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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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주(孔伷)는 후한 말기의 인물로, 예주 자사를 역임했다. 같은 군 사람 부융의 추천으로 상계리에 임명되었으며,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예주 자사가 되었다. 동탁의 명사 우대 정책으로 등용되었으나, 동탁에게 충실하지 않고 허정을 보호했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여 동탁 토벌전에 참여했으나, 190년 사망했다. 정태는 공주를 청담에 능하지만 군사에는 서툴다고 평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 토벌군의 일원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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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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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공주 |
원어 이름 | 孔伷 |
자 | 공서(公緒) |
출생지 | 카이펑, 허난 성 |
사망 추정 시기 | 기원후 190년경 |
사망지 | 허난 성 |
직업 | 관리, 군벌 |
관직 | |
관직명 | 예주 자사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헌제 |
후임 | 손견 |
2. 생애
공주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카이펑 허난성 일대에 있던 천류군(陳留郡) 출신으로, 관료 정태(鄭泰)는 공주가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철학적 문답인 청담에 뛰어났지만 군사적 지휘 능력은 부족하다고 언급했다.[1]
2. 1. 관직 생활
같은 군 사람 부융이 진류태수 풍대(馮岱)에게 범염(范冉)·한탁(韓卓)과 함께 추천해 주었고,[6][7] 풍대는 공주를 상계리(上計吏)에 임명하였다.[7]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주비와 허정을 등용하여 인사를 맡겼는데, 이들이 각지의 자사와 태수를 추거하면서, 공주도 이들에 의해 예주자사가 되었다. 그러나 공주는 주비와 허정이 천거한 다른 자사와 태수들, 즉 한복, 유대, 장막과 함께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허정의 망명을 받아들였고, 허정은 공주가 죽은 후에 진의, 왕랑 등에게 의탁하며 계속 유랑을 떠났다.[8]
정태는 동탁에게 공주를 두고, “공공서는 청담고론에 능하여, 마른 나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라고 했다.[9] 예주 지방에 근거하였으며,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기도 했다. 청담이나 고루한 학문에는 어느 정도 수준이 있었으나, 난세의 군벌로는 아주 모자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189년경, 한나라 중앙 정부를 장악한 군벌 동탁은 공주를 예주 자사(刺史)로 임명했다. 190년에 공주는 동탁에게 반기를 들고 한곡관 동쪽의 군벌 연합에 가담하여 동탁 토벌전에서 동탁을 제거하고 중앙 정부를 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그 해 안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또 다른 군벌 원술은 손견을 새로운 예주 자사로 지명했다.
하진과 십상시의 다툼 틈을 타 정권을 장악한 동탁의 명사 우대 정책의 일환으로 등용되었다. 예주 자사에 임명되었지만, 동탁에게 충실했던 것은 아니며, 후에 동탁과 사이가 나빠져 도망친 허정을 보호했다. 유대, 교모 등 제후들과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거병했다. 이때 장홍에게 예주에서 데려온 병사를 맡겼다고 한다. 원소, 원술, 조조 등이 이에 동조하여 대세력이 되었다.
관동의 제후들이 거병했을 때 의랑 정태가 동탁의 요청에 응해 전한 평에 따르면, 공주는 청담에 능하여 "공주가 말을 걸면 마른 나무도 꽃을 피운다"고까지 말해졌지만, 군사에는 서툴렀다고 한다. 그러나 정태는 후에 동탁의 암살을 꾀한 인물이며, 동탁을 방심시키기 위해 적대자 중 한 명인 공주를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2. 2. 반동탁 연합군 참여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주비와 허정을 등용하여 인사를 맡겼는데, 이들이 각지의 자사와 태수를 추천하면서 공주도 예주자사가 되었다.[8] 그러나 공주는 주비와 허정이 천거한 다른 자사와 태수들, 즉 한복, 유대, 장막과 함께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다.[1] 190년에 공주는 동탁에게 반기를 들고 한곡관 동쪽의 군벌 연합에 가담하여 동탁 토벌전에 참여했다.[8]정태는 동탁에게 "공공서(공주)는 청담고론에 능하여, 마른 나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라고 평가했다.[9] 그러나 정태는 후에 동탁의 암살을 꾀한 인물이며, 동탁을 방심시키기 위해 적대자 중 한 명인 공주를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2. 3. 허정과의 관계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주비와 허정을 등용하여 인사를 맡겼다. 이들은 각지의 자사와 태수를 추거했는데, 공주도 이들에 의해 예주자사가 되었다. 그러나 공주는 주비와 허정이 천거한 한복, 유대, 장막 등 다른 자사 및 태수들과 함께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허정은 망명길에 올랐고, 공주는 허정을 받아들였다. 허정은 공주가 죽은 후에 진의, 왕랑 등에게 의탁하며 유랑 생활을 계속했다.[8]2. 4. 정태의 평가
정태는 동탁에게 공주를 두고 "공공서(공주)는 청담에 능하여, 마른 나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라고 평가했다.[9]3. 평가
공주는 청담이나 고루한 학문에는 어느 정도 수준이 있었으나, 난세의 군벌로는 아주 모자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9]
3. 1. 부정적 평가
공주는 예주 지방을 근거로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기도 했다. 청담이나 고루한 학문에는 어느 정도 수준이 있었으나, 난세의 군벌로는 아주 모자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9]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 토벌군의 제3군으로 낙양을 공격하고 있다. 『연의』에서도 공주의 최후는 그려져 있지 않다.
5. 공주를 섬긴 사람들
- 허정
- 허탕
참조
[1]
서적
Houhanshu
[2]
서적
九州春秋
後漢書 董卓伝
[3]
서적
謝承後漢書
後漢書 符融伝
[4]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5]
서적
영웅기
삼국지 권1 무제기 배송지주
[6]
서적
후한서
[7]
서적
후한서
범엽, 《후한서》 권68 곽부허열전 이현주에 인용
[8]
서적
삼국지
[9]
서적
한기
진수의 삼국지 권1 무제기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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