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국대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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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공주로, 고려 충선왕과 정략 결혼을 통해 세자빈이 되었다. 그녀는 충선왕이 다른 여인을 총애하자 원나라에 이를 고하여 충선왕이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한국장공주로 봉해져 고려로 돌아왔으나 충선왕에게 버려졌고, 원나라로 돌아가 사망했다. 1343년 계국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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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로 원나라 공주였으나 공민왕과 정략결혼 후 고려에 와서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지지하며 헌신적으로 내조했으나 난산으로 사망하여 공민왕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고 사후 대장공주로 추증되었으며 현재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 원나라의 공주 - 제국대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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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국대장공주 | |
---|---|
인물 정보 | |
원어 이름 (원나라) | 중국어: 孛兒只斤 寶塔實憐 병음: Bèierzhǐjīn Bǎotǎshílián |
원어 이름 (한국) | 한국어: 패아지근 보탑실련 한자: 孛兒只斤 寶塔實憐 로마자 표기: Paeajigeun Botapsillyeon |
몽골 이름 | 부다시리 |
기타 이름 (한국) | 보타슈리, 보탑실련 |
기타 이름 (한자) | 寶塔實憐 (?) |
기본 정보 | |
작위 | 계국대장공주 (薊國大長公主) |
직함 | 고려의 왕비 (1회) 고려의 왕비 (2회) 태상왕 (Retired consort) |
재위 기간 (1회) | 1298년 |
즉위 (1회) | 1298년 |
선임 (1회) | 장목왕후 |
후임 (1회) | 장목왕후 |
재위 기간 (2회) | 1308년 – 1313년 |
즉위 (2회) | 1308년 |
선임 (2회) | 장목왕후 |
후임 (2회) | 공원왕후 |
재위 기간 (태상왕) | 충숙왕 시대 |
아버지 | 감마라 |
어머니 | 부얀 켈미쉬 카툰 |
배우자 | 충선왕 (1296년 결혼) |
출생 | 1285년경 |
출생지 | 원나라 |
사망일 | 1316년 1월 15일 |
사망지 | 고려 |
매장지 | 고려 |
왕조 (출생) | 보르지긴 가문 |
왕조 (결혼) | 왕씨 |
추증 | 한국공주 (韓國公主) 한국장공주 (韓國長公主) |
2. 가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이자, 친킴의 손녀이며, 원 현종 카말라의 딸이다.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아 송산의 친누이인지 이복 누이인지, 원 태정제의 친누이인지 이복 누이인지 확실하지 않다.[1]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이자 친킴의 손녀이며, 원 현종 카말라의 딸로, 이름은 '''부다시리'''였다. 1296년 11월 27일 원 성종 테무르 칸의 명으로 고려의 세자 왕장(후일의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고, 1310년 7월 원 무종 카이산에 의해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에 책봉되었다.
3. 생애
그러나 충선왕이 고려인 출신 후궁 조비를 총애하자 이를 시기하여 원나라에 보고했고, 그 결과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에게 양위해야 했으며 조비와 그 가족들은 원나라로 끌려가 구금되었다.[1] 충렬왕은 그녀를 세 번이나 내쫓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2]
왕고와 밀접한 정치적 관계를 맺었던[3] 그녀는, 충선왕에게 버려진 후, 일부 불교 사찰을 방문하거나 충숙왕의 정부가 준비한 연회에 참석하며 지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나라로 돌아갔다.[2]
정치적으로 많은 말썽을 일으키고 원에서 죽었으나 고려에서 장례를 지냈다. 사망 원인은 미상이며, 매장지 역시 미상이다. 자녀는 없으며, 1343년 원나라로부터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시호를 받았다.[1]
3. 1. 초기 생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이자 친킴의 손녀이며, 원 현종 카말라의 딸이다. 어머니는 미상으로, 송산의 친누이인지 이복 누이인지, 혹은 원 태정제의 친누이인지 이복 누이인지 불확실하다.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대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손자 진 헌무왕 카말라의 서녀로, 양왕 송산의 친누이 혹은 이복 누이이며, 원 진종 예순테무르의 이복 누나가 된다.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는 대고모뻘이고, 충선왕은 내종 아저씨뻘이었다.
1296년 11월 27일 원 성종 테무르 칸의 명으로 고려의 세자 왕장(王璋, 후일의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어 고려로 들어왔다. 1310년 7월 원 무종 카이산에 의해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에 책봉되었다.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에서 카말라(진금과 쾨케진 카툰의 아들)와 부얀 켈미쉬 카툰의 딸로 '''부다시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형제자매는 다음과 같다.
이름 | 관계 |
---|---|
쑨산 | 오빠 |
예순 테무르 | 오빠 |
델게르부카 | 오빠 |
라드나발라 | 여동생 |
수닝 | 여동생 (바부샤 카툰과 사다발라 카툰의 어머니) |
3. 2. 충선왕과의 결혼과 갈등
1296년 11월 27일 원 성종 테무르 칸의 명으로 고려의 세자 왕장(후일의 충선왕)과 결혼해 세자빈이 되어 고려로 들어왔다. 1310년 7월 원 무종 카이산에 의해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이 자기보다 앞서 맞아들인 고려인 출신 후궁 조비를 더 총애하자, 이를 시기하여 충선왕을 원으로 불러들이게 하였다.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이 그녀를 쫓아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그녀는 왕원(王謜)과 결혼하여 그의 정실 부인이 되었고, 이듬해 고려로 가서 숭경부(崇敬府)와 중화궁(中和宮)에 머물다가 남편이 즉위한 후 왕비가 되었다.[1] 처음에는 고모할머니였던 시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부다시리 또한 고려에 올 때 시녀를 거느렸다.[1]
그러나 그녀와 남편은 신혼 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남편이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고려 여인을 총애하자 그녀는 질투하여 원나라에 보고했다.[1] 그 결과, 왕은 아버지에게 양위해야 했고, 그가 총애했던 여인 조씨와 그녀의 가족들은 원나라로 끌려가 구금되었다.[1]
시아버지는 세 번이나 그녀를 내쫓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2]
그녀는 왕고와 밀접한 정치적 관계를 맺었다고 전해지며, 그는 1316년에 그녀의 조카와 결혼했다.[3] 왕원과 왕고 모두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들은 고려의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3] 남편이 쿠릴루크 칸의 지원을 받아 승리한 후, 그녀는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라는 새로운 칭호를 받고 그와 함께 다시 고려로 돌아왔다.[3] 그러나 그들을 따르는 50개의 수레는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비참했다.[3]
3. 3.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 다툼
1296년 11월 27일, 원 성종 테무르 칸의 명으로 고려의 세자 왕장(후일의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어 고려로 들어왔다.[1] 1310년 7월 원 무종 카이산에 의해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에 책봉되었다.[1] 그러나 충선왕이 자기보다 앞서 맞아들인 고려인 출신 후궁 조비를 더 총애하자, 이를 시기하여 충선왕을 원으로 불러들이게 하였다.[1]충선왕과 신혼 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녀는, 남편이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고려 여인 조비를 총애하자 질투하여 원나라에 보고했다.[2] 그 결과,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에게 양위해야 했고, 조비와 그 가족들은 원나라로 끌려가 구금되었다.[2]
충렬왕은 그녀를 세 번이나 내쫓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2]
그녀는 왕고와 밀접한 정치적 관계를 맺었는데, 왕고는 1316년에 그녀의 조카와 결혼했다.[2] 왕원과 왕고 모두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고려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2] 쿠릴루크 칸의 지원을 받은 충선왕이 승리한 후, 그녀는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라는 새로운 칭호를 받고 그와 함께 다시 고려로 돌아왔다.[2]
충선왕에게 버려진 후, 그녀는 일부 불교 사찰을 방문하거나 충숙왕의 정부가 준비한 연회에 참석하며 지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나라로 돌아갔다.[2] 그녀는 많은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고, 1315년 원나라에서 사망했는데, 그녀의 죽음은 논란이 많았다.[2]
3. 4. 말년과 죽음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이자 친킴의 손녀이며, 원 현종 카말라의 딸이다. 초기 생애는 알려진 것이 없다. 1296년 11월 27일 원 성종 테무르 칸의 명으로 고려의 세자 왕장(후일의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어 고려로 들어왔다. 1310년 7월 원 무종 카이산에 의해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이 고려인 출신 후궁 조비를 더 총애하자, 이를 시기하여 충선왕을 원으로 불렀다.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이 그녀를 쫓아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충선왕에게 버려진 후, 그녀는 일부 불교 사찰을 방문하거나 충숙왕의 정부가 준비한 연회에 참석하며 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녀는 많은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고, 1315년 원나라에서 사망했는데, 그녀의 죽음은 논란이 많았다. 그녀의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묻혔다. 1343년 원나라로부터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시호를 받았다.[1]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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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元代史新探
https://books.google[...]
新文豐出版公司
[2]
서적
Buddhas and Ancestors: Religion and Wealth in Fourteenth-Century Kore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3]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https://books.google[...]
Routledge
[4]
서적
Zhu Yuanzhang and Early Ming Legislation
https://books.google[...]
Brill
[5]
서적
[6]
서적
고려사 권34 〈세가〉 권34 - 충숙왕 2년 12월 갑오(甲午) 기사
[7]
서적
고려사 권89 〈열전〉 권2 후비 열전 - 충선왕 후비 계국대장공주
[8]
서적
원사(元史) 권109 〈표〉(表) 제4 - 제공주표(諸公主表)
[9]
서적
고려사 권89 〈열전〉 권2 - 충선왕 후비 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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