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1. 개요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은 1858년(안세이 5년)에 태어나 1903년(메이지 36년)에 사망한 일본의 황족이다. 닌코 천황의 유자로 친왕 선하를 받고 닌나지 제30세의 몬제키에 취임하여 불교 승려로 활동하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환속하여 군사 총재, 오우 정벌 총독 등을 역임하며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에 참여했다. 육군 대장, 참모총장을 거쳐 원수에 올랐으며, 외교 활동에도 힘써 유럽 각국을 방문하고 영국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메이지 천황을 대리하여 참석했다. 사회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 적십자사 등 여러 단체의 총재를 맡았으며, 유신 이후의 공로를 인정받아 세습 친왕가가 되었고 고마쓰노미야로 궁호를 개칭했다.
| 본명 | 고마쓰 아키히토 친왕 (小松宮彰仁親王) |
|---|---|
| 일본어 표기 | 小松宮彰仁親王 |
| 로마자 표기 | Komatsu-no-miya Akihito shinnō |
| 출생 | 1846년 2월 11일 |
| 출생지 | 교토, 도쿠가와 막부 |
| 사망 | 1903년 2월 18일 |
| 사망지 | 도쿄, 일본 제국 |
| 묻힌 곳 | 도요시마오카 묘지 |
| 작위 | 친왕 |
|---|---|
| 경칭 | 전하 |
| 계통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8번째 아들 스고 천황의 남계 16세손 레이겐 천황의 여계 6세손 |
| 배우자 |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비 요리코 (아리마 요리코) |
| 자녀 |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 (양자) |
| 아버지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
| 어머니 | 호리우치 노부코 |
| 소속 | |
|---|---|
| 복무 기간 | 1867년 – 1895년 |
| 최종 계급 | 원수 |
| 주요 참전 |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
| 훈장 | 금치훈장 (2등) 욱일장 (1등) 국화장 |
| 직책 | 원수 육군 대장 근위 사단장 참모총장 박애사 총장 → 일본 적십자사 초대 총재 대일본수산회 회장 대일본산림회 총재 대일본무덕회 총재 고야산 흥륭회 총재 외 다수 |
|---|---|
| 참모본부장 임기 시작 | 1895년 1월 26일 |
| 참모본부장 임기 종료 | 1898년 1월 20일 |
| 이전 참모총장 |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
| 다음 참모총장 | 가와카미 소로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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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노미야 -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은 무로마치 시대의 황족이자 후시미노미야 제3대 당주로, 고코마쓰 천황의 유자였으나 출가하여 도흠이라 불렸으며 고하나조노 천황의 친아버지로서 그의 혈통은 현재 일본 황실과 구 황족 궁가에 이어져 황위 계승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
후시미노미야 -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은 일본 난보쿠초 시대의 황족이자 북조 제3대 스코 천황의 맏아들로, 후시미노미야의 시조이며, 예술에 능통했고 그의 영지는 후손들에게 계승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현재 황실과 구 황족 간의 최근 공통 조상이다. -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
혼마 마사하루
혼마 마사하루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필리핀 공략전을 지휘했으나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한 책임으로 전범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재판은 지휘자 책임 적용 및 맥아더의 복수심 작용 등의 논란이 있다. -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인 도공 후손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만주, 스위스, 독일, 소련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소일 중립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으로서 미일 관계 개선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전범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며, 종전 과정에서 포츠담 선언 수용을 주장하여 일본 항복에 기여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
공2급 금치훈장 수훈자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공2급 금치훈장 수훈자 -
오쿠보 하루노
오쿠보 하루노는 육군 대장까지 진급하고 한국주둔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하고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한국 병합 이후 조선주둔군 사령관을 지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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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이 5년(1858년), 닌코 천황의 유자가 되어 친왕 선하를 받고 순인 친왕으로 불렸으며, 닌나지 제30세 몬제키에 취임했다.
게이오 3년(1867년), 환속하여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친왕(にんなじのみや よしあきしんのう)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에서 기의정, 군사 총재에 임명되었고,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 정벌 총독으로 관군을 지휘했다. 1870년(메이지 3년) 궁호를 히가시후시미노미야로 고쳤다. 1874년(메이지 7년) 사가의 난에서는 정벌 총독으로,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에는 여단장으로 참전하여 난을 진정시켰다.
1881년(메이지 14년), 유신 이후의 공로로 가격을 세습 친왕가로 인정받았다. 1882년(메이지 15년) 궁호를 닌나지 사역의 옛 이름인 고마츠 향에서 따와 고마츠노미야로 고쳤다. 친왕은 유럽 군주국의 예를 따라 황족이 솔선하여 군무에 종사할 것을 장려했다.
1890년(메이지 23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근위사단장,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정청 대총독으로 임명되어 뤼순에 출정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참모총장이 전쟁 중 사망하자 후임 참모총장이 되었다. 1898년(메이지 31년) 원수부에 들어갔다.
1886년(메이지 19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방문했고, 1887년(메이지 20년) 오스만 제국 수도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를 방문하여 오스만 왕가와 교류를 시작했다. 1902년(메이지 35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 메이지 천황을 대신하여 참석했다.
일본 적십자사, 대일본 수산회, 대일본 산림회, 대일본 무덕회, 고야산 흥륭회 등 여러 단체의 총재를 맡아 황족 공무의 원형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1896년(메이지 29년) 이노우에 엔료의 철학관(후의 도요 대학)에 "호국애리" 편액을 하사했다. 가와카미 촌 곤고지에 후남조 황족 지텐노의 비를 세웠다.
2.1. 초기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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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친왕은 후시미 구니이에 친왕의 일곱째 아들로 요시아키 친왕으로 태어났다. 1858년 닌코 천황의 유자가 되어 황위 계승 후보로 입양되었다. 당시 일본은 여전히 도쿠가와 바쿠후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불교 승려가 되었고, 교토의 몬제키 사찰인 닌나지에서 섬기게 되었으며,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仁和寺宮嘉彰)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게이오 3년(1867년), 환속을 명받아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친왕(にんなじのみや よしあきしんのう)이라고 칭했다. 메이지 유신에서는 기의정, 군사 총재에 임명되었고,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 정벌 총독으로 관군을 지휘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보신 전쟁에서 황실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 야마토국, 시코쿠 및 아이즈로 향했다.
1869년 11월 6일, 전 구루메번의 다이묘인 아리마 요리시게의 딸인 아리마 요리코(1852년 6월 18일 ~ 1914년 6월 26일)와 결혼했다. 1870년(메이지 3년) 궁호를 히가시후시미노미야로 개칭했다.
2.2. 메이지 유신과 군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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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은 1870년부터 1872년까지 영국에서 군사 전술을 공부했다. 귀국 후,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평가받으며 메이지 시대 초기에 발생한 여러 사무라이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1874년 사가의 난과 1877년 사쓰마 전쟁(세이난 전쟁)이 대표적이다. 메이지 천황은 그에게 일본 제국 육군 중장 계급과 욱일대수장 (1등급)을 수여했다.
1882년, 닌나지의 궁호를 이었던 그는 자신의 궁호를 고마쓰노미야로, 개인 이름을 "요시아키"에서 "아키히토"로 변경하여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1890년(메이지 23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근위사단장,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정청 대총독으로 임명되어 뤼순에 출정했다. 1895년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사망 후,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의 수장이 되었으며 원수 칭호를 받았다. 1898년(메이지 31년)에는 원수부에 들어갔다.
2.3. 청일 전쟁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은 청일 전쟁 (1894–95)에서 일본 원정군의 명목상 사령관이었으며 군사 최고 의회의 구성원이었다. 1890년(메이지 23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근위사단장을 역임하였고, 청일 전쟁에서 정청 대총독으로 임명되어 뤼순에 출정했다. 1895년 그의 삼촌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참모총장 재직 중 전쟁에서 병사하자, 그 후임으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2.4. 외교 활동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은 메이지 정부에서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1886년에는 메이지 천황을 대신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방문했다.
1887년에는 오스만 제국과 일본 제국 간의 관계를 시작하는 단계로 이스탄불에 파견되었다. 고마쓰노미야 친왕은 오스만 황제 압둘 하미드 2세에게 알현을 받았다.
1902년 6월,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은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메이지 천황을 대표하여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프랑스, 에스파냐, 벨기에, 독일, 러시아도 방문했다.
2.5. 사회 활동과 죽음
1886년(메이지 19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방문했다. 1887년(메이지 20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에 들러 오스만 왕가와 교류를 시작했다. 1890년(메이지 23년)에는 오스만 제국 해군의 에르투루르호가 와카야마현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사건(에르투루르호 침몰 사건)이 발생했다. 1902년(메이지 35년) 영국 국왕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메이지 천황을 대신하여 참석했다.
일본 적십자사, 대일본 수산회, 대일본 산림회, 대일본 무덕회, 고야산 흥륭회 등 여러 단체의 총재를 맡아 황족 공무의 원형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1896년(메이지 29년) 이노우에 엔료의 철학관(후의 도요 대학)에 "호국애리" 편액을 하사했다. 가와카미 촌의 곤고지에 후남조 황족 지텐노의 비를 세웠는데, 다이카쿠지통 황족이 지묘인통 황족에 의해 불쌍히 여겨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3. 가계
4. 연보
* 고카 3년(1846년): 탄생.
* 안세이 5년(1858년): 친왕 선하를 받고 가쇼 친왕이라 불림. 입사 득도하여 준닌이라고 칭함.
* 게이오 3년(1867년): 왕정복고로 복식을 명받음.
* 1868년(메이지 원년): 군사 총재, 해륙군무 총독, 군방 사무국 독, 군무관 지사, 아이즈 정벌 에치고구 총독을 맡음.
* 1869년(메이지 2년): 병부경을 맡았으나 사직함.
* 1870년(메이지 3년): 궁호를 히가시후시미노미야로 개칭. 영국 유학, 의정.
* 1873년(메이지 6년): 귀국, 육군 소위가 됨.
* 1874년(메이지 7년): 사가의 난 발발. 사가 정벌 총독을 맡음. 9월, 육군 소장이 됨.
* 1875년(메이지 8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음.
* 1876년(메이지 9년): 육군 도야마 학교장, 겸 의정관을 맡음.
* 1877년(메이지 10년): 도쿄 진대 사령관, 신선 여단 사령관을 맡음.
* 1878년(메이지 11년): 동부 검열사를 맡음.
* 1880년(메이지 13년): 육군 중장 및 근위 도독을 맡음.
* 1882년(메이지 15년): 궁호를 고마쓰노미야로 개칭.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음.
* 1886년(메이지 19년): 유럽 파견.
* 1887년(메이지 20년): 귀국하여 근위 도독을 맡음.
* 1890년(메이지 23년): 2월 귀족원 황족 의원, 6월 육군 대장이 됨.
* 1891년(메이지 24년): 근위 사단장을 맡음.
* 1893년(메이지 26년): 겸 의정관을 맡음.
* 1895년(메이지 28년): 참모 총장, 청일 전쟁 정청 대총독, 대훈위 국화장 경식을 받음.
* 1898년(메이지 31년): 원수 칭호를 받고 청일 전쟁 정청 대총독에서 사직.
* 1902년(메이지 35년): 영국 국왕 대관식에 파견됨.
* 1903년(메이지 36년): 훙거, 국장이 치러짐.
5. 수상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은 일본과 외국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1875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시작으로, 1882년 대훈위 국화대수장,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1895년 국화장경식 및 공2급금치훈장을 받았다. 1898년에는 원수 칭호를 받았다. 1885년에는 스웨덴-노르웨이에서 상트라브 1등 훈장을 받았다.
5.1. 일본
* 1875년(메이지 8년) 12월 31일 - 훈1등 욱일대수장
* 1882년(메이지 15년) 12월 7일 - 대훈위 국화대수장
* 1889년(메이지 22년) 11월 29일 -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 1895년(메이지 28년) 8월 5일 - 국화장경식, 공2급금치훈장
* 1898년(메이지 31년) 1월 20일 - 원수
; 외국 훈장 착용 허가
* 1885년(메이지 18년) 11월 12일 - 스웨덴-노르웨이: 상트라브 1등 훈장
5.2. 외국
1885년일본어 (明治일본어 18년) 11월 12일일본어 - 스웨덴-노르웨이로부터 상트라브 1등 훈장을 받았다.
6. 평가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은 메이지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군사 및 국제 친선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 등에서 군을 지휘하여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유럽 각국을 방문하고 에르투루르호 침몰 사건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는 등 국제 친선에도 힘썼다. 일본 적십자사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총재를 맡아 사회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황족의 공무의 원형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스스로 군무에 종사하며 황족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