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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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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물루스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레아 실비아와 마르스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중 한 명이다. 그의 형제 레무스와 함께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긴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를 복위시킨 후, 티베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로물루스는 형제 레무스를 죽이고 팔라티누스 언덕에 로마를 건설했으며, 정치, 군사 제도를 정비하고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사건을 일으켜 로마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37년간 로마를 통치한 후, 폭풍 속에서 사라졌으며, 퀴리누스 신으로 숭배받았다. 로물루스 신화는 예술 작품의 소재로 널리 활용되었으며, 로마의 건국 신화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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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물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흉상
로물루스와 그의 쌍둥이 형제 레무스 (15세기 프리즈, Certosa di Pavia)
로마자 표기Romulus
라틴어 표기ROMVLVS
IPA 표기 (영어)/ˈrɒmjʊləs/
IPA 표기 (라틴어)/ˈroːmʊɫʊs/
통치
칭호로마 왕
재위 기간기원전 753년–기원전 716년 (전통적인 날짜)
전임자루미토르 (알바 롱가)
계승자누마 폼필리우스
계승 형식선양
개인 정보
출생지알바 롱가
사망지로마
배우자헤르실리아
자녀아윌리우스
아버지마르스
어머니레아 실비아
기타 정보
신격화퀴리누스

2. 로물루스와 레무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레아 실비아와 마르스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는 알바 롱가의 왕이었으나, 동생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겼다.[2][3]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아들을 죽이고,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여사제로 만들어 독신 생활을 강요했다.[2][3]

늑대 상은 쌍둥이들이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아 실비아가 임신하자, 아물리우스는 그녀를 가두고 쌍둥이가 태어나자 티베르 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2][4] 그러나 쌍둥이들은 팔라티노 언덕 기슭의 무화과나무 아래에 버려졌고, 암늑대가 젖을 먹여 키웠다.[2][4] 이후 왕의 목동 파우스툴루스와 그의 아내 아카 라렌티아에게 발견되어 성장했다.[5]

성장한 쌍둥이 형제는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누미토르를 복위시켰다.[6][7] 이후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티베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돌아왔으나, 도시 건설 장소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6][8]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을,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주장하며 신의 징조를 기다렸다.[6][8] 레무스는 여섯 마리의 독수리를, 로물루스는 열두 마리의 독수리를 보았고, 로물루스가 선택받은 것으로 여겨졌다.[6][8]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고랑을 파서 도시의 경계를 표시했다. 그러나 레무스는 이를 조롱하며 고랑을 뛰어넘었고, 분노한 로물루스(혹은 그의 추종자)는 레무스를 죽였다.[6][8] 다른 전승에서는 레무스가 파우스툴루스와 함께 난투극 중에 죽었다고도 한다.

2. 1. 탄생과 성장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레아 실비아와 마르스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는 알바 롱가의 왕이었으나, 동생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겼다.[2][3]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아들을 죽이고,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여사제로 만들어 독신 생활을 강요했다.[2][3]

레아 실비아가 임신하자, 아물리우스는 그녀를 가두고 쌍둥이가 태어나자 티베르 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2][4] 그러나 쌍둥이들은 팔라티노 언덕 기슭의 무화과나무 아래에 버려졌고, 암늑대가 젖을 먹여 키웠다.[2][4] 이후 왕의 목동 파우스툴루스와 그의 아내 아카 라렌티아에게 발견되어 성장했다.[5]

다른 설에 따르면, 알바 롱가는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인 실비우스 왕의 후예들이 다스렸다. 실비우스 왕의 11대 후손인 프로카 왕 사후, 왕위는 장남 누미토르에게 계승되었으나, 차남 아물리우스가 왕위를 찬탈했다.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의 여사제로 삼아 혈통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마르스 신과의 사이에서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다. 아물리우스는 쌍둥이를 죽이려 했으나, 병사들이 몰래 강에 띄워 보냈다.[41]

2. 1. 1. 알바 롱가 왕위 계승 분쟁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레아 실비아와 마르스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는 알바 롱가의 왕이었으나, 동생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겼다.[2][3]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아들을 죽이고,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여사제로 만들어 독신 생활을 강요했다.[2][3]

레아 실비아가 임신하자, 아물리우스는 그녀를 가두고 쌍둥이가 태어나자 티베르 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2][4] 그러나 쌍둥이들은 팔라티노 언덕 기슭의 무화과나무 아래에 버려졌고, 암늑대가 젖을 먹여 키웠다.[2][4] 이후 왕의 목동 파우스툴루스와 그의 아내 아카 라렌티아에게 발견되어 성장했다.[5]

다른 설에 따르면, 알바 롱가는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인 실비우스 왕의 후예들이 다스렸다. 실비우스 왕의 11대 후손인 프로카 왕 사후, 왕위는 장남 누미토르에게 계승되었으나, 차남 아물리우스가 왕위를 찬탈했다.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의 여사제로 삼아 혈통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마르스 신과의 사이에서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다. 아물리우스는 쌍둥이를 죽이려 했으나, 병사들이 몰래 강에 띄워 보냈다.[41]

2. 2. 형제간의 갈등과 로마 건국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레아 실비아와 마르스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다.[2] 이들의 외조부 누미토르는 알바 롱가의 왕이었으나, 동생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겼다.[2][3] 아물리우스는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처녀로 만들어 독신 생활을 강요했다.[2][3] 레아가 임신하자 아물리우스는 그녀를 가두고, 쌍둥이가 태어나자 티베르 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2][4] 그러나 쌍둥이는 암늑대에게 발견되어 젖을 먹고 자랐으며, 이후 왕의 목동 파우스툴루스와 그의 아내 아카 라렌티아에게 발견되어 양육되었다.[5]

성장한 쌍둥이 형제는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누미토르를 복위시켰다.[6][7] 이후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티베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돌아왔으나, 도시 건설 장소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6][8]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을,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주장하며 신의 징조를 기다렸다.[6][8] 레무스는 여섯 마리의 독수리를, 로물루스는 열두 마리의 독수리를 보았고, 로물루스가 선택받은 것으로 여겨졌다.[6][8]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고랑을 파서 도시의 경계를 표시했다.[9] 그러나 레무스는 이를 조롱하며 고랑을 뛰어넘었고, 분노한 로물루스(혹은 그의 추종자)는 레무스를 죽였다.[6][8] 다른 전승에서는 레무스가 파우스툴루스와 함께 난투극 중에 죽었다고도 한다.

로마 건국은 매년 4월 21일 파릴리아 축제로 기념되었다.[9] 로물루스는 로물루스 성벽으로 팔라티노 언덕을 요새화하고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9][10] 이후 백성의 동의를 얻어 왕이 되었고, 주피터에게 제사를 지내고 좋은 징조를 받은 후 왕관을 받았다.[11]

3. 로마 건국과 통치

로물루스는 로마의 건국 이후, 도시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정치, 군사 제도를 정비했다.[9][10] 백성의 동의를 얻어 왕이 된 로물루스는 주피터에게 제사를 지내고 좋은 징조를 받아 왕관을 받았다.[11]

로물루스는 인구를 '람네스', '티티엔세스', '루케레스'의 세 부족으로 나누고, 각 부족을 다시 10개의 쿠리아로 나누어 조세와 군사 징집의 기반을 마련했다.[12][13] 각 쿠리아는 100명의 보병과 10명의 기병을 제공하여, 총 3,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레기오를 창설했다.[14][15] 이 300명의 기병은 켈레레스("신속한 자들")로 불리며 왕실 근위대를 구성했다.

또한 유력 가문 출신 100명을 선발하여 원로원을 설립하고, 이들을 '파트레스'(시조)라 칭했다.[16][17] 이들의 후손은 파트리키라 불리며 귀족 계급을 형성했다. 플레브스 또는 "플레베이"로 알려진 평민 계급은 로마에서 망명을 구한 종들, 해방 노예들, 도망자들, 전쟁 포로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16][17]

로물루스는 도시 성장을 위해 영아 살해를 금지하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망명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설립하여 자유민과 노예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18][19] 이러한 조치는 로마의 인구 증가에 기여했다.

로물루스 시대에는 파트루누스와 클리엔테스라는 독특한 사회 계층도 형성되었다. 로마는 주변 라틴 도시에서 이주민들이 몰려들면서 급속도로 발전했고, 로물루스는 로마의 일곱 언덕에 새로운 주거 지역을 건설하고 성벽을 쌓아 도시의 기반을 다졌다.

로마의 남성 편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물루스는 사비니족과의 교류를 시도했다. 넵투누스 축제에 사비니족을 초청했으나, 라틴인의 힘을 두려워한 사비니족은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로물루스는 축제에 온 다른 부족들의 딸들을 납치하여 로마 남성들과 결혼시키는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

3. 1. 정치, 군사 제도 정비

로물루스는 로마의 건국 이후, 도시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정치, 군사 제도를 정비했다.[9][10] 백성의 동의를 얻어 왕이 된 로물루스는 주피터에게 제사를 지내고 좋은 징조를 받아 왕관을 받았다.[11]

로물루스는 인구를 '람네스', '티티엔세스', '루케레스'의 세 부족으로 나누고, 각 부족을 다시 10개의 쿠리아로 나누어 조세와 군사 징집의 기반을 마련했다.[12][13] 각 쿠리아는 100명의 보병과 10명의 기병을 제공하여, 총 3,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레기오를 창설했다.[14][15] 이 300명의 기병은 켈레레스("신속한 자들")로 불리며 왕실 근위대를 구성했다.

또한 유력 가문 출신 100명을 선발하여 원로원을 설립하고, 이들을 '파트레스'(시조)라 칭했다.[16][17] 이들의 후손은 파트리키라 불리며 귀족 계급을 형성했다. 플레브스 또는 "플레베이"로 알려진 평민 계급은 로마에서 망명을 구한 종들, 해방 노예들, 도망자들, 전쟁 포로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16][17]

로물루스는 도시 성장을 위해 영아 살해를 금지하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망명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설립하여 자유민과 노예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18][19] 이러한 조치는 로마의 인구 증가에 기여했다.

로물루스 시대에는 파트루누스와 클리엔테스라는 독특한 사회 계층도 형성되었다. 로마는 주변 라틴 도시에서 이주민들이 몰려들면서 급속도로 발전했고, 로물루스는 로마의 일곱 언덕에 새로운 주거 지역을 건설하고 성벽을 쌓아 도시의 기반을 다졌다.

로마의 남성 편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물루스는 사비니족과의 교류를 시도했다. 넵투누스 축제에 사비니족을 초청했으나, 라틴인의 힘을 두려워한 사비니족은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로물루스는 축제에 온 다른 부족들의 딸들을 납치하여 로마 남성들과 결혼시키는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

3. 2. 사비니 여인 납치와 통합



로마의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물루스는 축제를 열어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했다.[16] 이 사건으로 인해 카이니나, 크루스투메리움, 안테므나이 등 라틴 도시들이 분노하여 로마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사비니의 준비에 지친 카이니나, 크루스투메리움, 안테므나이는 동맹 없이 독자적으로 로마를 공격했다. 카이니나가 먼저 공격했지만, 로마군에 의해 신속하게 패배하고 도시는 함락되었다. 로물루스는 일대일 결투에서 카이니나 왕을 직접 죽이고 그의 갑옷을 벗겨 스폴리아 오피마를 차지했으며, 주피터 페레트리우스 신전을 건설할 것을 서약했다. 로물루스는 레기오를 이끌고 전쟁에 나서 로마로 쳐들어온 여러 국가의 군대를 모두 격파했다. 주력이었던 카에니나 왕국의 왕 아크론은 전장에서 전사했고, 로물루스는 아크론 왕이 착용하고 있던 갑옷을 전리품(스포리아 오피마)으로서 주신 라티누스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로물루스는 동족인 카에니나 왕국에 관대하게 대해 그들을 모두 로마 왕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안테므나이와 크루스투메리움도 차례로 정복되었다. 이들 백성 중 일부, 주로 납치된 여성들의 가족들은 로마에 정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20]

3. 2. 1. 카이니나, 안템나이, 크루스투메리움과의 전쟁



새로운 도시는 대부분 젊은 미혼 남성인 식민지 개척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망명자들이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었지만, 미혼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훨씬 많았다. 로마와 인근 지역 사회 간의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새로운 도시는 결국 쇠퇴할 것이었다. 로물루스는 인근 마을에 사절을 보내 로마 시민과의 혼인을 허락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그의 제안은 거절당했다. 로물루스는 다른 정착지에서 여성을 획득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중요한 축제와 경기를 발표하고 인근 도시 사람들을 초대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사비니 사람들이 대거 참석했다. 미리 정해진 신호에 따라 로마인들은 손님들 중 결혼 가능한 여성들을 붙잡아 끌고 갔습니다.[16]

분노한 도시들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했고, 만약 그들이 완전히 연합했다면 로물루스를 패배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비니의 준비에 지친 카이니나, 크루스투메리움, 안테므나이의 라틴 마을들은 동맹국 없이 행동했다. 카이니나는 처음으로 공격했다. 그들의 군대는 신속하게 패주했고, 도시는 함락되었다. 로물루스는 카이니나의 왕자를 일대일 결투에서 직접 물리치고 죽인 후, 그의 갑옷을 벗겨 처음으로 ''스폴리아 오피마''를 차지하고 주피터 페레트리우스 신전을 건설할 것을 서약했다.

로물루스는 레기오를 이끌고 전쟁에 나서 로마로 쳐들어온 여러 국가의 군대를 모두 격파했다. 주력이었던 카에니나 왕국의 왕 아크론은 전장에서 전사했고, 로물루스는 아크론 왕이 착용하고 있던 갑옷을 전리품(스포리아 오피마)으로서 주신 라티누스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로물루스는 동족인 카에니나 왕국에 관대하게 대해 그들을 모두 로마 왕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안템나이와 크루스투메리움은 차례로 정복되었다. 그들의 백성 중 일부, 주로 납치된 여성들의 가족들은 로마에 정착하도록 허락받았다.[20]

이윽고 상황을 지켜보던 쿠레스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와의 전투에 참가했다. 타티우스는 로마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공격했다. 언덕의 수비대는 쿠레스 군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타티우스는 지휘관의 딸 탈페이아를 매수하여 성을 열게 했다. 탈페이아는 타티우스로부터 협력하면 보답으로 "병사들이 지니고 있는 것"을 주겠다는 말을 들었고, 이를 병사들이 지니고 있는 금팔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팔찌 대신 방패를 탈페이아에게 던졌고, 그녀는 방패에 깔려 죽었다.

타티우스의 계략으로 카피톨리누스 요새를 빼앗긴 로물루스는 주력 군대를 되돌려 두 군대는 도시 중심부의 광장에서 격돌했다. 전투 초반 로마군은 불리한 상황에 처했고, 로물루스는 조상 라티누스 신에게 승리를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다음 날, 로마군이 반격으로 전세를 역전시켰고, 패한 쿠레스 군은 로마에서 패주했다. 곧바로 로마군은 쿠레스 군을 추격했지만, 거기서 끌려가던 주민 중 사비니족 사람들이 로물루스에게 사비니족 국가들에 관대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쿠레스 왕 티투스 타티우스를 공동 왕으로 맞이하고, 사비니족의 유력 귀족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는 것을 대안으로 사비니 전역을 병합했다.

3. 2. 2. 쿠레스(사비니)와의 전쟁

새로운 도시 로마는 젊은 미혼 남성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여성의 수가 부족하여 도시의 미래가 불투명했다. 로물루스는 주변 부족들에게 혼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축제를 열어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하는 사건(사비나인 강간)을 일으켰다.[16]

이에 분노한 카이니나, 크루스투메리움, 안테므나이 등 라틴 도시들이 로마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로마는 이들을 차례로 격파했고, 로물루스는 카이니나 왕을 직접 죽이고 스폴리아 오피마를 차지하여 주피터 페레트리우스 신전을 건설할 것을 서약했다.[20]

이후 티투스 타티우스가 이끄는 사비니 군대가 로마를 공격했다. 그들은 로마 지휘관의 딸 타르페이아를 매수하여 요새를 점령했다.

요새를 잃은 로마군은 불리한 상황에서 사비니군과 전투를 벌였다. 격렬한 전투 중 로물루스는 주피터 스타토르 신전 건설을 서약하며 로마군의 사기를 북돋았다.[21]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사비니 여인들이 양측 군대 사이로 뛰어들어 아버지와 형제, 남편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평화를 찾을 것을 간청했다.

결국 양측 지도자들은 평화 협정을 맺고,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로 합의했다.[21]

3. 3. 로물루스의 죽음과 신격화

로물루스는 37년 동안 로마를 통치한 후, 마르스 평야에서 군대를 사열하던 중 갑작스럽고 격렬한 폭풍 속에서 사라졌다고 전해진다.[24][25] 이에 대해 리비우스는 로물루스가 상원의원들에게 살해당했거나, 질투심에 의해 찢겨 죽었거나, 혹은 전쟁의 신 마르스에 의해 하늘로 승천했다고 기록했다. 리비우스는 로마인들이 신들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믿게 하고, 로물루스의 이름으로 확장을 계속할 수 있도록, 왕의 죽음에 관한 마지막 이론(신격화)을 믿는다고 하였다.[26]

로물루스는 추종자들을 얻었고, 이는 나중에 아마도 원래 사비니족의 토착 신인 퀴리누스의 숭배와 동화되었다. 엔니우스(기원전 180년대 활동)는 키리누스를 언급하지 않고 로물루스를 독자적인 신으로 언급한다. 로마 신화학자들은 키리누스를 원래 사비니족의 전쟁 신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로마의 마르스와 동일시했다. 루킬리우스는 키리누스와 로물루스를 별개의 신으로 나열하고, 바로는 그들에게 서로 다른 신전을 부여한다. 키리누스의 이미지는 그를 창을 든 수염 난 전사로 묘사하며, 로마의 힘을 구현하는 전쟁의 신이자 로마 도시의 신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낸다. 그는 플라멘 마이오르인 플라멘 키리날리스를 두었는데, 그는 로물루스의 왕위 계승자인 누마 폼필리우스에게 귀속되는 로마 종교의 제정에서 그의 숭배와 의식을 감독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이전에 로물루스와 키리누스가 혼합된 증거는 없다.[33][34]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 XIV ([https://ovid.lib.virginia.edu/trans/Metamorph14.htm#487618622 805-828행])에서 로물루스와 그의 아내 헤르실리아신격화를 묘사하며, 그들에게 각각 키리누스와 호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로물루스의 아버지인 마르스는 주피터의 허락을 받아 아들을 올림푸스로 데려가 올림포스 신들과 함께 살게 한다.[35]

이러한 전통은 갑작스러운 폭우 속에서 로물루스가 사라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42] 암살설과 신격화설이 동시에 존재했다.

리비우스는 백성들이 로물루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했고, 일부 귀족들은 왕을 신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장례식에 참석한 귀족들과 백성들은 이에 동의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소수의 왕의 적대자들은 원로원과의 불화 관계를 소문냈지만, 백성들과 귀족들의 왕에 대한 존경심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들은 점차 원로원을 증오하며 로물루스를 미워하여 죽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율리우스 프로쿨루스(율리우스 씨족의 조상으로 여겨짐)는 원로원에서 “로물루스 폐하는 신이 되셨습니다. … 우리의 아버지이자 왕이신 분은 어젯밤 제 침상 곁에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진 저는 왕께 그 얼굴을 뵙기를 간청했고, 왕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왕은 저에게 로마의 번영을 백성에게 맡긴다고 말씀하시고, 신으로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라고 연설했다.[43]

리비우스는 로물루스가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으며, 율리우스 프로쿨루스는 신격화를 통해 죄의 추궁을 면하려 했다고 추측했다. 키케로는 프로쿨루스가 귀족이 아닌 평범한 평민이었고, 귀족들에게 압력을 받아 로물루스의 꿈을 보았다고 증언했다는 설을 주장하며, 그의 저서를 통해 로물루스 암살과 신격화에 관한 논고를 널리 알렸다.[44]

카시우스 디오는 『로마사』에서 로물루스가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의회에서 암살당했다고 더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경호병이 있었지만, 일식과 폭우로 인해 암살이 교묘하게 은폐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율리우스 프로쿨루스가 로물루스를 신격화하는 한편 새로운 왕을 선택하기 위해 분주했으며, 결국 누마 폼필리우스가 즉위할 때까지 원로원이 사실상 통치를 대행했다고 기록했다.[45]

결과적으로 원로원에 의해 로물루스는 퀴리누스 신의 화신이며, 속세에서의 목적을 달성하고 하늘로 돌아갔다고 여겨졌다.

4. 로물루스 신화의 의의와 영향

4. 1. 역사적 기반에 대한 논쟁

로물루스와 레무스 신화의 역사적 기반은 불분명하며 논쟁의 여지가 있다.[37][38] 현대 학계는 이 신화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로마 건국 신화에 대한 후대의 해석으로 접근한다. 로마 역사가들은 특정한 버전과 종합본을 권위 있는 것으로 제시하며, 모순과 변형을 제거한 공식적인 역사를 만들었다. 이는 당대의 발전, 족보 및 행동을 모스 마이오룸과 관련지어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서술들은 대중적 또는 민속적 전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며, 그중 일부는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없다.[37]

고고학자 안드레아 카란디니는 로마 팔라티노 언덕 북쪽 경사면에서 1988년 고대 성벽을 발견하고, 이를 무루스 로물리라 명명하며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는 극소수의 현대 학자 중 한 명이다.[37] 카란디니는 이 구조물을 기원전 8세기 중반으로 추정했다.

로물루스에 관한 많은 신화의 불쾌한 요소들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이를 "수치스러운" 또는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묘사했다.[39] 고대에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반로마적이고 반이교도적인 선전의 일부가 되었다. 최근에 역사가 헤르만 스트라스부르거는 이것들이 진정한 로마 전통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로마의 적들, 아마도 마그나 그라이키아에서 발명하고 대중화했다고 가정했다.[39] 그러나 팀 코넬 (1995)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이 시대에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가 이미 표준 형태를 취했고 로마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점에 주목하며 반박했다. 로물루스 신화의 다른 요소들은 민담과 전설의 일반적인 요소와 분명히 유사하며, 따라서 이 이야기들이 오래되었고 토착적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39] 모밀리아노는 스트라스부르거의 주장이 잘 발전되었지만 전적으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로물루스 신화가 조롱의 행위였다면, 그것은 큰 실패였다.[38]

4. 2.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로물루스 신화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예술, 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사빈 여인들의 납치, 타르페이아의 이야기, 티투스 타티우스의 죽음 등은 예술 작품의 단골 소재였다.

16세기 후반, 볼로냐의 마냐니 가문은 로마 건국 신화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들을 의뢰했다. 가브리엘레 피오리니는 갓난아기 쌍둥이를 안은 헤라클레스 조각상을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후원자 가문의 얼굴이 담겨 있다. 카라치 형제(루도비코, 안니발레, 아고스티노)는 '로마 건국의 역사'로 알려진 프레스코 연작을 제작했다. 이 작품에는 쟁기로 로마 도시의 경계를 표시하는 로물루스,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 신전에 아크론 왕의 전리품을 바치는 로물루스, 쿠르티우스 호수 전투, 프로쿨루스 율리우스에게 나타난 로물루스 등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는 일 소도마, 니콜라 푸생, 피터 폴 루벤스, 잠보로냐, 야코포 리고치, 테오도르 판 툴던, 세바스티아노 리치, 요한 하인리히 쇤펠트, 찰스 크리스티안 나흘 등 많은 화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타르페이아의 이야기는 아이밀리아 바실리카의 프리즈(기원전 100년-기원후 100년)에 펜텔리코 대리석 조각으로 남아있으며, 소도마의 작품으로도 전해진다.

헤르실리아는 조반니 바티스타 치프리아니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치의 판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 게르치노의 "헤르실리아가 로물루스와 타티우스를 갈라놓다" 등에 등장한다.

1788년 로마 대상은 타티우스의 죽음(''La mort de Tatius'')을 주제로 했다. 이 대회에서 에티엔-바르텔레미 가르니에가 우승했으며, 안-루이 지로데 드 루시-트리오송과 자크 레아튀도 이 주제로 작품을 남겼다.

4. 3. 현대적 해석

5. 각주

6. 참고 문헌

리비우스, 디오니시오스, 플루타르코스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를 자료로 사용하였다.[31] 다른 중요한 자료로는 오비디우스의 ''파스티''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있다.[31] 그리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로마가 그리스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기원전 5세기의 로고그래퍼 헬라니코스가 아이네이아스를 건설자로 지목하면서 거슬러 올라간다.[31] 로마 역사가들은 로물루스아이네이아스의 후손으로 연결시키고 팔라티노 언덕에 이전 정착지가 있었다고 언급하며, 때로는 에반데르와 그의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그 공을 돌리기도 한다.[31]

이 전설 전체는 로마의 자기 인식, 기원 및 도덕적 가치를 담고 있으며, 현대 학계에서는 이것이 모든 건국 신화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것 중 하나로 남아 있다.[31] 고대 역사가들은 로물루스가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데 의심하지 않았다.[32]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이름이 도시 이름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한다.[32] 로마 역사가들은 도시의 건설 시기를 기원전 758년에서 728년 사이로 추정했으며, 플루타르코스바로의 친구 타루티우스의 계산에 따르면 기원전 771년이 로물루스와 그의 쌍둥이 형제의 출생년도라고 전한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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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dríguez Mayorgas, Ana, "로물루스, 아이네이아스, 그리고 로마 공화국의 문화적 기억", ''Athenaeum'', Vol. 98, No. 1, 2010, pp. 89–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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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외부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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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뉴스 ローマ建国神話の王ロムルスの石棺? 約100年前に発掘のひつぎ公開 https://www.afpbb.co[...] AFPBB News 2020-02-23
[41] 비교연구 Romulus and Remus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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