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S 필리핀시 (CV-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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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SS 필리핀 시(CV-47)는 에식스급 항공모함으로, 1945년 진수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취역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근접 항공 지원, 전략 목표 공격, 유엔군 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9개의 종군 성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대잠전 항공모함으로 재지정되어 활동하다가 1958년 퇴역하여 1971년 스크랩으로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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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SS 필리핀시 (CV-47) - [배(Ship)]에 관한 문서 | |
|---|---|
| 함선 정보 | |
| 함명 | 필리핀 해 |
| 함명 유래 | 필리핀해 해전 |
| 건조국 | 미국 |
| 소속 | 미국 해군 |
| 함종 | 항공모함 (CV) → 공격 항공모함 (CVA) → 대잠 항공모함 (CVS) |
| 급 | 에식스급 |
| 건조 정보 | |
| 건조 조선소 | 포어 리버 조선소 |
| 기공 | 1944년 8월 19일 |
| 진수 | 1945년 9월 5일 |
| 취역 | 1946년 5월 11일 |
| 퇴역 | 1958년 12월 28일 |
| 제적 | 1969년 12월 1일 |
| 최후 | 1971년 3월, 해체 |
| 제원 | |
| 기준 배수량 | 27,100 톤 |
| 전체 길이 | 888 피트 (약 271 미터) |
| 수선 길이 | 820 피트 (약 250 미터) |
| 전체 폭 | 147 피트 6 인치 (약 45 미터) |
| 수선 폭 | 93 피트 (약 28 미터) |
| 흘수 | 28 피트 7 인치 (약 8.7 미터) |
| 동력 | 보일러 8기 150,000 마력 |
| 추진 방식 | 증기 터빈 4기 4축 추진 |
| 최대 속력 | 33 노트 (약 61 km/h) |
| 항속 거리 | 20,000 해리 (15노트 기준) |
| 승무원 | 장교 및 사병 3448명 |
| 무장 | |
| 무장 | 5인치 연장포 4문 5인치 단장포 4문 40mm 4연장 기관포 8문 20mm 기관포 46문 |
| 장갑 | |
| 장갑 | 현측: 2.5 - 4 인치 (약 64 - 102 mm) 비행 갑판: 1.5 인치 (약 38 mm) 격납 갑판: 2.5 인치 (약 64 mm) 사령탑: 1.5 인치 (약 38 mm) |
| 탑재 항공기 | |
| 탑재 항공기 | 90 - 100대 |
| 기타 | |
| 기타 | 함재기용 엘리베이터 (중앙 2기, 현측 1기) |
| 이미지 | |
![]() | |
2. 건조
필리핀 해는 에식스급 항공모함의 마지막 함선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위해 건조된 가장 크고 많은 주요 함선 중 하나였다.[1] 1943년 6월에 밸리 포지와 이오지마와 동시에 발주되었다.[2]
1943년 3월 이후 생산된 "롱헐(Long-hull)" 에식스급 설계를 따랐으며, 선수 부분을 "클리퍼" 형태로 연장하여 경사와 플레어를 증가시켜 2개의 4연장 40mm 포 포좌를 위한 갑판 공간을 확보했다.[3]
1942년 이후 건조된 에식스급 함선 중 본 옴 리처드만이 원래의 "숏헐(short-hull)" 설계를 따랐다. 후기 함선들은 "롱보우 유닛",[3][4] "롱헐 그룹",[5][6] 또는 "''타이콘데로가''급"으로 다양하게 불렸지만, 미국 해군은 에식스급의 롱헐과 숏헐을 제도적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전후 개조 및 업그레이드를 두 그룹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했다.[7]
CV-47의 기공식은 1944년 8월 19일 매사추세츠 주 퀸시에 있는 베들레헴 철강 회사에서 거행되었다. 원래 라이트 형제를 기리기 위해 라이트로 명명될 예정이었지만, 1944년 6월 19일 필리핀 해 해전 이후 해군은 함선의 이름을 그 전투의 이름을 따서 1945년 2월 13일에 개명했다.[10]
이 함선은 V-J 데이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며칠 후인 1945년 9월 5일에 진수되었다. 켄터키 주지사 앨버트 "해피" 챈들러의 부인이 명명했다.[7]
2. 1. 제원
''필리핀 해''는 27100ton의 만재배수량을 가졌다. 전체 길이는 약 270.66m, 너비는 약 28.35m, 흘수는 약 11.89m였다.[9] 8개의 600psi 밥콕 앤 윌콕스 보일러와 150000shp 웨스팅하우스 기어드 증기 터빈으로 구동되어 4개의 프로펠러를 돌렸다. 다른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마찬가지로 최고 속도는 33kn였으나, 해상 시험에서 30kn의 속도만 기록했다.[1] 총 승무원 수는 3,310명이었다.[9]| 항목 | 제원 |
|---|---|
| 만재배수량 | 27100ton |
| 전체 길이 | 약 270.66m |
| 너비 | 약 28.35m |
| 흘수 | 약 11.89m |
| 추진기관 | 8 x 밥콕 앤 윌콕스 보일러, 4 x 증기 터빈, 4축 추진, 150000shp |
| 최대 속도 | 33kn (설계상), 30kn (실제) |
| 승조원 | 3,310명 |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당시 필리핀시는 샌디에이고에서 정비 중이었다. 7월 5일 진주만을 거쳐 8월 4일 오키나와에 도착, 제77기동부대에 합류했다.[17][18] 필리핀시는 미국 밸리포지함, 영국 트라이엄프함에 이어 한국에 도착한 세 번째 항공모함이었다.[19]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 5월 11일, 매사추세츠주 사우스 보스턴의 보스턴 해군 조선소에서 취역한 ''필리핀 시''는 초기에는 해군 항공 기지 퀀셋 포인트에서 훈련 및 시험 운용을 수행했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군대 해산으로 인한 병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9월 말 해상 시험을 위해 승선했다.[7] 이후 항공단 제20단을 승선시켜 버지니아주 노퍽으로 이동, 쿠바 해역에서 초도 운항 및 훈련을 실시했다.[7]
이러한 시험 후, ''필리핀 시''는 하이점프 작전에 배정되었다. 1947년 1월, 리처드 E. 버드 후방 제독이 이끄는 남극 탐험을 지원하기 위해 더글러스 R4D-5 스카이트레인 수송기 6대, 스틴슨 OY-1 센티넬 연락기 2대, 시코르스키 HO3S-1 헬리콥터 1대 등을 싣고 남극으로 향했다.[12] 리틀 아메리카에서 떨어진 지점에서 R4D를 발사하여 남극 탐험을 지원했다.[12]
1948년 2월, ''필리핀 시''는 해군 준장 랄프 E. 제닝스가 이끄는 항공단 제4단의 기함이 되었고, 포레스트 셔먼 부제독의 제6함대에 배속되어 지중해로 첫 배치를 떠났다.[12] 8,534시간의 비행 시간을 기록하며 6월에 귀환했다.[12] 이후 작전 개발 부대의 일원으로 새로운 항공모함 항공 교리를 테스트하고, 북대서양에서 한랭 기후 착륙 테스트를 실시했다.[14]
1949년 1월, ''필리핀 시''는 조셉 J. 클라크 후방 제독 휘하의 항공단 제4단으로 항공단 제7단과 함께 다시 지중해에서 작전을 펼쳤으며, 영국 함대와 연합 훈련을 실시했다.[14] 5월 말 귀환하여 보스턴 해군 조선소에서 개조를 받았다.[15] 그해 가을, 항공단 제1단과 함께 카리브해로 돌아가 함대 훈련을 계속하고 새로운 제트 엔진 전투기를 테스트했다.[14]
4. 한국 전쟁
8월 5일 태스크 포스 77의 기함이 되어,[21] 이리시, 목포시, 군산시에 최초의 공습을 가했다. 하루 최대 140회 출격하며 북한군의 배, 다리, 댐 등을 공격했다.[23] 8월 31일 낙동강 전투에서는 밸리포지함과 함께 263회 출격해 북한군을 저지했으며,[25] 마산 전투에서는 약 321.87km 떨어진 거리에서도 마산의 목표물을 공습했다.[26]
9월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황해에서 북한군 진지를 공격하고, 서울 탈환 작전에서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했다.[28] 11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할 때, 필리핀시는 장진호 전투에서 고립된 제10군단에 대한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하고, 흥남 철수 작전을 지원했다.[35]
1950년 말부터 1951년 초까지, 필리핀시는 38도선 부근의 중국군을 상대로 공격을 지속하며 유엔군의 후퇴를 엄호했다. 1951년 3월 요코스카 해군 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항공단 2로 교체했으며,[35] 4월에는 타이완 해협에서 타이완에 대한 지원을 보여주는 시위 비행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1951년 봄까지 지상군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35]
1952년 8월 샌디에이고로 귀환한 필리핀시는 10월에 CVA로 함종이 변경되었으며, 12월 초에 다시 극동으로 향했다. 이후 적의 보급 및 수송로 차단을 위한 공격을 지속했다. 1953년 8월 14일 알라메다 해군 기지로 귀환하여 오버홀을 받았다.
4. 1. 주요 작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 시"(USS Philippine Sea, CV-47)는 대서양 함대에서 태평양 함대로 배속 변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샌디에이고에서 수리를 받고 있었다. 당시 서태평양에 전개된 유일한 미국 해군 항공모함인 "밸리 포지(USS Valley Forge, CV-45)"와 교대하기 위해 10월에 출항할 예정이었다. "필리핀 시"는 진주만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11항공단을 탑재하여 7월 5일에 출항, 진주만에서 10일간 훈련을 받고 24일에 출항하여 전속력으로 서태평양으로 향했다. 8월 4일에 오키나와에 도착하여 제77기동부대에 편입되었다.[17][18]
"필리핀 시"는 8월 5일에 제77기동부대의 기함으로서 한반도 수역에 전개했다. 함재기에서 발사된 수 톤의 폭탄, 로켓탄 및 네이팜탄을 전략 목표에 투하했으며, 하루 최대 140회 출격했다. 재무장, 급유 및 보수를 위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연속적으로 작전 활동을 수행했다.[23]
제77기동부대의 다른 함정과 함께 "필리핀 시"는 9월에 북한의 철도 및 서울에서 원산으로의 도로를 공격했다. 그 후 황해에서 인천 상륙 작전 지원을 위한 대지 공격을 수행했으며, 9월 15일 작전 결행일에는 내륙에서 적 증원 부대 차량을 발견 즉시 공격했다. 초기 공격에 이어 "필리핀 시" 함재기 부대는 서울 진격 부대의 상공 엄호를 지속했다.[21][28]
2개월 후 중국 인민 해방군의 예기치 않은 공격이 유엔군 지상 부대에 가해졌고, "필리핀 시" 함재기 부대도 격전에 직면했다. 압록강에서부터 해병대의 긴 퇴각로를 F9F 전투기, A-1 전투 폭격기 및 F4U 전투 폭격기로 상공 엄호했다. 흥남까지 "필리핀 시" 및 제77기동부대의 다른 함정 탑재기에 의한 상공 엄호가 이루어졌으며, 수백 대의 함재기가 해안으로 피난해 온 150,000명에 달하는 병사 및 시민의 상공을 비행했다.[35]
"필리핀 시"는 1951년 3월 후반에 요코스카 해군 기지에서 휴식 및 수리를 받고, 탑재 항공단을 교체했다. "필리핀 시"에 탑재된 제11항공단은 "밸리 포지"의 제2항공단과 3월 28일 교대했다. 같은 날 "필리핀 시"는 제7함대 사령관 H. M. 마틴 중장의 기함이 되었다.[35]
4월, 일본해에서 제7함대에 소속된 제77기동부대를 이끌고 타이완 해협에서 남중국해로 전개했다. 타이완 해협에서는 함재기에 의한 시위 활동을 타이완 상공에서 실시하고, 사흘 후에 지상 부대 지원을 위해 다시 한반도로 전개했다. "필리핀 시"의 함재기에 의한 제공권 확보 결과, 1951년 봄 중국군의 공격은 병력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35]
"필리핀 시"는 한반도 수역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1951년 6월 9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서해안에서의 활동 후, 12월 31일에 샌디에이고를 출항하고, 1952년 1월 8일에 진주만에 도착, 1월 20일에 요코스카에 도착했다.[9]
1952년 8월, 샌디에이고로 귀환하고, 10월에 CVA로 함종이 변경되었다. 제9항공단을 탑재하고 1952년 12월 초에 다시 극동으로 향했다. 함재기 부대에 의한 공격으로 적의 보급, 수송로를 차단했다. 최초의 휴전 제안과 같은 시기에 시작된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전선 부대에 "24시간" 엄호 출격을 수행했다.
1953년 8월 14일에 알라메다 해군 기지로 귀환하고, 헌터스 포인트에서 오버홀을 위해 건조선거에 들어갔다. 오버홀 종료 후인 1954년 1월 9일에 다시 샌디에이고 근해에서 훈련을 시작, 3월 12일에 네 번째 극동 전개를 실시했다. "필리핀 시"는 마닐라를 거점으로 작전 활동에 종사했다.
극동 전개 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4년 7월 22일에 발생했다. 중국 군용기가 타이완 군용기로 오인하여, 중국 하이난섬 부근에서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정기편을 격추했다(캐세이퍼시픽 항공기 격추 사건). "필리핀 시"는 생존자 구조를 위해 해당 해역에 파견되었다. 수색 활동 중, 두 대의 중국 군용기가 공격을 가했고, "필리핀 시"의 함재기는 항공모함 "호넷(USS Hornet, CV-12)"의 함재기와 함께 이를 격추했다. 이 사건은 후에 "하이난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4. 2. 일화
1950년 9월 17일, F9F 팬더 전투기 조종사 잭슨 소위가 한강에서 케이블에 걸려 큰 부상을 입었으나, 동료들의 도움으로 항공모함에 무사히 착륙한 사건이 있었다.[9]
5. 한국 전쟁 이후
1951년 6월, ''필리핀해''는 한국에서의 첫 번째 임무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39] 12월 19일에는 미국 해군 함선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최초의 시험인 비상 핵무기 조립 시험이 이루어졌다.[39] 1952년 1월, ''필리핀해''는 요코스카에 도착하여 한국에 대한 두 번째 임무를 수행했다. ''필리핀해''는 수풍댐 공격을 포함한 전략적 목표물에 항공기를 투입했다.[40]
1952년 10월, ''필리핀해''는 공격 항공모함(CVA-47)으로 재지정되었다.[9] 1953년, 세 번째 한국 전쟁 파병을 마치고 알라메다 해군 기지로 귀환했다.[9] 1954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근에서 호넷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9]
1954년 7월, ''필리핀해''는 중국 항공기가 격추한 여객기의 생존자 수색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해''의 더글러스 A-1 스카이레이더 비행대가 중국 전투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반격하여 격추시켰다.[42][43]
1955년에는 영화 ''미스터 로버츠'' 촬영에 사용되었다.[44] 11월, 대잠 항공모함(CVS-47)으로 재지정되었다.[43] 1957년에는 서태평양에 배치되어 활동했다.[43] 1958년 12월 28일, ''필리핀해''는 퇴역하여 예비역 함대에 편입되었다.[46] 1959년 5월 15일, 보조 항공기 수송 및 착륙 훈련함(AVT-11)으로 재지정되었다.[9] 1969년 12월 1일, 해군 함정 등록부에서 삭제되었으며,[9] 1971년 3월, 스크랩으로 매각되어 해체되었다.[45]
''필리핀해''는 한국 전쟁 참전으로 9개의 전투 별을 받았다.[46]
6. 수상 내역
| 수상 내역 |
|---|
참조
[1]
간행물
''Essex''-class Aircraft Carrier
http://www.history.n[...]
United States Navy
2006-06-06
[2]
간행물
''Ticonderoga''-class Aircraft Carrier
http://www.history.n[...]
United States Navy
2001-10-0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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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USS ''Philippine Sea'' (CV-47) from Dictionary of American Fighting Ships and United States Naval Aviation, 1910–1995
http://www.navy.mil/[...]
US Navy
20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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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USS Philippine Sea Commanding Officers
http://www.navsource[...]
20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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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Miracle Landing off Korea
http://www.historyne[...]
2017-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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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Aviation History magazine
Aviation History magazine
201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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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80-G-439862 picture data
http://www.history.n[...]
201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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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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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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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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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뉴스
Parade of Navy Ships to Bring Thousands Home From Pacific
San Bernardino Daily Sun
1954-11-19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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