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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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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마쿠라 공방은 1349년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가마쿠라로 내려와 설치한 관청이다. 간토 10개 국을 통치하며 교토의 막부와 대립했고, 4대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자결하면서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이후 부활했지만, 1455년 시모우사 국 고가로 본거지를 옮겨 고가 공방이라 칭했다. 1458년에는 아시카가 마사토모가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되었으나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호리고에 공방을 칭하며 간토 지방에 두 공방이 양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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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공방
개요
직책명간토 공방
다른 명칭가마쿠라 공방
가마쿠라 고쇼
간토 고쇼
로마자 표기Kantō kubō
일본어 표기関東公方 (간토 공방)
상세 정보
설명간토 지역을 통치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대리
역할간토의 통치
관할 지역가마쿠라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방
관련 직책간토 간레이
역사적 배경
시대무로마치 시대
설치 이유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간토 지방 통치 필요성 증대
관련 기관가마쿠라부
인물
주요 인물아시카가 모토우지 (初代)
아시카가 우지미쓰
아시카가 미쓰카네
아시카가 모치우지
아시카가 시게우지
기타
참고간토 간레이는 간토 공방을 보좌하는 직책

2. 역사

1349년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의 대립(간노의 소란)이 격화되면서, 다다요시를 대신해 정무를 보던 다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교토로 상경했다. 그 뒤를 이어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가마쿠라로 내려와 초대 가마쿠라 공방이 되었다. 모토우지는 간토 간레이의 보좌를 받으며 간토 10개 국(이후 무쓰국, 데와국까지 관할)을 통치했지만, 점차 교토의 막부와 관계가 소원해지며 대립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공방은 장군가와 신분 차이가 적어 막부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이를 위협하는 경향이 강했다. 1379년 고랴쿠의 정변 직전, 제2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우지미쓰는 막부 분열의 위기를 감지하고 거병을 계획했지만,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하루의 간언으로 단념했다. 1399년 오에이의 난 당시에는 이마가와 사다요의 중재로 오우치 요시히로와 제3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미쓰카네가 연합, 교토 공격을 구상했으나 오우치 요시히로의 전사로 좌절되었다.

에이쿄의 난에서는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와도 대립, 1439년 제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패배 후 자결하여 일시적으로 단절되기도 했다. 1447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막부의 허가를 받아 가마쿠라 공방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후 막부와 대립한 시게우지는 1455년 시모우사국 고가로 본거지를 옮겨 고가 공방을 자칭했다(교토쿠의 난). 이 난으로 가마쿠라부는 소멸하고, 고가 공방은 규모를 축소했지만, 1570년대까지 간토 지방을 지배하는 형태를 유지했다.

이에 맞서 막부는 1458년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정식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해 파견했으나,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즈국 호리고에를 본거지로 삼아 호리고에 공방이라 칭했다. 이로써 간토 지방에는 두 공방이 양립하게 되었다.

호조씨가 간토 간레이의 권한을 사실상 장악한 후에도, 고가 공방은 간토 지방의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후손은 고호조씨를 멸망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기레츠가와에 소령을 받게 되었고, 에도 시대에는 기레츠가와씨라 칭하며 도쿠가와 쇼군가의 객분이라는 특별한 입장의 다이묘 가문으로 존속했다. 메이지 시대아시카가 성으로 복귀하여 자작으로 서임되었다.

2. 1. 가마쿠라 공방의 성립

1349년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간의 대립(간노의 소란)이 심화되었다.[1] 다다요시를 대신하여 정무를 보기 위해 교토로 상경한 다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뒤를 이어,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가마쿠라로 내려와 초대 가마쿠라 공방이 되었다.[1]

간토 간레이의 보좌를 받으며 간토 10개 국(후에 무쓰국·데와국까지 관할)을 지배하였으나,[6] 대가 내려가면서 교토의 막부와 관계가 소원해지고 결국에는 대립하게 되었다.[1] 에이쿄의 난 때에는 간토 간레이와도 대립하여, 1439년 제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분쟁에서 패배하고 자결하면서 일시적으로 단절되기도 하였다.[1]

1447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막부로부터 가마쿠라 공방 취임을 허가받아 부활하였다.[1] 그러나 이후 막부와 대립하게 된 시게우지가 1455년 시모우사 국 고가로 본거지를 옮기고 고가 공방이라 칭하게 되었다(교토쿠의 난).[1]

이에 맞서 막부는 1458년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정식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으나,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한 채 이즈국 호리고에를 본거지로 삼고 호리고에 공방이라 칭하였다. 이로써 간토 지방에는 두 공방이 양립하게 되었다.[1]

2. 2. 간토 간레이의 보좌와 간토 통치

1349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대립(간노의 소란)이 심화되자, 다다요시를 대신해 정무를 보던 다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교토로 상경하였다. 그 뒤를 이어 가마쿠라로 내려온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초대 가마쿠라 공방이 되었다.[1] 모토우지는 간토 간레이의 보좌를 받으며 간토 10개 국(이후 무쓰국, 데와국까지 관할)을 다스렸지만,[6] 점차 교토의 막부와 관계가 소원해지고 대립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공방의 정부는 구조적으로 교토 쇼군가의 축소판이었으며, 완전한 사법 및 행정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1] 간레이는 쇼군의 아들이었고 간토를 통치하고 그곳의 군대를 통제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보통 가마쿠라 막부(가마쿠라 바쿠후)라고 불렸으며, 모토우지는 가마쿠라/간토 고쇼 등으로 불렸다.[1]

에이쿄의 난 때에는 간토 간레이와도 대립, 1439년 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패배하고 자결하면서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1447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가마쿠라 공방으로 부활했지만, 1455년 막부와 대립하던 시게우지가 시모우사 국 고가로 본거지를 옮겨 고가 공방을 칭하면서 (교토쿠의 난) 가마쿠라부는 소멸했다.[1]

2. 3. 막부와의 갈등과 대립

1349년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간의 대립(간노의 소란)이 심화되면서, 다다요시를 대신해 정무를 보던 다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이어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가마쿠라로 내려와 초대 가마쿠라 공방이 되었다. 간토 간레이의 보좌를 받으며 간토 10개 국(이후 무쓰국, 데와국 포함)을 통치했지만, 대를 거듭하면서 교토의 막부와 관계가 소원해지고 결국 대립하게 되었다.

에이쿄의 난에서는 간토 간레이와도 대립, 1439년 제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패배 후 자결하여 일시적으로 단절되기도 했다. 1447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막부의 허가를 받아 가마쿠라 공방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후 막부와 대립한 시게우지는 1455년 시모우사국 고가(古河)로 본거지를 옮겨 고가 공방을 자칭했다(교토쿠의 난).

이에 맞서 막부는 1458년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정식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해 파견했으나,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즈국 호리고에를 본거지로 삼아 호리고에 공방이라 칭했다. 이로써 간토 지방에는 두 공방이 양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이중 권력 구조는 간토 지방의 지속적인 독립 움직임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5] 가마쿠라는 막 정복되었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다.[5] 또한, 가마쿠라의 많은 아시카가 일족은 쇼군의 죽은 형제인 아시카가 타다요시의 지지자였고, 다카우지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5] 모토우지의 사후, 가마쿠라는 교토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5]

두 번째 ''쿠보'' 우지미쓰와 그의 후손들은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다.[5] 세 번째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시대에 이르러 아시카가 씨족의 가마쿠라 지부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9] 긴장은 여섯 번째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네 번째 ''쿠보'' 모치우지 사이에서 절정에 달했다.[9] 모치우지는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뒤를 이어 쇼군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요시노리가 그에게서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9] 그는 새로운 쇼군의 연호(넨고)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며 불만을 표출했다.[9] 1439년 요시노리는 간토에 군대를 파견했고, 모치우지는 패배하여 자결해야 했다.[1]

1449년 교토는 모토우지의 마지막 후손인 시게우지를 로 지명하여 가마쿠라로 보냈다.[1] 그러나 그와 우에스기 가문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긴장되었고, 시게우지가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살해하면서 간토 지방은 혼란에 빠졌다.[9] (교토쿠의 난 참조) 1455년 시게우지는 교토 군대에 의해 폐위되어 시모사 국의 코가로 도망가 막부에 대한 반란을 지휘했다.[9] 이것으로 는 종말을 맞았다. 칭호는 살아남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우에스기 가문의 손에 있었다.

시게우지는 더 이상 가 아니었기에 스스로를 ''코가 쿠보''라 칭했다. 1457년, 여덟 번째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그의 남동생 마사토모를 군대와 함께 간토를 평정하기 위해 보냈지만,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지도 못했다.[1] 이는 센고쿠 시대라 불리는 일련의 내전으로 간토와 가마쿠라가 황폐화된 시대의 시작이었다.

2. 4. 에이쿄의 난과 가마쿠라 공방의 단절

에이쿄의 난으로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와 대립한 제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1439년에 패배하여 자결하였고, 가마쿠라 공방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1]

1447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막부로부터 가마쿠라 공방 취임을 허가받아 부활하였다. 그러나 이후 막부와 대립한 시게우지는 1455년 시모사국고가로 본거지를 옮겨 고가 공방을 자칭하였다(교토쿠의 난).[9] 이로 인해 가마쿠라부는 소멸하였고, 고가 공방은 공방과 근습(가마쿠라부 봉공중의 후신)이 정무를 담당하는 체제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교토쿠의 난 종결 후에는 간토 간레이와 함께 간토 지방을 지배하는 "공방-간령 체제"를 1570년대까지 유지하였으며, 호조씨가 간토 간레이의 권한을 사실상 장악한 후에도 간토 지방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2. 5. 가마쿠라 공방의 부활과 고가 공방

1447년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아들 시게우지가 막부로부터 가마쿠라 공방 취임을 허가받아 가마쿠라 공방이 부활하였다. 그러나, 후에 막부와 대립하게 된 시게우지가 1455년에 시모우사 국 고가(古河)로 본거지를 옮기고 고가 공방(古河公方)이라 자칭하게 되었다(교토쿠의 난(享徳の乱)).[1]

이에 맞서 막부는 1458년에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를 정식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으나,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한 채 이즈국 호리고에를 본거지로 삼고 호리고에 공방이라고 칭하여 간토 지방에는 두 공방이 양립하게 되었다.[1] 이러한 이중 권력 구조는 간토 지방의 지속적인 독립 시위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5] 당시 가마쿠라는 막 정복되었고, 독립에 대한 열망이 여전히 강했다.[5] 또한 가마쿠라의 많은 아시카가는 쇼군의 죽은 형제인 아시카가 타다요시의 지지자였으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다.[5]

아시카가 모토우지 사후, 가마쿠라는 교토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5] 간토 아시카가의 의도는 그들이 씨족에게 이름을 부여한 시모츠케 국의 가문 토지인 ''아시카가-노-쇼''를 몰수하면서 명확해졌다.[5][8]

아시카가 우지미쓰와 그의 후손들은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다.[5] 아시카가 요시미츠 시대에 이르러 아시카가 씨족의 가마쿠라 지부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9]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아시카가 모치우지 사이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9] 모치우지는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뒤를 이어 쇼군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요시노리가 그에게서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9] 그는 새로운 쇼군의 연호 (''넨고'')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여 불만을 표현했다.[9] 1439년 요시노리는 간토에 군대를 파견했고, 모치우지는 패배하여 자결해야 했다.[1]

1449년 교토는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했다. 모토우지의 마지막 후손인 시게우지가 로 지명되어 가마쿠라로 보내졌다.[1] 그와 우에스기 가문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긴장되었고, 시게우지가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살해하면서 절정에 달했고, 이 살인은 간토 지방을 혼란에 빠뜨렸다.[9] (교토쿠의 난 참조) 1455년 시게우지는 교토 군대에 의해 폐위되었고 시모사 국의 코가로 도망가야 했으며, 그곳에서 막부에 대한 반란을 지휘했다.[9] 이것이 의 종말이었다. 이 칭호는 살아남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우에스기 가문의 손에 있었다.

시게우지는 더 이상 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코가 쿠보''라고 불렀다. 1457년,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그의 남동생 마사토모를 군대와 함께 간토를 평정하기 위해 보냈지만,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1] 이것은 센고쿠 시대라고 불리는 일련의 내전으로 간토와 가마쿠라가 황폐화된 시대의 시작이었다.

2. 6. 호리고에 공방

1458년(조로쿠 2년) 아시카가 마사토모는 막부에 의해 정식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되어 파견되었으나,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즈국 호리고에를 본거지로 삼아 호리고에 공방이라 불렸다. 이로써 간토 지방에는 두 공방이 양립하게 되었다.

2. 7. 고가 공방의 존속과 기레츠가와 씨

1447년 모치우지의 아들 시게우지가 막부로부터 가마쿠라 공방 취임을 허가받아 부활하였다. 그러나 이후 막부와 대립한 시게우지는 1455년 시모사국고가를 본거지로 하여 "고가 공방"이라 칭하게 되었다(교토쿠의 난). 이 난으로 가마쿠라부는 소멸하고, 고가 공방은 공방과 근습(가마쿠라부 봉공중의 후신)이 정무를 행하는 체제로 규모를 축소했지만, 교토쿠의 난 종결 후에는 간토칸레이와 함께 간토 지방을 지배하는 형태("공방-관령 체제")를 1570년대까지 지속하고 있었으며, 호조씨가 간토칸레이의 권한을 사실상 장악한 후에도, 간토 지방의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9]

그 후손은 고호조씨를 멸망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기레츠가와에 소령을 받게 되었고, 에도 시대에는 기레츠가와씨라 칭하며 도쿠가와 쇼군가의 객분이라는 특별한 입장의 다이묘 가문으로 존속했다. 메이지 시대아시카가 성으로 복귀하여 자작으로 서임되었다.[10]

3. 명칭

실제 일본 사료에는 '간토쇼군'(関東将軍), '히가시노쇼군'(東将軍|ひがしのしょうぐん일본어) 등으로 나온다. 또한 쇼군과 더불어 '都鄙|とひ일본어노쇼군케'라고도 불렸다.[16]

일설에는 '가마쿠라 도노(공방)'의 당초 정식 역직명은 '간토간레이'였고, 우에스기 씨(上杉氏)는 '집사'였는데, 집사 집안이 간토간레이가 되고 본래 '간토칸레이케'가 '가마쿠라(간토) 공방'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가마쿠라시사』에 따른 것으로, 『아시카가치란기』에서 나온 착설이다.[15] 일본 『국사대사전』에도 모토우지를 『엔타이랴쿠』에서 '간토칸레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식 호칭이 아니고, 『부케호닌』 등에서 '가마쿠라 간레이'라고 부르는 것도 후세의 글에서 나온 것으로 믿을 수 없다고 되어 있다.[16]

간토 지방 쇼군의 대리인은 이 지역을 통제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구조적으로 그의 정부는 교토 쇼군가의 축소판이었으며 완전한 사법 및 행정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간레이'는 쇼군의 아들이었고 간토를 통치했으며 그곳의 군대를 통제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보통 가마쿠라 막부라고 불렸으며, 모토우지는 左武衛将軍|사부에쇼군일본어 또는 가마쿠라/간토 고쇼와 동등한 칭호였다.[1] 나중에 쇼군을 '구보'라고 부르는 습관이 교토에서 간토로 퍼지면서 가마쿠라 통치자는 '가마쿠라 구보'라고 불리게 되었다.[1] '간레이' 칭호는 우에스기 세습 '시쓰지'에게 전해졌다.[1][5] 이 칭호가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1382년 鶴岡事書安|쓰루가오카지고안일본어이라는 문서의 기록으로, 두 번째 '구보'인 우지미쓰 아래에 있었다.[1] 이 용어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자신이 처음 채택했으며, 그 사용은 따라서 쇼군과의 동등함을 의미했다.[7] 실제로 때때로 '간토 구보'는 간토 쇼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7]

4. 역대 가마쿠라 공방

대수이름재임 기간비고
초대아시카가 모토우지1349년 - 1367년
2대아시카가 우지미쓰1367년 - 1398년
3대아시카가 미쓰카네1398년 - 1409년
4대아시카가 모치우지1409년 - 1439년에이쿄의 난으로 자결. 가마쿠라 공방직 일시 단절.
5대아시카가 시게우지1447년 - 1455년1455년 시모우사 국 고가로 거소를 옮기고, 고가 공방을 칭함.


5. 가마쿠라 공방의 저택

가마쿠라에 있던 ''쿠보'' 저택의 옛 터를 표시하는 비석


가마쿠라에 있던 저택의 옛 터에는 검은색 기념비가 서 있으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막부를 세운 후, 아시카가 요시카네[11]가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그의 후손들 또한 그 후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곳에 거주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쇼군이 되어 교토로 옮겨간 후, 그의 아들이자 제2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역시 그곳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요시아키라의 동생 아시카가 모토우지는 그 후 가 되어 이곳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이는 그 후 아시카가 가문 전체의 전통이 되었다. 그들은 교토의 방식을 따라 스스로에게 ''쿠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455년, ''쿠보''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우에스기 노리타다와 충돌한 후 이바라키의 시모사로 옮겨갔고, 저택은 철거되었다.

>

> 1918년 3월 가마쿠라초 청년단이 건립

비석은 니지노하시 다리 근처 조묘지 4-2-25에 있다.[12]

이곳은 매우 좁은 계곡의 아래쪽에 위치하여 방어에 용이하다. 근처의 아사이 나 고개는 포위 시 쉽게 탈출할 수 있도록 해준다. 1685년에 발행된 안내서인 신편 가마쿠라시에 따르면, 시게우지가 도망간 지 200년이 넘도록 현지 농민들은 쿠보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그가 돌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비워두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Kokushi Daijiten 1983
[2] 문서 Matsuo 1997
[3] 서적 Kokushi Daijiten
[4] 웹사이트 Nengocalc https://uni-tuebinge[...] 2007-09-30
[5] 문서 Jansen 1995
[6] 문서 Iwanami Nihonshi Jiten, Kamakura-fu
[7] 문서 Sansom
[8] 문서 Hall 1990
[9] 문서 Hall 1990
[10] 웹사이트 The last Koga Kubo https://kotobank.jp/[...] 2019-05-09
[11] 문서 Head of the Ashikaga clan
[12] 웹사이트 Original Japanese text http://www.kcn-net.o[...]
[13] 서적 鎌倉市史 吉川弘文館 1959
[14] 간행물 関東管領 吉川弘文館 1983-02
[15] 서적 鎌倉市史 吉川弘文館 1959
[16] 저널 関東管領 吉川弘文館 198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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