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모토 구니시게
1. 개요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1944년생으로,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 정치인이다. 선수 시절에는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일본 사커 리그에서 7번의 득점왕을 차지했고,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얀마 디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이끌었으며, 1990년대에는 감바 오사카 감독, 일본 축구 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는 일본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본명 | 가마모토 구니시게 |
|---|---|
| 출생일 | 1944년 4월 15일 |
| 출생지 | 일본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다이 |
| 신장 | 179cm |
| 포지션 | FW (CF) |
| 주발 | 오른발 |
| 유소년 클럽 | 교토시립 다이 초등학교 (1950?–1956) 교토시립 하치가오카 중학교 (1957-1959) 교토부립 야마시로 고등학교 (1960-1962) 와세다 대학 (1963-1966) |
|---|---|
| 프로 클럽 | 얀마 디젤 (1967-1984) |
| 클럽 출장 및 득점 | 251경기 202골 |
| 청소년 국가대표 | 일본 유스 (1962-1963) 9경기 5골 |
|---|---|
| 국가대표 | 일본 (1964-1977) 76경기 75골 |
| 클럽 감독 | 얀마 디젤 (1978-1984) 마쓰시타 전기/감바 오사카 (1991-1994) 후지에다 MYFC (2009-2010) |
|---|
| 올림픽 | 1968 멕시코시티 동메달 |
|---|---|
| 아시안 게임 | 1966 방콕 동메달 |
-
후지에다 MYFC의 축구 감독 -
이시자키 노부히로
이시자키 노부히로는 일본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으로, 수비수 포지션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지도자로 전향하여 J리그에서 역대 최다 경기 감독 기록을 보유하며 중원 압박을 중시하는 수비 스타일을 보여준다. -
후지에다 MYFC의 축구 감독 -
스도 다이스케
스도 다이스케는 일본의 축구 선수 출신 지도자로, 선수 시절 공격수로 활동했으며 은퇴 후 가이나레 돗토리 감독을 시작으로 후지에다 MYFC를 J2리그로 승격시키며 J3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
감바 오사카의 축구 감독 -
지크프리트 헬트
지크프리트 헬트는 독일의 은퇴한 축구 선수 및 감독으로, 선수 시절에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고 서독 국가대표팀으로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출전했으며, 감독으로서는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지도했다. -
감바 오사카의 축구 감독 -
미야모토 쓰네야스
미야모토 쓰네야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중앙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감바 오사카, 레드불 잘츠부르크, 빗셀 고베에서 뛰었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으로도 활동했으며, 현재는 일본 축구 협회 회장이다. -
1966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 -
야마구치 요시타다
야마구치 요시타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선수 시절 히타치 제작소에서 원 클럽 플레이어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지도자와 후지에다 MYFC의 명예 감독을 역임하며 2007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1966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 -
이세연 (축구인)
이세연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며, 프로 선수 경력과 국가대표 경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 어린 시절
1944년 4월 15일 일본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에서 태어났다. 교토 부립 야마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와세다 대학 제2상학부에 입학했다. 와세다 대학에서 4년 연속 간토 대학 축구 리그 득점상을 받았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1963년과 1966년 천황배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대학팀이 천황배에서 우승한 마지막 해였다. 1966년 와세다 대학에서 상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3. 선수 시절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1967년 세레소 오사카의 전신인 얀마 디젤에 입단하여 1984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며 일본 축구 리그(JSL)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얀마 디젤에서 JSL 4회 우승(1971, 1974, 1975, 1980), 천황배 3회 우승(1968, 1970, 1974) 등을 달성했다. 개인적으로는 JSL 득점왕 7회, 베스트 11 14회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74년 JSL 통산 100호 골, 1981년 JSL 통산 200호 골을 달성하기도 했다.
1970년 바이러스성 간염으로 선수 경력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복귀 후 꾸준한 활약으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78년부터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고, 1982년 아킬레스건 부상에도 불구하고 1983년 복귀하여 1984년까지 활약했다. 1984년 은퇴 경기에는 펠레와 볼프강 오베라트가 게스트 선수로 참여했다. 가마모토의 일본 리그 통산 기록은 202득점 79어시스트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시작으로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한 가마모토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동메달) 획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동메달, 1970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4강 진출을 이끌었다. 1977년, A매치 통산 76경기 75골(일본 축구 협회 기준) 또는 84경기 80골(FIFA 기준)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 구분 | 내용 |
|---|---|
| 클럽 | |
| 국가대표 |
3.1. 클럽 경력
1967년 세레소 오사카의 전신인 얀마 디젤에 입단하여 1984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얀마 디젤에서 일본 사커 리그(JSL) 4회 우승(1971, 1974, 1975, 1980)과 4회 준우승(1968, 1972, 1978, 1982), JSL컵 3회 우승(1973, 1983, 1984) 및 2회 준우승(1977, 1982), 천황배 3회 우승(1968, 1970, 1974) 및 5회 준우승(1971, 1972, 1976, 1977, 1983)을 달성했다.
개인 기록으로는 JSL 득점왕 7회(1968, 1970, 1971, 1974, 1976, 1978), JSL 베스트 11 14회(1967-1972, 1974-1981), JSL 어시스트상 2회(1973, 1975)를 수상했다. 1974년 JSL 통산 100호 골, 1981년 JSL 통산 200호 골을 달성했다.
1970년에는 바이러스성 간염으로 선수 경력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복귀 후 꾸준한 활약으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히, 1974년과 1975년에는 일본 리그 2연패를 달성했으며, 1975년에는 천황배 우승도 차지했다.
1978년 2월, 얀마의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을 이끌었으며, 1982년에는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83년 복귀하여 1984년까지 활약했다.
1984년 8월 25일, 은퇴 경기가 열렸으며, 펠레와 볼프강 오베라트가 게스트 선수로 참여했다. 가마모토는 이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은퇴를 기념했다.
가마모토의 일본 리그 통산 기록은 202득점 79어시스트이다.
| 클럽 성적 | 리그 | 컵 | 리그 컵 | 합계 | ||||||
|---|---|---|---|---|---|---|---|---|---|---|
| 시즌 | 클럽 | 리그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 일본 | 리그 | 천황배 | JSL 컵 | 합계 | ||||||
| 1967 | 얀마 디젤 | JSL 디비전 1 | 14 | 14 | 3 | 7 | — | 17 | 21 | |
| 1968 | 14 | 14 | 3 | 5 | — | 17 | 19 | |||
| 1969 | 12 | 10 | 3 | 7 | — | 15 | 17 | |||
| 1970 | 14 | 16 | 3 | 5 | — | 17 | 21 | |||
| 1971 | 14 | 11 | 3 | 5 | — | 17 | 16 | |||
| 1972 | 14 | 11 | 4 | 5 | — | 18 | 16 | |||
| 1973 | 16 | 17 | 2 | 0 | — | 18 | 17 | |||
| 1974 | 18 | 21 | 4 | 3 | — | 22 | 24 | |||
| 1975 | 17 | 9 | 3 | 2 | — | 20 | 11 | |||
| 1976 | 18 | 15 | 3 | 2 | 1 | 0 | 22 | 17 | ||
| 1977 | 18 | 20 | 4 | 4 | 3 | 2 | 25 | 26 | ||
| 1978 | 18 | 15 | 3 | 4 | 3 | 4 | 24 | 23 | ||
| 1979 | 18 | 7 | 3 | 2 | 2 | 1 | 22 | 11 | ||
| 1980 | 18 | 10 | 2 | 0 | 3 | 2 | 23 | 12 | ||
| 1981 | 18 | 11 | 2 | 0 | 0 | 0 | 20 | 11 | ||
| 1982 | 8 | 1 | 0 | 0 | 0 | 0 | 8 | 1 | ||
| 1983 | 2 | 0 | 0 | 0 | 0 | 0 | 2 | 0 | ||
| 1984 | 0 | 0 | 3 | 0 | 0 | 0 | 3 | 0 | ||
| 합계 | |202||48||51||12||9||311||262 | |||||||||
3.2. 국가대표팀 경력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일본 U-23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하여 4경기 1골을 기록하며 팀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7경기 6골을 기록하며 일본의 동메달 획득을 이끌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나이지리아와의 조별 리그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6경기 7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이자 아시아 국가 최초의 올림픽 메달(동메달) 획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018년, 이 팀은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70년 아시안 게임에서 3골을 기록하며 1966년 대회에 이어 팀의 2회 연속 아시안 게임 4강 진출을 이끌었고,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3골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팀의 조별 리그 탈락은 막지 못했다.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는 18골을 기록하며 1976년 대회 준우승에 기여했다.
1977년, A매치 통산 76경기 75골(일본 축구 협회 기준) 또는 84경기 80골(FIFA 기준)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장 | 득점 |
|---|---|---|---|
| 일본 | 1964 | 2 | 1 |
| 1965 | 3 | 3 | |
| 1966 | 7 | 6 | |
| 1967 | 5 | 11 | |
| 1968 | 4 | 7 | |
| 1969 | 0 | 0 | |
| 1970 | 6 | 3 | |
| 1971 | 6 | 8 | |
| 1972 | 8 | 15 | |
| 1973 | 3 | 2 | |
| 1974 | 5 | 5 | |
| 1975 | 7 | 5 | |
| 1976 | 16 | 9 | |
| 1977 | 4 | 0 | |
| 합계||76||75 | |||
4. 플레이 스타일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일본 축구계에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로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라모스 루이는 "온몸에 근육이 붙어 있고, 키가 크다. 공이 어떻게든 잡힌다. 그리고 슛은, 빠른 스윙과 정확성이 엄청났다. 가마모토 씨를 능가하는 일본인 센터 포워드가 나오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그의 최대 무기는 오른발에서 나오는 강력한 슛이었다. 특히 오른쪽 45도에서의 슛은 정확무비 했고, 은사인 데트마르 크라머는 그 수준이 세계 최고라고 평가했다. 왼발 슛도 오른발만큼은 아니지만 정확했고, 점프력을 활용한 헤딩슛도 아름다웠다. 가마모토는 훗날 자신의 슛에 대해 "5할은 오른발, 왼발이 3할, 머리가 2할"이라고 말하며, 모든 형태로 골을 넣을 수 있는 만능형 포워드임을 보여주었다. 오른발 슛은 포르투갈의 명 스트라이커 에우제비오의 영상을 보며 분석하여 익혔다. 에우제비오의 슛 동작이 자신보다 하나 적다는 것을 깨닫고 슛 폼을 교정했으며, 득점 후 에우제비오와 같은 골 세리머니를 하기도 했다.
상대팀은 가마모토의 돌파와 오른발 슛을 막는 데 집중했으나, 이는 왼발 슛의 위력을 더했다. 1974년 일본 리그 통산 100득점은 왼발 토 킥, 1981년 통산 200득점도 왼발 슛이었다.
처음에는 수비를 등진 상태에서 볼 키핑 후 슛으로 연결하는 동작이 불안정했으나, 데트마르 크라머와 유프 데어발의 지도 아래 개선되었다. 그는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수비 3명에게 마크당해도 자신에게 패스해야 한다", "적이 오면 몸으로 블록하고 슛을 때리면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수비를 벗어나는 움직임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968년멕시코 올림픽에서 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일본 대표팀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일본 대표팀에서는 스기야마 류이치와의 콤비 플레이가 돋보였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당시에는 스기야마가 더 유명했지만, 가마모토가 스트라이커로서 재능을 꽃피우자 스기야마는 어시스트 역할에 전념했다. 멕시코 올림픽에서 가마모토가 기록한 7득점 중 4득점이 스기야마의 어시스트였다.
5. 은퇴 이후
1995년 모리 요시로 당시 건설대신의 스카우트로 정계에 진출, 자민당 소속 참의원으로 1995년부터 2001년까지 활동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 축구 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후지에다 MYFC의 감독을 맡았으나, 실제 현장 지휘는 사이토 토시히데 코치가 맡았고 가마모토는 슈퍼바이저 역할이었다. 이후 일본 축구계에서 은퇴했다.
5.1. 감독 경력
1978년, 가마모토는 얀마 디젤의 선수 겸 감독을 맡아 1984년까지 팀을 지휘했다. 취임 3년째인 1980년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1983년과 1984년에는 JSL컵 우승을 달성했다. 1985년 2월까지 감독을 맡았다. 얀마 디젤 감독에서 물러난 후에는 '가마모토 FC'를 설립하여 유소년 육성에 힘썼다.
1991년, 감바 오사카의 전신인 마쓰시타 전기 산업 축구부 감독으로 취임하여 1993년 J리그 개막 당시 감바 오사카의 감독이 되었다. J리그컵 4강(1993, 1994), 1994 시즌 천황배 4강 진출을 이끌었으나, 고참 선수들과의 갈등, 선수 영입 실패 등으로 성적이 부진하여 1994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났다.
2009년에는 후지에다 MYFC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실제 현장 지휘는 사이토 토시히데 코치가 맡았고, 가마모토는 슈퍼바이저 역할이었다.
감독으로서의 J리그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5.2. 정치 경력
1995년 모리 요시로 당시 건설대신의 스카우트로 정계에 진출, 자민당 소속 참의원으로 1995년부터 2001년까지 활동했다.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자민당 공천(비례 명부 등재 순위 11위)으로 비례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자민당 동기 의원으로는 하세 히로시, 하시모토 세이코가 있다.
당선 후에는 원내 후생노동위원회에 소속되어 일본 축구 협회 부회장을 겸임하면서 2002년 FIFA 월드컵 개최 준비 등에 힘썼다. 당내 파벌로는 세이와 정책 연구회에 소속되었다.
1998년, 일본도로공단 관련 회사의 하이웨이 카드 부정 판매 사건에 가마모토의 아내가 경영하는 회사가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다.
2000년 7월 4일, 제2차 모리 내각의 노동 정무 차관에 취임하여 같은 해 12월 6일까지 재직했다.
2001년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비구속 명부식이 도입된 비례구에 자민당 공천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하여 정계에서 물러났다.
5.3. 기타 경력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 축구 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0년부터는 일본 축구 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 2005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외에도 교토 분쿄 대학 객원 교수, 크라운 힐즈 교토 골프 클럽 오너 등을 역임했다.
6. 수상 내역
| 수상 | 횟수 | 연도 |
|---|---|---|
| 하계 올림픽 축구 득점왕 | 1 | 1968년 |
|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 | 7 | 1966, 1968, 1971, 1974, 1975, 1980, 1981 |
| 일본 사커 리그 득점왕 | 7 | 1968, 1970, 1971, 1974, 1975, 1976, 1978 |
|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11 | 14 |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
| 일본 사커 리그 도움왕 | 2 | 1973, 1975 |
| 일본 사커 리그 스타 볼 어워드 | 5 | 1967, 1968, 1970, 1971, 1972 |
| 일본 사커 리그 투혼상 | 1 | 1968 |
| 일본 사커 리그 100골 달성상 | 1 | 1974 |
| 일본 사커 리그 200골 달성상 | 1 | 1981 |
| 아시아 올스타 | 2 | 1967, 1968 |
| 마스터카드 아시아/오세아니아 20세기 팀 | 1 | 1998 |
|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 1 | 2005년 헌액 |
* 1978년 일본 사커 리그 득점왕은 카르발류와 공동 수상이다.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1968년 하계 올림픽에서 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일본 사커 리그에서 총 7번 득점왕, 14번 베스트 일레븐, 7번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6.1. 클럽 (선수 겸 감독)
釜本 邦茂일본어는 1967년부터 1984년까지 세레소 오사카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프로 통산 311경기 262골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사커 리그 디비전 1 4회 우승(1971, 1974, 1975, 1980) 및 4회 준우승(1968, 1972, 1978, 1982), JSL컵 3회 우승(1973, 1983, 1984) 및 2회 준우승(1977, 1982), 천황배 3회 우승(1968, 1970, 1974) 및 5회 준우승(1971, 1972, 1976, 1977, 1983)을 달성했다. 1978년에는 세레소 오사카의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다음은 가마모토 구니시게의 클럽 성적을 나타내는 표이다.
| 클럽 성적 | 리그 | 천황배 | JSL 컵 | 합계 | ||||||
|---|---|---|---|---|---|---|---|---|---|---|
| 시즌 | 클럽 | 리그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 1967 | 얀마 디젤 | JSL 디비전 1 | 14 | 14 | 3 | 7 | — | 17 | 21 | |
| 1968 | 14 | 14 | 3 | 5 | — | 17 | 19 | |||
| 1969 | 12 | 10 | 3 | 7 | — | 15 | 17 | |||
| 1970 | 14 | 16 | 3 | 5 | — | 17 | 21 | |||
| 1971 | 14 | 11 | 3 | 5 | — | 17 | 16 | |||
| 1972 | 14 | 11 | 4 | 5 | — | 18 | 16 | |||
| 1973 | 16 | 17 | 2 | 0 | — | 18 | 17 | |||
| 1974 | 18 | 21 | 4 | 3 | — | 22 | 24 | |||
| 1975 | 17 | 9 | 3 | 2 | — | 20 | 11 | |||
| 1976 | 18 | 15 | 3 | 2 | 1 | 0 | 22 | 17 | ||
| 1977 | 18 | 20 | 4 | 4 | 3 | 2 | 25 | 26 | ||
| 1978 | 18 | 15 | 3 | 4 | 3 | 4 | 24 | 23 | ||
| 1979 | 18 | 7 | 3 | 2 | 2 | 1 | 22 | 11 | ||
| 1980 | 18 | 10 | 2 | 0 | 3 | 2 | 23 | 12 | ||
| 1981 | 18 | 11 | 2 | 0 | 0 | 0 | 20 | 11 | ||
| 1982 | 8 | 1 | 0 | 0 | 0 | 0 | 8 | 1 | ||
| 1983 | 2 | 0 | 0 | 0 | 0 | 0 | 2 | 0 | ||
| 1984 | 0 | 0 | 3 | 0 | 0 | 0 | 3 | 0 | ||
| 합계 | |202||48||51||12||9||311||262 | |||||||||
6.2. 국가대표팀 (선수)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1964년 하계 올림픽과 1968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 특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7골을 넣어 득점왕을 차지하며 일본의 동메달 획득에 크게 기여했다. 2018년, 이 동메달 팀은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6골을 기록하며 일본의 동메달에 기여했고, 1970년 아시안 게임과 1974년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했다. 1976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가마모토는 1964년 3월 3일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골을 기록했고, 1977년까지 76경기에서 75골을 넣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일본 축구 협회는 84경기 80골로 인정하고 있다.
|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장 | 득점 |
|---|---|---|---|
| 일본 | 1964 | 2 | 1 |
| 1965 | 3 | 3 | |
| 1966 | 7 | 6 | |
| 1967 | 5 | 11 | |
| 1968 | 4 | 7 | |
| 1969 | 0 | 0 | |
| 1970 | 6 | 3 | |
| 1971 | 6 | 8 | |
| 1972 | 8 | 15 | |
| 1973 | 3 | 2 | |
| 1974 | 5 | 5 | |
| 1975 | 7 | 5 | |
| 1976 | 16 | 9 | |
| 1977 | 4 | 0 | |
| 합계||76||75 | |||
; 주요 국제 대회 성적
* 아시안 게임: 동메달 (1966)
* 하계 올림픽: 동메달 (1968)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준우승 (1976)
6.3. 개인
| 수상 | 횟수 | 연도 |
|---|---|---|
| 하계 올림픽 축구 득점왕 | 1 | 1968년 |
|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 | 7 | 1966, 1968, 1971, 1974, 1975, 1980, 1981 |
| 일본 사커 리그 득점왕 | 7 | 1968, 1970, 1971, 1974, 1975, 1976, 1978 |
|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11 | 14 |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
| 일본 사커 리그 도움왕 | 2 | 1973, 1975 |
| 일본 사커 리그 스타 볼 어워드 | 5 | 1967, 1968, 1970, 1971, 1972 |
| 일본 사커 리그 투혼상 | 1 | 1968 |
| 일본 사커 리그 100골 달성상 | 1 | 1974 |
| 일본 사커 리그 200골 달성상 | 1 | 1981 |
| 아시아 올스타 | 2 | 1967, 1968 |
| 마스터카드 아시아/오세아니아 20세기 팀 | 1 | 1998 |
|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 1 | 2005년 헌액 |
* 1978년 일본 사커 리그 득점왕은 카르발류와 공동 수상이다.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1968년 하계 올림픽에서 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2018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일본 사커 리그에서 총 7번 득점왕을 차지했고, 14번이나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7번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장 | 득점 |
|---|---|---|---|
| 일본 | 1964 | 2 | 1 |
| 1965 | 3 | 3 | |
| 1966 | 7 | 6 | |
| 1967 | 5 | 11 | |
| 1968 | 4 | 7 | |
| 1969 | 0 | 0 | |
| 1970 | 6 | 3 | |
| 1971 | 6 | 8 | |
| 1972 | 8 | 15 | |
| 1973 | 3 | 2 | |
| 1974 | 5 | 5 | |
| 1975 | 7 | 5 | |
| 1976 | 16 | 9 | |
| 1977 | 4 | 0 | |
| 합계||76||75 | |||
가마모토는 1964년 3월 3일 와세다 대학 재학 중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골을 기록했다. 1977년까지 A매치 통산 76경기 75골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