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피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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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스피치 학살은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고스피치와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세르비아계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다.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준군사조직이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체포, 구금, 살해했으며, 100명에서 120명 사이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의 조사와 크로아티아 정부의 재판을 통해 관련자들이 처벌받았으나, 진실 규명 과정에서 증인 살해 등 어려움이 있었다.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 내 과거사 문제 해결과 화해를 위한 노력을 촉구하며, 한국 사회에도 과거사 문제 해결과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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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피치 학살 | |
---|---|
개요 | |
사건 | 즉결처형 |
대상 | 주로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민간인 |
위치 | 크로아티아 고스피치 |
시기 | 1991년 10월 17일~25일 |
사망자 | 100~120명 |
배경 | |
관련 전쟁 |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
가해자 |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제118여단, 고스피치 경찰, 크로아트계 준군사조직 |
2. 배경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는 민족주의 갈등으로 인해 해체 위기에 놓여 있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크로아티아 내에서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독립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인구가 많은 고스피치 인근 리카 지역을 포함해 세르비아계 다수 거주 구역에서 일어난 반란은 SAO 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세르비아와의 합병을 추구했으며,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이후의 자세한 전개 과정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문서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2. 1.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리카 지역과 고스피치 인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고스피치에도 상당수의 세르비아인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SAO 크라이나로 불리게 되었고, 세르비아와의 통합 의사를 밝히자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1991년 3월, 이 분쟁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91년 6월,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언했고, 유고슬라비아 해체가 시작되었다. 이후 3개월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 10월 8일, 독립이 정식으로 발효되었다.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SAO 크라이나를 지원하고, 크로아티아 경찰이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워지자,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 방위대(ZNG)가 창설되었다. 9월에 도입된 유엔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크로아티아 군대의 발전이 저해되었고, 크로아티아에서의 군사적 갈등은 계속 심화되어 8월 26일 부코바르 전투가 시작되었다. 8월 말, 리카 지역에서도 전투가 격화되었고, 9월 내내 고스피치를 장악하기 위한 전투가 이어졌다. 고스피치는 크로아티아 군이 계속 점령했지만, 전투 이후에도 세르비아 군의 포격을 받았다. 전투로 인해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피난을 가 약 3,000명의 주민만 남게 되었다. 전쟁 전 고스피치에는 8,000명의 인구가 있었으며, 이 중 3,000명이 세르비아인이었다.
9월 말, 민간인들이 귀환하기 시작하자 고스피치 경찰서장 이반 다소비치는 보안을 위해 귀환하는 세르비아인 명단을 작성할 것을 제안했다. 리카 위기 본부(''krizni stožer'')의 회장 안테 카리치에 따르면, 다소비치는 귀환하는 세르비아인들이 도시 방어를 훼손하는 제5열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카리치는 이 조치에 반대했다고 알려졌지만, 명단은 10월 10일에 작성되었다. 인근 카를로바그로 돌아온 세르비아인에 대한 비슷한 명단도 10월 16일에 만들어졌다.
고스피치 경찰은 당시 내무부 장관 이반 베키치의 명령에 따라 리카 위기 본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ZNG의 제118 보병 여단과 고스피치에 주둔한 군사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토미슬라브 메르체프가 지휘하는 "가을비"라는 별명의 준군사 자원 봉사 단체가 9월에 고스피치에 배치되었으며,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 내무부의 지휘를 받았다.
2. 2. 고스피치 지역의 상황
1990년 8월, 크로아티아 리카 지역의 고스피치 인근 등 세르브계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반군 장악 지역은 SAO 크라이나로 불렸고, 크라이나가 세르비아와의 합병 의사를 밝히자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1991년 3월에는 이 분쟁이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해 6월,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과 동시에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었다. 이후 3개월간의 독립 유예 기간 끝에 10월 8일 독립이 정식으로 발효되었다.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SAO 크라이나 지원을 늘리자, 크로아티아의 경찰만으로는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워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이 창설되었다. 크로아티아군의 무장은 9월에 도입된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크로아티아 내 군사 분쟁이 격화되며 8월 26일에는 부코바르 전투가 시작되었다. 8월 말에는 리카 지역의 전투도 격화되었고, 9월 내내 고스피치 도시 내에서도 도시 장악을 위한 시가전이 계속되었다. 고스피치는 크로아티아군이 계속 장악했지만, 전투 이후에도 세르비아군의 포격이 계속되었다. 전투로 마을이 큰 피해를 입고 대부분의 시민이 피난을 가, 전투 후 3천 명의 주민만 남았다. 전쟁 전 고스피치 인구는 세르브인 약 3천 명을 포함해 총 8천 명 정도였다.
9월 말부터 민간인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고스피치의 경찰청장 이반 다소비치는 표면적으로는 '안보'를 목적으로 귀환하는 세르브인의 명단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카 지역의 비상대책본부 본부장 안테 카리치에 따르면, 다소비치는 귀환하는 세르브인 사이에 '제5열'이 숨어들어 마을의 방어 상태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리치는 이런 움직임에 반대했다고 말했으나, 10월 10일에는 귀환자 명단이 만들어졌다. 인근의 카를로바그 마을로 돌아온 세르브인에 대해서도 유사한 명단이 10월 16일 작성되었다.
고스피치 경찰은 당시 크로아티아 내무부 장관 이반 베키치의 명령에 따라 국가방위군 제118보병여단, 고스피치 주둔 헌병대와 함께 리카 비상대책본부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또한, 토미슬라브 메르체프가 지휘하는 "가을비"라는 별칭을 가진 자원병이 모인 준군사조직이 9월 고스피치로 배치되었으며,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는 내무부 산하로 두었다.
3. 학살
티호미르 오레슈코비치와 미르코 노라츠는 1991년 10월, 고스피치와 인근 지역에서 세르비아계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들은 부하들을 소집해 세르브인 민간인을 체포하고 페루시치 막사에 구금한 다음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학살은 10월 16일부터 시작되어 10월 18일까지 절정에 달했다. 민간인들은 방공호에서 총구에 겨눠진 채 끌려 나왔으며, 군용 트럭에 실려 사라졌다. 고스피치의 지트니크, 페루시치 인근 리포바글라비차 등에서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희생자 중에는 의사, 판사, 교수 등 저명한 세르브계 지식인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3. 1. 학살의 명령과 실행
티호미르 오레슈코비치 리카 비상대책본부 본부장과 미르코 노라츠 제118보병여단 사령관(중령)은 부하들을 소집하여 세르비아계 민간인들을 체포, 페루시치 막사에 구금하고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이 명령이 내려진 정확한 날짜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크로아티아 대법원을 포함한 재판 법원들은 10월 17일에 회의가 열렸고, 오레슈코비치와 노라츠가 참석자들에게 준비된 명단에 따라 체포된 민간인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판단했다.[1]10월 16일에서 17일 사이에 고스피치와 카를로바그에서 민간인들이 체포되었다.[1] 특히 세르브인들이 10월 16일부터 방공호에서 총구에 겨눠진 채 끌려 나왔다. 이틀 후, 고스피치 주민들은 마을의 가축시장에서 민간인들이 군용 트럭 11대에 실려 가는 것을 목격했고, 그 후 이들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10월 17일에는 파자리슈테라고 알려진 고스피치의 지트니크에서 최소 10명의 민간인이 사살되었다. 10월 18일에는 페루시치 인근 리포바글라비차에서도 학살이 이어졌고, 당시 제118보병여단이 주둔하고 있던 페루시치 막사에서도 39~40명이 추가로 구금된 후 총살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의사, 판사, 교수 등 저명한 세르브계 지식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3. 2. 학살의 피해자
희생자들은 대부분 고스피치와 카를로바그 지역에 거주하던 세르비아계 민간인들이었으며, 의사, 판사, 교수 등 지식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크로아티아에 충성하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는 크로아트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국가의 반세르비아 정책을 반대한 반정부 인사로 추정된다.10월 16일에서 17일 사이에 고스피치와 카를로바그에서 세르브계 민간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방공호에서 총구가 겨눠진 채 끌려나왔다. 10월 17일에는 파자리슈테라고 알려진 고스피치의 지트니크에서 최소 10명의 민간인이 사살당했다. 10월 18일에는 페루시치 인근 리포바글라비차에서도 학살이 이어졌고, 당시 제118보병여단이 주둔하고 있던 페루시치 막사에서도 39~40명이 추가로 구금된 후 총살형을 당했다. 10월 25일에는 고스피치와 카를로바그에서 세르브계 민간인 3명이 추가로 체포되었고, 이들은 12월 3일 라브니다바르 지역에서 총살당하고 시신이 수습되었다.
4. 여파
고스피치 학살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크로아티아가 저지른 가장 큰 규모의 잔학 행위 중 하나로 기록된다. 사망자 수는 자료에 따라 100명에서 120명 사이로 추정되며, 1991년부터 1995년 사이 고스피치 지역에서 총 123명이 실종되었다는 공식 통계도 있다.
1992년 크로아티아 정부는 학살 가담 부대원 일부를 잠시 투옥했으나 기소 없이 석방했다.[1] 1997년, 폐간된 신문 《페랄 트리부네》는 학살에 관여한 준군사조직 '가을비' 대원 미로슬라브 바이라모비치의 증언을 보도했다. 바이라모비치는 자신의 부대가 고스피치에서 민족 청소 명령을 받았으며,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의 측근 토미슬라브 메르체프로부터 포로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베키치도 이 임무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바이라모비치와 다른 부대원 3명은 체포되었으나, 베키치는 증언을 부인했고, 크로아티아 정부 관료들도 책임을 부인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이 4명에 대한 정보 공개를 요청했다. 투지만은 학살을 세르브인과 외국 스파이 탓으로 돌렸고, 관련 민병대 지휘관을 잠시 체포했다가 석방 후 내무부 요원으로 배정했다.
1998년, 밀란 레바르와 즈덴코 로파츠 등 크로아티아군 정보장교 2명과 헌병장교 1명이 ICTY에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레바르는 고스피치에서 약 50명의 처형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이비차 라찬 제1내각의 크로아티아 법무행정부 장관 란코 마리얀은 전임 내각과 경찰의 부실 수사를 비판했지만, 2000년 8월 차량 폭탄 테러로 살해된 레바르를 보호하지는 못했다.
고스피치 학살 수사는 크로아티아군 현역 장교 7명과 퇴역 장교 5명이 "12장군 서한"으로 정부를 비난하면서 난항을 겪었고, 스테판 메시치 대통령은 현역 장교 7명을 강제 퇴역시켰다.
4. 1. 국제사회의 개입과 진상 조사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가 사건 조사에 착수하면서 희생자들의 시신이 발견되어 국제적인 관심이 집중되었다. 2000년 5월, ICTY 수사관들은 고스피치에서 정화조에 버려진 10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페루시치 동쪽 두게니베 인근에서는 24구의 불탄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1991년 12월 25일 유고 인민군 제6여단에 의해 수습되어 우드비나에서 15km 떨어진 데벨로브르도에 다시 매장되었다. 이 중 18구는 집단무덤에, 나머지 6구는 개별적으로 매장되었다가 유가족에 의해 이장되었다.밀란 레바르와 즈덴코 로파츠 등 크로아티아군 정보장교와 헌병장교는 ICTY에 사건 관련 정보를 제공하며 내부 고발자 역할을 했다. 특히 레바르는 고스피치에서 약 50명의 처형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정부는 레바르를 보호하지 못했고, 그는 2000년 8월 30일 차량 폭탄 테러로 살해되었다.
4. 2. 관련자 처벌과 재판
크로아티아 정부는 고스피치 학살 관련자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1997년, 《페랄 트리부네》는 학살에 가담했던 준군사조직 '가을비'의 대원 미로슬라브 바이라모비치의 증언을 보도했다. 그는 자신의 부대가 민족 청소 명령을 받았으며,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의 측근인 토미슬라브 메르체프로부터 포로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1]1998년에는 밀란 레바르와 즈덴코 로파츠 등 2명의 크로아티아군 정보장교와 헌병장교가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레바르는 고스피치 지역에서 약 50명의 처형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으나, 2000년 8월 차량 폭탄 테러로 살해되었다.
2000년 말, 고스피치 학살에 대한 공식 조사가 시작되었고, 2001년 2월 오레슈코비치, 노라츠, 스체판 그란디치, 이비차 로지치, 밀란 차니치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노라츠는 크로아티아 내에서 재판을 받기로 한 후 자수했다. 2003년 3월, 리예카 지방법원은 오레슈코비치에게 징역 15년, 노라츠에게 징역 12년, 그란디치에게 10년 형을 선고했다. 로지치와 차니치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4년 크로아티아 대법원은 이 판결을 확정했다.
BBC 뉴스는 이 판결이 크로아티아 정부가 자국민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처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바이라모비치와 그의 부대원 4명은 별도의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4. 3. 진실 규명과 화해를 위한 노력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수사관들이 2000년 5월 고스피치에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발견 당시 고스피치 시장의 불만 섞인 발언과 크로아티아 참전용사들의 거리 시위가 이어졌다.1997년에는 폐간된 《페랄 트리부네》가 학살에 가담한 준군사조직 '가을비' 대원 미로슬라브 바이라모비치의 증언을 보도했다. 바이라모비치는 자신의 부대가 고스피치에서 민족 청소 명령을 받았으며,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의 측근인 토미슬라브 메르체프로부터 포로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바이라모비치와 부대원 3명은 체포되었으나, 베키치는 증언을 부인했고 크로아티아 정부 관료들도 책임을 회피했다.
1998년에는 밀란 레바르와 즈덴코 로파츠 등 크로아티아군 정보장교 및 헌병장교들이 ICTY에 사건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특히 레바르는 고스피치에서 약 50명의 처형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으나, 2000년 8월 30일 차량 폭탄 테러로 살해되었다. 새 내각의 크로아티아 법무행정부 장관 란코 마리얀은 전임 내각과 경찰의 부실 수사를 비판했지만, 레바르를 보호하지는 못했다.
고스피치 학살 수사는 크로아티아군 현역 및 퇴역 장교 12명이 '12장군 서한'으로 정부를 비난하면서 난항을 겪었다. 스테판 메시치 대통령은 현역 장교 7명을 강제 퇴역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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