초기에는 알바의 모토벨로드로모 아피오 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다가 1929년에 캄포 테스타치오 경기장을 건설하여 이전했다.[5][2]
1930–31 세리에 A 시즌, 로마는 리그 2위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2]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주장 아틸리오 페라리스, 귀도 마세티,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로돌포 볼크 등이 있었다.[6] 1934-35 시즌 구단주 레나토 세사도티는 주장 아틸리오 페라리스에게 라치오와의 더비전에서 3:3으로 비긴 책임을 덮어씌워 팀 훈련 참가를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페라리스는 1934년 FIFA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하여 우승을 거두었고, 그 후 로마와 마찰이 생겨 팀을 떠나 라치오로 이적하였다.
이후 팀이 침체기에 빠지자, 로마는 '검은 해적'이란 별명을 가진 아르헨티나 태생 공격수 엔리케 구이이타를 영입하였다. 루이지 바르베시노 감독 하에, 로마는 1935-36 세리에 A 시즌 첫 우승을 할 뻔했지만, 볼로냐 FC에게 승점 1점 차로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2. 2. 첫 우승과 침체기 (1941년~1979년)
AS 로마는 1941-42 시즌 알프레드 샤퍼 감독과 18골을 넣은 아메데오 아메데이의 활약으로 첫 스쿠데토를 획득했다.[9] 당시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 중이었고, 로마는 스타디오 나치오날레 PNF에서 경기를 치렀다.[10]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로마는 5시즌 연속 세리에 A 하위권에 머물렀고, 결국 1950-51 시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2][11] 하지만 쥐세페 비아니 감독의 지휘 아래 즉시 세리에 A로 승격했다.[2]
세리에 A 복귀 후, 로마는 에지스토 판돌피니, 디노 다 코스타, 헬게 브로니 등을 영입하며 상위권 클럽으로 안정되었다.[2]제시 카버 감독 아래 1954-55 시즌에는 우디네세가 승부조작으로 강등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2] 이후 10년 동안 리그 상위 4위 안에는 들지 못했지만, 컵 대회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1960-61 시즌에는 결승전에서 버밍엄 시티를 4-2로 꺾고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 우승하며 첫 국제 대회 우승을 기록했다.[12] 몇 년 후 1963-64 시즌에는 토리노를 1-0으로 꺾고 첫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13]
1964-65 시즌은 후안 카를로스 로렌소 감독이 구단의 재정 문제를 발표하며 어려운 시기를 겪었으나, 팬들의 모금과 프랑코 에반젤리스티 회장 선출로 파산을 면했다. 1968-69 시즌에는 두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2] 지아코모 로시는 1969년 은퇴할 때까지 모든 대회에서 45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38년 동안 유지되었다.[14]
2. 3. 명암의 공존기 (1979년~1999년)
AS 로마의 새로운 성공은 1979-80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으로 시작되었다.[2] 1980-81 시즌에는 유벤투스 FC에 근소한 차이로 밀려 리그 2위를 기록했다.[16] 닐스 리에트홀름 감독 체제에서, 1982-83 시즌에 41년 만에 두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로마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18]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브루노 콘티, 아고스티노 디 바르톨로메이, 로베르토 프루쪼, 파울루 로베르투 팔캉 등이 있었다.[17]
1983-84 시즌, 로마는 리그 2위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고,[2] 1984년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다.[2] 결승에서 리버풀 FC과 로베르토 프루쪼의 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9][192][193] 1985-86 시즌에는 삼프도리아를 꺾고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하고 리그 2위를 차지했다.[2]스벤예란 에릭손 감독 체제에서는 유벤투스 FC와 우승 경쟁을 펼쳤으나, 종반에 패배하여 리그 우승을 놓치기도 했다. 1987-88 시즌에는 리그 3위를 기록했다.[2]
1990년대에는 1997-98 시즌 리그 4위가 최고 성적이었다.[2] 1991년에는 UEFA컵 결승에서 인테르에게 패배해 준우승했지만,[20] 코파 이탈리아 7번째 우승을 차지했다.[2]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는 삼프도리아에 패하며 준우승했다. 이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토리노에 패배하는 등, 1990년대는 리그에서 평범한 시기를 보냈다.[2]
1990년대 초, 프란체스코 토티가 데뷔하여 팀의 핵심 선수이자 상징적인 주장으로 성장했다.
2. 4. 새로운 세기 (2000년~현재)
AS 로마는 2000년대 들어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지휘 아래 2000-01 시즌 세리에 A 세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2] 파르마 FC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3:1로 승리하며 유벤투스 FC를 승점 2점 차로 제치고 우승을 확정지었다.[2] 이 우승의 주역은 프란체스코 토티였으며, 알다이르, 카푸, 빈첸초 몬텔라,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이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2][21]
마지막 경기에서 파르마를 3:1로 이겼을 때 서포터들의 모습
2001-02 시즌에는 유벤투스 FC에 승점 1점 차로 밀려 준우승을 기록했다.[2] 이후 로마는 2000년대에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에서 여러 차례 준우승을 차지했다. 2003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AC 밀란에 패하고,[2] 2003-04 시즌 세리에 A에서도 AC 밀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22]
2006년 세리에 A 승부 조작 사건(칼초폴리)에 로마는 연루되지 않았고, 2005-06 시즌 최종 순위가 2위로 조정되었다.[27] 같은 시즌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13] 2006-07 시즌과 2007-0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8강에 진출했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패해 탈락했다.[28] 그러나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2회 연속 우승(2006-07, 2007-08)을 차지했고, 2006-07 시즌 초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도 인테르를 꺾고 우승했다.[195]
2009-10 시즌에는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 아래 리그 2위를 기록하며 인테르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다.
2010년 여름, 센시 가문은 부채 해결 합의의 일환으로 로마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했다. 2011년 4월 16일, 토마스 디베네디토가 구단을 인수하여 세리에 A 최초의 외국인 구단주가 되었다.[30]
2013-14 시즌에는 뤼디 가르시아 감독 아래 세리에 A 개막 10연승 신기록을 세우며 2위를 차지했다.[35] 2015-16 시즌에는 에딘 제코를 영입하고,[37][38][39]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 부임 후 세리에 A 3위를 기록했다.
2017-18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 진출하며 유럽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54] 8강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1차전 4-1 패배 후 2차전에서 3-0으로 승리하며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적을 연출했다.[54]
|thumb|2017–18 시즌 로마 팀이 샤흐타르 도네츠크와의 2017–18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을 앞두고 있다.
2021-22 시즌에는 조제 모리뉴 감독 아래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65] 결승전에서 페예노르트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65]
3. 클럽 문화
AS 로마의 색상은 진홍색(carmine red)과 금색(golden yellow)의 배색으로, 로마의 전통적인 색상을 나타내며, 로마 코뮌의 공식 문장에서도 동일한 색상을 사용한다.[67] 금색과 짙은 붉은색은 로마 제국의 위엄을 상징한다.[68] 홈 유니폼 셔츠에는 보통 흰색 반바지와 검은색 양말을 착용한다. 하지만 중요한 경기에서는 반바지와 양말의 색상도 홈 셔츠와 같은 색상으로 통일하기도 한다.[69]
이 유니폼은 원래 1927년 현재의 AS 로마를 창단하기 위해 합병된 세 팀 중 하나인 ''로마 축구 클럽(Roman Football Club)''이 착용했다.[70] AS 로마는 유니폼 색상 때문에 종종 "i giallorossi"(옐로우-레드)라는 별명으로 불린다.[71] AS 로마의 원정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흰색이며, 세 번째 유니폼은 때때로 색상이 변경된다.[72]
클럽의 인기 있는 별명은 "i lupi"(늑대)이며, 이 동물은 클럽의 역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클럽의 엠블럼에 등장했다. 팀의 엠블럼은 현재 클럽이 처음 창단되었을 때 사용되었던 것이다. 엠블럼은 두 명의 어린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와 함께 암컷 늑대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 건국 신화를 보여주는 것으로,[74] 진홍색 방패 위에 금색과 짙은 붉은색으로 양분된 모양을 하고 있다.[73] 클럽의 별명과 로고의 유래가 된 신화에서, 쌍둥이 (마르스와 레아 실비아의 아들)는 삼촌 아물리우스에 의해 테베레 강에 버려진다. 그 후 암컷 늑대가 쌍둥이를 구출하여 돌본다.[74] 결국 두 쌍둥이는 아물리우스에게 복수를 한 후 서로 다투게 된다.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였고,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새로운 도시, 로마의 왕이 되었다.[74]
스타디오 올림피코의 로마 팬들
로마는 유벤투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AC 밀란, SSC 나폴리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다섯 번째로 팬이 많은 축구 클럽이며, 이탈리아 축구 팬의 약 7%가 로마를 응원하고 있다(2006년 4월 조사)[180]。 역사적으로, 로마시의 로마 서포터의 대부분은 이너 시티, 특히 테스타초 출신이다[181]。
클럽의 전통적인 울트라스 집단은 ''Commando Ultrà Curva Sud''(CUCS의 약칭으로 알려짐)[182]였다. CUCS는 많은 소규모 그룹의 합병으로 설립되었으며 유럽 축구 역사상 가장 유서 깊은 그룹 중 하나로 여겨졌다[164]。 그러나 1990년대 중반까지 CUCS는 라이벌 파벌에 의해 대체되었고 결국 해산되었다. 이때부터 스타디오 올림피코 디 로마의 쿠르바 수드(남쪽 스탠드)는 더 우익적인 집단[164]인 AS 로마 울트라스, 보이즈, 조비네차 등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그룹인 ''Fedayn''은 정치적 무관심이며, 정치는 로마의 주요 정체성이 아니라 전체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로마 경기 중의 스타디오 올림피코
가장 잘 알려진 클럽 앤섬은 안토넬로 벤디티가 부른 "Roma (non si discute, si ama)"('Roma Roma'로도 알려져 있음)[183][184]이다. 곡의 제목은 "로마는 논쟁의 여지가 없고 사랑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며, 매 경기 전에 불린다. 같은 가수의 "''Grazie Roma''"는 홈 경기에서 승리한 후에 흐른다. 최근에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곡 "세븐 네이션 아미"의 리프도 경기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185]。
3. 1. 서포터
AS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유벤투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AC 밀란, 나폴리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팬을 보유한 축구 클럽이다.[199][93][180] 이탈리아 축구 팬의 약 7%가 로마를 지지한다. 로마 팬들은 주로 로마 시내, 특히 테스타초 지역에 많이 분포한다.[94][181] 또한 쿠바에도 팬 클럽이 있다.[200]
로마의 모토는 "로마는 논쟁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사랑할 대상일 뿐이다"(Roma (non-si discute, si ama))이며,[98][99][183][184] "C'E' SOLO L' ASROMA!"라는 응원 문구도 사용한다. 가장 잘 알려진 클럽 응원가는 안토넬로 벤디티의 "Roma (non-si discute, si ama)"이며, "Roma Roma"로도 알려져 있다.[98][99] 이 노래는 매 경기 전에 불린다. 같은 가수의 "Grazie Roma"는 승리한 홈 경기 마지막에 연주된다. 최근에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세븐 네이션 아미"의 주요 리프도 경기에서 널리 사용된다.[100][185]
로마의 전통적인 울트라스 그룹은 '코만도 울트라 쿠르바 수드'(Commando Ultrà Curva Sud, CUCS)였다.[2][182] 이 그룹은 여러 소규모 그룹들이 합병하여 결성되었으며, 유럽 축구 역사상 가장 역사적인 그룹 중 하나로 여겨졌다.[2][164] 그러나 1990년대 중반, CUCS는 경쟁 파벌에 의해 찬탈당했고 결국 해체되었다. 그 이후 스타디오 올림피코의 쿠르바 수드는 ''A.S. 로마 울트라스'', ''보이스'', ''지오비네차'' 등 우익 단체들이 통제해 왔다.[2][164] 가장 오래된 그룹인 ''페다인''은 비정치적이며, 정치적 성향은 로마의 주된 정체성이 아니라 전체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울트라스 그룹 외에도, 로마 팬들은 좌익 정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라치오 서포터들은 그들의 우익 성향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95]
2015년 11월, 로마와 라치오의 울트라스는 스타디오 올림피코에 부과된 새로운 안전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수도 더비(Derby della Capitale)를 보이콧했다. 이 조치에는 각 골대 뒤 구역을 둘로 나누는 플라스틱 유리 칸막이를 쿠르바 수드와 쿠르바 노드에 설치하는 것이 포함되었다.[96] 양쪽 울트라스는 시즌 남은 기간 동안 계속 항의를 이어갔다. 라치오 울트라스는 2016년 12월 로마의 1-4 승리 경기에 쿠르바 노드로 복귀했지만, 로마 울트라스는 계속 경기를 보이콧하고 있다.[97]
AS 로마는 SS 라치오와 홈 경기장을 함께 쓰는 라이벌 관계이다. 두 팀 간의 경기는 데르비 델라 카피탈레라고 불리며, 세계 축구의 더비 경기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격렬한 경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201] 과거에는 1979-80 시즌 경기에서 쿠르바 수드에서 발사된 비상 조명탄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라치오 팬 빈첸초 파파렐리의 사망 사고[101][186]나, 사망자가 나왔다는 근거 없는 소문으로 시작된 경기장 밖에서의 폭력으로 인해 경기가 중단된 2004년 3월의 사례[102][187] 등, 종종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유벤투스(특히 1980년대에 시작된 라이벌 관계), AC 밀란, 아탈란타(두 클럽의 울트라 간 우호 관계가 악화된 1984년부터)[104], 그리고 인테르(최근 몇 년 동안 증가)를 라이벌로 여기는데, 이들은 종종 리그 순위 상위 4위 안에 들어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위한 경쟁 상대이기 때문이다.[105][182]
3. 3. 훌리건
AS 로마의 울트라스는 과거 여러 차례 폭력 사건에 연루된 바 있다.[106][107][108] 특히 2014년에는 AS 로마 울트라스가 2014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 경기를 보러 온 나폴리 팬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109] 이 사건으로 다니엘레 데 산티스는 징역 26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16년으로 감형되었고, AS 로마 울트라는 데 산티스를 옹호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109]
AS 로마는 1953년부터 SS 라치오와 함께 스타디오 올림피코를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82] 이 경기장은 이탈리아로마의 포로 이탈리코에 위치해있다. 1936년에 지어졌으며 70,643석 이상의 수용 인원을 갖추고 있어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경기장이다.[82]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다. 또한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개최할 수 있는 5성 경기장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 결승전이 열리기도 했다.[82]1990년 FIFA 월드컵을 위해 재건축되었다.[82]
AS 로마는 이전에는 알바-아우다체가 사용하던 아피오 모토벨로드로모를 1927-28 시즌 동안 사용했다. 1929년부터 1940년까지는 캄포 테스타치오를, 1940년부터 1953년까지는 스타디오 나치오날레 델 PNF를 홈 경기장으로 사용했다. 1989-90 시즌에는 스타디오 올림피코의 재건축으로 인해 스타디오 플라미니오를 임시 홈 경기장으로 사용했다.
AS 로마는 2017년에 은퇴한 프란체스코 토티를 기리기 위해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22년에는 파울로 디발라에게 배정될 예정이었지만, 디발라는 10번 대신 21번을 선택했다.
6. 기타
6. 1. 역대 구단주
AS 로마는 역사상 수많은 회장(lit=회장/presidentiit 또는 lit=이사회 의장/presidenti del consiglio di amministrazioneit)을 거쳤으며, 그 중 일부는 구단의 소유주이자 공동 소유주였고, 일부는 소유주에 의해 지명되었다.[122] 프랑코 센시는 2008년 사망할 때까지 회장을 역임했으며, 그의 딸이자 AS 로마 CEO인 로셀라 센시가 회장직을 이어받았다.[123][2]
1927년부터 현재까지 AS 로마의 역대 구단주 및 회장 목록은 다음과 같다.[197][124]
이름
재임 기간
이탈로 포스키
1927–1928
레나토 사체르도티
1928–1935
비토리오 스칼로야
1935–1936
이기노 베티
1936–1941
에드가르도 바치니
1941–1944
피에트로 발다사레
1944–1949
피에르 카를로 레스타뇨
1949–1952
로몰로 바셀리
1952
레나토 사체르도티
1952–1958
아나클레토 지안니
1958–1962
프란체스코 마리니-데티나
1962–1965
프랑코 에반젤리스티
1965–1968
프란체스코 라누치
1968–1969
알바로 마르키니
1969–1971
가에타노 안잘로네
1971–1979
디노 비올라
1979–1991
플로라 비올라
1991
주세페 치아라피코
1991–1993
치로 디 마르티노
1993
프랑코 센시
1993–2008
로셀라 센시
2008–2011
로베르토 카펠리[122]
2011
토마스 R. 디베네데토
2011–2012
제임스 팔로타
2012–2020
댄 프라이드킨
2020–현재
AS 로마는 프랑코 센시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2004년 건강 악화를 이유로 그의 딸인 로젤라 센시에게 구단주 자리를 물려주었다. 프랑코 센시는 2008년 타계했으며, 그 후 센시가의 모기업의 재정악화로 2011년 은행의 관리를 받게 되고 미국의 사업가 토마스 디 베네디토가 구단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후 2012년 토마스 디 베네디토와 같은 컨소시엄을 구성하던 제임스 팔로타가 구단주로 취임했다.[197]
6. 2. 역대 감독
AS 로마는 1927년 창단 이후 많은 감독들이 팀을 이끌었다.[198][125] 1927년부터 현재까지 AS 로마의 역대 감독들은 다음과 같다.
로마는 챔피언스리그(구 유러피언컵)에 '''13회''' 참가했으며, 총 '''2회''' 4위권에 들었다:
'''1회''' 결승 진출 (1983-84)
'''1회''' 준결승 진출 (2017-18)
; 유러피언컵위너스컵
로마는 유러피언컵위너스컵에 '''6회''' 참가했으며, 총 '''1회''' 4위권에 들었다:
'''1회''' 준결승 진출 (1969-70)
; 유로파리그/UEFA컵
로마는 유로파리그(구 UEFA컵)에 '''18회''' 참가하여 결승전에 '''1번''' 진출했다:
'''1회''' 결승 진출 (1990-91)
6. 4. 스폰서
AS 로마는 현재 윈드(Wind)를 메인 스폰서로, 나이키(Nike)를 유니폼 스폰서로 두고 있다. 과거에는 바릴라(Barilla) (첫 공식 스폰서, 1981-82~1993-94), 누오바 티레나(Nuova Tirrena) (1994-95), 이탈리아 보험공사(INA Assitalia) (1995-96~2001-02), 마쓰다(Mazda) (2002-03~2004-05) 등이 스폰서로 참여했다.
AS 로마는 UEFA 챔피언스컵 /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111경기 41승 27무 43패, 148득점 160실점을 기록했다. UEFA 컵 위너스 컵에서는 29경기 12승 9무 8패, 34득점 24실점을 기록했다. UEFA컵 / UEFA 유로파 리그에서는 151경기 81승 29무 41패, 268득점 152실점을 기록했으며,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서는 15경기 10승 3무 2패, 33득점 16실점을 기록했다. 통산 306경기에서 144승 68무 94패, 483득점 352실점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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