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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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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미도는 인천광역시에 위치한 섬으로, 지명 유래는 '물이 섞이는 섬'을 뜻하는 '얼미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피난처로 활용되기도 했다. 근대에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유원지로 개발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인천 상륙 작전의 주요 거점으로, 미군의 폭격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현재는 월미공원, 월미 문화의 거리 등 관광 시설이 조성되어 있으며, 미군 폭격 사건으로 인한 주민들의 귀향 운동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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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리 정보
위치경기만
면적0.7 km²
해안선 길이1 km
최고점월미산
높이108 m
일반 정보
이름월미도 (月尾島)
로마자 표기Wolmido
한글월미도
한자月尾島
일본어 (히라가나)げつびとう
일본어 (가타카나)워르미도
영어Wolmido, Wolmi Island, Wolmido Island, Roze Island
월미도 산책로
월미도 산책로
행정 구역
국가대한민국
광역시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1가

2. 지명 유래

섬의 이름은 어을미도(魚乙未島)[15], 어을미도(於乙味島)[16], 어미도(於味島)[17], 제물도(濟物島)[18], 돌도(突島)[19], 월성(月星)[20], 돌미도(突尾島) 등으로도 불렸다. 섬의 서남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북동쪽은 완만한 구릉이다. 흔히 ‘달 꼬리’를 닮았다 하여 월미도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얼다(어르다)'의 '얼'과 물(水)을 뜻하는 '미'가 합쳐져 '물이 섞이는(어르는, 휘감아 도는) 섬'이라는 '얼미도'라는 이름이 붙었고, 한자로 음차하면서 '월미도'가 되었다.[21][22][23][20]

3. 역사

조선 말까지 월미도는 효종 때 월미행궁이 지어졌다는 승정원일기 기록 외에는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15][11]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월미도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대동여지도에 와서야 '월미'라는 표기와 '행궁'이라는 부기가 나타난다.[24] 하지만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서울로 가는 배는 반드시 월미도 서쪽의 월미해협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월미도는 백제 때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무역과 군사의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인천도호부에 속해 있었으나, 1653년(효종 4) 영종진이 설치되면서 그곳에 편입되었다.[22]

대한제국 시기, 월미도에는 일본 해군 기지와 러시아 석탄 창고 등이 잇따라 세워지면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1886년 병인양요 때, 인천 앞바다에 정박했던 프랑스 함대 대장의 이름을 따서 외국 지도에는 '로즈 섬'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1891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월미도 지소 차입 약서(조차 월미도 지기약)가 체결되었다.[5] 1923년에는 1km 길이의 방파제가 건설되어 육지와 연결되면서 유원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조탕(바닷물을 데워 입욕하는 시설), 해수 풀, 별장 등이 정비되었다.[6]

1950년 9월 15일,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 반격의 계기가 된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월미도에는 유엔군의 폭격이 가해져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강제로 이주해야 했다.[7] 이 때문에 섬 주민들은 인천시, 대한민국 국방부, 미국 및 유엔을 상대로 인천 상륙 작전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7]

2009년에는 인천역에서 월미도를 잇는 관광 모노레일인 '월미 은하 레일'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안전성 문제로 개업이 연기되고 계획이 변경되다가, 2019년 10월 8일 인천교통공사가 운영하는 '월미 바다열차'로 개업했다.[8]

3. 1. 월미행궁

효종 때 월미행궁이 지어졌다는 승정원일기 외에 조선 말까지 역사에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15][11]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월미도가 전혀 기록되지 않았고, 대동여지도에 와서야 '월미'라는 표기에 '행궁'이라는 부기가 붙어 나온다.[24]

병자호란강화도로 피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정은 강화도로 가는 제2의 피난길을 개척했다. 그 경로는 다음과 같다.

서울-영등포-인천도호부-월미도-영종도-강화도

이때 월미도에도 임시 거처로서 1656년(효종 7) 홍명하의 건의로 인천부사 윤부가 비밀리에 월미행궁을 세웠다.[27][20] 인천에서 영종도로 바로 가지 않고 월미도에 들러 머물렀다 가는 것은 물때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여겨진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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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200년 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임금이 월미행궁으로 올 일은 한 번도 없었다. 1695년(숙종 21) 행궁이 중건되었고, 북벌론이 수그러들면서 그 기능이 상실되어 조선 말 고종 때 헐어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행궁에는 수직군(守直軍)이 배치되어 관리를 담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처 월미도 주민들로 추측된다.[20]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다른 행궁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28]

월미행궁이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청나라와 관계가 개선되면서 쓰일 일도 언급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행궁을 설치한 지 불과 12년 만에 그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29] 영조 대에는 방치가 되어 승려 단 한 명이 관리하였다.[30] 정조 때까지도 언급[31]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극후반이나 19세기 초반에 완전히 퇴락했을 것으로 보인다.

월미행궁의 터가 어디였는지는 월미도 동남쪽 설과 서북쪽 산자락 설이 있는데, 동남쪽은 경사가 가팔라 행궁을 지을 만한 평지도 없고, 수직군이 경작할 농토도 마땅히 없고, 무엇보다 영종도로 갈 뱃길이 없으므로 서북쪽 산자락 나루터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20] 단, 이를 확증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문헌에서 보이는 행궁의 위치는 '영종진의 남쪽 수로 7리', '일본 해군 석탄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28]

3. 2. 개항과 열강의 각축

조선 말까지 월미도는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효종 때 월미행궁이 지어졌다는 승정원일기 기록 외에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동여지도에 와서야 '월미'라는 표기와 '행궁'이라는 부기가 붙어 등장한다.[24] 그러나 월미도는 백제 때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무역, 군사 요충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인천도호부 소속이었다가 1653년(효종 4) 영종진 설치와 함께 편입되었다.[22]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일본 제국은 월미도 북서쪽 월미행궁 터 4900평에 불법으로 석탄창고를 세웠다.[10] 이후 일본은 이 부지를 매입하려 했으나, 월미행궁 터라 매매가 불가능함을 알고는 '매년 은화 80원을 내고 부지를 빌리겠다'고 조정에 강압적으로 제안했다. 조정은 땅을 빌려준 기록조차 찾을 수 없었지만, 결국 1891년 1월 12일, 민종묵은 일본의 곤도 스케 대리공사와 〈월미도 부지조차조약〉을 체결해야 했다.[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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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러시아 제국 역시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건설하려 했다. 당시 군함의 동력원이었던 석탄을 조달하기에 월미도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월미도 남쪽 지역 13400평 부지를 얻어 부두, 석탄고[52], 병원[53], 연병장 등을 건설했다.[20] 한편, 미국 회사 타운센드는 1894년 월미도에 약 1893만L 규모의 석유저장고를 건설하여 조선의 석유 시장을 독점했다.[54]

1891년에는 한일 간에 월미도 지소 차입 약서(조차 월미도 지기약)가 체결되었다.[5] 1923년에는 1km 방파제가 축조되어 육지와 연결되면서 유원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조탕(바닷물을 데워 입욕하는 시설), 해수 풀, 별장 등이 정비되었다.[6]

1950년 9월 15일,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면서 월미도에 유엔군의 폭격이 가해져 많은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7]

3. 2. 1. 병인양요

1866년 병인박해를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러 온 프랑스 극동함대 소속 이양선 무리가 월미도와 작약도 사이 월미해협에 들어와 닻을 내렸다. 함대의 소형 전투함 데룰레르호에는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길잡이로 삼아 극동함대는 9월 23일 월미해협에 정박했다.[10] 9월 24일에는 기함 프리모게호만 월미해협에 남고 나머지 함선들이 염하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이때 사방에서 몰려온 조선인들이 산등성이에 올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배들을 구경했다고 한다. 거대한 배가 돛도 없이 해류를 역행해 올라가는 광경은 조선인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한강 하구를 찾은 군함들은 25일 양화진까지 들어갔고, 27일에는 서강나루에 이르렀다. 서강나루는 삼남 지방에서 거둔 세곡이 서해안을 타고 올라와 화물을 내리는 종착지로, 조선의 목구멍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조정은 급하게 의논을 했으나 마땅한 뾰족한 수가 없었고, 적당히 물러가라는 편지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정찰을 마친 프랑스 함대는 복귀하였다. 이후 10월 14일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강화성을 점령하였다. 관청이란 관청에는 죄다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해 갖가지 도서를 약탈한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장군이 승리하자 놀라 철수하였다.[10]

이때 프랑스 해군은 정찰을 하면서 크고 작은 섬들에 사령관과 장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였다.[32] 가장 중요한 월미도에는 최고 사령관 로즈 제독의 이름을 붙였다.[20] 이후 조선에 찾아오는 모든 서양 제국주의 세력은 월미도를 로즈 섬(Roze Island영어)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 지도는 5년 뒤 미국 함대가 월미도를 찾아올 때 로저스 제독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10]

3. 2. 2. 신미양요

1866년 병인박해를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러 온 프랑스 극동함대가 월미도와 작약도 사이 월미해협에 닻을 내렸다. 프랑스 해군은 정찰을 하면서 크고 작은 섬들에 사령관과 장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였는데, 가장 중요한 월미도에는 최고 사령관 로즈 제독의 이름을 붙였다.[32] 이후 조선에 찾아오는 모든 서양 제국주의 세력은 월미도를 로즈 섬(Roze Island영어)이라 부르게 된다. 이 지도는 5년 뒤 미국 함대가 월미도를 찾아올 때 로저스 제독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10]

로저스 제독이 군함으로 초대한 월미도 촌장. 손에는 그가 선물로 준 맥주가 가득 들려 있다.


1871년에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의 로저스 제독이 전함 5척, 병사 1,230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여 월미해협에 다시 나타났다. 이들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만든 항해용 지도를 바탕으로 조선에 접근했지만 그리 정확한 지도는 아니어서 제독은 5월 23일 입파도에 정박을 하고 휘하의 블레이크 함장에게 탐측대를 꾸려 인천과 강화해협 근해에 안전하게 정박할 곳이 어딘지 찾아보게 했다. 블레이크는 닷새 뒤 5월 28일 돌아와서 월미해협이 정박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보고했다. 이튿날 29일 오전에 출발한 함대는 하루종일 서해를 거슬러 월미도와 작약도 사이 월미해협에 정박했다. 로저스 제독은 철수할 때까지 모든 지휘를 여기에서 내렸다. 강화도에 상륙하여 손돌목 돈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어재연 장군의 부대를 학살한 미군은 6월 12일 정박지로 귀환하고, 20일 간 우물쭈물대다가 7월 3일 철수한다.[10]

3. 2. 3. 운요호 사건

1875년 9월 19일,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이 이끄는 운요호가 월미도 연안에 나타났다. 이노우에는 무력 충돌을 유도하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해협의 초지진 앞으로 접근했다. 조선군은 강화해협을 방어하기 위해 이노우에의 보트에 포격을 가했다.

이노우에 요시카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노우에는 월미도로 돌아왔고, 다음 날 초지진 상륙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운요호는 9월 28일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10]

3. 2. 4. 열강의 이권 침탈

조선 말, 일본 제국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월미도 북서쪽 월미행궁 터 4,900평에 불법으로 석탄창고를 세웠다.[10] 이후 일본은 이 부지를 사들이려 했으나 월미행궁 터이기에 매매가 불가함을 깨닫고, '월미도 부지 4,900평을 조차하는 대신 매년 은화 80원을 납부하겠다'고 조정에 반강제로 제안했다. 조정은 처음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월미도에 다른 나라의 군사 시설을 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일본 제국의 강압에 결국 1891년 1월 12일, 민종묵은 일본의 곤도 스케 대리공사와 〈월미도 부지조차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51][20]

청나라러시아 제국도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지으려 했다. 월미도가 당시 군함의 동력원인 석탄을 조달하기에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을 장악한 청나라는 1889년 12월 월미도 서북 지역에 석탄고 설치를 요청했으나, 이미 일본 제국이 석탄고를 지은 자리였다. 이에 청은 월미도 동쪽, 일본 제국 석탄고 건너편에 부지를 마련했지만, 창고를 짓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일본 제국이 그 부지에 군수물자 창고를 짓게 된다.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 조정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 제국을 견제하려고 1896년 월미도 남쪽 지역 13,400평 부지를 러시아에게 내준다. 러시아는 부두, 석탄고[52], 병원[53], 연병장, 사격장, 수도관까지 건설했다.[20] 한편 미국의 석유 제품 회사 타운센드는 1894년 월미도에 약 1893만L 규모의 석유저장고를 건설하고,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조선특약점 계약을 맺어 조선의 송인석유 판매권을 전부 장악하였다.[54]

3. 3. 일제강점기

1891년 조선일본 제국 사이에 월미도 지소 차입 약서(조차 월미도 지기약)가 체결되었다.[5] 임오군란 직후, 일본은 월미도 북서쪽 땅에 불법으로 석탄 창고를 세웠고, 이후 강압적인 방법으로 이 부지를 조차하였다. 청나라러시아 제국도 월미도에 석탄 창고 건설을 시도했으나,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일본이 이 부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월미도는 일본 해군 기지와 러시아 석탄 창고 등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1886년 병인양요 당시, 인천 앞바다에 정박했던 프랑스 함대 대장의 이름을 따서 외국 지도에는 '로즈 섬'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경술국치가 일어난 후, 일본은 인천에서 쌀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월미도에 근대 항구 시설을 건설했다. 1906년에는 월미도 북단과 인천역을 잇는 철도를 놓아 처음으로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되었고, 소월미도에 작은 부두도 함께 건설했다. 1907년에는 만주에서 발생한 콜레라 확산을 막기 위해 월미도 남서쪽 끝에 해양검역소를 설치했으며, 1910년에는 월미산 정상에 무선 전신소를 세웠다.[10]

1903년에는 일본의 강요로 대한제국이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소월미도 등대를 세웠는데, 이는 팔미도 등대와 함께 인천항의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천항의 낮은 수심 문제는 1918년 갑문식 도크(선거)가 설치되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3. 3. 1. 군사 기지화

1891년, 한일 간에 월미도 지소 차입 약서(조차 월미도 지기약)가 체결되었다.[5] 일제는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월미도 북서쪽 땅 월미행궁 터 4900m2에 불법으로 석탄창고를 세웠다.[10] 1885년, 일본은 이 부지를 사들이려다 월미행궁 터이기에 매매가 불가함을 깨닫고는 '월미도 부지 4900m2를 조차하는 대신 매년 은화 80원을 납부하겠다'고 조정에 반강제로 제안했는데, 조정이 사정을 조사하니 애초에 땅을 일제에 빌려줬다는 기록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즉 일제는 일단 허락도 안 받고 석탄 창고를 지어놓은 뒤, 나중에 그 땅을 빌려달라고 요구를 한 것이다. 조정은 처음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월미도에 (이미 들어왔지만) 다른 나라의 군사 시설을 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에 결국 양력으로 1891년 1월 12일,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를 맡은 민종묵은 일본의 근둥 대리공사와 〈월미도 부지조차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51][20]

그런데 일제만 월미도를 노리는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러시아 제국도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지으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월미도가 당시 군함의 동력원인 석탄을 조달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지배하는 나라만이 월미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으로 하나부사가 쫓겨나고 조선을 장악한 청나라는, 처음에는 산둥반도에서 인천까지 거리가 짧아 석탄고를 요구하지 않았으나, 일제가 급격히 성장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1889년 12월 월미도 서북 지역에 석탄고를 설치하고 싶다고 조정에 요청을 한다. 그런데 여기는 이미 위 편지대로 일제가 석탄고를 지은 자리였다. 이에 청은 하는 수 없이 월미도 동쪽, 일제 석탄고 건너편에 부지를 마련했는데, 정작 창고를 안 지었다. 그러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청이 패배하면서 일제가 그 부지에 군수물자 창고를 짓게 된다.

이때 일제는 랴오둥반도 때문에 삼국 간섭을 당한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한 조정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견제하려고 1896년 월미도 남쪽 지역 13400m2 부지를 러시아에게 내준다. 러시아는 마음 놓고 부두, 석탄고[52], 병원[53], 연병장, 사격장, 수도관까지 건설할 수 있었다.[20] 한편 미국의 석유 제품 회사 타운센드는 조선의 석유 제품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1894년부터 부산 절영도와 월미도 등에서 부지를 물색하였고, 그 해 월미도에 5000000gal 규모 석유저장고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조선특약점 계약을 맺어 조선의 송인석유 판매권을 전부 장악하였다.[54]

그 후 1904년 5월 말, 러시아 발틱 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일제 함대에 궤멸되면서 러일 전쟁은 일제의 승리로 끝났다. 같은 해 8월 월미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월미도를 통째로 군사 지역으로 지정하고, 작전상 필요하다며 포대를 지은 뒤, 월미도 북쪽에 있던 가옥 21채를 전부 사들여서 타운센드 사의 석유창고 옆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1905년 5월에는 모든 민가를 강제로 철거한다고 대한제국에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의 인천항 감리는 일본에게 계획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대답은 이러했다.

이를 시작으로 월미도 주민들은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야만 하게 된다.[57][10]

3. 3. 2. 유원지 개발

1923년에 1킬로미터의 방파제가 축조되어 육지와 연결되면서부터 월미도는 유원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조탕(바닷물을 데워 입욕하는 시설), 해수 풀, 별장 등이 정비되었다.[6]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을 완전히 마무리짓고 을사조약에 연이은 한일 병합 조약으로 1910년 8월 22일 조선의 국권을 피탈하였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일제는 인천에서 쌀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월미도에 근대 항구 시설을 속속 지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에는 월미도 북단과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철로를 놓았다. 처음으로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그때 소월미도에 작은 부두도 같이 지었다. 만주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1907년에는 월미도 남서쪽 끝에 해양검역소를 설치했다. 1910년에는 월미산 정상에 무선 전신소도 세웠다.[10]



이때 일제가 건설한 시설 가운데 눈여겨볼 만한 것은 1903년 일제의 강압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세운 소월미도 등대로, 팔미도 등대와 같은 시기에 설치되어 인천항의 눈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인천항의 수심이 너무 낮아 만조 때가 아니면 배가 진입할 수 없는 문제는 여전했는데, 이는 1918년 갑문식 선거(도크)가 설치되면서 해결된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배들은 만조가 아닐 때마다 월미도에 정박하지 않아도 되었다. 갑문을 설치하면서 1917년 일제는 월미도와 육지를 잇던 철로 자리에 돌을 쌓아 방파제를 지었다. 철로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개통되어 열차로 수송할 화물의 양이 줄어드면서 1911년 철거된 상태였다. 새로 쌓은 방파제는 파도와 북쪽에서 흘러오는 모래펄이 항구와 선거에 쌓이는 것을 막아주었다. 몇 년 후에는 시멘트를 바르고 철제 난간을 달아 1km 남짓한 왕복 2차선 도로를 닦았다. 월미도는 이제 나룻배를 잡아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아무 때나 걸어서든 차를 타서든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10]

당시 월미도유원지 입장 인원은 다음과 같다.

연도인원(명)
192769,800
192872,390
192986,640
1930103,900
193181,200
1936125,000
1937123,000



당시 월미도유원지 입장료는 다음과 같다.

내역요금
입장료대인 20전, 소인 10전 (물놀이장 사용료 포함, 단체 20인 이상 체감할인 회수권 발행)
가족탕료80전-1원
대실료1원 50전 - 3원
홀 사용료30-35원
해수탕 호텔3원 50전 - 6원 50전
별장 요금60-230원



윤치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월미도단신〉. 윤치호와 그 가족들이 텐트 앞에 서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곤궁하게 사는 조선인들에게 월미도 유원지 여행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친일파 윤치호는 가족과 월미도로 여행을 가기[71]식민지 근대화론을 설파하는 일기를 남겼다.[72] 그는 이후에도 수 차례 조탕을 드나들었다.[73]

한편 오히려 일본인보다 (부유한) 조선인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증언도 있다.[10]

3. 4. 한국전쟁과 월미도

1950년 9월 13일, 인천 상륙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미 해군과 영국 해군 함정들은 월미도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포병 진지를 이틀 동안 무력화했다.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한국군과 UN군은 월미도에 상륙하여 인천을 탈환하고 서울로 진격했다. 이 작전으로 한국 전쟁 초기 한국군과 UN군이 부산까지 밀렸던 상황이 반전되었다.[4] 이 과정에서 93개의 네이팜탄이 투하되어 민간인 수백 명이 사망했다. 이 전투는 1982년 북한에서 제작한 전쟁 영화 《월미도》의 소재가 되었다.[4]

3. 4. 1.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

맥아더미 합동참모본부는 한국 전쟁에서 후퇴를 거듭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인천 상륙 작전을 의논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인천항의 조수간만의 차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점이었다. 짧은 만조 때가 아니면 배를 댈 수 없었고, 만조 때 모든 병력을 신속하게 상륙시키지 못하면 썰물 때 드러나는 수 킬로미터의 갯벌에 배가 좌초되어 조선인민군기관총박격포 세례를 받고 참패할 위험이 있었다.[10]

무엇보다 큰 문제는 월미도였다. 월미도는 단순한 평지가 아니라 고도 105m의 월미산이 우뚝 솟은 섬이었다. 월미산에서는 인천항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월미도는 인천항의 '감제고지'나 다름없었다. 월미도를 확보하지 않고 인천에 상륙하는 것은, '상륙군이 가장 약할 때는 바로 상륙할 때'라는 격언처럼, 후방의 월미산에서 인민군이 기총소사와 박격포 공격을 퍼부어 상륙군이 몰살당할 수 있는 위험한 작전이었다.[10]

1950년 9월 13일, 미국 중순양함 2척, 영국 경순양함 2척, 미국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된 해군 포격 지원 부대는 인천 상륙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월미도에 주둔한 조선인민군(NKPA) 포병 진지를 이틀 동안 무력화했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대한민국과 유엔군은 월미도에 상륙하여 인천을 탈환하고 서울로 진격했다. 이 상륙 작전은 한국 전쟁 초기 대한민국과 유엔군이 부산까지 밀렸던 전황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4] 그러나 이 과정에서 93발의 네이팜탄 투하로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 전투는 1982년 제작된 북한 전쟁 영화 《월미도》의 소재가 되었다.[4]

3. 4. 2. 미군 주둔과 주민들의 귀향 좌절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광복이 되었다. 이후 미 군정은 월미도를 해안경찰대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75] 1949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고 그 자리에 바로 한국 해군이 들어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해군은 월미도에서 재빠르게 물러났는데, 북한군이 한강을 넘지 못하고 발이 묶이자 다시 월미도로 돌아왔다. 며칠 후 북한군이 한강을 넘자마자 한국 해군은 완전히 철수했고, 곧이어 인민군이 월미도에 들어왔다. 육지가 거의 다 인민군에게 점령된 탓에 도민들은 피난을 갈 수 없었고, 배가 있는 몇몇 가족만 영종도나 작약도로 가까스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월미도에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 본 피난자 일부는 다시 월미도로 돌아오기도 했다.[10]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30여 가구 남짓한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돌아오려 했다. 미군이 도저전차로 밀어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해안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다른 폭격지와는 다르게 월미도는 폭격 후에도 미군 부대가 그대로 주둔한 탓에 도민들은 월미도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들어갈 수 없었다. 미군은 월미도와 인천을 잇는 다리를 철저히 봉쇄하였다. 결국 이들은 다리 입구에 있는 미군 부대 초소 옆 얼음 창고에서 지내다가, 근처에 판자촌을 지으면서 월미도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1952년 3월 주민들은 인천시장에게 처음으로 진정서를 냈는데, 이때 표양문 인천 시장은 "지금 미군이 저렇게 들어와 있으니 어쩌겠나. 걱정하지 마라. 미군이 나가면 다시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라고 답했다.[10]

1969년,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대폭 철수시킨다고 발표하자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1971년 7월 20일 미군이 떠나자마자 한국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들어온 바람에 주민들은 여전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고,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감히 항의할 생각도 못했다.[10]

3. 4. 3. 귀향 운동과 진실 규명

한국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30여 가구의 월미도민들은 미군이 도저전차로 밀어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해안마을'을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미군 부대가 주둔한 탓에 월미도에 들어갈 수 없었다. 1952년 3월, 주민들은 인천시장에게 진정서를 냈고, 표양문 인천 시장은 "미군이 나가면 다시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라고 답했다. 판잣집 마을은 200가구까지 불어났으나 80년대에 개발로 강제 철거되었다.[10]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다른 폭격과 달리, 미군이 주민들의 집터 자체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본조차도 1904년과 1942년에 강제 철거를 했지만, 살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미군은 군사기지만 짓고 주민들은 외면했다.[10]

1969년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발표하자 주민들은 희망을 품었지만, 1971년 미군이 떠난 자리에 한국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들어오면서 귀향은 무산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라 항의도 어려웠다. 국방부는 소유자가 불분명한 월미도민들의 땅을 해군에게 전부 국유화하라고 통보했다. 이 사실은 2005년 한인덕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발견했다.[10]

월미공원 입구 옆 귀향대책위원회 농성장. 2004년 10월 7일 첫 농성을 시작으로 매일 회원들이 순번을 정해 농성장을 지켰다. 처음에는 열두 시간씩 교대로 밤낮없이 농성했지만, 현재는 하루 한 명이 주간에 농성을 하고 있다.


국방부와 인천시 등에 계속 진상규명, 배상, 귀향을 요구하던 도민들은 1997년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렸다. 2001년 해군 철수 소식에 귀향 기대를 품었지만, 국방부가 마을 부지를 인천시에 팔고, 인천시가 공원 조성 계획을 발표하면서 또다시 좌절했다. 이들은 2004년 10월 17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월미공원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10]

2005년 한인덕 위원장 취임 후, 귀향대책위원회는 적극적인 요구에 나섰고, 인천의 시민단체, 언론, 지자체, 일부 국회의원들이 월미도민 배상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2006년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서를 제출,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10]

진실화해위원회의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진실규명결정서》 '결정 요지'는 다음과 같다.

  • 1.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 10일 인천광역시 월미도 마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집단 희생되었다. 폭격은 리차드 루블(Richard W. Ruble) 제독의 해병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기들에 의해 월미도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병항공기들(VMF-214, 323)은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 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하였다. 이 집중폭격으로 동쪽 지역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 2. 본 사건의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정용구(鄭龍九) 등 10명이다. 실종자 및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하여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 명까지로 추산된다.
  • 3.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월미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 하에서 발생했다. 당시 유엔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 했고 월미도는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천의 관문으로서 반드시 무력화시켜야 할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 4. 당시 미군은 월미도 동쪽에 민간인 집 주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미군은 상륙작전에서 인민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자국 군인에게 큰 피해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모든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작전 개념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또한 9월 13~14일 함포사격작전의 사전작업으로 인민군의 방어시설을 숨겨주는 은폐물을 없애려는 것이 폭격의 주요 목표였다. 따라서 미군은 다수 민간인 거주지를 포함한 월미도 동쪽 전체를 집중폭격했다.
  • 5. 미군의 월미도 폭격에 한 군사적 필요를 인정하고 적을 기만해야 할 군사적 필요가 컸다고 하더라도, 폭격 이전 폭격지점 선정에서나 폭격 중 식별할 수 있었던 민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월미도 폭격의 경우 그러한 노력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하고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고도에서 주민에게 기총소사까지 한 것은 국제인도법, 전쟁법의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민간인 구별의 원칙,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 작전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 6. 월미도 주민들은 거주지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를 가름하는 핵심지역이 되면서 민간인 면제규범에 따른 보호도 받지 못하고 전쟁의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월미도는 군사기지가 되었고, 그에 따라 유족과 거주민은 5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여 큰 고통을 겪고 있다.
  • 7. 진실화해위원회는 본 사건의 진실이 규명됨에 따라 한국정부에 미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본 사건의 피해에 대해 실질적으로 보상할 수 있는 방안과 함께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 및 위령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비롯한 명예회복조치 등을 적극 강구할 것을 권고하였다.[78]


그러나 주민들은 아직도 배상을 받지 못했다. 2006년 한광원 열린우리당 의원의 특별법 발의는 '형평성' 논리에 막혔고, 2012년 문병호 국민의당 의원의 특별법은 계류, 폐기되었다. 2017년 안상수 자유한국당 의원 등 인천 지역 여야 국회의원 10명이 공동 발의한 법률안도 2018년 9월 현재까지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국방부는 여전히 '형평성이 맞지 않다'라며 배상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10] 2013년 11월 14일, 서울고등법원은 국가승소(확정) 판결을 내렸다.

한인덕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월미도 폭격은 이해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을 모른 척하는 것은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국방부가 주최한 인천상륙작전 제60주년 기념 재연행사. 2010년 9월 15일.


국방부는 매년 9월 '인천상륙작전 승전 기념식'을 주최하지만, 월미도 유가족들과 주민들은 매년 9월 '월미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제'를 지낸다.[10] 수많은 정치인들이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 참석했지만, 위령제를 방문한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4. 현대의 월미도

1923년 육지와 연결되는 1킬로미터 길이의 방파제가 건설되면서 월미도는 유원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바닷물을 데워 사용하는 조탕, 해수 풀, 별장 등이 설치되었다.[6]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면서 월미도 주민들은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인천시, 대한민국 국방부, 미국, 유엔을 상대로 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7]

2009년 인천역과 월미도를 잇는 관광용 모노레일인 월미 은하 레일이 완공되었으나, 안전 문제로 개통이 연기되었다. 이후 2019년 월미 바다열차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통되었다.[8]

이후 월미도는 월미공원, 월미 문화의거리, 한국이민사박물관, 월미테마파크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4. 1. 월미공원

월미공원 입구. 오른쪽에는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 농성장이 있으나 잘려 보이지 않는다.


산책로


2001년 인천시는 국방부로부터 월미도 부지 전체를 넘겨받아 월미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이는 월미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월미공원은 50년간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곳이다. 해송, 산벚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군락을 이룬 자연림과 너구리, 다람쥐, 고라니 등의 야생동물, 오목눈이, 박새, 곤줄박이 등 다양한 종류의 조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월미숲의 나무들은 어린 밑둥이 잘려나가고 그 곳에서 수많은 가지들이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무들에게도 가지가 잘리고 몸통이 쪼개지고 뿌리에 폭탄 파편이 박히는 등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남아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고 더 단단하고 아름다워진 나무들을 보며 자연과 역사가 주는 교훈을 느낄 수 있다.[79]

경내


월미공원에는 공원조성계획에 따라 조성된 한국전통정원이 있다. 정원 유형으로는 궁궐정원, 별서정원, 민가정원이 있다. 궁궐정원에는 창덕궁의 연못 부용지, 연꽃이 가득한 연못 애련지, 아미산굴뚝 및 화계가 있다. 별서정원에는 국담원, 소쇄원, 서석지가 있다. 민가정원에는 전통 건축 양식의 양진당과 초가, 인공 연못, 개울, 논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79]

월미문화관 입구


궁중의상체험실


월미문화관 1층은 전통문화전시관으로 생활문화전시실, 궁중문화전시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관혼상제, 서당향교 같은 교육과정, 종묘 제례악 등 궁중음악과 궁중음식, 왕의 경연과 일과 등을 볼 수 있다. 한복 입어보기 체험도 가능하다. 전통혼례복과 왕가의 궁중복식, 신발과 가채 등이 준비되어 있다.

지하층 한식체험관에서는 한식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전통 떡, 김치, 궁중삼계탕, 궁중떡볶이, 불고기 등 다양한 음식 만들기와 맛보기 체험이 가능하다. 체험은 사전 예약 후 이용할 수 있다.

문화관 입구에서는 소망엽서함과 느린우체통을 운영하고 있다. 소망엽서를 친구나 가족에게 작성하여 느린우체통에 넣으면 1년 후에 발송된다. 1년 후 엽서를 받는 사람의 반응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 것은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다.[79]

4. 2. 월미 문화의거리

월미 문화의거리는 횟집과 카페가 즐비했던 월미도의 해안인접도로를 차 없는 도로로 바꾸고 새단장하여 1989년 7월 2일 개장하였다.[81] 별빛·수경·이벤트 광장과 전망대, 휴식·테마 공간 등 직접 해양을 접할 수 있다. 문화거리를 걷다 보면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들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엠넷의 디지털 채널 M2의 노래방 오디션 프로그램 《불토엔 혼코노》 4차 예선을 위한 코인노래방 상자가 문화의 거리에 설치되기도 했다.[82]

중앙에는 공유수면 5667km2를 매립하여 조성한 '친수공간'이 있다. 친수공간은 인천대교와 서해바다의 경관을 활용한 휴게 및 문화 이벤트 공간이다. 친수공간에는 '월미달빛 음악분수', 낙조전망대, 구름언덕, 조석체험시설 등이 있고, 친수계단으로 내려가면 출렁이는 바닷물을 직접 만질 수 있다.

문화의 거리를 깊숙이 들어가면 종이학 모양 야외무대가 바다를 등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구나 대관 신청만 하면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79]

문화의거리 끝에 자리한 등대

4. 3. 기타 시설

2001년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월미도 부지 전체를 인계받아 월미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이곳은 50년간 군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라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해송, 산벚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군락을 이룬 자연림과 너구리, 다람쥐, 고라니 등 야생동물, 오목눈이, 박새, 곤줄박이 등 다양한 조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월미숲의 나무들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이를 이겨내고 더욱 단단하고 아름다워진 모습을 통해 자연과 역사가 주는 교훈을 느낄 수 있다.[79]

월미공원에는 한국전통정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창덕궁의 부용지, 애련지, 아미산굴뚝 및 화계, 별서정원에는 국담원, 소쇄원, 서석지, 민가정원에는 양진당과 초가, 인공 연못, 개울, 논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79]

월미문화관 1층은 전통문화전시관으로 관혼상제, 서당향교, 종묘 제례악, 궁중음식, 왕의 경연 등을 볼 수 있고, 한복 체험도 가능하다. 지하층 한식체험관에서는 전통떡, 김치, 궁중삼계탕, 궁중떡볶이, 불고기 등 만들기 체험이 가능하며,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문화관 입구에서는 소망엽서함과 느린우체통을 운영하여 1년 후에 엽서를 발송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79]

월미유람선은 ㈜월미도해양관광이 운영하며, 700톤, 전장 401m, 선폭 11m, 승선정원 670명인 3층 크루즈 뉴코스모스호가 운항한다. 공연크루즈(A코스)는 월미도-영종대교-아라뱃길 서해갑문 앞-월미도, 불꽃크루즈(B코스)는 월미도-영종도 앞바다-인천대교-월미도를 운항한다.[80][79]

낮에 찍힌 월미유람선
주경


월미 문화의거리는 1989년 7월 2일 개장한 차 없는 도로로, 별빛·수경·이벤트 광장, 전망대, 휴식·테마 공간 등이 조성되어 있다.[81] 엠넷의 《불토엔 혼코노》 코인노래방 상자가 설치되기도 했다.[82] 중앙에는 5,667km2를 매립하여 조성한 '친수공간'이 있는데, '월미달빛 음악분수', 낙조전망대, 구름언덕, 조석체험시설 등이 있다. 문화의 거리에는 종이학 모양 야외무대가 있어 누구나 대관 신청 후 공연할 수 있다.[79]

월미산 정상에서는 인천항, 영종도, 용유도 등을 조망할 수 있으며, 월미전망대에서는 서해의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23m 높이의 유리전망대는 야간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달빛마루 카페가 있다. 월미산 정상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물범카로는 15분이 소요된다.[79]

외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은 한국 이민사를 기리기 위해 2008년 개관하였다. 4,4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하와이 이민자들의 여정, 사탕수수농장 노동, 광복을 위한 노력, 해외동포들의 근황 등을 전시하고 있다.[79]

오른쪽


월미도에는 마이랜드, 월미테마파크 등 여러 놀이시설이 있다. 마이랜드의 2층 바이킹은 안전 문제로 악명이 높았으며, 2015년 안전봉 사고로 잠정 폐쇄되기도 했다.[83] 런닝맨에 소개된 바 있다.[84] 월미테마파크의 대관람차는 높이 115m로, 인천대교와 인천 앞바다 야경을 볼 수 있으며, 싸우자 귀신아 촬영지이기도 하다.[85] 트와이스의 우아한 사생활에는 타가다디스코가 나왔다.[85] 비취랜드, 월미랜드 등 다른 유원지들도 있으며, 입장료는 없다.

참조

[1] 웹사이트 Where the Sky and the Sea Are Open to the World http://english.visit[...] Korea Tourism Organization 2012-11-09
[2] 웹사이트 Wolmido Monorail: Incheon, South Korea http://www.monorails[...] The Monorail Society 2012-03-25
[3] 웹사이트 Incheon » Jung-gu » Wolmido Island http://english.visit[...] Korea Tourism Organization 2012-03-25
[4] 뉴스 Wolmido residents demand joint investigation into Korean War massacre http://english.hani.[...] 2009-09-16
[5] 간행물 韓国条約類纂 附・各国関税対照表 統監府 1908-12
[6] 서적 図説 ソウルの歴史 漢城・京城・ソウル 都市と建築の六〇〇年 河出書房新社
[7] 웹사이트 仁川上陸作戦被害補償推進…韓国与党「壬辰倭乱も補償するのか」 https://japanese.joi[...] 중앙일보 2019-03-24
[8] 웹사이트 인천 '월미바다열차' 착공 11년 만에 개통 http://world.kbs.co.[...] 2019-10-08
[9] 웹인용 월미공원: 인천 근대사의 지표 http://park.incheon.[...] 2018-12-06
[10] 서적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작은 섬 월미도가 겪은 큰 전쟁들 서해문집 2017-09-10
[11] 웹인용 월미도-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여행 http://korean1.visit[...] 2018-12-07
[12] 문서 인천관광동향 보고서 인천관광공사
[13] 웹인용 월미도-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여행 http://korean1.visit[...] 2018-12-07
[14] 웹인용 월미도에서 배만 타면 아깝지 http://www.hani.co.k[...] 2018-12-07
[15] 서적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 1655-08-03
[16] 서적 국역비변사등록 44책 http://db.history.go[...] 2018-12-09
[17] 서적 국역비변사등록 http://db.history.go[...] 2018-12-11
[18] 서적 효종실록 http://sillok.histor[...] 2018-12-11
[19] 서적 세종실록 http://sillok.histor[...] 2018-12-11
[20] 저널 월미도, 그 섬 이야기 http://museum.incheo[...] 제16기 박물관대학 상반기과정 2018-12-11
[21] 서적 월미도가 달꼬리라구? 다인아트
[22] 웹인용 월미도(月尾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8-12-07
[23] 웹인용 월미행궁 터 http://www.kihoilbo.[...] 기호일보 2018-12-08
[24] 웹인용 인천역사 7호-인천 지리의 재발견 https://www.incheon.[...] 2018-12-08
[25] 서적 여지도서(輿地圖書) http://db.history.go[...] 2018-12-11
[26] 웹인용 월미공원-월미행궁 배치도 http://park.incheon.[...] 201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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