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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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갑훈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권력에 굴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헌신한 관리였다. 그는 무위 태수의 횡포를 고발하고, 황건적의 난 때 황준을 구제하며,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식량을 배급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동탁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으며,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동탁에 대한 미움으로 등창에 걸려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갑순은 영양태수를 지냈다.
갑훈은 대대로 태수 급으로 올라간 명문가에서 태어났다.[1] 영제에게 소환되어 토로교위에 임명되었고, 종정 유우와 좌군교위 원소와 함께 근위대를 통솔하며 환관 배척을 계획했다. 그러나 사려교위 장온이 갑훈을 경조윤으로 천거했고, 견석 등은 갑훈을 싫어했기 때문에 장온의 상주를 따르도록 영제에게 권했다. 갑훈은 경조윤에 임명된 후, 한양군의 왕국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개훈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2. 생애
189년(중평 6년), 낙양으로 소환되어 의랑이 되었다. 좌장군 황보숭이 정병 3만 명을 이끌고 부풍군에 주둔하자, 갑훈은 황보숭과 결탁하여 동탁을 토벌하려 했다. 190년(초평 원년)[3], 황보숭이 소환되자, 갑훈은 병력이 적어 자립할 수 없다며 황보숭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동탁에게 굽신거리지 않는 자가 없었지만, 홀로 갑훈은 동탁과 예의 범절을 다투었다. 동탁이 사려교위에 임명할 인물을 사도 왕윤에게 묻자, 왕윤은 갑훈을 추천했다. 동탁은 갑훈을 월기교위에 임명했고, 더 나아가 영천 태수로 부임하게 했다. 191년(초평 2년)[4], 갑훈은 군에 부임하기 전에 낙양으로 소환되었으나, 등에 부스럼이 생겨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신은 안릉에 묻혔다.
아들 개순은 영양 태수까지 올랐다.
2. 1. 지방 관리 시절
갑훈은 처음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한양 장사가 되었다.
184년(중평 원년), 북지군의 강호와 변장 등이 롱우로 침공하자, 량주자사 좌창은 토벌군을 일으키면서 수만 석의 군량을 훔쳤다. 갑훈이 강하게 간하자, 좌창은 노하여 갑훈에게 따로 아양현에 주둔하게 하고 반란군의 공격을 막게 했다. 좌창은 갑훈에게 군사적 실패를 씌워 죄를 주려 했지만, 갑훈은 오히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변장 등이 금성군을 공격하여 군수 진의를 살해하자, 갑훈은 금성군을 구원할 것을 권했지만 좌창은 따르지 않았다. 변장 등이 진격하여 기현의 좌창을 포위하자, 좌창은 두려워 갑훈을 불렀다. 갑훈은 처음에 종사 신증과 공상과 함께 아양현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좌창의 격문이 도착하자 신증 등은 의심하여 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갑훈은 "옛날 장가가 기일을 어겼을 때, 사마양저는 칼을 휘둘러 처형했다. 지금 종사들은 옛날의 감군(莊賈)의 고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가"라며 노했다. 신증 등은 두려워 갑훈을 따랐다. 갑훈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좌창을 구원했다. 도착하자, 갑훈은 변장 등의 반란 죄를 꾸짖고 항복을 권했다. 반란자들은 "좌사군이 만약 일찍이 그대의 말을 따랐다면, 우리도 귀순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미 죄가 무거워 항복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포위를 풀고 떠났다.
좌창은 횡령죄로 문책을 받아 면직되었고, 송소가 대신 자사가 되었다. 송소는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것에 고민하며 "량주는 학술이 부족하여, 그 때문에 반란과 폭행이 자주 일어난다. 『효경』을 많이 필사하게 하여, 각 집에 이를 배우게 하면, 민중도 의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갑훈에게 말했다. 갑훈은 "옛날 태공망이 봉해진 제에서는, 최저가 임금 장공을 죽였다. 백금이 후가 된 노에서는, 경부가 민공을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 이 두 나라에는 학자가 부족했던 것입니까? 지금 병란을 진정시킬 방도를 서두르지 않고, 상식을 벗어난 일을 한다면, 한 주의 원망을 살 뿐만 아니라, 더욱이 조정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갑훈은 생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간했다. 송소는 갑훈의 간언을 듣지 않고, 주상하여 『효경』을 반포했다. 과연 송소는 조서에 의한 문책을 받고, 죄를 물어 소환되었다.
이때 강이 반란을 일으켜 호강교위 하육을 축관에서 포위했다. 갑훈은 하육을 구원하고자 주군의 군사를 규합하고, 호반으로 진격하여 강에게 패했다. 갑훈은 잔여 군사 백여 명을 재편성하여 어린의 진을 펼쳤다. 강의 정예 기병에게 협공을 당하여 패배했고, 사로잡혔다. 강은 갑훈의 신병을 한양군으로 송환했다. 후에 자사 양옹이 갑훈의 공적을 상주하자, 갑훈은 한양 태수를 겸임했다.
갑훈이 한양 태수였을 때, 기근이 일어나자, 갑훈은 곡물을 징발하여 분배하고, 맨 먼저 자신의 집의 식량을 내놓았다. 이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2. 2. 조정의 직신
영제는 갑훈에게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를 묻자, 갑훈은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자제가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11] 이때 건석이 함께 있었는데, 영제는 건석을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건석은 두려워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고, 이 일로 갑훈에게 한을 품었다. 영제는 갑훈에게 다시 평락관(平樂觀)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중장(中藏)의 재화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11]
갑훈은 쓸데없이 무용을 낭비하는 것이라 답하였고, 영제는 크게 감탄하며 이제야 갑훈을 만난 것이 심히 아깝다고 말하며, 여태껏 이와 같은 말을 해준 신하는 없었다고 하였다.[11]
갑훈은 종정 유우·좌군교위(佐軍校尉) 원소와 함께 근위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갑훈은 이들에게 환관을 주살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들 또한 동의하여 서로 계획을 세웠다.[11]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사례교위 장온이 갑훈을 경조윤으로 천거하였다. 영제는 갑훈을 곁에 두고 싶어했으나 건석 등은 그를 꺼렸기 때문에 장온의 의견에 동조하였고, 결국 갑훈은 경조윤으로 전출되었다.[11]
당시 장안령(長安令)이었던 양당(楊黨)은 부친이 중상시(中常侍)였는데, 권세를 부리며 탐욕스러운 자였다. 갑훈이 이를 조사한 결과 그가 을 수뢰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귀족과 외척들이 모두 양당을 비호하였으나, 갑훈은 듣지 않고 수사를 계속하였다.[11]
이 무렵 소황문(小黃門) 고망이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태자는 고망의 아들 고진(高進)을 효렴으로 삼을 것을 건석을 통해 갑훈에게 부탁하였으나, 갑훈은 듣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태자의 말을 들을 것을 권하며 황태자는 황제의 한 팔이고, 고망은 그분이 총애하시는 자이며 건석은 황제의 총신인데, 그들을 거스르면 세 가지 원망이 생기지 않겠냐고 하였다.[11]
갑훈은 어진 이를 가리는 것은 나라에 보답하는 일이며, 어질지 못한 자를 추천하지 않아 주살되는 것에 무슨 한이 있겠냐며 거절하였다.[11]
2. 3. 동탁이 두려워하다
중평 6년(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소제가 즉위하였다. 양주의 군벌 동탁은 궁성으로 쳐들어와 소제를 폐위하고 하태후를 죽였다. 갑훈은 동탁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를 꾸짖으니, 동탁은 갑훈을 대단히 두려워하며 불러들여 의랑(議郞)으로 삼았다.[1]
이때 좌장군 황보숭의 병사 3만 명이 부풍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갑훈은 그와 은밀히 공조하여 동탁을 치고자 하였다. 마침 황보숭도 수도로 소환되었는데, 갑훈은 군세가 적은데다 혼자 거병하기는 어려웠으므로 함께 수도로 돌아갔다.[3]
아무도 동탁에게 거스르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갑훈만은 예법을 따라 읍할 뿐이었으니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보고 얼굴의 핏기가 가셨다.
동탁은 왕윤에게 사례교위로 삼을 만한 자를 자문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왕윤은 갑훈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동탁은 갑훈의 명석함을 아까워하여 월기교위(越騎校尉)에 임명하였다. 갑훈은 이후 영천태수로 전출되었으나, 다시 수도로 소환되었다.
이 무렵 하남윤 주준이 군무에 관해 동탁에게 아뢰었는데, 동탁은 주준을 꾸짖으며 "나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는데, 이는 모두 내 마음대로 하여 얻은 것이다. 너는 망언이나 하며 내 칼을 더럽힐 생각이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갑훈이 "옛날에는 무정 같은 명군도 간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신 정도의 인물이 다른 사람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것입니까?"라고 동탁에게 말했다.
동탁은 갑훈에게 '농담으로 한 말'이라고 핑계를 댔으나, 갑훈은 성을 내며 "성을 내며 장난을 친다니, 그런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동탁은 결국 주준에게 사과하였다.
2. 4. 죽음
갑훈은 동탁에 대한 깊은 반감으로 인해 결국 병을 얻어 등창으로 사망했다.[4] 향년 51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동탁이 주는 물건을 받지 말라고 했으나, 동탁은 관용을 베푸는 척하며 조문품을 보내고 예법에 따라 유해를 보냈다. 시신은 안릉(安陵)에 묻혔다.[4]
죽기 직전, 동탁은 갑훈을 영천 태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갑훈은 부임하기 전에 낙양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4]
3. 평가
이러한 개훈의 행동들은 그가 청렴하고 강직하며,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백성을 위한 마음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돋보인다.
4. 가계

참조
[1]
서적
続漢書
[2]
문서
天水郡
0074
[3]
서적
後漢書
[4]
서적
後漢紀
[5]
서적
속한서
[6]
문서
사제
[7]
서적
후한서
[8]
문서
천수군
[9]
문서
진법
[10]
문서
강족
[11]
문서
왕실의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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