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ray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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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X-ray 작전은 6.25 전쟁 중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해군 첩보대가 수행한 첩보 작전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결정에 따라 17명의 첩보대가 조직되어 영흥도에서 활동하며 인천, 수원, 서울 등지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첩보대는 해안 방어시설 파악을 위해 위장 취업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했고, 미군 정보장교의 합류로 통신 보안 문제를 해결했다. 작전 막바지, 첩보대는 철수 명령을 받았지만, 일부 대원은 잔류하여 임무를 수행하다가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받아 희생되었다. X-ray 작전과 유사한 시기에 진행된 트루디 잭슨 작전과의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이 두 작전을 소재로 다루었다.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3일 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다음날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전황을 뒤집기 위해 적의 병참 보급선을 끊는 인천 상륙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그의 예상대로 한국군과 UN군은 조선인민군에게 밀려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비슷한 시기에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이라는 같은 목표를 위해 X-ray 작전과 트루디 잭슨 작전이라는 두 첩보 작전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두 작전 부대가 서로 협력하여 작전을 수행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X-ray 작전과 트루디 잭슨 작전을 소재로 하여 제작되었다.
2. X-Ray 작전의 전개
이러한 상황 속에서 UN군사령부는 코드명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즉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전 성공을 위해서는 인천 지역에 대한 정확한 첩보가 필수적이었다. 1950년 8월 12일, 대한민국 해군 함명수 소령은 손원일 제독으로부터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첩보 임무를 부여받았다. 함 소령은 즉시 해군 정보국에서 특수 공작 임무를 수행하던 김순기 중위, 임병래 소위, 장정택 소위 등에게 신뢰할 만한 하사관들을 선발하여 특공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8월 16일 저녁, 세 장교로부터 보고를 받고 최종적으로 17명의 첩보대가 조직되었으며, 이들은 'X-Ray 작전'이라는 암호명 아래 극비 임무에 투입되었다.
첩보대는 1950년 8월 18일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어선 백구(白鷗)호를 타고 영흥도로 비밀리에 출발하여 8월 24일 새벽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상륙했다. 당시 영흥도는 이희정 중령의 리작전 성공으로 해군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영흥국민학교에 본부를 마련한 첩보대는 인천, 수원, 서울 근교를 넘나들며 조선인민군의 해안 방어 태세, 병력 및 장비 배치 등 핵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월미도의 해안 방어시설 정보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수집된 정보는 해군본부를 거쳐 맥아더사령부에 보고되었으며, 9월 1일에는 미 해군 정보장교 클라크(Eugene F. Clark) 대위 팀이 합류하여 정보 보고 체계가 개선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 D-day를 이틀 앞둔 9월 13일, 첩보부대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철수했으나, 남은 임무 처리를 위해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 등 6명의 대원은 섬에 남았다. 그러나 다음 날인 9월 14일 새벽, 대부도에 주둔하던 조선인민군 대대 병력이 영흥도를 기습 공격했다. 남은 첩보대원들과 영흥도 청년 의용대는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포위된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는 작전 기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1. 영흥도에서의 첩보 활동
1950년 8월 18일 01시, 자갈치 시장에 모인 첩보대원들은 어선 백구(白鷗)호를 타고 극비리에 영흥도를 향해 출발했다. 8월 23일 밤, 백구호가 영흥도 근해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8월 24일 01시 30분, 첩보대는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당시 영흥도는 이희정 중령이 지휘한 '리작전(Lee Operation)'의 성공으로 대한민국 해군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첩보대는 영흥국민학교의 한 교실을 본부로 삼고, 그날부터 인천뿐만 아니라 수원과 서울 근교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 조선인민군의 군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임병래 소위는 김순기 중위와 함께 인천 등지로 잠입해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8월 24일 밤, 두 사람은 김순기 중위가 과거 인천경비부 근무 시절 정보원으로 활용했던 권 씨와 접선했다. 권 씨는 피난하지 못하고 조선인민군 보안서원으로 부역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첩보 활동에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다음 날 밤에는 또 다른 정보원 김 씨와도 접선하여 협력을 확보했다.
첩보 활동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통행증 문제였는데, 권 씨와 김 씨가 이를 해결해주었다. 통행증을 얻은 임병래 소위는 김 씨의 집에 하숙인으로 위장하여 머물면서 인천 시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필수적인 월미도의 해안 방어시설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함명수 소령은 첩보대원들을 월미도 해안도로 보수 공사장과 방어진지 구축 공사장에 인부로 위장 취업시켰다. 임병래 소위 역시 공사장 인부로 위장하여 직접 정보를 수집했다. 때로는 조선인민군 군복을 입고 인천 일대를 돌아다니거나, 경인가도 도로 보수 공사장의 노무자로 위장하여 조선인민군의 병력과 장비 이동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된 귀중한 정보들은 대한민국 해군본부를 거쳐 맥아더사령부에 보고되었다.
2. 2. 미군과의 협력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첩보부대는 영흥도에 본부를 설치하고 인천 및 수원, 서울 근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대원들은 때로는 공사장 인부나 조선인민군으로 위장하여 적의 방어 시설, 병력 및 장비 이동 상황 등을 파악했다. 이렇게 수집된 각종 정보는 대한민국 해군본부를 거쳐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1일, 미 해군 정보장교인 클라크(Eugene F. Clark) 대위의 팀이 함명수 첩보부대와 합류했다. 이 합류는 정보 전달 체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에는 대한민국 해군본부를 거쳐야 했던 정보 보고가 클라크 대위에게 직접 전달될 수 있게 되면서,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통신 보안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2. 3. 영흥도 전투와 임병래 소위의 희생
인천 상륙 작전 D-day를 이틀 앞둔 1950년 9월 13일, 영흥도에 주둔하던 해군 첩보부대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인천 근해의 함정으로 철수하였지만,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를 포함한 6명의 첩보대원은 남은 임무(殘務)를 처리하기 위해 섬에 남았다.
그러나 다음 날인 9월 14일 0시경, 대부도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대대 병력이 영흥도를 기습 공격했다. 섬에 남아있던 임병래 소위 등 첩보대원 6명과 영흥도 청년 의용대원 30여 명만이 남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전력의 차이로 많은 청년 의용대원이 전사하고 첩보부대원들은 쫓기며 십리포 해안에 다다랐다. 첩보대원 중 4명은 미리 숨겨둔 보트를 이용해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지만, 적에게 포위된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는 인천 상륙 작전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3. 트루디 잭슨 작전과의 관계
4. 대중 문화에서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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