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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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바야시 조지는 브라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71년 일본으로 건너가 얀마 디젤에서 1976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한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얀마 디젤 소속으로 1971년, 1974년, 1975년 일본 사커 리그 우승과 1974년 천황배 우승을 경험했으며, 1974년과 1975년에는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또한 1972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3경기에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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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조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명 | 조지 고바야시 |
원어 이름 | 小林 ジョージ |
로마자 표기 | George KOBAYASHI |
출생일 | 1947년 11월 29일 |
출생지 | 상파울루 주 |
키 | 173cm |
포지션 | 미드필더 |
클럽 경력 | |
유소년 클럽 | 해당 없음 |
소속 클럽 | 얀마 디젤 (1971-1976) |
출전 횟수 | 92 |
득점 횟수 | 7 |
통산 출전 횟수 | 92 |
통산 득점 횟수 | 7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팀 | 일본 (1972) |
국가대표 출전 횟수 | 3 |
국가대표 득점 횟수 | 0 |
수상 내역 | |
수상 정보 | 일본 사커 리그 우승 (1971) 일본 사커 리그 우승 (1974) 일본 사커 리그 우승 (1975) 일본 사커 리그 준우승 (1972) 천황배 우승 (1974) 천황배 준우승 (1971) 천황배 준우승 (1972) 천황배 준우승 (1976) |
2. 클럽 경력
고바야시 조지는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얀마 디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얀마는 1971년, 1974년, 1975년 리그에서 우승했으며, 1974년 천황배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고바야시는 리그에서 92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했으며, 1974년과 1975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71년, AUSP 회장 카이오 모리가 브라질에서 새로운 전력을 찾고 있던 얀마에 고바야시를 추천하면서 일본행이 결정되었다.[3] 1976년, JSL 선발팀 일원으로 펠레가 있는 뉴욕 코스모스와 대결했는데, 경기 후 펠레는 눈에 띄는 선수로 고바야시, 자이루, 가마모토를 언급했다.[3]
클럽 | 시즌 | 비고 |
---|---|---|
얀마(ヤンマー) | 1971-1976 |
2. 1. 브라질 시절
고바야시 조지는 1947년 11월 29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일본계 브라질인 2세로 태어났다. 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니가타현에서 브라질로 이민 와 생과 가게를 운영했다.[3] 어릴 때는 축구 외에도 유도, 야구, 수영 등 다양한 스포츠를 하며 자랐다.[4]일본계 선수들로 구성된 제르파라는 클럽에서 활동하며 상파울루의 일본계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리그 최고의 강호 클럽인 야마다로 스카우트되어 주장을 맡았다.[3] 브라질 시절에는 애니메이션 주인공 마술사의 이름에서 따온 만드라키(Mandrak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3] 공과대학에 다니던 시절 코린치안스의 테스트를 받았지만, 학업과 병행하기 어려워 프로 선수의 길은 포기했다.[4]
클럽 | 시즌 | 비고 |
---|---|---|
제우파 | ||
야마다 | -1971 |
2. 2. 얀마 디젤 (세레소 오사카) 시절
고바야시는 1971년 얀마 디젤에 입단했다.[3] 얀마는 1971년, 1974년, 1975년 일본 사커 리그에서 우승했고, 1974년 천황배에서도 우승했다.[3] 고바야시는 리그에서 92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고, 1974년과 1975년에는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3]얀마 입단 명목은 "업무 연수"였지만, 넬슨 요시무라와는 달리 실제로 얀마의 브라질 공장에서 일했다.[3] 일본에 건너간 초기에는 인사 정도의 일본어밖에 하지 못했다.[3] 얀마에는 요시무라, 카를루스 에스테베스에 이어 세 번째 브라질 선수로 합류했으며, 요시무라와는 브라질 시대 일본계 선발팀에서 함께 뛰었던 사이였다.[3]
얀마에서 한동안 스토퍼로 기용되었지만, 1974년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했다.[5] 요시무라와 플레이 포지션이 가까워지면서 더욱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5] 얀마가 JSL을 연패했을 때, 2년 연속 어시스트왕과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76년에는 JSL 선발팀 일원으로 펠레가 있는 뉴욕 코스모스와 대결했고, 경기 후 펠레는 눈에 띄는 선수로 고바야시, 자이루, 가마모토를 언급했다.[3] 3기에 걸친 "연수"를 마치고 1977년 브라질로 귀국했다.[3]
3. 국가대표 경력
1972년 7월 16일, 고바야시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스리랑카를 상대로 데뷔했다. 1972년 일본 대표팀에서 3경기에 출전했다.[1] 같은 해 7월 무르데카 대회에 참가하여 스리랑카전에서 국제 A매치 첫 출전을 기록했고, 이 대회에서 3경기에 출전했다.[2]
4. 은퇴 이후
1977년, 3기에 걸친 "연수"를 마치고 브라질로 귀국했다.[3] 1998년부터는 다시 일본에 가서 루네스 학원과 교토 산업 대학에서 코치를 맡았다.[3]
1972년, 펠레가 소속된 산투스와 일본 대표팀의 친선 경기가 열렸고,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경기 후 고바야시는 당시 나가누마 겐 감독의 방을 찾아 "오늘은 손님이 많이 왔습니다. 손님이 안 오면 선수들은 돈을 요구하지 않아요. 손님이 많이 왔으니, 선수들은 돈을 요구합니다"라고 하며 선수들에게 수익 배분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나가누마 감독은 "지금 체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거절했지만, 고바야시는 듣지 않았고, 결국 가마모토가 그를 내쫓았다. 이전에도 나가누마 감독은 해외 원정 시 축구 협회에는 비밀로 경기 개런티를 선수에게 적게나마 환원했지만, 고바야시처럼 프로 의식에 기반한 발언을 한 사람은 없었다. 고바야시의 발언은 프로화의 단초가 되는 발언으로 평가받는다.[6] J리그 창설은 이로부터 20년 뒤의 일이다.
5. 일화
일본계 2세로, 상파울루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니가타현에서 브라질로 이민 와서 생과 가게를 운영했다.[3] 어릴 때는 축구 외에도 유도, 야구, 수영 등 다양한 스포츠를 하며 자랐다.[4]
브라질 시대에는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의 마술사에 비유하여 만드라키(''Mandrak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3]
1972년 펠레가 소속된 산투스 FC와 일본 대표팀의 친선 경기가 열렸고,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경기 후 고바야시는 당시 나가누마 겐 감독의 방을 찾아 "오늘은 손님이 많이 왔습니다. 손님이 안 오면 선수들은 돈을 요구하지 않아요. 손님이 많이 왔으니, 선수들은 돈을 요구합니다"라며 선수들에게 수익 배분을 요구했다. 나가누마 감독은 "지금 체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라며 거절했지만, 고바야시는 끈질기게 요구했고 결국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그를 내쫓았다.
나가누마 감독은 이전에도 해외 원정 시 축구 협회에는 비밀로 경기 개런티(출전료)를 선수에게 환원했지만, 고바야시처럼 프로 의식에 기반한 발언은 처음이었다. 고바야시의 발언은 훗날 J리그 창설의 단초가 되는 발언으로 평가받는다.[6]
6.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
---|---|
팀 | |
개인 | |
6. 1. 개인
수상 |
---|
1974 - 어시스트왕 (7 어시스트), 실버 볼상, 연간 베스트 11 |
1975 - 어시스트왕 (6 어시스트), 연간 베스트 11 |
No. | 개최일 | 개최 도시 | 경기장 | 상대팀 | 결과 | 감독 | 대회 |
---|---|---|---|---|---|---|---|
1 | 1972년 7월 16일 | 이포 | ○5-0 | 나가누마 겐 | 메르데카 대회 | ||
2 | 1972년 7월 18일 | 쿠알라룸푸르 | ○5-1 | 메르데카 대회 | |||
3 | 1972년 7월 22일 | 쿠알라룸푸르 | ●1-3 | 메르데카 대회 |
6. 2. 팀
고바야시는 1971년 얀마 디젤에 입단했다. 얀마 디젤에서 1971년, 1974년, 1975년 리그 우승과 1974년 천황배 우승을 달성했다. 1976년에 은퇴할 때까지 리그 92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으며, 1974년과 1975년에는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7. 통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 ||
---|---|---|
연도 | 출장 | 득점 |
1972 | 3 | 0 |
합계 | 3 | 0 |
7. 1. 클럽
고바야시는 1971년 얀마 디젤에 입단했다. 얀마 디젤은 1971년, 1974년, 1975년 리그에서 우승했고, 1974년 천황배에서도 우승했다. 그는 1976년에 은퇴했으며, 리그에서 92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다. 1974년과 1975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7. 2. 국가대표팀
고바야시 조지는 1972년 7월 16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스리랑카를 상대로 데뷔했다. 그는 1972년 일본 대표팀에서 3경기에 출전했다.[1]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 ||
---|---|---|
연도 | 출장 | 득점 |
1972 | 3 | 0 |
합계 | 3 | 0 |
참조
[1]
웹사이트
Japan National Football Team Database
http://www.jfootball[...]
[2]
뉴스
小林 ジョージ
http://www.jfootball[...]
[3]
서적
サッカー移民―王国から来た伝道師たち
双葉社
2003
[4]
간행물
マガジン談話室 ジョージ小林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75-08-25
[5]
간행물
今月のプレーヤー ジョージ小林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75-02
[6]
서적
日本サッカーは本当に強くなったのか
中央公論新社
2000
[7]
서적
日本代表公式記録集2008
日本サッカー協会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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