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집 (1963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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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검은 집》은 1963년에 제작된 이란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가 연출했다. 이 영화는 한센병 환자들이 거주하는 바바바기 마을을 배경으로, 그들의 일상생활과 고통을 시적인 영상미로 담아냈다. 영화는 한센병 환자들의 고립과 절망을 보여주며,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다. 개봉 당시에는 샤와 파로흐자드의 이익을 위해 환자들을 착취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후 이란 영화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이란 뉴 웨이브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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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1963년 영화)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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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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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Khaneh siah ast |
감독 | 포루그 파로흐자드 |
제작 | 에브라힘 골레스탄 |
각본 | 포루그 파로흐자드 |
개봉 | 1963년 |
상영 시간 | 22분 |
국가 | 이란 |
언어 | 페르시아어 |
2. 배경
이란의 영화 제작 역사는 1900년에 시작되었으며, 1950년대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이 활발해졌다. 당시에는 이란 안팎의 뉴스를 4~5편 묶어 상영하는 뉴스 영화 형식이 성행했는데, 이는 주로 교육과 선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1950년대 이란은 정치적으로 격변하는 시기를 겪었다. 1951년에는 석유 자원 국유화가 단행되었고, 1953년에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모하마드 레자 샤 정권은 국왕을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하고 국가의 이념과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선전 목적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다수 제작했다. 이란 문화 예술부(Wezārat-e farhang o honarfa)와 이란 국영 텔레비전 라디오(Rādīo wa televīzīon-e mellī-e Īrānfa)에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고, 1960년대 초반에는 이들 기관이 발주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영국이나 캐나다 등 외국의 미디어가 이란 내 영화 제작사에 자국의 상황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화 프로듀서이자 작가인 에브라힘 골레스탄은 1955년 테헤란에 이란 최초의 사설 민영 영화 제작소인 골레스탄 영화 스튜디오(Sāzmān-e Film-e Golestānfa)를 설립했다. 한편, 시인으로 잘 알려진 포루그 파로흐자드는 1958년 유럽에서 돌아와 골레스탄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영화 제작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이후 한 나병 구호 단체와 협력하여 《검은 집》을 연출하게 된다.
2. 1. 포루그 파로흐자드와 에브라힘 골레스탄의 만남
1958년 유럽에서 돌아온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는 이란으로 귀국하여 영화 제작자 에브라힘 골레스탄을 만나 교류하기 시작했다. 골레스탄은 1955년 테헤란의 아라크 거리에 이란 최초의 사설 민영 영화 제작소인 골레스탄 필름 스튜디오(Sāzmān-e Film-e Golestānfa)를 설립한 인물이었다. 이 스튜디오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말까지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아흐바즈 유전 지대에서 국영 석유 회사 설립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불꽃" 등이 대표적이다.골레스탄은 친구들의 소개로 당시 일자리를 찾고 있던 파로흐자드를 만났고, 자신의 스튜디오에 고용했다. 처음에는 타이피스트나 전화 응대 업무를 맡았지만, 점차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파로흐자드는 골레스탄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다큐멘터리 영화 《불》과 《물과 열》의 편집자로 참여했고, 이후 "불꽃"의 편집, 다른 영화의 각본과 촬영까지 담당하며 1962년까지 영화 제작 전반에 걸친 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이 시기 파로흐자드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심, 개인적인 관계 문제, 가족과의 갈등,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깊은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영화 제작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고, 이후 한 나병 구호 단체와 협력하여 《검은 집》을 연출하게 된다.
3. 제작
시인으로 알려진 포루그 파로흐자드는 1958년 이란으로 돌아와 영화 제작자 에브라힘 골레스탄을 만나 교제를 시작했으며, 그의 골레스탄 영화 스튜디오(Sāzmān-e Film-e Golestānfa)에서 일하며 영화 제작 기술을 익혔다. 파로흐자드는 골레스탄 스튜디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의 편집, 각본, 촬영 등을 경험하며 1962년까지 영화 제작 전반에 대한 기술을 습득했다.
1962년, 골레스탄 영화 스튜디오는 한센병 환자 지원 협회(Anjoman-e komak be joḏāmīānfa)로부터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위탁받았다. 촬영 장소는 이란 북서부 동아자르바이잔주 타브리즈 인근에 위치한 Bābābāghī|바바바기fa로, 마을 전체가 한센병 환자를 위한 종신 요양소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골레스탄은 이 영화의 감독으로 당시 27세였던 파로흐자드를 지명했다.
파로흐자드는 1962년 여름, 먼저 혼자 바바바기를 방문하여 사전 조사를 진행한 후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이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가을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3. 1. 촬영
촬영은 1962년 가을, 이란 북서부 동아자르바이잔주 타브리즈 인근의 한센병 환자 요양소 마을인 باباباغی|바바바기fa에서 12일 동안 진행되었다. 포루그 파로흐자드 감독은 여름에 사전 조사를 마친 뒤, 가을에 5명의 촬영 스태프와 함께 마을에 머물며 촬영했다. 파로흐자드는 미리 각본이나 촬영 목록, 일정 등을 준비하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주민들과 소통하며 촬영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촬영 기간의 첫 이틀 동안 마을 환경에 적응하고 주민들과 친밀감을 쌓는 데 집중했으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바바바기 주민들의 신뢰를 얻어 촬영에 대한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4. 내용
영화는 약 22분 길이로, 한센병 환자들의 일상생활을 억제된 카메라 워크를 통해 천천히 비춘다. 영상 위에는 감독 포루그 파로흐자드가 직접 쓴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가 겹쳐지는데, 이는 억양을 최대한 억제한 담담한 어조로 마치 중얼거림처럼 들린다. 또한, 제작자 에브라힘 골레스탄은 남성 내레이터로서 한센병의 병태나 의료 정보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영화는 몸단장을 하는 여성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비추며 시작한다. 이후 신체 기능 유지를 위한 재활 장면, 예배소에서 치유를 바라며 쿠란의 구절을 암송하는 모습, 그리고 파로흐자드가 위로하는 듯한 어조로 신약 성경의 일부를 읽는 장면 등이 이어진다. 이 외에도 공놀이나 급식 시간과 같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는 학교 장면이 포함되어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4. 1. 영화 속 상징: 학교
영화에는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학교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교과서를 읽는 모습이 그려지고, 두 번째 장면에서는 교사가 아이들에게 배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교사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예를 들어보세요"와 같은 질문을 한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문답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바바바기 마을 주민들의 고립되고 힘겨운 삶의 현실과 대비되어 아이러니한 느낌을 준다.5. 제목
영화의 제목 "검은 집"은 페르시아어 원제인 '하네 시야흐 아스트'(خانه سیاه است|하네 시야흐 아스트fa)를 번역한 것이다. 이 제목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학생이 칠판에 적는 문구에서 따왔다. 직역하면 "집이 검다"라는 뜻이지만, 영화의 맥락을 고려하여 "그 집은 파멸할 운명이다"(The House is doomed영어)와 같이 해석되기도 한다.
5. 1. 제목에 담긴 의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목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교사가 한 학생에게 '하네'(خانه|하네fa, '집'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라는 단어를 이용해 문장을 만들라고 한다. 학생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배웅하는 모습과 함께 카메라가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며 문이 닫히는 장면이 나온다. 닫힌 문 바깥쪽에는 '조자메 하네'(나병 환자의 집)라고 쓰여 있다. 이후 소년은 칠판에 분필로 "하네 시야흐 아스트"(خانه سیاه است|하네 시야흐 아스트fa)라고 쓴다.
포루그 파로흐자드 감독은 이 문장을 영화의 제목으로 삼았다. "하네 시야흐 아스트"는 직역하면 "집이 검다"라는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영화의 맥락을 고려하여 "''The House is doomed''"(그 집은 파멸할 운명이다)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페르시아어 원제에는 정관사나 지시사가 없지만,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 제목으로는 정관사를 붙인 "''The House is Black''"와 "''La maison est noire''"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일본에서는 지시사 '저'를 붙여 "저 집은 검다"(あの家は黒い)로 번역된 예가 있으며, 1999년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될 때는 "블랙 하우스"(ブラックハウス)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6. 해석 및 평가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이란 외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이란 영화 역사에서 획기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평론가 에릭 헨더슨은 이 영화를 "원형적인 에세이 영화 중 하나로, ''검은 집''은 이란 뉴 웨이브의 길을 열었다"라고 평가했다.[7] 실제로 이 작품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란 뉴 웨이브 영화들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검은 집》의 가장 큰 특징이자 중요한 평가 지점은 시적인 영상미와 다큐멘터리 기법을 융합하여 "시적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영화 평론가 조나단 로젠바움은 이 영화가 영화와 시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드문 사례 중 하나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록산 바르지는 2014년 ''Off Screen'' 기고를 통해 이 영화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운동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9]
이러한 혁신성은 후대 이란 감독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검은 집》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는 평가가 있으며,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은 이 영화를 현대 이란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
6. 1. 비판적 시각
이란에서 1962년 또는 1963년 첫 상영 당시에는 본작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일반 공개에 앞서 테헤란 대학교 의과학 연구소에서 열린 전문가 대상 프리미어 상영회는 샤의 쌍둥이 여동생 اشرف پهلوی|아슈라프 팔라비fa와 샤의 비 فرح پهلوی를 귀빈으로 초청하여 개최되었다. 본작에 대한 주요 비판은 "포루그 파로흐자드 감독 등이 샤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센병 환자들을 착취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비판은 당시 이란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전후로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이란에는 냉전 시대 동서 진영의 대립 구도가 국내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샤 지지파와 좌익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 영화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배경 속에서 제기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6. 2. 국제적 인정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이란 외 지역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란 영화 역사상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서방 국가에서는 비교적 일찍 이 영화의 가치를 인정했다. 1963년 서독의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으며,[8] 1966년에는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영국 영화 협회(BFI)는 이 영화를 "역대 가장 위대한 다큐멘터리 50편 (Critics’ 50 Greatest Documentaries of All Time)"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국제적인 관심은 이어져, 2020년 영국의 가디언 지는 영화 속 고립된 분위기를 코로나19 범유행 상황에서의 고립감과 연결 지어 분석하기도 했다.[2] 2024년에는 영화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영화에 대해 "매우 번뜩이고, 매우 인간적이며, 매우 정치적"이라고 언급하며 시청을 권유했다.[10]
7. 영화의 유산
포루그 파로흐자드 감독은 영화 촬영을 통해 바바바기(Bābābāghīfa) 주민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이는 영화에 대한 외부 평가보다 감독 자신에게 더 큰 의미를 지녔다. 촬영 중 만난 한센병 환자 부부의 아이를 테헤란으로 데려와 양자로 삼았으며, 1967년 감독 사후에도 시집 인세 수입으로 양자를 계속 부양했다. 감독이 남긴 편지에는 아이에 대한 깊은 모성애가 드러난다.
한편, 영화의 배경이 된 바바바기에는 현재(2006년 기준) 타브리즈 대학교 ( University of Tabriz영어 ) 의학 연구소 시설이 들어서 한센병의 조기 발견과 치료에 기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난 수십 년간 해당 지역의 한센병 유병률은 꾸준히 감소해왔다.
7. 1.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1962년, 골레스탄 영화 스튜디오는 한센병 환자 지원 협회(Anjoman-e komak be joḏāmīānfa)로부터 이란 북서부 동아제르바이잔주 타브리즈 인근의 한센병 환자 요양소 마을인 바바바기(Bābābāghīfa)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의뢰받았다. 당시 27세였던 포루그 파로흐자드가 감독을 맡아, 1962년 가을 5명의 촬영 스태프와 함께 12일간 바바바기에 머물며 촬영을 진행했다. 파로흐자드는 사전 각본 없이 현장에서 주민들과 교감하며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주민들과의 깊은 신뢰 관계 구축으로 이어졌다.
《검은 집》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란 뉴 웨이브 영화 운동보다 앞서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시적인 영상미와 다큐멘터리 기법을 결합하여 "시적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 평론가 조나단 로젠바움(Jonathan Rosenbaum영어)은 이 영화가 시와 영화를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드문 사례라고 평했으며,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작품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 역시 《검은 집》을 현대 이란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았다.
그러나 1962년 또는 1963년 이란에서의 첫 상영 당시에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존재했다. 특히 테헤란 대학교 의과학 연구소에서 열린 전문가 대상 시사회 이후, 파로흐자드 감독이 샤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센병 환자들을 이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냉전 시대 이란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귀빈으로는 모하마드 레자 샤의 쌍둥이 여동생 아슈라프 팔라비(Ashraf Pahlavi영어)와 샤의 비 파라 팔라비(Farah Pahlavi영어)가 초청되었다.
반면, 서구에서는 일찍부터 영화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1963년 서독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66년 페사로 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영국 영화 협회는 이 영화를 "역대 가장 위대한 다큐멘터리 50선"(Critics’ 50 Greatest Documentaries of All Time)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파로흐자드 감독 자신은 영화에 대한 외부 평가와 관계없이 바바바기 주민들과 쌓은 인간적인 유대감에 큰 의미를 두었다. 촬영 중 만난 환자 부부의 아이를 입양하여 테헤란으로 데려왔고, 1967년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시집 인세 수입으로 양자를 계속 부양했다. 그녀가 남긴 편지에서는 아이에 대한 깊은 모성애를 엿볼 수 있다.
현재(2006년 기준) 바바바기에는 타브리즈 대학교( University of Tabriz영어 ) 의학 연구소 시설이 들어서 한센병의 조기 발견과 치료에 힘쓰고 있으며, 지난 수십 년간 꾸준히 유병률을 감소시켜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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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n Iranian film about a leper colony can teach us about corona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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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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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a Poesis: The interplay of poetry, image and ethnography in Forough Farrokhzad’s The House is Bl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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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Glazer on the power of the camera as wit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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