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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바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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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코바르 학살은 1991년 11월 부코바르 전투에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 민병대가 부코바르 병원에서 연행한 비세르비아인들을 오브차라 농장으로 끌고 가 학살한 사건이다. 이 학살로 260명 이상이 희생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지휘관과 세르비아 민병대 지도자들이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1996년 집단 매장지가 발굴되었고,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사건을 전쟁 범죄로 판결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매년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오브차라 학살은 민족 갈등의 비극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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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바르 학살
개요
명칭부코바르 학살
부분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위치크로아티아 부코바르 외곽 그라보보
대상크로아티아인 포로, 민간인 (일부 세르비아인, 무슬림, 헝가리인 포함)
발생일1991년 11월 20일
유형대량 살인, 즉결 처형, 민족 청소
사망자200명 이상 (현장 발굴), 약 60명 (실종 추정)
가해자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 영토방위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세르비아계 민병대 (레바 수포데리카, 백독수리)
추가 정보
다른 이름(오브차라 학살), (부코바르 학살), (오브차라 학살)

2.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승리하면서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민족 갈등이 고조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는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했고,[1]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의 봉기(통나무 혁명)로 긴장이 더욱 격화되었다.[2] 봉기는 크닌 인근 달마티아 연안,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슬라보니아 등 세르비아계 인구 밀집 지역에서 발생했다.[3]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보이보디나, 코소보 메토히야 자치주의 지원을 받아 유고 인민군의 크로아티아 보안군 무장 해제 작전 승인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3월 초, 세르비아계 반군과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사이에 무혈 충돌이 발생했다. 유고 인민군은 유고 대통령직에 전시 통수권 부활과 비상사태 선포를 요청했지만, 세르비아 및 동맹국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거부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유지 대신 세르비아 확장을 지지하며 유고 인민군을 세르비아군으로 대체하겠다고 위협하고, 연방 대통령의 권한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유고 인민군은 밀로셰비치의 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세르비아 확장 계획에 찬성하며 연방 유지 입장을 폐기했다. 3월 말,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으로 첫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4월 초, 세르비아계 반군은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선언했고,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 지역을 '이탈지역'으로 선언했다.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어 경찰력을 증강하고, 5월에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을 창설했다. 하지만, 국가방위군은 중화기 부족 등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무기 비축량은 해외 수입 소화기 3만 정과 기존 소유 소화기 15,000정뿐이었다. 방위여단으로 재편된 특수경찰을 대신하여 10,000명의 특수경찰이 다시 소집되었다.

3. 전조

1990년,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민족 갈등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DZ)에 패배한 후 심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저항을 줄이기 위해 크로아티아의 영토 방위군(TO) 무기를 압수했다.[1] 8월 17일, 통나무 혁명이라 불리는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의 반란으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 반란은 크닌 주변의 달마티아 내륙 지역과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1] 1991년 1월,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 자치주인 보이보디나, 코소보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 치안군 무장 해제를 위한 JNA 작전을 승인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1]

3월, 세르비아 반군과 크로아티아 특별 경찰 간의 무혈 충돌이 발생하자, JNA는 연방 대통령직에 전시 권한 부여 및 비상사태 선포를 요청했으나 3월 15일 거부되었다.[1]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 유지보다 세르비아 확장을 선호하며 JNA를 세르비아 군대로 교체하겠다고 위협하고, 연방 대통령직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 JNA는 밀로셰비치 통제 하에 유고슬라비아 보존 계획을 포기하고 세르비아 확장으로 방향을 틀었다.[1] 3월 말 분쟁의 첫 사상자가 발생했다.[1] 4월 초,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반군 지도자들은 자신들 통제 지역을 세르비아와 통합하겠다고 밝혔고,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분리주의로 간주했다.[1]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어 국방력 강화를 위해 경찰 인원을 약 2만 명으로 늘렸다.[2] 가장 효과적인 부분은 군사적으로 조직된 12개 대대 3천 명의 특수 경찰이었다.[2] 9천~1만 명의 지역 조직 예비 경찰(16개 대대, 10개 중대)도 있었으나 무기가 부족했다.[2] 5월, 크로아티아 정부는 특수 경찰 대대를 4개 전문 경비 여단으로 확장하여 크로아티아 국가 경비대(ZNG)를 설립, 마틴 슈페겔 장군이 지휘하는 약 8천 명의 병력을 구성했다.[2] 예비 경찰은 4만 명으로 확장, ZNG에 배속되어 19개 여단과 14개 독립 대대로 재편성되었다.[2] 경비 여단은 ZNG 내 유일하게 소형 화기로 완전히 무장한 부대였고, ZNG 전체적으로 중화기 부족과 여단급 이상 지휘, 통제 구조가 미흡했다.[2] ZNG는 박물관과 영화 스튜디오에서 가져온 제2차 세계 대전 시대 무기까지 사용했다.[2] 당시 크로아티아 무기 비축량은 해외 구매 3만 정, 이전 경찰 소유 1만 5천 정의 소형 화기가 전부였다.[2] 경비 여단 인력 손실 대체 위해 1만 명의 특수 경찰이 신설되었다.[2]

동슬라보니아, 시르미아, 바라냐 지역의 1991년 9월부터 1992년 1월까지의 유고 인민군 군사 작전을 보여주는 지도. 세르비아에서 부코바르를 포위하고 축소하며 오시예크 남쪽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1991년 9월~1992년 1월 동슬라보니아 군사 작전 지도.


1991년 9월 14~15일, 크로아티아가 병영 전투를 시작하여 크로아티아 내 유고 인민군(JNA) 시설을 점령하자, JNA는 부코바르 주둔군을 구원하기 위한 소규모 작전을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JNA는 크로아티아 작전을 준비하며 동원을 시작했으나, 동원된 병력은 지정 부대 보고를 거부하고 탈영하는 등 전반적인 열의가 부족했다. 특히 중앙 세르비아에서는 징집 인원 중 26%만이 복무하여 반응률이 매우 낮았다. 이로 인해 JNA는 병력 부족으로 더 적은 보병 부대를 배치해야 했다.

9월 20일, JNA의 공격 작전은 동 크로아티아 지역인 슬라보니아 작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시작되었다. 부코바르 공격은 JNA가 도시 점령에 계속 실패하면서 점차 작전의 주된 노력이 되었다. 부코바르 안팎의 전투는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이전에는 서슬라보니아의 세르비아 점령 지역으로 서쪽 진격 예정이었던 JNA 주요 장갑 부대가 투입되었다. JNA는 부코바르 주둔군 구원 외에도, 빈코브치 서쪽으로 작전이 진행될 경우 크로아티아군이 후방에 위협을 가하지 않도록 도시 내 크로아티아군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JNA는 지역 세르비아인 국토방위군(TO) 부대와 징집에 불응한 예비군을 대체하기 위한 세르비아 준군사 자원병의 지원을 받았다. 자원병들은 종종 민족적 증오로 동기가 부여되어 수많은 집을 약탈하고 민간인에게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2개월이 넘는 전투 끝에 11월 18일, 크로아티아군은 항복했다. 부코바르는 JNA의 포격과 로켓 공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전투가 끝날 무렵 하루 최대 12,000발의 포탄과 미사일이 도시에 발사되었다.

4. 전개

1991년 9월 14-15일, 크로아티아가 크로아티아 내 유고 인민군 시설을 점령하기 위해 막사 전투를 시작하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부코바르 포위를 위한 작은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1]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를 향한 대규모 공세를 위해 동원령을 선포하여 병력을 모았으나, 징병 거부, 부대 이탈, 탈영, 사기 저하 등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2] 중앙세르비아에서는 징병 대상자의 약 26%만이 실제로 병역을 치렀다고 보고되었다.[3] 이로 인해 병력 부족이 심화되자 유고 인민군은 보병 부대 배치를 줄였다.

1991년 9월 20일,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 전역의 최종 목표는 유고 인민군이 বারবার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부코바르 시가지 장악이었다. 부코바르 및 주변 지역 전투는 수개월간 계속되었고, 유고 인민군의 주력 기갑부대는 서슬라보니아의 세르비아계 장악 지역에서 서쪽으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 함락 외에도 빈코브치 서쪽으로 진격하기 전 후방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크로아티아군을 완전히 소멸시키려 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징병에 참여하지 않은 예비군 대신 현지 세르비아계 영토방위군이나 세르비아계 준군사 조직을 이용하여 병력을 보강했다. 자원군은 민족 증오로 인해 민간인 가정을 약탈하는 등 여러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2개월이 넘는 전투 끝에 1991년 11월 18일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군은 항복했다. 부코바르 시가지는 유고 인민군의 포병, 박격포, 로켓 포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전투가 끝날 때까지 최소 70만 개의 포탄과 미사일이 도시에 떨어졌으며, 이는 하루 평균 12,000개 이상에 달하는 수치였다.

4. 1. 이송 준비

1991년 11월 17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제5(자그레브) 군관구 사령관 안드리야 라셰타 소장은 유럽 공동체 감시단(ECMM)에게 유고 인민군이 부코바르에서 취약한 사람들을 신속하게 대피시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했다고 통보했다. 당시 부코바르 병원에는 약 400명이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약 450명 이상이었다. 이들 중에는 중환자 40명과 경상자 360명 외에도 전투 막바지에 병원으로 피난 온 민간인들이 있었다. 또한, 많은 크로아티아군 병사들이 환자나 직원으로 위장하여 병원에 피신해 있었다.

11월 18일, 크로아티아, 유고 인민군, ECMM 대표로 구성된 삼자 위원회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국경없는 의사회, 몰타 기사단 대표와 함께 부코바르 피난 방법을 논의했다. 11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라셰타 소장과 크로아티아 보건부 장관 안드리야 헤브랑은 피난에 관한 합의에 서명했다.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피난민들은 루자크 교외-보그다노브치-마린치-지디네 교차로-누슈타르-빈코브치 경로를 통해 이동한다.
  • 피난민들은 지디네 교차로에서 국제기구에 인도된다.
  • 병원은 ICRC가 관리한다.
  • ECMM이 전체 작전을 감독한다.


헤브랑 장관은 부코바르 병원장 베스나 보사나츠에게 이 합의를 알리고 ICRC 팀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부코바르 포위전 전 과정을 보도했던 라디오 기자 시니샤 글라바셰비치는 병원에서 마지막 방송을 했다. 글라바셰비치는 세르비아 민병대가 자신을 체포할 경우를 우려하여 ICRC와 함께 빨리 도시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4. 2. 병원 장악

1991년 11월 19일 아침, 유럽 공동체 감시단(ECMM)은 부코바르 내 조직적인 저항이 모두 끝났음을 알았으나, 병원 내 환자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받지 못했다. 결국 유럽 공동체 감시단 대표 디릭 잔 반 휴턴 대사는 ECMM을 대신하여 라슈타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같은 날 유고 인민군 부대가 병원에 도착했고, 병원장 베스나 보사나츠는 유고 인민군 장교 밀레 므르크시치를 만났다. 보사나츠는 므르크시치가 피난 협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 대원들은 현장의 유고 인민군 장교 때문에 부코바르에 진입할 수 없었지만, 11월 19일 초저녁에 적십자사 대표 니콜라스 보리싱어가 "장군"과의 약속을 주장하며 부코바르 병원에 도착했다. 보리싱어는 병원을 장악한 인민군 대위를 만나 적십자사의 시설 방문을 허가받았다. 이후 보리싱어는 적십자사 호송 행렬에 합류하여 병원을 탈출했다.

11월 20일 아침, 적십자사 행렬이 부코바르에 도착했으나 병원 바로 앞 다리에서 저지당했다. 장갑차가 병원으로 향하는 다리를 막고 있었고, 그곳에 있던 인민군 장교 소령 베셀린 슈리반차닌은 적십자사 행렬의 진입을 막았다. BBC 기자 마틴 벨은 현장에서 유고 인민군과 적십자사 간의 협상을 돕기 위해 통역을 자원했다. 베셀린 슈리반차닌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적십자사 요원에게 "여긴 내 나라이고, 우리는 이곳을 점령했다. 여긴 유고슬라비아고, 난 이곳을 지휘한다!"라고 말했다. 슈리반차닌이 호송대를 막는 동안, 약 300여 명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끌려나갔다.

4. 3. 오브차라 농장

11월 20일, 베셀린 슈리반차닌은 부상자 이송을 위한 버스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포로들을 부코바르 남쪽 끝에 있는 유고 인민군 병영으로 이송했다. 병원에서 직원으로 확인된 15명은 병원으로 돌려보내졌고, 나머지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등에게 위협받았다.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은 이들을 세르비아 내 구금 시설로 옮기는 것에 반대했다.

2시간 후, 버스는 그라보보 근처 오브차라 농장으로 이동했다. 포로들은 대부분 크로아티아인이었지만, 세르비아인, 무슬리마니, 헝가리인, 그리고 부코바르에서 크로아티아군에 자원한 프랑스인 장 미셸 니콜리에와 독일인 1명도 포함되었다. 오브차라에는 261명이 끌려왔으며, 이 중에는 임신 5개월의 여성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포로들의 나이는 16세에서 72세까지 다양했으며, 최연소 희생자는 만 16세의 이고르 카치치였다.

오브차라 기념관 개관 전 2005년 오브차라 농장


포로들은 부코바르에서 약 10km 떨어진 오브차라에 도착하자, 농장 창고 건물로 끌려갔다. 슬라브코 도크마노비치는 포로를 구타하는 데 가담했다. 군인들은 포로들의 소지품, 돈, 보석을 빼앗고, 막대기, 개머리판, 쇠사슬, 야구방망이 등으로 폭행했다. 유고 인민군 헌병은 폭행을 막지 못했고, 최소 2명이 구타로 사망했다. 또한, 포로 감시자 중 한 명이 니콜리에로 추정되는 프랑스인을 포함한 최소 5명을 총살했다. 7-8명은 유고 인민군의 명령으로 부코바르로 돌아와 풀려났다.

결국 유고 인민군은 철수하고, 포로 관리는 미롤류브 부요비치가 지휘하는 세르비아계 영토방위군에게 넘어갔다. 오후 6시경, 포로들은 10-20명씩 나뉘어 트럭에 실려 처형 장소로 옮겨져 총살당하고 집단무덤에 묻혔다. 15-20분 후 빈 트럭이 돌아오는 식으로 반복되었으며, 마지막 포로 무리는 농장 건물 밖에서 학살당했다. 밤 10시경 모든 포로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약 26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 여파

1991년 체결된 일련의 정치적 협정과 1992년 초 크로아티아와 유고 인민군 사이 체결된 휴전 협정으로 부코바르와 인근 지역을 포함한 크로아티아 곳곳에 유엔보호군(UNPROFOR)이 평화유지 임무로 파견되었다. 유엔보호군은 1992년 3월 경부터 배치가 시작되었다.[1] 1991년 10월 초, 세르비아계 군사는 오브차라를 수용소로 바꾸었다. 집단살해 이외에도 1991년 가을 동안 오브차라 수용소에는 약 3-4천 명의 남성 포로가 수용되었으며, 이들은 일시적으로 오브차라에 수용되었다가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감옥이나 지역 유고 인민군 군부대로 이송된 후 다시 스타예체보, 베게이치 등 세르비아 내의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2]

오브차라 기념관에 전시된 희생자들의 문서와 개인 소지품

5. 1. 집단무덤 발견

법의인류학자 클라이드 스노우는 1992년 10월 자그레브를 방문하면서 학살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스노우는 전쟁범죄 혐의 조사를 위해 유엔팀의 일원으로 부코바르를 여행했다. 그는 자그레브 대학교 의대 학과장을 만나 학살에서 살아남은 전 군인을 소개받았고, 그에게서 학살에 관해 들었다. 3일 후, 스노우는 부코바르 지역의 유엔보호군으로 파견된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중사 레리 무어와 함께 오브차라 지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어는 진흙 속에 파묻힌 인간 두개골을 발견하였다. 며칠 후 유엔은 오브차라 지역을 범죄 현장으로 선포하고 현장 보호를 위해 러시아 유엔보호군을 파견하였다.[1]

스노우는 자신을 포함해 4명으로 이뤄진 팀을 꾸려 겨울 전에 예비 조사를 실시했으며, 1992년 12월 학살 현장에 도착하였다. 이 팀은 러시아군이 보호하고 있는 학살 현장에 도착하여 무어가 발견한 뼈조각 외에도 나머지 모든 뼈도 발견하였으며 부분적으로 파묻혀 남아있는 뼈조각들도 발견하였다. 팀은 현장에서 대략 1m 정도의 깊이로 참호를 팠다. 땅을 파면서 더 많은 뼈를 발견하였으며 무덤의 크기도 대략적으로 추측하였다. 지하를 파내려가 조사한 결과 대략 200여 명 이상이 집단무덤에 파묻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조사단은 무덤 한켠에서 유고슬라비아군이 사용하는 표준 생산된 AK-47탄약통 더미를 발견하고 그와 정반대편 나무엔 총알 구멍이 뚫린 것도 발견하여 사격수들이 무덤 한쪽에 서서 한가운데를 향해 발사해 총살한 것 같다는 추측을 하였다.[2]

크로아티아 정부는 1993년에서 1994년 사이 오브차라에 묻힌 시신을 발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다.[3] 1993년 10월 유엔 사무총장이 임명한 5명의 전문가위원회 위원이 시신 발굴을 위해 오브차라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이들도 지역 세르비아계 행정부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세르비아계 정부가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감시를 받는 오브차라 집단묘지에 대한 추가 조사 시도를 몇 차례 막은 끝에 1994년 1월 미국의 유엔 대사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오브차라로 파견되었다. 올브라이트는 1993년 세워진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보여주기 위해 파견되었다.

5. 2. 무덤 발굴

1995년까지 부코바르 지역의 정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크로아티아군은 그해 5월과 8월에 플래시 작전과 폭풍 작전을 통해 세르비아계 군대를 격파하였다.[1] 동부 슬라보니아는 세르비아계가 마지막으로 점령한 지역이었다.[2] 11월, 에르두트 협정을 통해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을 점진적으로 크로아티아 통치로 반환하기로 합의하였고, 협정 이행을 위해 유엔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서시르미움 잠정통치기구(UNTAES)가 임시로 통치하게 되었다.[3]

1996년 9월 1일, UNTAES의 감시 하에 오브차라 지역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작업에는 ICTY 요원, 인권을 위한 의사회, 크로아티아 감독관이 참여하였다. 약 30 m² 면적에서 시신들이 엉킨 집단무덤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시신은 여러 발의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10월 24일까지 200구의 시신 유골이 발굴되었고, 이 유골은 자그레브 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부로 옮겨졌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4년 전부터 희생자 정보를 수집하고, 의학부 건물에 현대적인 시신안치소를 건설하였으며, ICTY 조사관이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시신에 대해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유전학자들을 훈련시켰다. 2002년 10월까지 184구, 2010년까지 총 194구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며, 대부분 유전자 조사로 확인되었다. 글라바셰비치의 시신 일부도 오브차라에서 발견되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오브차라 학살 희생자 61명이 추가로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는 발견된 집단무덤 근처에 무덤이 더 있거나, 다른 곳에 묻혔던 시신이 옮겨져 매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5. 3. 전범 재판

1995년, ICTY는 슈리반차닌, 므르크시치, 유고 인민군 대위 미로슬라브 라디치를 오브차라 학살 관련 혐의로 기소하였다. 이들은 이후 언론 등에서 "부코바르 3인방"(Vukovar three)으로 불렸다. ICTY는 당시 부코바르 시장이었던 슬라브코 도크마노비치도 추가 기소하였으나, 도크마노비치는 1998년 6월 28일 ICTY 감옥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3] ICTY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도자 젤코 라주나토비치(아르칸)도 기소했으나, 재판 전 베오그라드에서 암살당했다.

2002년 5월 므르크시치는 네덜란드 ICTY에 자수했다. 라디치와 슈리반차닌은 2003년 5월과 6월 세르비아에서 체포되었다. 2007년 ICTY는 므르크시치와 슈리반차닌에게 유죄를, 라디치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므르크시치는 20년형, 슈리반차닌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 2009년 항소심에서 슈리반차닌의 형량은 17년으로 늘었으나, 2010년 재검토에서 10년형으로 줄었다.

ICTY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국가보안청 소속 조비차 스타니시치와 프란코 시마토비치,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 정치지도자 고란 하지치, 세르비아 급진당 당수 보이슬라브 셰셸 등도 기소했다. 밀로셰비치는 2006년 3월 재판 중 사망했고, 스타니시치와 시마토비치는 2013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셰셸은 2016년 3월 항소심을 앞두고 석방되었으며, 하지치는 2016년 7월 암으로 사망했다.

2015년까지 세르비아 정부는 오브차라 학살 관련자 총 1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2010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 지휘관 미로류브 부요비치와 부지휘관 스탄코 부야노비치 등 11명은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 병사 또는 민병대 "레바 수퍼데리카" 소속이었다. 프레드라그 밀로예비치, 조르제 쇼시치, 밀로슬라브 자코비치, 사샤 라다크는 20년형, 밀란 보이노비치, 이반 안토니예비치는 15년형, 요비차 페리치는 13년형, 나다 칼라바는 11년형, 밀란 란추자닌은 7년형, 프레드라그 드라고비치, 고란 무고샤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2013년 12월 세르비아 헌법재판소는 이 판결을 무효화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2015년 2월 부요비치 등은 세르비아 최고대법원 결정으로 석방되었다. 2014년 별도 재판에서 세르비아 법원은 레바 수퍼데리카 소속 페타르 치리치에게 15년형을 선고했다.

2015년 2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부코바르 포위공격과 학살이 전쟁범죄는 맞지만, 제노사이드는 아니라고 판결했다.

6. 추모

1998년부터 부코바르에서는 부코바르 전투의 희생자와 그 직후 일어난 참상에 대한 추모로 매년 11월 18일 부코바르 시립병원에서 시작하여 도시 내 기념묘지까지 "기억의 행진"을 연다. 2014년에는 8만 명이 이 행진에 참여했다. 부코바르 희생자 추모일은 2020년에 국경일이 되었다.

1998년 12월 30일, 오브차라의 집단무덤 위에 조각가 슬라보미르 드린코비치가 조각한 추모비가 공개되었다. 이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 벌어진 학살 등의 집단무덤에는 이와 같은 모양의 추모비가 건설되었다.

2006년 첫 개장한 오브차라 추모 센터의 모습.


2006년에는 전 오브차라 농장 부지 위에 밀리옌코 로미치가 디자인한 오브차라 추모 센터가 건립되었다. 이 추모센터는 1991년 11월 20일 포로들이 처형되기 직전 수용되었던 창고 건물을 개조하여 건립하였다. 유리로 둘러싸인 로비에서 들어올 수 있는 이 건물은 오브차라에서 처형당해 집단무덤에서 발견된 200명의 사망자와 발견되지 못한 61명의 실종자의 사진을 조명으로 비춘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코딩된 폐 탄약통과 희생자 261명의 이름이 기록된 "악마의 나선"(크로아티아어로 Spirala zla) 조각품이 있다. 천장에는 희생자 261명을 상징하는 작은 조명 261개가 달려 있다. 이 센터 안에는 집단무덤 발굴때 발견한 개인 소지품과 여러 신분증과 같은 문서도 전시되어 있다. 이 추모센터는 자그레브시에서 (약 270000EUR)를 지원하여 세워졌다. 완공 후 2014년 7월까지 50만 명이 추모센터를 방문하였다. 같은 해 크로아티아 정부는 8학년 학생들에게 센터를 방문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매년 약 50만 명의 학생이 이 센터를 방문한다.

2010년에는 세르비아의 대통령 보리스 타디치가 세르비아 국가수반으로는 최초로 기념센터와 오브차라 집단무덤을 방문하였다. 타디치 대통령은 무덤에 화환을 얹었으며 세르비아 국가를 대표하여 사죄 발언을 하였다.

부코바르에는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물과 시설들이 있다. 부코바르 전투 중 1991년 10월 2일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와 함께 카치치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으며, 도시의 다리는 니콜리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도시의 학교 중 하나는 글라바셰비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참조

[1] 뉴스 BBC News | EUROPE | Milosevic Indictment: Text http://news.bbc.co.u[...] 2001-10-29
[2] 뉴스 U.N. tribunal to rule in Vukovar massacre case | Reuters http://www.reuters.c[...] 2007-09-25
[3] 뉴스 옛 유고전범 밀란 바비치의 배신과 자살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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