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삼인의 합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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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인의 합의제는 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쇼군으로 즉위한 후, 요리이에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기 위해 유력 가신 13인으로 구성된 협의체이다. 13인의 합의제는 요리이에의 친재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구성원들의 사망과 권력 투쟁으로 인해 1200년경 붕괴되었고, 이후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은 호조 씨를 중심으로 한 싯켄 정치 체제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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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삼인의 합의제 | |
---|---|
개요 | |
명칭 | 십삼인합의제 (十三人合議制) |
로마자 표기 | Jūsan'nin Hyōgijō |
종류 | 정치 체제 |
시대 | 가마쿠라 시대 말기 ~ 무로마치 시대 초기 |
존속 기간 | 1324년 ~ 1333년 |
주체 | 가마쿠라 막부 |
목적 | 정치 개혁 및 권력 분점 |
배경 | |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 | 몽골의 일본 원정 이후 재정 악화 아다치 야스모리의 난 이후 도쿠소 전제 정치 강화 |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 계획 | 막부 타도 및 천황 중심 정치 복귀 시도 |
설립 및 구성 | |
설립 시기 | 가마쿠라 막부 말기, 가마쿠라 시대 |
설립 주도 인물 | 도쿠소 호조 다카토키 |
구성원 | 호조 히데토키 호조 사다아키 호조 모토토키 호조 이에토키 호조 오키토키 나가사키 엔키 아다치 도키아키 니카이도 사다후지 다이부쓰 무네요리 히라코바 야스시게 유키나가 토키미츠 오다 사다타카 도키 요리마사 |
구성 특징 | 호조 씨 일족 및 측근 중심 |
주요 활동 및 한계 | |
정치 개혁 시도 | 겐코의 변 이후 고다이고 천황의 유배 새로운 천황 옹립 시도 |
권력 분점 시도 | 호조 씨 내부 권력 다툼 심화 실질적인 권력 분점 실패 |
사회 혼란 심화 | 민중 봉기 및 사회 불안 증가 막부의 통제력 약화 |
멸망 | |
멸망 시기 | 겐코 3년 (1333년) |
멸망 원인 | 고다이고 천황의 재봉기 및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의 활약 아시카가 다카우지 및 닛타 요시사다 등의 막부 이반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
역사적 평가 | |
긍정적 평가 |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를 막기 위한 자구책 시도 |
부정적 평가 | 호조 씨 중심의 권력 독점 심화 사회 혼란 가중 및 막부 멸망 가속화 |
2. 연혁
1199년(쇼지 원년) 음력 1월 13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장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음력 1월 20일 18세의 나이로 좌중장에 오르고 정무 총책임을 맡았다.[1] 음력 1월 26일에는 교토 조정에서 제국 수호의 선지가 내려와 요리이에는 아버지 요리토모를 이어 제2대 가마쿠라도노가 되었다.
13인의 합의제는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소송을 직접 처리하는 것을 중지하고, 호조 도키마사 등 13인의 합의를 통해 처리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는 요리이에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10]
13인의 합의제 구성원은 호조 씨를 비롯한 유력 고케닌과 교토에서 내려온 문관들로 구성되었다.
요리이에는 산자에몬 사건 등으로 막부 공신(고케닌)들의 힘을 빌려야 했고,[1] 초기에는 강력한 권력을 갖지 못해 오에노 히로모토 등 중신들의 보좌를 받아서만 주요 사안을 처리해야 했다.[2]
음력 4월 12일, 요리이에의 독단적인 정무적 결단이나 판결은 부정되었다. 결국 당시 유력 공신 13인의 협의를 통해 모든 정치적·법적 판단이 내려지게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이야기 모음집인 '아즈마카가미'에는 요리이에가 관습을 무시하고 권한을 남용한 여러 일화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은 반정 공신들이 요리이에를 제거한 후 작성한 것이라 역사적 중립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요리이에를 옹립하고 큰 권력을 갖게 된 오에노 히로모토, 나카하라노 지카요시(中原親能), 가지와라 가게토키(梶原景時) 등이 다른 공신 집안들의 불만[3]을 잠재우는 동시에 요리이에의 독재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13인 전원이 따로 회의를 가진 적이 없고, 수 명의 회의 참석만으로 일단 논의를 해 결과를 요리이에에게 상주하면 요리이에가 장군으로서 재가를 내리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점을 볼때, 13인의 합의제는 세이이대장군의 보좌역이 주기능일 뿐, 독립되어 따로 명명된 기관은 아니었다는 견해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1199년(쇼지 원년) 말, 합의제 구성원 중 하나인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숙청되었다. 이듬해인 1200년(쇼지 2년)에 아다치 모리나가(安達盛長)와 미우라 요시즈미(三浦義澄)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합의제는 붕괴되었다. 막부 공신들의 권한이 강해지고 요리이에의 외척인 호조씨가 발흥하면서 요리이에 정권 자체도 권력 투쟁 속에 몰락해 갔다.
3. 합의제의 실제
하지만, 이 제도가 요리이에의 친재(親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숙로(宿老)들의 합의를 거쳐 요리이에가 최종 판단을 내리는 방식을 취했다.[10] 이는 소송 중개 기능을 13인으로 한정하고, 몬추조 개설 및 기능 확대, 마사도코로 정비 등 소송 기구를 정비하여 젊은 요리이에의 권력을 보완하는 체제를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10][11]
1200년 무쓰국 신구마노사령의 사카이 소송에서 요리이에가 "암군"적인 판결을 내렸다는 기록이 아즈마카가미에 남아있다.[10] 그러나 실제로는 요리이에가 영주의 주장을 인정하거나 지토의 진술을 참작하여 지토 보임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결정임을 확인하고, 지토에게 부당한 행위가 없음을 근거로 영주 측의 요구를 각하하는 등 나름대로의 판단을 행하였다.[10]
요리이에는 무쓰·데와국 지토의 소무는 요리토모의 결정과 같이 후지와라 씨 시대의 규정을 지키도록 명하고, 사카이 소송 등의 분쟁을 "비론"(非論)으로 억제하였다.[10] 즉, 요리이에는 분쟁을 억제하고 요리토모 시대의 결정을 준수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10]
4. 구성원 목록
출자 인명 생몰년 역직 비고 호조 씨 호조 도키마사 호엔4년(1138년) - 겐포3년(1215년) 이즈・스루가・도토미 수호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외조부. 겐큐2년(1205년)에 추방(마키 씨 사건) 호조 요시토키 초겐원년(1163년) - 겐닌원년(1224년) 침소 경호중(이에고) 호조 도키마사의 아들. 요리이에의 숙부. 그 외 유력 고케닌 히키 요시카즈 ? - 겐닌3년(1203년) 시나노・고즈케 수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유모(히키 니)의 양자, 요리이에의 유모부, 장인. 피살(히키 요시카즈의 변). 와다 요시모리 큐안3년(1147년) - 겐랴쿠3년(1213년) 사무라이도코로벳토 미우라 요시즈미의 조카. 요절(와다 전투). 가지와라 가게토키 호엔6년(1140년) - 쇼지2년(1200년) 사무라이도코로 소지 → 사무라이도코로 벳토. 하리마・미마사카 수호 요리이에의 유모(시카노니)의 남편. 쇼지 원년(1199년)에 실각. 요절(가지와라 가게토키의 변). 아다치 도모토 1130년대 전반? - 조겐원년(1207년) 이후 구몬조 요리우도 아다치 모리나가의 조카? 미우라 요시즈미 다이지2년(1127년) - 쇼지2년(1200년) 사가미 수호 와다 요시모리의 숙부. 병사. 핫타 도모이에 1140년경?[12] - 조큐3년(1221년) 이후 히타치 수호 요리토모의 유모(사무카와 니)의 남동생. 아다치 모리나가 호엔원년(1135년) - 쇼지2년(1200년) 미카와 수호 아다치 도모토의 숙부? 요리토모의 유모(히키 니)의 사위. 병사. 교토 하강 문관 오에노 히로모토 큐안4년(1148년) - 가로쿠원년(1225년) 구몬조 벳토 → 만도코로 벳토 공가 출신. 나카하라노 지카요시의 동생. 나카하라노 지카요시 코지2년(1143년) - 조겐2년(1209년)[13] 구몬조요리우도 → 만도코로 공사 봉행인 교토 수호 공가 출신. 오에노 히로모토의 형. 니카이도 유키마사 1130년대 후반?[14] - ? 구몬조 요리우도 → 만도코로 령 벳토 → 만도코로집사 공가 출신. 요리토모 생모의 사촌. 미요시노 야스노부 호엔6년(1140년) - 조큐3년(1221년) 몬추조 집사 하급 귀족 출신. 요리토모의 유모의 조카.
4. 1. 호조씨
호조 도키마사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장인이자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외조부로, 초대 싯켄(執權)을 역임했다.[8] 호조 요시토키는 호조 도키마사의 아들로, 2대 싯켄을 역임했으며 효조슈를 창설했다.[9]
출자 | 인명 | 생몰년 | 역직 | 비고 |
---|---|---|---|---|
호조 씨 | 호조 도키마사 | 호엔4년(1138년) - 겐포3년(1215년) | 이즈・스루가・도토미 수호 | 요리이에의 외조부. 겐큐2년(1205년)에 추방(마키 씨 사건) |
호조 씨 | 호조 요시토키 | 초겐원년(1163년) - 겐닌원년(1224년) | 침소 경호중(이에고) | 도키마사의 아들. 요리이에의 숙부. |
4. 2. 유력 고케닌
히키 요시카즈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유모부이자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장인이었으나, 겐닌 3년(1203년)에 살해되었다.[1] 와다 요시모리는 사무라이도코로 벳토를 역임하였으나, 겐랴쿠 3년(1213년) 와다 전투에서 요절하였다.[1] 가지와라 가게토키는 사무라이도코로 벳토였으나, 쇼지 원년(1199년)에 숙청되었다.[1] 아다치 도모토[1], 미우라 요시즈미[1], 핫타 도모이에[1], 아다치 모리나가[1]는 쇼지 2년(1200년)에 병사하였다.출자 | 인명 | 생몰년 | 역직 | 비고 |
---|---|---|---|---|
그 외 유력 고케닌 | 히키 요시카즈 | ? - 겐닌3년(1203년) | 시나노・고즈케 수호 | 요리토모의 유모(히키 니)의 양자, 요리이에의 유모부, 장인. 피살(히키 요시카즈의 변). |
와다 요시모리 | 큐안3년(1147년) - 겐랴쿠3년(1213년) | 사무라이도코로벳토 | 미우라 요시즈미의 조카. 요절(와다 전투). | |
가지와라 가게토키 | 호엔6년(1140년) - 쇼지2년(1200년) | 사무라이도코로 소지 → 사무라이도코로 벳토. 하리마・미마사카 수호 | 요리이에의 유모(시카노니)의 남편. 쇼지 원년(1199년)에 실각. 요절(가지와라 가게토키의 변). | |
아다치 도모토 | 1130년대 전반? - 조겐원년(1207년) 이후 | 구몬조 요리우도 | 아다치 모리나가의 조카? | |
미우라 요시즈미 | 다이지2년(1127년) - 쇼지2년(1200년) | 사가미 수호 | 와다 요시모리의 숙부. 병사. | |
핫타 도모이에 | 1140년경?[12] - 조큐3년(1221년) 이후 | 히타치 수호 | 요리토모의 유모(사무카와 니)의 남동생. | |
아다치 모리나가 | 호엔원년(1135년) - 쇼지2년(1200년) | 미카와 수호 | 아다치 도모토의 숙부? 요리토모의 유모(히키 니)의 사위. 병사. |
4. 3. 교토 하강 문관
5. 13인 합의제의 붕괴와 싯켄 정치로의 전환
1199년(쇼지 원년) 음력 1월 13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하면서 장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음력 1월 20일 18세의 나이로 좌중장에 올라 정무 총책임을 맡았고, 음력 1월 26일에는 교토 조정에서 제국 수호의 선지가 내려와 제2대 가마쿠라도노 지위에 올랐다.
요리이에는 산자에몬 사건 등으로 고케닌의 힘을 빌려야 했고[15], 오에노 히로모토 등 중신들의 보좌로서만 주요 사안을 처리해야 했다[16].
음력 4월 12일에는 여러 정치적 암투의 결과로 요리이에 독단의 정무적 결단이나 판결력 자체를 부정당했다. 결국 당시 유력 공신 13인으로 구성된 협의체를 통해 모든 정치적·법적 판단이 내려졌다. 아즈마카가미에는 요리이에가 관습을 무시하고 권한을 남용한 여러 일화들이 나열돼 있으나, 해당 기록은 반대파 공신들이 요리이에를 제거한 후 기록한 것이라 역사적 중립성을 의심받고 있다.
요리이에를 옹립하고 큰 권력을 갖게 된 친 쇼군파 오에노 히로모토, 나카하라노 지카요시(中原親能), 가지와라 가게토키(梶原景時) 등이 다른 공신 집안들의 불만[17]을 잠재우는 동시에 요리이에의 독재를 막을 목적으로 13인 합의제가 설치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13인 전원이 따로 회의를 가진 적이 없고 수 명의 회의 참석만으로 일단 논의를 해 결과를 요리이에에게 상주하면 요리이에가 장군으로서 재가를 내리는 형식으로 미뤄볼 때, 13인 합의제는 세이이대장군의 보좌역이 주기능일 뿐 독립된 기관은 아니었다는 견해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5. 1. 13인 합의제의 붕괴
1199년(쇼지 원년) 말, 13인 합의제 구성원 중 한 명이었던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숙청되었고[15], 이듬해인 1200년(쇼지 2년)에 아다치 모리나가와 미우라 요시즈미가 병사하면서 합의제는 붕괴되었다.[16] 막부 공신들의 권한이 강해지고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외척인 호조 씨가 발흥하면서 요리이에 정권 자체도 권력 투쟁 속에 몰락해 갔다.[17]5. 2. 싯켄 정치로의 전환
1199년(쇼지 원년) 말, 합의제 구성원 중 한 명이었던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숙청되었다. 이듬해인 1200년에는 아다치 모리나가와 미우라 요시즈미가 병사하면서 합의제는 붕괴되었다. 막부 공신들의 권한이 강해지고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외척인 호조 씨가 발흥하면서 요리이에 정권 자체도 권력 투쟁 속에 몰락해 갔다.[15][16][17]6. 역사적 의의와 한국적 관점
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하고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2대 가마쿠라도노가 되면서, 고케닌의 힘을 빌려야 했고, 오에노 히로모토 등 중신들의 보좌를 받아야 했다.[15][16] 음력 4월 12일에는 요리이에의 독단적 결정을 막기 위해 13인의 유력 공신들로 구성된 협의체가 구성되었다. 이 협의체는 요리이에의 권한 남용을 막고 다른 공신 가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17] 그러나 13인 전원이 회의를 가진 적이 없고, 몇 명의 회의 참석만으로 요리이에에게 상주하여 재가를 받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독립된 기관이 아니라 세이이대장군의 보좌역이 주기능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13인의 합의제는 일본 초기 무사 정권의 권력 분점 형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한국 역사에서도 고려 시대의 무신정권이나 조선 시대의 비변사처럼 특정 가문이나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합의를 통해 국정을 운영한 사례가 있다. 13인의 합의제는 권력 집중을 막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려는 시도였으나, 1200년 아다치 모리나가와 미우라 요시즈미가 병사하는 등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인해 실패하고 싯켄 정치라는 새로운 권력 집중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는 권력 분점과 합의제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사례로, 한국의 정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13인의 합의제는 권력 분산과 합의를 통한 정치 운영이라는 이상적인 측면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권력 투쟁과 정치적 불안정성을 야기할 수 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다양한 의견 수렴과 효율적인 국정 운영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참조
[1]
문서
後藤基清の讃岐国守護職改替、伊勢神宮領六箇所地頭職の停止など
[2]
문서
吾妻鏡
[3]
문서
三左衛門事件では、大江広元や中原親能が中心となって事態の収拾に当たっている
[4]
서적
中世地域社会と将軍権力
汲古書院
2011
[5]
논문
熊谷直実の出家と往生に関する史料について―『吾妻鏡』史料批判の一事例―
2005
[6]
문서
森内、2019年、P93-102
[7]
논문
熊谷直実の出家に関する一考察
2008
[8]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9]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10]
서적
治承〜文治の内乱と鎌倉幕府の成立
清文堂出版
2014
[11]
서적
日本中世の歴史3 源平の内乱と公武政権
吉川弘文館
2009
[12]
문서
姉の寒河尼の生年が保延3年(1137年)、子の小田知重の生年は永万元年(1165年)又は嘉応2年(1170年)である
[13]
문서
西暦ではすでに1月であるが、和暦では12月
[14]
문서
子の二階堂行村の生年が久寿2年(1155年)である
[15]
문서
요리토모의 급서 후 일어난 산자에몬 사건에서, 오에노 히로모토와 나카하라노 지카요시와 호조 씨들이 중심이 되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16]
문서
고토 모토키요(後藤基清)의 사누키국 수호직 해임 및 이세 신궁 부속토지 관리대장직(領六箇所地頭職) 정지 등 업무를 일컬음
[17]
문서
여타 공신 집안들을 살펴보면 호조는 요리토모의 외척이었고, 히키(比企)씨와 핫타(八田)씨는 요리토모의 유모 쪽 족벌이었으며, 아다치(安達)는 요리토모가 유배를 당했던 시절부터 측근으로서 가마쿠라 막부를 함께 일으켰다. 가지와라(梶原), 와다(和田), 아다치(足立)씨는 요리토모의 누대에 걸친 가신들이었고 미우라(三浦)씨 역시 미나모토씨의 장원인 미우라 지방의 호족으로서 효죠슈에 가담할 수 있었다. 지역 유지로서 고케닌이 된 지바(千葉)씨, 오야마(小山)씨, 지치부(秩父)씨의 의향 역시 반영됐음을 미뤄볼 때, 주요 공신 집안 모두의 불만을 누르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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