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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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가류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존재했던 무사 집단으로, 현재의 시가현 고카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롯카쿠 씨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자치적인 조직인 '소'를 형성하여 다수결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등 독립적인 면모를 보였다. 특히, 롯카쿠 씨와 아시카가 막부 간의 분쟁에서 게릴라전을 통해 뛰어난 전투 능력을 발휘하며 '닌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후 고가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해체되었으나, 그들의 기술과 정신은 현대에도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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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술 - 이가류
이가류는 고용주와의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의뢰를 수행하며, 엄격한 훈련과 가혹한 처벌을 특징으로 하는 닌자 집단으로, 센고쿠 시대에 자치 공동체를 형성했으나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하고 에도 시대에는 막부에 흡수되었다. - 고난시 (시가현)의 역사 - 고세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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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가류 | |
|---|---|
| 개요 | |
| 본거지 | 일본, 고가군 (현재의 시가현 남부) |
| 기원 | 가마쿠라 시대 말기 ~ 무로마치 시대 |
| 주요 인물 | 고가 53가 |
| 관련 인물 | 모치즈키 이즈모노카미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
| 주요 기술 | 닌술 전반, 약학, 기문둔갑 |
| 특징 | 독립적인 닌자 집단, 뛰어난 정보 수집 능력, 약학 지식, 기문둔갑 활용 |
| 역사 | |
| 성립 | 가마쿠라 시대 말기 ~ 무로마치 시대에 고가군을 중심으로 형성 |
| 전국 시대 | 고가 53가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닌자 집단으로 활동, 뛰어난 정보 수집 능력과 약학 지식 활용 |
|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에도 막부의 정보 기관 역할 수행, 오니와반에 참여 |
| 현대 | 현대에 와서는 닌술의 한 유파로 전승, 다양한 대중 문화에 등장 |
| 특징 | |
| 독립적인 닌자 집단 |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 고가 53가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운영 체제 유지 |
| 뛰어난 정보 수집 능력 | 고가군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 주변 지역의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집, 에도 막부의 정보 기관으로 활동 |
| 약학 지식 | 다양한 약초를 재배하고 약을 제조, 전투 및 생존에 필요한 약품 개발, 닌자의 필수적인 생존 기술 |
| 기문둔갑 활용 | 기문둔갑을 이용하여 유리한 위치를 선정하고 전투 전략 수립, 닌술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 |
| 고가 53가 | |
| 개요 | 고가류 닌술을 대표하는 53개의 가문, 각 가문은 독자적인 기술과 역할을 담당 |
| 주요 가문 | 모치즈키 씨 우류 씨 반 씨 다가미 씨 나카무라 씨 고치 씨 |
| 기술 | |
| 닌술 전반 | 은신술, 변장술, 무기 사용술 등 닌자의 기본적인 기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숙련된 기술 연마 |
| 약학 | 약초 재배, 약 제조, 독 사용 등 약에 대한 지식, 닌자의 생존 능력 향상에 기여 |
| 기문둔갑 | 기문둔갑을 이용한 점술, 예측, 전략 수립,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 확보 |
| 관련 인물 | |
| 모치즈키 이즈모노카미 | 고가류 닌술의 시조로 알려진 인물, 뛰어난 닌술 실력과 지략을 갖춘 것으로 전해짐 |
|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 고가류 닌자 출신으로 용맹함과 충성심으로 유명, 주군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줌 |
| 도쿠가와 이에야스 | 고가류 닌자의 도움을 받아 천하통일에 성공, 에도 막부를 세우고 고가류 닌자를 중용 |
2. 역사
헤이안 시대에 스즈카 관문이 설치되고 일본 도고쿠로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고가 지역에도 무사들이 토착하였다. 고대 오토모씨의 일족이었던 도모노 스쿠네(伴宿禰)가 고가향(甲賀郷)의 향장(郷長)이 되어 이 지방의 호족으로써 재임하였다. 그 먼 후손으로써 파생되어 무사화되고 차츰 '''고가 무사'''(甲賀武士)가 형성되어 간다.
센고쿠 시대 고가는 소규모 영주들이 「同名中」이라는 일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독립성이 강했기에 롯카쿠 씨(六角氏)의 지배가 충분히 미치지 못하였다. 훗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대두해오자 이들 고가 사무라이 무리들은 고가 군(甲賀郡)을 단위로 하는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이것이 고가 군 츄소(甲賀郡中惣)였다.[17]
무로마치 시대 후기 간논지 성(観音寺城)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오미국(近江)의 사사키 롯카쿠 씨(佐々木六角氏)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명령도 무시하며 세력을 키웠다. 1487년(조쿄 원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가 롯카쿠 씨를 정벌하려 하자 롯카쿠 다카요리(六角高頼)는 고가 성(甲賀城)으로 옮겨 저항하였다. 요시히사는 본진을 구리타 군(栗太郡) 안요지(安養寺)로 옮겨 고가 성을 함락시켰으나, 다카요리는 고가 무사들에게 게릴라(ゲリラ)전을 명하였다. 「가메로쿠 법」(亀六ノ法)은 적이 오면 거북이처럼 숨었다가 기습하는 전법이었다.[18] 고가 무사들은 산속 지형을 이용, 요시히사 본진을 공격하기도 했다.[19] 1489년 요시히사 사망으로 싸움은 끝났고, 참전한 53개 집안을 「고가 53가(甲賀五十三家)」, 감장을 받은 집안을 「고가 21가(甲賀二十一家)」라 칭했다.
이후 고가 무사들은 롯카쿠 씨와 행동을 같이했다. 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가 간논지 성 전투(観音寺城の戦い)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고 야스가와라 전투(野洲河原の戦い)에서도 패퇴했다. 롯카쿠 씨 몰락 후 고가는 오다 노부나가 지배하에 들어갔다.[8] 혼노지의 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가 탈출(伊賀越え) 때, 야마구치 미쓰히로(山口光広) 등이 고가 무사들을 이끌고 이에야스 일행을 경호했다. 미에 대학 교수 후지타 다쓰오(藤田達生)는 이를 "고가 탈출"이라 칭하기도 한다.[20]
덴쇼(天正) 13년(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는 고가 무사들을 개역(改易)했고, 고가는 나카무라 가즈우지(中村一氏) 지배하에 놓였다. 고가 옛 무사들은 일부 무사 신분을 유지했지만 대부분 평민, '''고가 고시'''(甲賀古士)가 되었다.[21]
에도 시대, 다라오 씨는 대관(代官) 세습을 허락받았고, 이가 탈출을 도운 고카 무사는 중용되었다.[9] 고카 고사는 간분(寛文)부터 겐로쿠(元禄) 무렵 에도 막부에 무사 신분 획득을 탄원했다. "고카 53가", "고카 21가"는 간분 2년(1667년) 고카 고사 작성 『두려운 마음으로 소상 말씀드립니다』(乍恐以訴状言上仕候)에 처음 등장, 에도 시대 용어다.[11] 고카 고사들은 이에야스, 막부 공헌을 주장, 후세 "고카 닌자" 이미지 원형이 되었다. 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00년 이상 중단되었다. 간세이(寛政) 시대 탄원에는 지샤부교(寺社奉行)에게 『반센슈카이(만천집해)』를 제출, 에도 시대 사회에 "고카 닌자" 존재를 알렸다.
막부 말기 고카 고사들은 사쿠보(佐幕)에서 도바쿠(倒幕)로 전환, 고카대(甲賀隊) 결성,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지휘 아래 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쇼나이 번과 싸운 세키카와 전투에서 활약했다.
대정봉환 이후 고카 고시 대부분은 평민이 되었다. 첩보 활동, 야마부시(산에서 수행하는 승려) 부적 판매, 『만천집해』 속 '기갈환', '주불취약' 등 닌자 비약 판매, 의약, 제약에 밝았다. 1884년(메이지 17년) 배찰금지령 후 약 매매에 전념, 배치매약(配置売薬)을 했다. 현대 고카 지방에는 의약품, 드링크제 회사, 공장이 많다. 오미 형제사, 닛신 제약 공업 주식회사 등 일본 제약 회사 중 고카 닌자 후예 설립 기업들이 있다.
고가류 마지막 소케(宗家)는 14대 후지타 세이코(藤田西湖, 1898–1966)다. ''도론론: 사이고노 닌자''(どろんろん最後の忍者일본어 "마지막 닌자", 1958년)에서 닌술을 가르치지 않고 유파 전수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1]
일본 무술 백과사전 부게이 류하 다이지텐, 고류 부술(古流武術), 겐다이 부도(현대 무도) 목록은 현재 가르침 아는 이가 없다 명시한다.[2] 고가류 관련성 주장은 증거 제시 어렵고, 진정한 전통 실천 가능성은 낮다.
2. 1. 형성
헤이안 시대에 스즈카 관문이 설치되고 일본 도고쿠로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고가 지역에도 무사들이 토착하였다. 고대에 오토모씨의 일족이었던 도모노 스쿠네(伴宿禰)가 고가향(甲賀郷)의 향장(郷長)이 되어 이 지방의 호족으로써 재임하였다. 그 먼 후손으로써 파생되어 무사화되고 차츰 '''고가 무사'''(甲賀武士)가 형성되어 간다.센고쿠 시대 고가는 소규모 영주들이 「同名中」이라는 일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독립성이 강했기에 롯카쿠 씨(六角氏)의 지배가 충분히 미치지 못하였다. 훗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대두해오자 이들 고가 사무라이 무리들은 고가 군(甲賀郡)을 단위로 하는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이것이 고가 군 츄소(甲賀郡中惣)였다.[17]
무로마치 시대 후기 간논지 성(観音寺城)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오미국(近江)의 사사키 롯카쿠 씨(佐々木六角氏)가 차츰 힘을 키워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명령도 가볍게 보며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조쿄(長享) 원년(1487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가 이를 정토하고자 군을 내었으며 롯카쿠 세력과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鈎의 陣). 요시히사가 여러 구니의 다이묘(大名)들을 동원하여 롯카쿠 씨의 본거지 간논지 성을 압박해 왔을 때 롯카쿠 다카요리(六角高頼)는 막부군과의 직접 대결을 피해 고가 성(甲賀城)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요시히사는 본진을 구리타 군(栗太郡)에 위치한 鈎의 안요지(安養寺)로 옮기고 고가 성을 쳐서 이를 함락시켰으나, 탈출한 롯카쿠 다카요리는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고가 무사들에게 명해 산속에서 게릴라(ゲリラ)전을 전개하면서 완강하게 막부군에 저항하였다. 「가메로쿠 법」(亀六ノ法)이라고 부르는, 다카요리가 고안한 전법이 있는데, 적이 공격해 오면 거북이처럼 고가 산속에 숨어서 적이 오랜 대치로 지치기를 기다려 거북이가 손발을 내밀듯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는 전법이었다.[18] 이밖에 고가 무사들은 산속에서 그 지형지리를 살려 다양한 기습 작전을 감행하였고, 또한 때때로 밤을 틈타 요시히사의 본진에 쳐들어가 불을 지르기도 하는 등, 막부군을 괴롭혔다고 한다.[19] 때문에 제대로 결착이 나지 않았고, 결국 조쿄 3년(1489년) 요시히사가 진중에서 사망하면서 3년에 걸친 싸움은 끝이 났으며, 롯카쿠 씨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 참가했던 53개의 지방 사무라이 집안들을 「고가 53가(甲賀五十三家)」라 부르게 되었으며 나아가 53가 가운데 롯카쿠 씨로부터 감장(感状)을 받고 중한 위치에 놓이게 된 집안을 「고가 21가(甲賀二十一家)」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후 고가의 사무라이 무리들은 롯카쿠 씨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다. 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가 간논지 성 전투(観音寺城の戦い)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자 고가로 달아나 노부나가와 싸우게 되었으나, 야스가와라 전투(野洲河原の戦い)에서 고가 사무라이 무리들이 가세한 롯카쿠 군세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뒤로도 싸움은 계속되었고 롯카쿠 씨가 몰락하자 고가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배하에 들게 된다.[8]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는 고가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무렵에는 노부나가와 함께 혼노지에서 죽은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동생인 모리 다다마사(森忠政)와 그 어머니 묘코니(妙向尼)를 고가의 사무라이 무리인 반 고레야스(伴惟安)가 고가의 자신의 영지에 숨겨주었다. 훗날 반씨(伴氏)는 모리 다카마사(森忠政)의 가신이 된다. 혼노지의 변 소식을 알고 본국인 미카와국(三河)로 돌아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이가 탈출(伊賀越え)에서는 야마구치 미쓰히로(山口光広)가 이에야스와 동행하고 있던 노부나가의 가신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의 요구에 응해 친형인 다라오 미쓰마사(多羅尾光雅)와 함께 고가 사무라이 무리들을 거느리고 이에야스 일행의 가는 길을 지켰다. 「이가 탈출」의 구체적인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고가를 통과하는 거리가 긴 것이었다는 추측을 내놓는 연구자들도 존재하고 있다. 미에 대학(三重大学)의 교수 후지타 다쓰오(藤田達生)는 「이가 탈출(伊賀越え)이라기보다는 고가 탈출(甲賀越え)이었다」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20]
2. 2. 롯카쿠 씨와의 관계
무로마치 시대 후기, 간논지 성을 본거지로 한 오미 롯카쿠 씨는 힘을 키워 무로마치 막부의 명령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1487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롯카쿠 씨를 정벌하려 군사를 일으켰고, 롯카쿠 다카요리는 막부군과의 직접 대결을 피해 고가 성으로 옮겼다. 요시히사는 본진을 구리타 군의 안요지로 옮겨 고가 성을 함락시켰으나, 롯카쿠 다카요리는 고가 무사들에게 게릴라전을 명하여 막부군에 저항했다.[18] 다카요리가 고안한 "가메로쿠 법"은 적이 공격하면 거북이처럼 고가 산속에 숨어 기다리다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는 전법이었다.[18] 고가 무사들은 산속 지형을 이용한 기습과 요시히사 본진 방화 등으로 막부군을 괴롭혔다.[19] 1489년 요시히사가 진중에서 사망하며 3년간의 싸움은 끝났고, 롯카쿠 씨는 살아남았다. 이 싸움에 참가한 53개 집안을 고가 53가라 불렀고, 그중 롯카쿠 씨에게 감장을 받은 집안을 고가 21가라 칭했다.이후 고가 무사들은 롯카쿠 씨와 행동을 같이했다. 롯카쿠 요시카타가 간논지 성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자 고가로 달아나 싸웠으나, 야스가와라 전투에서 롯카쿠 군은 패배했다. 롯카쿠 씨 몰락 후 고가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8] 혼노지의 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가 탈출에서 야마구치 미쓰히로 등이 고가 무사들을 이끌고 이에야스 일행을 경호했다. 미에 대학 교수 후지타 다쓰오는 이를 "고가 탈출"이라 칭하기도 한다.[20]
2. 3.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
센고쿠 시대 고가는 소규모 영주들이 '도묘나카'(同名中)라는 일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독립성이 강했기에 롯카쿠 씨(六角氏)의 지배가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훗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세력을 키우자, 고가 사무라이들은 고가 군(甲賀郡)을 단위로 하는 연합체인 고가 군 주소(甲賀郡中惣)를 결성하였다.[17]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는 간논지 성 전투(観音寺城の戦い)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한 후 고가로 피신하여 노부나가와 계속 싸웠다. 그러나 야스가와라 전투(野洲河原の戦い)에서 고가 사무라이들이 가세한 롯카쿠 군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하였다.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롯카쿠 씨가 몰락하면서 고가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8]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는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고가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당시, 노부나가와 함께 혼노지에서 사망한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동생 모리 다다마사(森忠政)와 그의 어머니 묘코니(妙向尼)는 고가 사무라이 반 고레야스(伴惟安)에 의해 고가의 영지에 은신하였다. 훗날 반 고레야스는 모리 다다마사의 가신이 되었다.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듣고 본국 미카와(三河)로 돌아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이가 탈출(伊賀越え) 때, 야마구치 미쓰히로(山口光広)는 이에야스와 동행하던 노부나가의 가신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의 요청으로 친형 다라오 미쓰마사(多羅尾光雅)와 함께 고가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이에야스 일행의 길을 경호했다. '이가 탈출'의 경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고가를 통과하는 거리가 길었다는 추측도 있다. 미에 대학(三重大学) 교수 후지타 다쓰오(藤田達生)는 '이가 탈출'이 사실상 '고가 탈출'이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20]
2. 4. 이가류와의 관계
甲賀流일본어와 伊賀流일본어는 흔히 닌자 유파의 양대 산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고이 일국"(甲伊一国)이라고 불릴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지역은 혼인을 통해 주민 간의 관계가 밀접했으며, 조쿄·엔토쿠의 난(鈎の陣)에서 오미요치시랴쿠에 따르면 이가슈(伊賀衆)가 고가슈와 함께 롯카쿠 다카요리를 돕는 등 동맹을 맺거나 연대하는 경우가 많았다.[18][19]하지만, 덴쇼 이가의 난(天正伊賀の乱)에서 伊賀일본어류가 오다 노부나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甲賀일본어류는 오다 노부나가 군의 편에 서서 이가 침공 루트 중 하나를 제공하는 등 서로 항쟁한 시기도 있었다.[16] 이처럼 두 유파는 협력과 대립의 복잡한 관계를 겪었다. "고가 대 이가"라는 숙적 관계는 후세의 창작으로, 실제 역사와는 차이가 있다.
2. 5. 몰락과 그 후
헤이안 시대에 스즈카 관문이 설치되고 일본 도고쿠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었던 고가 지역에도 무사들이 토착하였다. 고대 오토모씨의 일족이었던 도모노 스쿠네가 고가향(甲賀郷)의 향장이 되어 이 지방의 호족으로 재임하였다. 그 먼 후손으로 파생되어 무사화되고 차츰 '''고가 무사'''(甲賀武士)가 형성되어 갔다.센고쿠 시대 고가는 소규모 영주들이 「同名中」이라는 일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독립성이 강했기에 롯카쿠 씨(六角氏)의 지배가 충분히 미치지 못하였다. 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대두해오자 이들 고가 사무라이 무리들은 고가 군(甲賀郡)을 단위로 하는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이것이 고가 군 츄소(甲賀郡中惣)였다.[17]
무로마치 시대 후기 간논지 성(観音寺城)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오미의 사사키 롯카쿠 씨(佐々木六角氏)가 차츰 힘을 키워서 무로마치 막부의 명령도 가볍게 보며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조쿄(長享) 원년(1487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이를 정토하고자 군을 내었으며 롯카쿠 세력과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鈎の陣). 요시히사가 여러 구니의 다이묘들을 동원하여 롯카쿠 씨의 본거지 간논지 성을 압박해 왔을 때 롯카쿠 다카요리는 막부군과의 직접 대결을 피해 고가 성(甲賀城)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요시히사는 본진을 구리타 군(栗太郡)에 위치한 鈎의 안요지(安養寺)로 옮기고 고가 성을 쳐서 이를 함락시켰으나, 탈출한 롯카쿠 다카요리는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고가 무사들에게 명해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완강하게 막부군에 저항하였다. 「가메로쿠 법」(亀六ノ法)이라고 부르는, 다카요리가 고안한 전법이 있는데, 적이 공격해 오면 거북이처럼 고가 산속에 숨어서 적이 오랜 대치로 지치기를 기다려 거북이가 손발을 내밀듯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는 전법이었다.[18] 이밖에 고가 무사들은 산속에서 그 지형지리를 살려 다양한 기습 작전을 감행하였고, 또한 때때로 밤을 틈타 요시히사의 본진에 쳐들어가 불을 지르기도 하는 등, 막부군을 간간이 괴롭혔다고 한다.[19] 때문에 제대로 결착이 나지 않았고, 결국 조쿄 3년(1489년) 요시히사가 진중에서 사망하면서 3년에 걸친 싸움은 끝이 났으며, 롯카쿠 씨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 참가했던 53개의 지방 사무라이 집안들을 「고가 53가」(甲賀五十三家)라 부르게 되었으며 나아가 53가 가운데 롯카쿠 씨로부터 감상을 받고 중한 위치에 놓이게 된 집안을 「고가 21가」(甲賀二十一家)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후 고가의 사무라이 무리들은 롯카쿠 씨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다. 롯카쿠 요시카타가 간논지 성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자 고가로 달아나 노부나가와 싸우게 되었으나, 야스가와라 전투(野洲河原の戦い)에서 고가 사무라이 무리들이 가세한 롯카쿠 군세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뒤로도 싸움은 계속되었고 롯카쿠 씨가 몰락하자 고가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배하에 들게 된다.[8]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고가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혼노지의 변 무렵에는 노부나가와 함께 혼노지에서 죽은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동생인 모리 다다마사(森忠政)와 그 어머니 묘코니(妙向尼)를 고가의 사무라이 무리인 반 고레야스(伴惟安)가 고가의 자신의 영지에 숨겨주었다. 훗날 반 씨(伴氏)는 모리 다다마사의 가신이 된다. 혼노지의 변 소식을 알고 본국인 미카와로 돌아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른바 이가 탈출(伊賀越え)에서는, 야마구치 미쓰히로(山口光広)가 이에야스와 동행하고 있던 노부나가의 가신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의 요구에 응해 친형인 다라오 미쓰마사(多羅尾光雅)와 함께 고가 사무라이 무리들을 거느리고 이에야스 일행의 가는 길을 지켰다. 「이가 탈출」의 구체적인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고가를 통과하는 거리가 긴 것이었다는 추측을 내놓는 연구자들도 존재하고 있다. 미에 대학의 교수 후지타 다쓰오(藤田達生)는 「이가 탈출(伊賀越え)이라기보다는 고가 탈출(甲賀越え)이었다」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20]
덴쇼(天正) 13년에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해 고가의 사무라이 무리들은 개역 처분되었다. 고가는 히데요시의 가신 나카무라 가즈우지(中村一氏)의 지배하에 들었다. 이로 해서 고가의 옛 사무라이 무리들은 일부 무사 신분화한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평민이 되었다.[21] 이들을 '''고가 고시'''('''甲賀古士''')라고 부른다.
에도 시대, 다라오 씨가 대관 세습을 허락받는 등,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가 탈출(이가 고개)를 도운 고카의 무사가 중용되었다.[9] 한편, 고카 고사는 간분부터 겐로쿠 무렵, 에도 막부에 무사 신분 획득을 목표로 탄원 운동을 벌였다. 앞서 언급한 "고카 53가" "고카 21가"라는 말도, 처음 등장한 것은 간분 2년 (1667년)에 고카 고사가 작성하여 막부에 제출한 『두려운 마음으로 소상 말씀드립니다』(乍恐以訴状言上仕候)이며,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용어이다.[11] 『두려운 마음으로 소상 말씀드립니다』 등에서 고카 고사들은 그들의 선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막부에 섬기며 공헌했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후세의 "고카 닌자"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다. 이 소원은 막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00년 이상 소원은 중단되었다. 이 사이에 기존의 지역 사회가 변화하여 본가와 분가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간세이 시대의 소원에도 반영되었다. 간세이 시대의 탄원에서는 지샤부교에게 닌술서 『반센슈카이(만천집해)』를 제출했다. 이 행동이 에도 시대 사회에 "고카 닌자"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막부 말기가 되자 고카 고사들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사쿠보에서 도바쿠로 전환하여 고카대를 결성하고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의 지휘 아래 보신 전쟁에 참가했다. 고카 고사로서의 자긍심을 걸고 훈련을 거듭하여 쇼나이 번과 싸운 세키카와의 싸움에서는 다른 여러 부대에서 칭찬을 받을 정도로 활약했다.
2. 6. 근현대
덴쇼 13년(1585년),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카 무사들을 개역 처분했다. 고카는 히데요시의 가신 나카무라 가즈우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카의 옛 무사들 중 일부는 무사 신분을 유지했지만 대부분 평민이 되었다.[21] 이들을 '''고카 고시'''(甲賀古士)라고 불렀다.에도 시대에는 다라오 씨가 대관 세습을 허락받는 등,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가(이가 국) 탈출을 도왔던 고카 무사들이 중용되었다.[20] 한편, 고카 고시들은 간분(1661년 ~ 1673년)에서 겐로쿠(1688년 ~ 1704년)에 걸쳐 에도 막부에 무사 신분을 얻기 위한 탄원 운동을 벌였다. '고카 53가', '고카 21가'라는 말도 간분 2년(1667년)에 고카 고시들이 작성해 막부에 제출한 『송구하나마 소장을 받들어 올리나이다』(乍恐以訴状言上仕候)라는 문헌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에도 시대에 들어와 생겨난 용어이다.[22]
『송구하나마 소장을 받들어 올리나이다』 등에서 고카 고시들은 선조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막부에 출사하여 공헌했다는 내력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후세 '고카 닌자'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다. 이 소원은 막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100년 동안 중단되었다. 이 사이에 종래의 지역 사회가 변화하여 본가와 분가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고, 간세이(1789년 ~ 1801년) 무렵의 소원에도 반영되었다. 간세이 연간의 탄원에는 지샤부교(사찰과 신사를 담당하는 부서)에 닌술서 『만천집해』(萬川集海)를 제출했다. 이 행동이 에도 시대 사회에 '고카 닌자'의 존재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막부 말기에 이르러 고카 고시들은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좌막(佐幕, 막부 옹호)에서 도막(倒幕, 막부 타도)으로 노선을 바꾸고, 고카타이(甲賀隊)를 결성해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아래서 보신 전쟁에 참가했다. 고카 고시로서의 긍지를 걸고 훈련을 거듭해, 쇼나이 번과 싸웠던 세키가와 전투(関川の戦い)에서 다른 여러 부대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활약했다.
고카 고시의 대부분은 대정봉환 이후 평민 신분으로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첩보 활동을 하면서 야마부시(산에서 수행하는 승려)로서 부적을 팔거나, 부업으로 『만천집해』에 기술된 '기갈환', '주불취약' 등이나 다른 닌자의 비약을 팔러 다니기도 했으며, 의학이나 제약에 밝았다. 1884년(메이지 17년)에 배찰금지령(配札禁止令)이 내려져 본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되자 약 매매에 전념하며 배치매약(配置売薬)을 하게 되었다. 현대에도 고카 지방에는 의약품이나 드링크제 등의 회사나 공장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장사에 성공한 일부 약국은 일본 전국으로 규모를 넓혔기 때문에 오미 형제사나 닛신 제약 공업 주식회사 등 현대 일본의 제약 회사 중에도 고카 닌자의 먼 후예들에 의해 설립된 기업들이 많이 존재한다.
3. 특징
현대의 일본 사가현 고카시, 고난시가 그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보통은 농업에 종사하며 행상을 하며 각지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지령이 떨어지면 전장이나 그 후방으로 가서 공작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둔갑(手妻)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으며, 인술 유파 가운데서도 약을 다루는 데에 뛰어나 그 이름의 흔적으로 고카에는 현대에도 제약회사가 많이 위치해 있다.[16] 또한 여성 닌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점으로도 유명하다.
무로마치 막부부터 센고쿠 시대 중기에 걸쳐 고가는 롯카쿠씨(六角氏)의 산하에 속해 있으면서 「소」(惣)를 형성하였고, 군에 관련된 모든 안건을 다수결(합의제)로 결정하고 운영하였다. 이는 이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보아도 지극히 희귀한 것이었다. 고가의 토착 사무라이들은 자치를 인정받는 대신에 전시에는 롯카쿠 씨에 협력하였으며 후술할 「鈎の陣」에서는 야간 기습 등의 활약을 펼쳐 고가슈(甲賀衆)가 후세에서 말하는 「닌자」로써의 인식이 생기거나 혹은 그러한 임무로써 기용되기에 이르렀다.[4]
4. 연구
현대의 일본 사가현 고카시, 고난시가 고가류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들은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며 행상을 통해 각지의 정보를 수집했고, 지령이 떨어지면 전장이나 후방에서 공작 활동을 벌였다. 둔갑술에 능숙했으며, 인술 유파 중에서도 약을 다루는 데 뛰어났다. 고가에는 현대에도 제약회사가 많이 위치해 있는데, 이는 고가류 닌자들이 약을 잘 다루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가류에는 여성 닌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16]
고가 닌자에 대한 기록은 고가 무사의 가계에서 그 선조가 인술로 군공을 세웠다는 후세의 기록이 대부분이며, 당시의 사료는 부족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덧붙여진 이미지가 많아 그 존재를 의문시하는 경우도 많았다.[13] 그러나 2000년에 에도 시대에 오와리번을 섬겼던 고가 5인조 중 한 명이 저술한 고문서 『와타나베 가 문서』(渡辺家文書)가 민가에서 발견되면서, 적어도 에도 시대에는 고가류 닌자가 확실히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13] 2012년부터는 미에 대학이나 고가 시 등이 협력하여 고가류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13] 와타나베 가의 후손은 고가 인술 연구회(甲賀忍術研究会)에서 회장을 맡은 적이 있으며,[9] 『와타나베 가 문서』는 『오와리번 고가자 관계 사료』로서 고가시 관광 협회에서 입수할 수 있다.[4]
5. 닌자 저택
닌자 저택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이지만, 내부에는 밧줄 사다리, 함정, 회전문, 지하도 등이 설치되어 있다.[24] 고카시 고난초 류호시 2331번지에는 고카 53가의 필두 격이었던 모치즈키 이즈모노카미가 겐로쿠 연간에 건축한 옛집이 고카류 닌자 저택으로 남아있다.[14]
6. 고카 마을 닌자촌
1983년 시가현 고카시(甲賀市) 고카초 오키에 고카의 마을 닌자 마을(甲賀の里忍術村)이 개원했으며, 마을 내에는 『만카슈카이』 저자로 알려진 후지바야시 야스케의 일족의 집을 이전한 카라쿠리 저택과 고카 닌술 박물관(甲賀忍術博物館) 등의 자료관이 있다.[24]
7. 대중문화 속의 고가류
- 이가의 카게마루 - 등장인물에 "코우가 7인중"이 등장한다.
- 오다 노부나가와 이와무로 나가토노카미 - 주인공 "이와무로 나가토노카미"가 코우가류 닌자이다.
- 음에서 마모루! - 히로인 중 한 명인 "쿠모가쿠레 호타루"가 코우가 닌자이다.
- 가면의 닌자 아카카게 - "코우가 겐요사이"가 이끄는 금목교, 만지당은 코우가 닌자 집단이다.
- 은의 왕 - 닌자의 5대 세력 중 하나로 등장한다.
- 코우가 닌법첩/바질리스크 ~코우가 닌법첩~
- 코우가의 핑키 - 파칭코 게임으로,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 코우가류 닌자! 퐁포코 - 버추얼 유튜버이다. 코우가시에 사는 너구리 닌자이다.
- 사스케 - 주인공 "사스케"가 코우가류의 소년 닌자이다.
- 사무라이 스피리츠 - 등장인물 중 한 명인 "갈포드"가 코우가 닌자이다. "어스퀘이크"도 수행자 중 한 명이다.
- 초전자 머신 볼테스 V - 볼테스 팀의 여성 멤버 "오카 메구미"는 코우가류 17대이다.
- 직격! 지옥권 - 주인공 "코우가 류이치"는 코우가 닌법 종가 제24대 적자이다.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오우미 슈리"가 코우가 닌자이다.
- 닌자 핫토리군 - 주인공의 라이벌 "케무마키 켄조"가 코우가류의 소년 닌자이며, 그 외에도 코우가류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 닌자 캡터 - 후반부의 적이 "코우가 닌자"이다.
- 프로 골퍼 사루 코우가 비경! 그림자 닌자 골퍼 등장!
- 마법선생 네기마! -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나가세 카에데"가 코우가 중닌이다.
- 야지키타 학원 도중기 - 등장인물 "각운재 코테츠"와 "켄보 사기리"가 코우가류 닌자이다. 특히 켄보는 방계이지만 "모치즈키 이즈모노카미"의 후예로 여겨진다.
- 낙제 닌자 란타로 (닌타마 란타로) - 닌술 학원 전 교사 "오오키 마사노스케"가 코우가 출신이다.
- 사나다 태평기 - 히데요시, 이에야스에게 종사하는 야마나카 나가토시 등이 "코우가 야마나카 닌자"이다.
참조
[1]
서적
Doronron : Saigo no Ninja " " The last ninja
[2]
웹사이트
Bugei ryuha dai jiten
http://www.budogu.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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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武芸流派辞典
新人物往来社
196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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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を訪ねて 1487】忍者たちのデビュー戦(栗東市、甲賀市)戦国の世 将軍を夜討ち
北海道新聞
2020-02-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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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2012)pp.22-24
[6]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71 忍者と忍術 闇に潜んだ異能者の虚と実
학연
200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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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徳2年(1712年)作成の『甲賀古士之事』(藤田(2012)pP.45-46)
[8]
문서
藤田(2012)pp.24-25
[9]
뉴스
【みちものがたり】家康の「伊賀越え」(滋賀県、三重県)本当は「甲賀越え」だった?忍者の末裔が唱える新説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0-06-13
[10]
문서
藤田(2012)pp.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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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藤田(2012)p.44
[12]
웹사이트
みんなで、忍者の携帯食であった『兵糧丸』を作ってタイムスリップ!!!
2021-04-16
[13]
뉴스
甲賀忍者、幻から実在へ 滋賀、古文書発見で“光”
http://www.kyoto-np.[...]
2017-04-02
[14]
웹사이트
甲賀流忍術屋敷 公式ホームページ
http://www.kouka-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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