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챈들러
1. 개요
해피 챈들러는 켄터키주 출신의 정치인이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였다. 챈들러는 켄터키 주지사, 상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야구 커미셔너로 재임하며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 리그 진출을 승인하는 등 인종 통합에 기여했다. 그는 1955년 켄터키 주지사로 다시 선출되었으며, 1991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이름 | 해피 챈들러 |
|---|---|
| 원래 이름 | Happy Chand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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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1898년 7월 14일 |
|---|---|
| 출생지 | 미국 켄터키주 커라이던 |
| 사망일 | 1991년 6월 15일 |
| 사망지 | 미국 켄터키주 버셀리스 |
| 정당 | 민주당 |
| 학력 |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켄터키 대학교 |
| 배우자 | 밀드레드 루실 왓킨스 (1925년 결혼) |
| 자녀 | 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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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무 | 미국 육군 |
|---|---|
| 복무 기간 | 1918년 ~ 1919년 |
| 계급 | 이등병 |
| 근무 | 미국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직책 | 제49대 켄터키주지사 |
|---|---|
| 임기 | 1955년 12월 13일 ~ 1959년 12월 8일 |
| 부지사 | 해리 리 워터필드 |
| 전임 | 로런스 웨더비 |
| 후임 | 버트 콤스 |
| 직책 | 제44대 켄터키 주지사 |
|---|---|
| 임기 | 1935년 12월 10일 ~ 1939년 10월 9일 |
| 부지사 | 킨 존슨 |
| 전임 | 제임스 브레싯 주니어 |
| 후임 | 킨 존슨 |
| 직책 | 제2대 야구 커미셔너 |
|---|---|
| 임기 | 1945년 11월 1일 ~ 1951년 7월 15일 |
| 전임 | 케니소 마운틴 랜디스 |
| 후임 | 포드 프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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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
존 C. 브레킨리지
존 C. 브레킨리지는 켄터키주 출신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부통령을 지냈으며, 남북전쟁에서 남부 연합군 장군으로 활동하고 남부 연합의 마지막 전쟁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
제퍼슨 데이비스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아메리카 연합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연합을 이끌었으며, 노예제 옹호와 남부 연합 지도자로서의 역할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켄터키주지사 -
어니 플레처
어니 플레처는 켄터키 대학교에서 학사 및 의무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켄터키주 하원의원, 연방 하원의원, 제60대 켄터키 주지사를 역임한 미국의 정치인이다. -
켄터키주지사 -
앤디 베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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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터키주의 민주당 당원 -
프레드 빈슨
프레드 빈슨은 미국의 정치인이자 법조인으로, 연방 하원 의원, 컬럼비아 특별구 연방 항소 법원 판사,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미국 대법원장을 지냈으며, 트루먼 행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전후 경제 안정과 국제 금융 질서 재건에 기여했다. -
켄터키주의 민주당 당원 -
애슐리 저드
애슐리 저드는 미국의 배우이자 인도주의 활동가로,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UNFPA 친선대사로서 여성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2. 초기 생애와 교육
켄터키주 커라이던에서 수리공이자 시골 집배원, 전화 교환원이었던 아버지 조지프 챈들러와, 4세 때 가족을 떠난 주부였던 어머니 캘리 샌더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 때문에 부서진 집에서 자랐으며, 유일한 동생은 14세에 나무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챈들러는 헨더슨 군에 있는 커라이던 고등학교를 다녔다. 1918년부터 1년간 미국 육군에서 이등병으로 복무한 후, 켄터키주 렉싱턴에 있는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끊임없는 미소 때문에 "해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세탁소에서 일하며 등록금을 벌었고, 야구, 미식축구, 농구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921년 인문사회 학사 (B.A.) 학위를 받고 졸업했으며, 1년간 하버드 로스쿨을 다니다가 재정적인 이유로 그만두었다. 1924년 켄터키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3. 정치 경력
챈들러는 켄터키주 버셀리스에서 법률 업무를 시작하고 프로 야구를 했다. 1928년 우드퍼드군 연방항소법원의 최고 책임자로 선정되었고, 1930년 민주당 소속으로 켄터키주 상원의원 (1930년-1931년)을 거쳐,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켄터키주 부지사를 역임했다. 1935년 주지사 루비 래푼이 자리를 비운 사이, 주의 기본법 제정을 위한 총회 특별 회의를 소집했다. 이후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래푼이 지지하는 후보를 꺾고 그해 11월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3.1. 켄터키주지사 (1935-1939)
챈들러는 1935년 12월부터 1939년 10월까지 켄터키 주지사를 지냈다. 그의 행정부는 판매세를 술과 소득세로 대체하였고, 130개의 주정부 기관을 제거하였으며, 20의 적자를 해소하였다. 또한 교도소들을 개혁하고 많은 병원들을 건설하였으며 아동 노동 헌법의 비준을 확보하였다. 1939년, 유나이티드 광산 근로자들이 노동 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챈들러는 할런군에 질서 회복을 위해 1,000명의 주방위군을 파견했다.
주지사는 한 번의 임기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챈들러는 1938년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현직 상원의원 앨번 윌리엄 바클리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바클리가 50,000표 이상을 얻어 승리하였다.
3.2. 켄터키주 상원의원 (1939-1945)
챈들러는 1939년 사망한 켄터키주 상원의원 마블 로건의 자리를 승계하여 연방 정치에 진출했다. 1940년 11월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잔여 임기를 채웠고, 1942년 11월에는 공화당의 존 영 브라운을 꺾고 6년 임기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챈들러는 상원 군사 위원회 소위원회 의장을 맡아 1942년 알래스카와 알류산 열도를 방문했다. 그는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소련의 도움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독일보다 일본을 먼저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챈들러는 무기대여법, 역수 무역 연장법, 브레턴우즈 체제, 유엔 헌장, 농업안정국 대출 연장과 국토 확장을 위한 100 지출을 지지했다. 1944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 (1945-1951)
1945년 11월 챈들러는 상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케니소 마운틴 랜디스의 뒤를 이어 야구 커미셔너가 되었다. 그는 야구가 공정하고 정직하며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챈들러는 고등학생 야구 선수들이 졸업할 때까지 계약하지 않도록 소유주들을 설득하고, 더 많은 야간 경기를 지지했다.
챈들러는 선수들을 위해 연금 기금을 제정하고, 야구의 첫 텔레비전 계약을 맺었으며, 수익금을 선수들의 연금 기금을 지원하는데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구단주들은 강력한 커미셔너를 원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선호했다. 1951년 7월, 구단주들은 챈들러를 해고했다. 챈들러는 재선에 필요한 12표 중 9표밖에 얻지 못해 커미셔너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4.1. 재키 로빈슨의 MLB 진출과 인종 통합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 계약을 승인하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의 인종 통합에 물꼬를 텄다. 팀 소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챈들러는 로빈슨의 계약을 승인하여 윌리 메이스, 로이 캄파넬라와 같은 다른 흑인 선수들의 MLB 진출을 가속화했다.
4.2. 멕시코 리그 파동과 선수 이적 제한
1946년 멕시코 야구 리그로 이적한 18명의 메이저 리그 스타 선수들에게 5년간 출전 금지 처분을 내렸다. 몇몇 선수들은 1948년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에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듬해 챈들러가 그들에게 사면을 주면서 사건은 법정 밖에서 해결되었다.
4.3. 커미셔너직 사임
1946년 챈들러는 멕시코 야구 리그로 뛰어든 메이저 리그 스타 선수 18명에게 5년간 출장 금지 징계를 내렸다. 이들 중 일부는 1948년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듬해 챈들러가 사면하면서 법정 밖에서 사건이 해결되었다.
1947년 구단주들이 15 대 1로 반대했지만, 챈들러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 영입을 승인했다. 로빈슨의 활약은 윌리 메이스, 로이 캄파넬라 등 다른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는 길을 열었다. 같은 해 4월, 챈들러는 브루클린 다저스 감독 리오 더로셔가 도박꾼들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1947년 시즌 출장 정지 징계를 내렸다. 챈들러는 선수 연금 기금을 마련하고 야구 최초의 텔레비전 중계 계약을 체결했으며, 수익금을 선수 연금 기금에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구단주들은 강력한 권한을 가진 커미셔너를 싫어했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원했다. 일부 구단주들은 챈들러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인종 통합을 승인하고, 선수 계약 조항을 멋대로 해석하며, 일부 구단주들의 도박 의혹을 조사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1951년 7월 올스타 휴식기 동안 구단주들은 챈들러를 해고했다. 챈들러는 재선에 필요한 12표 중 9표밖에 얻지 못했고, 결국 커미셔너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5. 은퇴 이후
1963년 챈들러는 주지사 민주당 후보 지명에 실패하였다. 이후 그는 채터누가의 퍼스트 플라이트 골프 컴퍼니 부회장 겸 이사, 조지아주의 코스털 스테이츠 생명 보험 이사, 루이빌의 인터사우스 생명 보험 수신자, 켄터키 가정 생활 보험 결성자로 활동하였다. 챈들러는 우드워드군 민주당 집행위원회 의장과 켄터키주 민주당 국가위원을 역임했다.
켄터키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1957년)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1982년)에 헌액되었다. 캔자스주 위치토에서 국제 야구 회의 회장, 컨티넨탈 미식축구 리그 커미셔너(1965년), 타이 코브 재단과 켄터키 대학교에서 신탁 관리인을 지냈다.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 통치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성공회 주교 메달(1959년)과 제퍼슨 데이비스 메달(1975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