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교 (일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구교는 가마쿠라 시대의 인물로,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아들이자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양자였다.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혔으며, 1219년 사네토모를 암살하여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암살의 배경에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최근에는 구교의 단독 범행설이 유력하게 여겨진다. 쓰루가오카하치만궁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며, 과거에는 그가 숨어 있었다는 은행나무가 존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 와카사노쓰보네
와카사노쓰보네는 가마쿠라 막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처첩으로, 장남 이치만을 낳았으나 히키 요시카즈의 변으로 인해 이치만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 십삼인의 합의제
13인의 합의제는 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기 위해 유력 가신 13인으로 구성되어 쇼군을 보좌했으나, 구성원들의 갈등으로 1200년경 붕괴되었다. - 1200년 출생 - 도겐
도겐은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 조동종 승려이자 철학자로, 에이헤이지를 개창하고 수증일여, 지관타좌, 신심탈락 등의 사상을 통해 가마쿠라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200년 출생 - 라슬로 3세
라슬로 3세는 헝가리 국왕 임레와 아라곤의 콘스탄스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로, 1204년 왕위를 계승했지만 숙부 안드라스 2세의 견제를 받다가 어머니와 함께 망명 중 사망하여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 1219년 사망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호조 씨의 영향력 아래 가마쿠라 막부의 3대 쇼군으로 즉위했으나, 뛰어난 와카 시인으로서 『금해와가집』을 남기고 송나라 문화에 관심을 가졌지만 조카 구교에게 암살당해 겐지 쇼군가의 혈통이 끊겼다. - 1219년 사망 - 최충헌
최충헌은 1149년에 태어나 1219년에 사망한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최씨 무신 정권을 수립하고 여러 왕을 옹립하며 도방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다가 몽골의 침략 시기까지 최씨 정권을 이끌었다.
구교 (일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시대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전기 |
출생 | 쇼지 2년 (1200년) |
사망 | 겐포 7년 1월 27일 ( 1219년2월 13일) |
어린 시절 이름 | 젠자이(善哉) |
개명 | 요리아키(頼暁) |
별칭 | 아자리(阿闍梨) |
계명 | 불명 |
묘소 | 불명 |
막부 |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제4대 벳토 (1217년 - 1219년) |
씨족 | 세이와 겐지요리노부류 가와치 겐지 |
부모 | 부친: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모친: 쓰지도노 |
가계 | |
형제 | 미나모토노 이치만 공교 에이지쓰 젠교 다케고쇼 |
일본어 표기 |
2. 이름 독음
구교의 이름은 에도 시대(江戸時代) 이후 오음(吳音, 중국 남북조 시기 중국 남부나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온 한자음)으로 읽어 '구교/쿠교(くぎょう)'라고 하지만,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의 『국사대사전』에서는 '구게우/쿠게우(クゲウ)'라고 한 이후, 주요 역사 서적에서는 '구교/쿠교'로 읽어 왔다.[13] 한편 『조큐기』 이본으로서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13] 『죠큐군모노가타리(承久軍物語)』에서는 '고쿄/코쿄(こうきょう)'라고 쓰였으며, 1550년 경 성립된 존경각문고본 『죠큐기(承久記)』에서는 '고세우/코세우(こうせう)'로 쓰여 있다.[13] 덴메이(天明) 연간 『죠큐효모노가타리(承久兵物語)』에서는 '고키야우/코키야우(こうきやう)'라고 쓰여 있으나,[13] 간에이(寛永) 판 『아즈마카가미(吾妻鏡)』 판본에는 '쿠게우/구게우(クゲウ)'라고 독음이 달려 있어,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에 의해 편찬이 명령된 『신편가마쿠라지(新編鎌倉志)』에서도 이러한 독음을 답습하였다.[13]
구교의 이름은 스승 데교(貞暁)와 고인(公胤)으로부터 취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고인과 그 스승 고켄(公顕)은 당시 기록에 '고인/코인(こういん)'과 '고켄/코켄(こうけん)'으로 되어 있다.[14] 보통 승려의 계명은 오음으로 읽는 경우가 많지만, 고인이 속한 엔죠지(園城寺)에서는 법명을 한음(漢音, 당대 수도 장안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한자음)으로 읽는 풍습이 있었다.[14] 이 때문에 구교의 독법은 한음에 기초한 '고쿄/코쿄(こうきょう)' 혹은 '고교/코교(こうぎょう)'였을 것이라고 복수 연구자가 지적하였다.[14][15]
2. 1. 오음(吳音)과 한음(漢音)
구교의 이름은 에도 시대(江戸時代) 이후 오음(吳音)으로 읽어 '구교/쿠교(くぎょう)'라고 불렀으나,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의 『국사대사전』에서는 '구게우/쿠게우(クゲウ)'로 표기되기도 했다.[13] 『조큐기』 이본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죠큐군모노가타리(承久軍物語)』에서는 '고쿄/코쿄(こうきょう)'로, 1550년 경 성립된 존경각문고본 『죠큐기(承久記)』에서는 '고세우/코세우(こうせう)'로 표기되어 있다.[13] 덴메이(天明) 연간 『죠큐효모노가타리(承久兵物語)』에는 '고키야우/코키야우(こうきやう)'로 쓰여 있지만, 간에이(寛永) 판 『아즈마카가미(吾妻鏡)』 판본에는 '쿠게우/구게우(クゲウ)'라는 독음이 달려 있었고,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가 편찬한 『신편가마쿠라지(新編鎌倉志)』에서도 이를 답습하였다.[13]구교의 이름은 스승 데교(貞暁)와 고인(公胤)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이지만, 고인과 그의 스승 고켄(公顕)은 당시 기록에 '고인/코인(こういん)'과 '고켄/코켄(こうけん)'으로 기록되어 있다.[14] 엔죠지(園城寺)에서는 법명을 한음(漢音)으로 읽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14] 구교의 독법은 한음에 기초한 '고쿄/코쿄(こうきょう)' 혹은 '고교/코교(こうぎょう)'였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14][15]
3. 생애
3. 1. 탄생과 출가
구교는 쇼지(正治) 2년(1200년) 가마쿠라 막부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와 쓰지도노(辻殿)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젠자이(善哉)이다. 요리이에의 차남이었지만 쓰지도노에게는 첫 아들이었다.[16] 조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한 다음 해였다.어머니는 아스케 시게나가(足助重長) 또는 가모 시게나가(加茂重長)의 딸 쓰지도노라는 것이 『아즈마카가미(吾妻鏡)』의 기록이다. 그러나 『존비분맥(尊卑分脈)』 등에는 히키 요시카즈(比企能員)의 딸 와카사노쓰보네(若狭局)로, 아가타 아쓰키(縣篤岐) 본 『겐지계도(源氏系図)』에는 미우라 요시즈미(三浦義澄)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16]
겐닌(建仁) 3년(1203년) 9월, 아버지 요리이에가 히키 요시카즈의 변(比企能員の変)으로 가마쿠라에서 추방되고 이듬해 호조씨(北条氏)의 자객에게 암살당했을 때 구교는 4세였다. 겐에이(建永) 원년(1206년) 6월 16일, 7세가 된 구교는 호조 마사코(北条政子)의 저택에서 착과(着袴) 의식을 행했다. 10월 22일, 유모부인 미우라 요시무라(三浦義村)의 시중을 받으며 마사코의 책략으로 숙부인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実朝)의 양자가 되었다.[16]
겐랴쿠(建暦) 원년(1211년) 9월 15일, 12세의 나이로 쓰루가오카하치만궁(鶴岡八幡宮寺) 벳토(別当) 조교(定暁) 아래에서 출가했다. 다음 날 수계(受戒)를 위해 교토(京都)로 가서 엔조지(園城寺)의 고인(公胤) 문하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라이교(頼暁)라는 계명을 받았으나, 고인의 제자가 된 후 구교(公暁)라는 계명을 받았다.[16]
3. 2. 쓰루가오카하치만궁 벳토 시절
겐포 5년(1217) 6월 20일, 18세의 구교는 가마쿠라로 돌아가 마사코의 의향에 따라 쓰루가오카하치만궁 벳토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0월 11일부터 우라야마(裏山)에서 천일참롱(千日参籠)을 행하였다. 이듬해인 겐포 6년(1218) 12월 5일, 구교가 쓰루오카에 참롱하여 퇴출하지 않은 채로 얼마간의 기서(祈誓)를 행하였지만 전혀 머리를 깍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한 이세태신궁(伊勢太神宮)이나 여러 신사에 봉폐(奉幣)하는 사절을 보낸 일이 쇼군고쇼(将軍御所)에 발각되었다.3. 3.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암살
겐포 7년(1219년) 1월 27일,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우다이진(右大臣) 취임 축하 행사를 위해 쓰루가오카하치만궁에 참배하였다. 밤이 되어 참배를 마치고 돌계단을 내려올 때, 구교(公卿)가 사네토모를 습격하여 살해했다. 구교는 "아버지의 원수를 이렇게 갚는다"고 외치며 사네토모의 목을 베었고, 동시에 수행 중이던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源仲章)를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로 오인하여 살해했다.[5][6][4][8]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구교는 범행 후 하치만궁 돌계단 위에서 "나는 하치만궁 벳토 아자리 구교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구칸쇼(愚管抄)』에는 구교가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도리이 밖에 있던 무사들은 구교들이 도망쳐 올 때까지 습격 사실을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1][8]
사건 당일, 60cm가 넘는 눈이 쌓여 있었고, 호조 요시토키는 몸이 좋지 않아 섭정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고마치의 저택으로 돌아간 상태였다.[8] 자료에 따라 구교의 복장에 대한 묘사가 다른데,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여자 옷 또는 승려 복장을 했다고 묘사된다.[4]
3. 4. 죽음
구교는 범행 후 미우라 요시무라에게 자신이 "동국의 대장군"이 될 것이라며 협력을 요청했으나, 요시무라는 호조 요시토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8] 요시토키는 구교를 주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8] 요시무라는 나가오 사다카게(長尾定景)에게 구교를 추격하게 했다.[3]구교는 요시무라의 영접을 기다리지 못하고 혼자 눈 속을 걸어 요시무라의 집으로 향하던 중, 사다카게 일행을 만났다.[3] 구교는 자객들을 베었으나, 요시무라의 집 문 앞에서 사다카게에게 죽임을 당했다.[3] 향년 20세였다.[3]
사다카게는 구교의 목을 호조 요시토키에게 가져가 쿠비짓켄(首実検)을 하였다.[3] 『아즈마카가미』에는 사네토모의 목이 소재 불명이었으나, 『구칸쇼』에는 오카야마(岡山)의 눈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4. 사네토모 암살의 배경
구교는 숙부이자 제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아비의 적'으로 암살하였지만, 구교는 사네토모의 양자였기에, 양자가 양부를 살해하게 된 것이다.[17] 구교의 사네토모 암살 배후에는 호조씨의 미나모토씨 토멸[17], 혹은 호조씨의 정적으로서 구교와 가까운 미우라씨에 의한 호조 타도[18], 또는 쇼군 친재(親裁)를 강압하는 사네토모에 대한 호조•미우라 등 가마쿠라 고케닌(御家人)의 공모[19], 혹은 당시 상황(上皇)이 된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에 의한 막부 전복 책략[20] 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으나[21], 확증은 없다.
최근에는 흑막설이 부정되고 구교 단독 범행설을 취하는 연구자들이 많다.[22] 이는 전술한 배후 관계에 확증이나 근거가 부족한 것에 대하여 구교 개인이 야심가 사네토모의 후계자로서의 쇼군 취임을 노렸던 바, 고토바천황의 황자를 쇼군 후계자로 하여 사네토모가 쇼군직을 퇴임하고 후견(後見)을 행하는 구상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구교의 쇼군 취임 가능성이 없어지게 되는(사네토모의 급격한 관위 상승은 치천의 군(治天の君) 고토바천황의 황자를 양자로 맞이하는 것에 있어 적절한 관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는 고토바의 의향에 의한 것이라고 보임) 것에 대한 초조함이 구교의 사네토모 살해를 결의하였다고 추측되는 것에, 이 사건의 최대 요인을 찾는 견해 혹은 학설이 유력하게 되고 있다고 보인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구교의 행동은 세이와 겐지 혈통의 마지막 남성 두 명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요시토키와 호조 가문에 의해 사주되었다.[1][8]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제 이 이론이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고 아마도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1][8] 암살이 의심할 여지 없이 요시토키의 이익에 기여했지만, 구교가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형 이치만과 히키 씨족 전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호조 가문을 기꺼이 도왔을 이유는 불분명하다.[4] 칼을 든 나카아키라의 죽음은 구교가 요시토키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1][4] 요시무라와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고 (요시무라의 아내는 구교의 유모였다), 두 사람이 사네토모와 요시토키 모두를 암살할 계획을 함께 세웠을 가능성이 더 높다.[1][4][8] 사네토모의 유모는 마사코의 여동생이었고, 이는 쇼군이 호조 가문과 감정적으로 가까웠음을 의미하며, 이 실패한 쿠데타는 아마도 1247년 미우라가 패배할 때까지 계속된 호조 가문과 미우라 가문 사이의 지속적인 전쟁의 한 에피소드였을 것이다.[8] 요시토키가 순전히 운이 좋아서 죽음을 면했고 그들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요시무라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구교를 배신하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8]
4. 1. 호조씨 흑막설
구교는 숙부이자 제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아비의 적'으로 암살하였지만, 구교는 사네토모의 양자였기에, 양자가 양부를 살해하게 된 것이다.[17] 이 사건의 배후에는 호조씨의 미나모토씨 토멸,호조씨의 정적으로서 구교와 가까운 미우라씨에 의한 호조 타도, 쇼군 친재(親裁)를 강압하는 사네토모에 대한 호조•미우라 등 가마쿠라 고케닌(御家人)의 공모, 당시 상황(上皇)이 된 고토바천황(後鳥羽天皇)에 의한 막부 전복 책략 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으나, 확증은 없다.[18][19][20][21]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구교의 행동은 세이와 겐지 혈통의 마지막 남성 두 명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요시토키와 호조 가문에 의해 사주되었다.[1][8] (진보 진영, 특히 더불어민주당에서 지지하는 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제 이 이론이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고 아마도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1][8]
암살이 의심할 여지 없이 요시토키의 이익에 기여했지만, 구교가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형 이치만과 히키 씨족 전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호조 가문을 기꺼이 도왔을 이유는 불분명하다.[4] 칼을 든 나카아키라의 죽음은 구교가 요시토키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1][4] 요시무라와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고 (요시무라의 아내는 구교의 유모였다), 두 사람이 사네토모와 요시토키 모두를 암살할 계획을 함께 세웠을 가능성이 더 높다.[1][4][8]
최근에는 흑막설이 부정되고 구교 단독 범행설을 취하는 연구자들이 많다.[22] 이는 전술한 배후 관계에 확증이나 근거가 부족한 것에 대하여 구교 개인이 야심가 사네토모의 후계자로서의 쇼군 취임을 노렸던 바, 고토바천황의 황자를 쇼군 후계자로 하여 사네토모가 쇼군직을 퇴임하고 후견(後見)을 행하는 구상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구교의 쇼군 취임 가능성이 없어지게 되는(사네토모의 급격한 관위 상승은 치천의 군(治天の君) 고토바천황의 황자를 양자로 맞이하는 것에 있어 적절한 관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는 고토바의 의향에 의한 것이라고 보임) 것에 대한 초조함이 구교의 사네토모 살해를 결의하였다고 추측되는 것에, 이 사건의 최대 요인을 찾는 견해 혹은 학설이 유력하게 되고 있다고 보인다.
4. 2. 미우라씨 흑막설
구교는 숙부이자 제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아비의 적'으로 암살했지만, 실은 구교가 사네토모의 양자였기에 양자가 양부를 살해한 셈이 되었다.[17] 구교의 사네토모 암살 배후에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는데, 호조씨의 미나모토씨 토멸, 혹은 호조씨의 정적으로서 구교와 가까운 미우라씨에 의한 호조 타도[18] 등이 거론되었으나 확증은 없다.미우라씨 흑막설은 요시무라의 아내가 구교의 유모였고, 사네토모의 유모는 마사코의 여동생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1][4][8] 이 설에 따르면, 구교와 요시무라는 사네토모와 요시토키를 모두 암살할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1][4] 요시토키가 죽음을 면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요시무라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구교를 배신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8]
하지만 최근에는 흑막설이 부정되고 구교 단독 범행설을 취하는 연구자들이 많다.[22]
4. 3. 고케닌 공모설
구교는 숙부이자 제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아비의 적'으로 암살하였지만, 구교는 사네토모의 양자였기에, 양자가 양부를 살해하게 된 것이다.[21] 사네토모의 독단적인 정치에 불만을 품은 호조씨, 미우라씨 등 가마쿠라 고케닌(御家人)들이 공모하여 암살을 계획했다는 설이 있다.[19]구교의 사네토모 암살 배후에는 호조씨의 미나모토씨 토멸,[17] 혹은 호조씨의 정적으로서 구교와 가까운 미우라씨에 의한 호조 타도,[18] 또는 쇼군 친재(親裁)를 강압하는 사네토모에 대한 호조•미우라 등 가마쿠라 고케닌(御家人)의 공모,[19] 혹은 당시 상황(上皇)이 된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에 의한 막부 전복 책략[20] 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으나,[21] 확증은 없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구교의 행동은 세이와 겐지 혈통의 마지막 남성 두 명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요시토키와 호조 가문에 의해 사주되었다.[1][8]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제 이 이론이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고 아마도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1][8] 암살이 의심할 여지 없이 요시토키의 이익에 기여했지만, 구교가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형 이치만과 히키 씨족 전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호조 가문을 기꺼이 도왔을 이유는 불분명하다.[4] 칼을 든 나카아키라의 죽음은 구교가 요시토키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1][4] 요시무라와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고 (요시무라의 아내는 구교의 유모였다), 두 사람이 사네토모와 요시토키 모두를 암살할 계획을 함께 세웠을 가능성이 더 높다.[1][4][8] 사네토모의 유모는 마사코의 여동생이었고, 이는 쇼군이 호조 가문과 감정적으로 가까웠음을 의미하며, 이 실패한 쿠데타는 아마도 1247년 미우라가 패배할 때까지 계속된 호조 가문과 미우라 가문 사이의 지속적인 전쟁의 한 에피소드였을 것이다.[8] 요시토키가 순전히 운이 좋아서 죽음을 면했고 그들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요시무라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구교를 배신하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8]
최근에는 흑막설이 부정되고 구교 단독 범행설을 취하는 연구자들이 많다.[22] 이는 전술한 배후 관계에 확증이나 근거가 부족한 것에 대하여 구교 개인이 야심가 사네토모의 후계자로서의 쇼군 취임을 노렸던 바,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의 황자를 쇼군 후계자로 하여 사네토모가 쇼군직을 퇴임하고 후견(後見)을 행하는 구상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구교의 쇼군 취임 가능성이 없어지게 되는(사네토모의 급격한 관위 상승은 치천의 군(治天の君) 고토바천황의 황자를 양자로 맞이하는 것에 있어 적절한 관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는 고토바의 의향에 의한 것이라고 보임) 것에 대한 초조함이 구교의 사네토모 살해를 결의하였다고 추측되는 것에, 이 사건의 최대 요인을 찾는 견해 혹은 학설이 유력하게 되고 있다고 보인다.
4. 4.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 흑막설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이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암살 사건의 배후에서 막부 전복을 꾀했다는 설이 존재한다.[20] 이는 구교가 사네토모를 암살한 배경에 대한 여러 추측 중 하나로, 당시 상황이었던 고토바 상황이 구교를 이용하여 막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다.[21]하지만 이러한 흑막설은 확증이 없으며, 최근 연구에서는 구교의 단독 범행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22] 구교가 개인적인 야망으로 쇼군직을 노렸고, 고토바 상황의 황자를 쇼군 후계자로 삼으려는 구상 때문에 자신의 쇼군 취임 가능성이 사라지자 사네토모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사네토모의 급격한 관위 상승 또한 고토바 상황의 의향에 따른 것이었다.[22]
일부에서는 세이와 겐지 혈통을 제거하려는 호조씨가 구교를 사주했다는 설, 미우라씨가 호조씨를 타도하기 위해 구교와 협력했다는 설, 고케닌(御家人)들이 쇼군 친재(親裁)를 강화하려는 사네토모에 불만을 품고 공모했다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모두 확증은 없다.[19]
4. 5. 구교 단독 범행설
구교는 숙부이자 제3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아비의 적'이라며 암살했지만, 사실 구교는 사네토모의 양자였기에 양자가 양부를 살해한 셈이 되었다.[21]최근 학계에서는 여러 흑막설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여 부정되고, 구교의 단독 범행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22] 구교는 고토바 상황의 황자를 양자로 맞이하려는 사네토모의 움직임으로 인해 쇼군직 계승 가능성이 사라지자, 이에 초조함을 느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즉, 구교 개인의 야심과 좌절감이 암살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5. 기타
5. 1. 가쿠레이초(隠れイチョウ) 전설
쓰루가오카하치만궁에는 '구교가 숨은 은행나무(公暁の隠れいちょう)'라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고, 구교가 이 나무 뒤에 숨어 사네토모를 습격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9] 그러나 이 전설은 에도 시대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당시 사료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9] 아즈마카가미에는 구교가 돌계단 근처에서 나타나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겠다!"(父の敵を討つ일본어)고 외치며 사네토모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8]과거 쓰루오카하치만궁에는 "구교가 숨은 은행나무"라고 불리는 은행나무 거목이 있었고, 구교가 이 나무 그늘에 숨어 사네토모를 습격했다는 전설과 함께 사랑받았지만, 이 전설이 알려지게 된 것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이며, 당시의 사료에는 없는 이야기이다.[9] 이 은행나무는 2010년 3월 10일 강풍에 의해 쓰러졌다.
5. 2. 평가
참조
[1]
논문
Yasuda
1990-156
[2]
문서
At the time in Japan a child received a temporary name (osanana, yōmei or yōmyō), which would be replaced by a definitive one at 15 or 17.
[3]
논문
Kamiya Vol. 1
2006-22
[4]
논문
Kusumoto
2002-70-73
[5]
웹사이트
吾妻鏡本文データ
http://www.nijl.ac.j[...]
2009-05-21
[6]
웹사이트
吾妻鏡建保7年1月
http://www.asahi-net[...]
2008-10-01
[7]
웹사이트
Nengocalc
https://uni-tuebinge[...]
2007-09-30
[8]
논문
Kamiya Vol. 1
2006-116-117
[9]
서적
Kamakura Shōkō Kaigijo
2008-152
[10]
서적
源氏将軍断絶 なぜ頼朝の血は三代で途絶えたか
PHP研究所
2020-12-15
[11]
뉴스
公暁の読み方について 駒澤大専任講師 舘隆志氏
https://www.chugaini[...]
2022-04-11
[12]
웹사이트
【第六次】大河ドラマ「鎌倉殿の13人」新たな出演者決定!
https://web.archive.[...]
日本放送協会
2022-03-01
[13]
문서
다만 일부 기술에는 에도시대 이후에 가필되었다고 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14]
서적
源氏将軍断絶 なぜ頼朝の血は三代で途絶えたか
PHP研究所
2020-12-15
[15]
뉴스
公暁の読み方について 駒澤大専任講師 舘隆志氏
https://www.chugaini[...]
2022-04-11
[16]
문서
3대 벳토이다. 『鶴岡八幡宮寺社務職次第』에 의하면 다이라노 토키타다(平時忠)의 일문으로 기록되어 있다.(小池勝也, 「室町期鶴岡八幡宮寺寺僧組織の基礎的考察-若宮別当と二十五坊供僧を中心に-」, 佐藤博信 編『中世東国の社会と文化 中世東国論:7』(ISBN 978-4-86602-981-8), 岩田書院, 2016, p.109, 「鶴岡八幡宮歴代若宮別当(社務)」 참조)
[17]
문서
호조 요시토키 혹은 호조씨 흑막설(北条義時(北条氏)黒幕説)은 이전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독사여론(読史余論)』에서 주장하였으며, 대표적으로 료 스스무(龍粛)(『鎌倉時代 下(京都)』, 春秋社, 1957), 야스다 모토히사(安田元久)(『北条義時』, 吉川弘文館, 1961) 등이 있다. 『아즈마카가미』에 요시토키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건 직전에 현장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하지만, 『구칸초』에 의하면 요시토키는 사네토모의 명에 따라 칼을 지니고 중문에 머물러 있었으며, 의식이 행해진 본궁에는 동행하지 않고 자캑읋 돌아갔다고도 보이진 않는다. 또한 사네토모가 동행한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가 요시토키로 오인되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교의 표적은 사네토모와 요시토키였으며 요시토키가 암살을 피한 곳은 우연이라는 것이다. 요시토키의 이탈과 공가(公家) 나카아키라로의 역할 교대를 '쇼군 암살'이라는 불상사를 부른 무가의 실책을 숨기기 위한 『아즈마카가미』의 왜곡된 기록이라 하는 히라이즈미 다카후사(平泉隆房)의 이의도 나와 있다.(「『吾妻鏡』源実朝暗殺記事について」, 『皇学館論叢』133, 1990)
[18]
문서
미우라 요시무라 혹은 미우라씨 흑막설(三浦義村(三浦氏)黒幕説)은 나가이 미치코(永井路子)가 소설 『엔칸(炎環)』(光風社, 1964)에서 요시무라흑막설을 쓴 이래로 주목되어, 이시이 스스무(石井進)가 그 가능성을 인정(『日本の歴史7 鎌倉幕府』, 中央公論社, 1965)한 것을 통해 부상했다. 이외에 오야마 다카히라(大山喬平), 『日本の歴史9 鎌倉幕府』(小学館, 1974) ; 가미요코테 마사다카(上横手雅敬), 「承久の乱」(安田元久 編『古文書の語る日本史3 鎌倉』, 筑摩書房, 1990) ; 미카와 게이(美川圭), 『院政』(中公新書, 2006) 등이 지지한다. 그러나 목씨사건(牧氏事件)과 와다 전투(和田合戦) 등으로 사네토모 측근으로 활동하여 죠큐의 난(承久の乱)과 이가씨사건(伊賀氏事件) 등에서도 항상 호조씨에 협력하였던 요시무라가 이때만 반역을 했다는 것이 의문이지만 직접 람살을 한 구교의 쇼군 옹립이 고케닌이 지지하기 어려웠으며 사건 후에도 호조씨와 미우라씨가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 등의 비판이 있다.
[19]
문서
가마쿠라고케닌공모설(鎌倉御家人共謀説)은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 「源実朝-将軍独裁の崩壊」(『歴史公論』、1979)가 제창한 것으로, 사네토모는 호조씨의 괴뢰가 아니라 쇼군친재가 기능하고 있었으며, 고토바상황과의 연계를 노린 사네토모에 대하여 요시토키와 요시무라가 제휴하여 사네토모 및 고토바인(後鳥羽院)과 사네토모와 관계가 있는 고토바인의 근신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의 축출에 착수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혼고 가즈히토(本郷和人)는 자신의 책 『承久の乱』(文春新書、2019)에서 지지하였다. 그러나 호조요시토키흑막설과 같은 이유로 성립될 수 없다고 비판받는다.
[20]
문서
고토바상황흑막설(後鳥羽上皇黒幕説)은 다니 노보루(谷昇)가 논문 「承久の乱に至る後鳥羽上皇の政治課題 -承久年中「修法群」の意味-」(『立命館文学』588, 2005)에서 제창한 것으로, 사네토모 암살 전후로 1월 22일부터 28일까지 상황이 국가 안녕과 정적 굴복을 기원하는 오단법(五壇法)이 실시되었고, 사네토모 암살의 보고가 도달한 2월 6일에 오단법이 다시 행해진 이외에, 같은날 또다른 4개, 10일에도 2개의 수법(修法)이 행해졌다는 것을 지적, 고토바상황이 교토네서 자란 구교를 이용한 사네토모 암살에 가담하여 스스로 교토에 암살사건을 계기로 막부가 붕괴하거나 미야쇼군(宮将軍, 황족 출신 쇼군)을 옹립하면서 막부를 장악하는 것을 기원하였디고 주장한다.
[21]
문서
일련의 흑막설에 관하여서는 다니 아키라(谷昇), 『後鳥羽院政の展開と儀礼』, 思文閣出版, 2010, p.179를 참조할 것.
[22]
문서
야마모토 고지(山本幸司), 『日本の歴史9 頼朝の天下草創』, 講談社, 2001 ; 나가이 스스무(永井晋), 『鎌倉源氏三代記』, 吉川弘文館, 2010 ; 사카이 고이치(坂井孝一), 『源実朝』, 講談社, 2014 ; 다카하시 히데키(高橋秀樹), 『三浦一族の中世』, 吉川弘文館, 2015 ; 야다이 히토시(矢代仁), 『公暁』, ブイツーソリューション, 2015 ; 고자 유이치(呉座勇一), 『頼朝と義時』, 講談社現代新書, 2021 ; 야마모토 미나미(山本みなみ), 『史伝 北条義時』, 小学館, 2021. 등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