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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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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시욱은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한 해군 특수첩보대 하사이다. 그는 X-ray 작전에 참여하여 영흥도 첩보전에서 활약했으며, 작전 수행 중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임병래 중위와 함께 자결했다. 그의 희생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사후 은성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대한민국 해군은 그의 이름을 딴 유도탄 고속함을 취역했으며,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그의 활약상이 대중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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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욱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인 정보
서훈 내역을지무공훈장, 미국 은성훈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X-ray 작전
성별
국적대한민국
사망일1950년 9월 14일
출생일1929년 5월 27일
최종 계급하사

2. X-ray 작전

X-ray 작전은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대한민국 해군 해군첩보대가 수행한 비밀 첩보 작전이다. 낙동강 지구까지 밀린 불리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뒤에는,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비롯한 해군 특수첩보대원들의 성공적인 X-ray 작전 수행과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작전명 'X-ray'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적의 내부 상황을 마치 X-ray 사진처럼 면밀히 파악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창설된 17명의 해군 특수첩보대는 영흥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인천 지역의 해안포대 위치, 병력 배치, 기뢰 매설 정보, 상륙 지점 지형 및 수심 등 작전 성공에 필수적인 핵심 정보들을 수집하여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제공했다. 작전 막바지에는 북한군의 기습으로 위기에 처했으며,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작전 기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이러한 첩보 활동과 희생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2. 1. 해군 특수첩보대의 탄생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북한군의 남침이 거세지면서 불리한 전황에 놓인 한미 연합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인천의 지형과 적의 배치 상황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수적이었으나, 한국어와 현지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미군 첩보부대로는 정보 수집 임무 수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손원일 당시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에게 한국군에 의한 정보 수집 활동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포함한 총 17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해군 특수첩보대가 창설되었다. 해군 특수첩보대가 수행한 주요 작전은 X-ray 작전으로, 이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적진 내부 상황을 X-ray 사진처럼 면밀히 파악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2. 2. X-ray 작전의 수행

6.25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전세 역전을 위해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작전 성공에 필수적인 인천 지역 정보 수집을 위해 미국 첩보부대 대신 한국 지리에 밝은 한국군이 필요했다. 이에 맥아더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요청했고,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포함한 17명으로 구성된 해군 특수첩보대가 창설되었다.[1][2] 이들이 수행한 핵심 작전이 바로 'X-ray 작전'으로, 이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적 내부 정보를 샅샅이 파악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3]

해군 특수첩보대는 먼저 '영흥도 첩보전'을 수행했다.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거점으로 삼아 인천, 서울, 수원 등지로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작전이었다. 1950년 8월 18일 새벽 1시, 대원들은 어선으로 위장한 첩보선을 타고 부산을 출발해 영흥도로 비밀리에 잠입했다. 작전은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되었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어선 밑바닥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자폭까지 준비했다. 영흥도에 도착한 대원들은 현지 정보원을 통해 인천 해안포대의 정확한 위치, 병력 배치 현황, 병력 규모와 화력 수준, 기뢰 매설 위치, 상륙 예정 지점의 지형 등 핵심 군사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인천만은 함정 진입이 어려운 좁은 수로와 9m가 넘는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라는 지리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안전한 항로 확보를 위한 정확한 수심 측정이 필수적이었다. 대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수심을 측정한 결과, 작전 예정일 중 50년 만에 수심이 가장 깊어지는 날짜를 특정하고, 밀물 때 상륙 가능한 시간이 단 2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수집된 귀중한 정보들은 즉시 미 극동군 사령부로 전달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의 세부 계획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2. 1. 해군 특수첩보대의 희생

인천상륙작전 개시를 앞두고 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철수를 서두르던 새벽 2시, 첩보 활동을 뒤늦게 감지한 북한군은 영흥도를 기습 공격했다. 11명의 대원들이 먼저 철수하고, 영흥도에는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 6명의 대원만이 남아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노력했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적을 유인하여 나머지 대원들을 모두 탈출시킨 후 포위될 위기에 놓였다. 정규 작전을 수행할 무기가 부족하여 곧 적에게 포로가 될 것이라 판단했고, 포로가 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의 전모가 탄로 날 것을 우려했다. 결국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자결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무사히 시작될 수 있었다. 해군 특수첩보대원들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 개시 15시간 만에 월미도와 그 일대를 되찾았으며,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3. 인천상륙작전과 X-ray 작전의 의의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지구까지 밀렸던 전세를 완전히 뒤바꾼 결정적인 작전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노르망디상륙작전과 함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1950년 9월 15일 성공적으로 수행된 이 작전의 이면에는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의 X-ray 작전과 대원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개시를 앞두고 첩보 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으나, 철수를 서두르던 새벽 2시경, 첩보 활동을 뒤늦게 감지한 북한군이 영흥도를 기습 공격했다. 11명의 대원이 먼저 철수하고,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포함한 6명의 대원만이 남아 적의 공격을 막아내며 동료들의 탈출을 도왔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적을 유인하여 나머지 대원들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킨 후 북한군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정규 작전을 수행할 무기가 부족하여 곧 포로가 될 상황이었고, 만약 포로가 된다면 인천상륙작전의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두 사람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작전의 성공을 지켰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은 예정대로 개시될 수 있었다. 해군 특수첩보대원들이 목숨 걸고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 개시 15시간 만에 월미도와 인천 일대를 탈환하며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들의 헌신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중요한 기여로 평가받는다.

4. 사후

홍시욱 하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후 대한민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훈장이 추서되었으며,[2] 그의 이름을 딴 유도탄 고속함이 대한민국 해군에서 운용 중이다.[3]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2]

4. 1. 상훈

미국 정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홍시욱 하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3년 7월 6일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하였다.[2] 대한민국 정부는 1954년 1월 4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여 그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였다.[2]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2]

4. 2. 홍시욱함

2013년 10월 10일, 홍시욱 하사의 이름을 딴 유도탄 고속함 11번함인 '홍시욱함'이 취역하였다.[3] ‘홍시욱함’은 함대함 유도탄, 76㎜, 40㎜ 함포 등으로 무장했다. 규모는 배수량 450ton에 길이 63m, 전폭 9m이다. 최대 속도는 40노트(시속 74km)까지 낼 수 있으며, 40여 명의 승조원이 탑승할 수 있다. 홍시욱함은 연안·항만 방어와 초계 임무를 수행한다.

4. 3. 영화 '인천상륙작전'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작전 한 달 전부터 실시한 대북 첩보작전 'X-ray'에 투입된 해군 첩보부대 대원들의 임무 수행 과정을 다루고 있다. 첩보전의 특성상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생존자 증언을 토대로 영화화하였다. 이 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역사를 바꾼 비밀 연합 작전인 X-ray 작전이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참조

[1] 문서 당시 해군 계급에 따르면 홍시욱은 지금의 하사인 '이등병조'였다.
[2] 문서 한동안 그의 시신은 방치되어있었으나, 1975년 해군 당국의 주선으로 25년만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 문서 군은 유도탄 고속함 1~6번함에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의 이름을, 7~12번함에는 6.25전쟁 이후 주요 전투에서 귀감 인물의 이름 등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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