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르지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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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지오 1세는 687년부터 701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태어나 로마로 이주하여 추기경 사제로 활동하다가, 교황 코논의 사망 후 대립 교황과의 경쟁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웨식스의 왕 채드왈라에게 세례를 베풀고, 빌리브로르도를 프리슬란트의 주교로, 베르트왈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서임했다. 또한 퀴니섹스트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갈등을 겪었으며, 701년에 선종하여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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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세르지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교황 성인 |
이름 | 세르지오 1세 |
직함 | 로마 주교 |
교회 | 가톨릭 교회 |
![]() | |
출생 이름 | (정보 없음) |
재임 시작 | 687년 12월 15일 |
재임 종료 | 701년 9월 8일 |
선임자 | 코논 |
후임자 | 요한 6세 |
추기경 서임 | 683년 6월 27일 |
추기경 서임자 | 레오 2세 |
출생일 | 650년경 |
출생지 | 동로마 제국, 시칠리아, 팔레르모 |
사망일 | 701년 9월 8일 (향년 51세) |
사망 장소 | 동로마 제국, 로마 |
이전 직책 | 산타 수산나의 추기경 사제 (683년~687년) |
기타 | 세르지오 |
2. 생애 초기
세르지오 1세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정착한 안티오키아계 시리아인이다.[19][20][21] 교황 아데오다토 2세 재위 시기에 시칠리아를 떠나 로마로 이주하였다. 그는 7세기 중반 칼리파국의 시칠리아 공격으로 인해 로마에 온 많은 시칠리아 성직자 중 한 명이었을 수 있다.[1] 교황 레오 2세는 683년 6월 27일 그를 산타 수산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하였으며,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2][3][13]
687년 9월 21일 교황 코논이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짧은 재위 기간을 마치고 선종하자, 수석부제였던 파스칼은 라벤나 총독 요한네스 2세 플라티누스에게 뇌물을 보내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20][2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수석사제였던 테오도로를 지지하였다. 로마는 파스칼과 테오도로를 지지하는 두 세력으로 나뉘었고, 이들은 무장한 채로 교황의 관저인 라테라노 궁전으로 들어가려다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689년 4월 10일 세르지오 1세는 로마에서 웨식스의 왕 채드왈라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였다. 또한 빌리브로르도를 프리슬란트의 주교로, 베르트왈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서품하였다. 698년에는 옛 아퀼레이아에서 벌어진 삼장서 논쟁을 종식시켰다.[20]
3. 교황 선출
이러한 교착 상태가 지속되자 로마 시민 당국, 군 장교, 성직자, 그리고 다른 시민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옛 로마 황제의 궁전에서 회의를 열고 세르지오 1세를 후임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들은 라테라노 궁전을 급습하여 파스칼과 테오도로에게 세르지오 1세를 새 교황으로 인정하고 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20][21]
테오도로는 굴복하였지만, 파스칼은 겉으로만 굴복하는 척하면서 라벤나 총독에게 밀사를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며 많은 황금을 약속하였다.[21] 라벤나 총독은 로마를 방문하여 세르지오 1세가 정당하게 선출된 교황임을 인정하였지만, 파스칼이 약속했던 황금을 세르지오 1세에게 요구하였다. 결국 687년 12월 15일 세르지오 1세의 착좌식이 거행되었고, 라벤나 총독은 떠났다.
이후 파스칼은 계속해서 교황직을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주술을 거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21] 수도원에 강제로 구금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20][21]
4. 교황
코르소 가도에 있는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의 부제단을 설립하고,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성당을 복원하여 아름답게 장식하였다.[21]
세르지오 1세는 692년 퀴니섹스트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공의회의 규정을 무효라고 선언하며 "잘못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비록 동로마 제국의 충실한 신하였지만,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그 포로"가 되려 하지 않았다. 특히 교황 호노리우스 1세의 파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에 이어 두 번째라는 선언 등에 반대했다. 또한 퀴니섹스트 공의회가 사도 규정 85개 모두를 승인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세르지오 1세는 처음 50개만 지지)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성직자 독신에 대한 동방과 서방의 태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였는데, 공의회는 결혼한 남자가 사제가 될 권리를 확인하고 성직자를 아내와 분리하려는 시도에 대해 파문을 규정했다. 세르지오는 미사 중 성체 분배 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찬송가를 전례에 도입했다.
격분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는 세르지오 1세를 체포하려 했으나, 라벤나 총독과 펜타폴리스 공작의 민병대가 그 시도를 좌절시켰다.[3][15] 세르지오 1세는 반(反) 비잔틴 정서를 이용하기보다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4. 1. 퀴니섹스트 공의회 반대
69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컸던 퀴니섹스트 공의회(트룰로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나, 세르지오 1세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22] 세르지오 1세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법령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반대하였으며, 오류가 있는 법령에 동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천명했다.[21][22]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전례 양식과 성직자 양성 등 기존의 교회 관행들을 단일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여러 가지 규정을 제정해 법제화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동방 교회의 성직자들로만 구성되었던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모든 것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관행을 중심으로 삼았다.[24] 특히 사제와 부제의 독신 생활과 관련해서 서방 교회와 다른 사고방식을 보였다.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기혼자도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누구든지 성직자를 그의 아내와 갈라놓으려 하거나, 어느 성직자든 간에 자신의 아내를 버리려 할 경우에는 파문에 처한다는 규정을 제정하였다.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세르지오 1세는 대중을 위해서는 상징적인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미사 중 성체를 쪼갤 때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성가로 부를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안마당에 있는 어린 양으로 묘사된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장면을 담은 모자이크를 복원하도록 지시하였다.[21]
4. 1. 1.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
692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주도로 열린 트룰로 공의회(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결정된 조항에 서명하도록 명령했다. 이 조항은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고, 기독교회는 동방을 중심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지오 1세는 이 조항을 거부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자카리아스에게 군대를 보내 압력을 가했지만, 라벤나 총독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695년 레온티오스의 쿠데타로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폐위되면서 양측의 대립은 해소되었다.
5. 죽음
세르지오 1세는 701년 9월 8일 선종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요한 6세가 즉위하였다.[17]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9월 8일이다.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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