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왕랑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왕랑은 후한 말에서 위나라 시대를 거쳐 서진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하진, 도겸 등을 섬기다 회계태수를 지냈으며, 손책에게 항복한 후 조조에게 발탁되어 중용되었다. 조비의 황제 즉위를 도왔으며, 조예 대에는 사도에 이르렀다. 유학에 조예가 깊어 저술 활동을 했으며,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2. 생애

왕랑은 산둥성 탄청현 일대의 동해군 탄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엄"(嚴중국어)이었으나 후에 "랑"(朗중국어)으로 고쳤다.[2]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이 깊어 낭중(郎中중국어)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3]

서주 자사 도겸을 섬기며 헌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권고했고, 도겸은 장안의 한 중앙 정부에 사신을 보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대가로 왕랑은 회계군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회계 태수 시절, 진시황 숭배를 금지하고 산월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손책이 강동 정벌을 시작하자 엄백호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맞섰으나 패배했다. 동야(東冶)로 도주하여 장아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재건하려 했으나, 하제에게 패배하고 교주로 가려다 손책에게 붙잡혔다. 손책에게 항복했고, 손책은 왕랑의 겸손한 태도에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후 조조의 초빙을 받아 허창에서 조조를 섬겼다. 조조 사후에는 화흠과 함께 조비에게 황제 등극을 권했으며, 조위 건국 후 사공에 임명되었다. 조예 대에는 사도가 되었다.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왕궁 예산을 절감할 것을 건의했으며, 육형에 반대했다. 유비 사후 제갈량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

228년 11월,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성후'(成侯중국어)로 추증되었다.[9] 사마염의 외증조 할아버지이며, 손녀 왕원희사마소의 부인이 되어 사마염을 낳았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왕랑은 산둥성 탄청현 일대의 동해군 탄현 출신이다. 본래 이름은 "엄"(嚴중국어)이었으나 나중에 "랑"(朗중국어)으로 바꾸었다.[2] 경서에 통달했으며, 낭중(郎中중국어)을 거쳐 재구 현장이 되었다. 185년 말 스승 양사[3]가 사망하자,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효렴으로 추천받아 삼공의 부름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서주 자사 도겸을 섬기면서 헌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권고했는데, 이는 춘추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무재로 추천받아 치중에 발탁되었고, 별가 조욱과 함께 도겸을 보좌했다. 당시 헌제는 장안에 있었고, 관동은 병란으로 혼란스러웠다. 왕랑과 조욱은 도겸에게 조정에 사자를 파견하여 근황을 알려야 한다고 권했다. 도겸은 장안의 한 중앙 정부에 사신을 보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 대가로 "동쪽을 진정시키는 장군"이라는 임명을 받았다. 초평 4년 (193년), 헌제는 이 충성을 치하하여 왕랑을 양주 회계 태수로 임명했다.

2. 2. 회계 태수 시절

《동관기》에 따르면 왕랑은 처음에 대장군 하진의 속연이었다가 서주로 가서 자사 도겸을 섬겼다. 그러나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이 높게 평가받아 회계태수에 임명되었다.[4]

건안 원년(196년), 유요를 격파한 손책이 회계로 진출해 왔다. 왕랑은 우번이 도주를 권했으나, 한(漢)의 신하로서 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고, 원래 단양 태수였던 주흔의 협력을 얻어 고릉에서 손책의 진격을 막았다. 그러나 손정의 계략에 따라 사독으로 유인되어 손책 군에게 대패했고, 주흔은 참수되었다.[14]

왕랑은 성을 포기하고 배를 타고 동야로 도망쳤으나[15], 손책이 추격해 와 다시 대패했다. 결국 왕랑은 손책에게 투항하여 항복이 늦어진 것을 사죄했다. 손책은 왕랑이 유학적 교양이 풍부하고 겸손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처형하지 않고 용서했다.[16] 그 후 왕랑은 일족을 거느리고 곤궁한 생활을 하였으나, 도의에 따른 생활을 하였다.

왕랑은 회계군 태수로 재임하는 동안 현지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던 진시황 숭배를 금지했는데, 그가 덕이 없는 군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4] 왕랑은 또한 산월 부족과 은밀한 동맹을 맺었다. 군벌 손책이 강동 정벌을 시작했을 때, 왕랑은 산월의 지도자 엄백호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손책과 싸우게 했지만, 엄백호와 다른 산월 부족 지도자들은 손책에게 패배했다.

왕랑은 그 후 동야(東冶)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후관장(侯官長)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군대를 가진 반란 지도자 장아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재건하려 했다.[5] 그러나 결국 손책 휘하의 장수 하제에게 패배했다.

왕랑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더 남쪽의 교주로 가려 했지만, 손책에게 붙잡혀 패배했다.[6] 그는 손책을 달래기 위해 매우 겸손한 연설을 했고, 손책은 나중에 그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왕랑의 『가전』에 따르면, 회계 태수로 근무한 4년 동안 백성을 자애롭게 대했다고 한다.[12]

2. 3. 조조와 위나라 섬김

조조(曹操)에게 초빙되어 중직을 역임하였다. 조조 사후에는 화흠(華歆)과 함께 조비(曹丕)에게 황제 등극을 권했으며, 위(魏) 왕조가 건국된 후에는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7] 조예(曹叡) 대에는 사도(司徒)가 되었다. 왕랑은 관대하게 정무를 보았으며, 백성의 부담을 줄여 인구를 늘릴 것과 왕궁의 예산을 줄일 것을 건의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또 육형을 두는 것에 반대론을 펴기도 하였다(진군과의 논쟁).

유비(劉備)가 사망하자, 제갈량(諸葛亮)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허정(許靖)에게도 같은 편지를 보냈으나, 허정이 사망하여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

건안 3년(198), 왕랑은 조조에게 소환되어 곡아에서 출발하여 장강과 바다를 통해 수 년에 걸쳐 도읍에 도착했다. 공융(孔融)은 왕랑이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걱정하여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도읍에 도착한 후, 조조로부터 간의대부(諫議大夫), 참사공(司空)군사에 임명되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손책의 성격에 대한 질문에 왕랑은 "손책은 큰 야심과 뛰어난 인재를 가지고 있으므로, 한낱 도적에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17]

왕랑의 《가전》에 따르면, 왕랑이 젊은 시절 교류했던 유양이라는 자가 일찍 사망했다. 생전의 유양과 조조는 적대 관계였기 때문에, 조조는 유양의 유족에게 심하게 대했다. 그러나 왕랑은 유양의 유족을 회계에 숨겨두었다. 회계에서 귀환한 후, 왕랑은 조조를 여러 번 설득하여 유양 일가의 사면을 받아냈다. 또한 손책에게 편지를 보내 유요(劉繇)의 유족이 해를 입지 않도록 부탁하기도 했다.[17]

건안 18년, 위나라가 번속으로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승상(丞相) 참군 제주에 취임했으며, 위군 태수를 겸임했다. 더 나아가 소부(少府), 태상(太常), 정위(廷尉)를 역임했다. 정위로서의 업무는 관용을 으뜸으로 삼아, 죄에 의심이 있을 때는 가볍게 처리하도록 했다. 그 법의 운용은 종요(鍾繇)와 함께 칭찬받았다.

《위략》에 따르면, 과거 회계에서 쌀밥을 절약한 것을 조조에게 놀림받았기 때문에, 왕랑은 예전처럼 절약해야 할 때 절약한 것과, 지금 조조처럼 절약해야 할 때 절약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반론했다. 또한, 조조는 왜 손권(孫權)이 한 왕조에 신종하는지 모르겠다며, 공물을 보내온 것에 대해 의견을 묻자 "손권은 과거의 과오를 보충하기 위해, 한 왕조에 충성을 보이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동서부가 신종한 후, 형주(荊州) 남부와 익주(益州)는 위에 굴복할 것이다. 정세는 결정되었고, 경사는 계속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20년, 조조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왕이 되었고, 왕랑을 사공(司空)으로 승진시키고, 월평정후(悅平亭侯)로 봉했다. 그해 겨울 헌제(獻帝)는 조비에게 양위했고, 조비는 조위(曹魏)를 건국했다. 황제가 된 후 조비는 왕랑을 사공으로 임명하고 안릉향후(安陵鄕侯)로 봉했다. 조비의 재위 기간 동안 왕랑은 군사 및 민간 문제에 대해 여러 제안을 했는데, 예를 들어 국가의 보안과 직원의 감축, 지출 삭감 등이었다.[7]

226년, 조예(曹叡)가 즉위하자 왕랑은 현후에서 군후로 승진하여 "란릉후(蘭陵侯)"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의 식읍은 이전의 1,200호에서 1,700호로 증가했다.

왕랑은 후에 예(현재의 한단, 허베이성)로 보내져 문소황후 조예의 어머니의 묘소를 방문했다. 그녀는 아직 황후로 시호되지 않았으므로, 왕랑은 그럴 수 있도록 허가하는 부절과 문서를 받았으며, 이를 위한 적절한 희생 동물을 받았다. 그녀를 위해 특별 묘소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방문하는 동안 그는 백성들이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을 보고 조예에게 검소할 것을 권고하는 글을 써서 그의 사치스러운 궁궐과 조상 사당 건설 규모를 줄이도록 조언했다.

2. 4. 말년과 죽음

조조(曹操)에게 초빙되어 중직을 역임하였다. 조조 사후에는 화흠(華歆)과 함께 조비(曹丕)에게 황제 등극을 권했으며, 위(魏)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 조예(曹叡) 대에는 사도(司徒)가 되었다. 왕랑은 관대하게 정무를 보았으며,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인구를 늘릴 것과 왕궁의 예산을 줄일 것을 건의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또 육형(肉刑)을 두는 것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진군과의 논쟁).[8]

유비(劉備)가 사망하자, 그의 신하 제갈량(諸葛亮)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또한 구면인 허정(許靖)에게도 같은 편지를 보냈으나, 때마침 허정이 죽어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19]

228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19]

서진을 세운 사마염의 외증조 할아버지이며, 그의 손녀 왕원희는 그의 장남 왕수의 딸로,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의 정실부인이 되어 사마염을 낳았다.

왕랑은 조예의 궁궐 건설 사업에 반대했으나, 조예의 후궁 수가 적다는 것을 알고 조예에게 상소를 올려 황제는 더 많은 후궁을 두어 더 많은 자손을 통해 황실의 혈통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예는 왕랑의 말에 동의하여 후궁의 규모를 늘리기 시작했다. 왕랑이 죽은 지 9년 후, 조예는 남편이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경우, 모든 아름다운 기혼 여성들을 정식으로 붙잡아 병사들과 결혼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은 그의 후궁이 될 것이었다. 장모를 포함한 일부 관리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칙령은 시행되었고, 백성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8]

왕랑은 이후 학술 저작에 집중하여 당시 호평을 받은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시호는 '성후'(成侯|성후중국어)로 추증되었다.成|정권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거나 백성을 위로한 사람은 "성"이라는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중국어 왕랑은 조위 정권 수립에 기여한 공로로 시호를 받았다. 시호를 부여하는 규칙은 ''일주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9]

연강 원년(220년) 2월,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의 자리를 계승하자 왕랑은 어사대부로 승진하여 안릉정후에 봉해졌다. 백성에 대한 은혜와 관용을 우선시하는 통치를 하도록 상주했다. 헌제가 조비에게 제위를 선양하려 하자 조비에게 이를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조비(문제)가 황제로 즉위한 후의 황초 원년(220년) 11월, 어사대부의 관직은 사공으로 개칭되었다. 낙평정후로 승진했다[18]

조비는 자주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왕랑은 상소를 올려 제왕의 마음가짐을 설파하고, 사려 깊지 못한 행위는 삼가도록 간했다. 조비는 고대의 제왕과 최근의 상황을 들어 "무의 도를 존중하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며 이에 반론했다. 왕랑은 경비 절약과 노력 절감을 설파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과거 대리였을 때 주부였던 장등의 공적을 황초 연간에 종요와 연명으로 현창하고, 그의 충의와 직무 열심함을 조비에게 인정받아 장등을 태관령으로 발탁했다.

촉한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나자(이릉 전투), 조비는 손권과 협력하여 유비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려 했다. 왕랑은 "먼저 손권이 움직인 후에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군대를 움직이는 것에 소극적인 의견을 냈다.

황초 3년(222년), 손권이 아들 손등을 상경시키려 하지 않자 조비는 오나라 정벌을 생각하고 허창으로 옮겨 출진 준비를 시작했다. 왕랑은 "현 시점에서의 출진은 경솔하고 낭비가 많지 않습니까"라고 간했다. 조비는 결국 계획대로 출진했지만, 오나라에게 패하여 철수했다.

황초 4년(223년), 고관들에게 뛰어난 인물을 추천하도록 조칙이 내려지자 왕랑은 양표를 추천한 뒤, 자신이 병을 핑계 삼아 양표에게 지위를 양보하려 했다. 조비는 양표에게 삼공 다음의 지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왕랑에게도 직무에 복귀하도록 요청했다. 왕랑은 명령에 복종하여 복귀했다.

황초 7년(226년) 5월,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 (명제)가 즉위하자 왕랑은 난릉후로 승진하여 500호의 식읍이 더해져 총 1200호가 되었다. 조예에게도 노역과 지출의 경감을 간언했다. 같은 해 12월, 사도로 전임되었다. 조예가 후계자를 얻지 못하는 것을 우려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예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왕랑은 유학에 통달하여, 『역경』, 『춘추』, 『효경』, 『주례』의 전(주석)을 저술했다. 상소나 논의 등 저술 전부가 세상에 전해졌다. 또한, 촉에 있던 옛 지인 허정에게 편지를 보내 제갈량에게 신하로 따르도록 권유해 줄 것을 부탁하려 했지만, 허정이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회신은 없었다. 후에 제갈량은 진군 등 다른 위나라 고관들의 항복 권고 편지와 함께 묶어, 『정의』라는 제목으로 반론을 공표했다[19]

태화 2년(228년) 11월에 사망했다. 시호는 성후였다. 조비 시대에, 그 소령을 분할하여 아들 하나가 열후에 봉해졌으며, 왕랑의 바람에 따라 조카도 등용되었다.

정시 4년(243년) 가을 7월, 당시 황제인 조방 (제왕)은 조서를 내려 조조의 묘정에 왕랑 등 공신 20명을 제사 지냈다. 정시 6년(245년)에는 왕랑의 저서 『역전』이 관료 등용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20]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엄백호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후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설전으로 제갈량을 상대하다가 제갈량의 언변에 혈압이 올라 말에서 떨어져 사망한다.[1]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왕랑은 228년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1] 그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진영을 세워 제갈량과 전투를 벌였다.[1] 소설에서 조진은 제갈량에게 패배했다.[1] 조진이 부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왕랑은 항복을 설득하려 했고(비록 곽회는 성공할 것이라고 회의적이었지만), 제갈량과 논쟁을 벌였지만 완패했다.[1] 제갈량은 그를 개와 반역자로 꾸짖었고, 충격을 받은 그는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1] 역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고, 대신 그는 제갈량에게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전해진다.[1] 그 편지는 무시되었다.[1]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태수 중 한 명으로 엄백호와 함께 손책에게 적대하지만 패배한다.[1] 그 과정에서 부하인 우번으로부터 손책과 화평을 맺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격노하여, 우번에게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받고 떠나게 된다.[1] 이후 조조의 중신 중 한 명으로 등장하여, 조비 즉위의 선양극을 주도하는 인물로서 화흠과 함께 암약한다.[1] 또한, 제갈량북벌에서 패배한 하후무 대신 조진을 추천한다.[1] 그리고 조진의 군사로서 7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출진하여 제갈량과 논전을 벌였으나 패배한다.[1] 이때 선양극에 가담했던 과거를 심하게 비난받고, 그 수치심과 충격으로 분사하고 만다.[1]

4. 평가

세설신어에는 왕랑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世說新語|세설신어중국어[10]

조조(曹丕)는 종요, 화흠과 왕랑을 삼공(三公)에 임명한 후 "이 삼공은 당대 최고의 인물이며, 후세에 이를 잇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칭찬했다.[21]

진림장굉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에 있는 왕랑과 그쪽에 있는 당신과 장소는 저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언급했다.[22]

왕침의 魏書|위서중국어에서는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고, 성품이 엄격하며, 예의 바르고 신중하며, 은혜를 잘 베풀고, 약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강자를 비판했다"라고 평가했다. 三國志|삼국지중국어의 편자인 진수는 왕랑을 당대의 뛰어난 인물로 칭송하며, 그의 학식과 문재(文才)를 칭찬했다. 반면에 世說新語|세설신어중국어 덕행편에는, 한 번 목숨을 구해주고 일행에 합류시킨 남성을 버리려다가 화흠에게 꾸짖음을 받은 일화가 실려 있어, 세상에서는 화흠보다 열등하게 여겨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3]

5. 가계

왕랑

6. 저술 활동

왕랑은 유학에 정통하여 『역경』, 『춘추』, 『효경』, 『주례』의 주석을 저술했다. 상소나 논의 등 그의 저술은 모두 세상에 전해졌다. 그는 촉에 있던 옛 지인 허정에게 편지를 보내 제갈량에게 신하로 따르도록 권유해 줄 것을 부탁하려 했지만, 허정이 이미 사망하여 답장을 받지 못했다. 훗날 제갈량은 진군 등 다른 위나라 고관들의 항복 권고 편지와 함께 왕랑의 편지를 묶어 『정의』라는 제목으로 반론을 공표했다.[19]

정시 6년(245년)에는 왕랑의 저서 『역전』이 관료 등용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20]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3
[2]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3
[3]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4] 서적 Sanguozhi vol. 13
[5] 서적 Sanguozhi vol. 60
[6] 서적 Xiand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3
[7] 서적 Sanguozhi vol. 13
[8] 서적 Weilǜe annotation in Sanguozhi, vol.03
[9] 서적 Yizhoushu
[10] 기타 華歆、王朗俱乘船避難、有一人欲依附、歆輒難之。朗曰:「幸尚寬、何為不可?」後賊追至、王欲舍所攜人。歆曰:「本所以疑、正為此耳。既已納其自託、寧可以急相棄邪?」遂攜拯如初。世以此定華、王之優劣。
[11] 서적 三国志「于禁伝」
[12] 서적 資治通鑑
[13] 서적 三国志「許靖伝」
[14] 서적 資治通鑑漢記54
[15] 서적 献帝春秋
[16] 서적 漢晋春秋
[17] 서적 三国志「劉繇伝」
[18] 서적 三国志「文帝紀」
[19] 서적 諸葛亮集 三国志「諸葛亮伝」의 注에 인용
[20] 서적 三国志「斉王紀」
[21] 서적 三国志「鍾繇伝」
[22] 서적 呉書 三国志「張紘伝」의 注에 인용
[23] 기타 ほぼ同じ内容の逸話が、先に華嶠(華歆の孫)の『譜叙』に記されているが、そこには王朗の名はない。
[24] 서적 위서(魏書) 유의경, 《세설신어》 권상지상 덕행 유효표주(劉孝標注)에 인용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