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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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충헌은 1149년에 태어나 1219년에 사망한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무신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최씨 무신 정권을 수립했다. 그는 이의민을 제거하고 명종을 폐위한 후 신종을 옹립했으며, 이후 희종, 강종, 고종을 차례로 옹립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최충헌은 도방이라는 사병 조직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고, 긍정적으로는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문신을 등용했으나, 부정적으로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백성에게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그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유사한 점이 있으며, 최씨 정권은 60년간 지속되며 몽골의 침략에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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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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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최충헌 |
한글 | 최충헌 |
한자 | 崔忠獻 |
로마자 표기 | Choe Chungheon |
일본어 | 崔忠献 (さい ちゅうけん) |
직책 | |
직위 | 무신정권 집권자 |
임기 시작 | 1196년 |
임기 종료 | 1219년 10월 29일 |
전임 | 이의민 |
후임 | 최우 |
직위2 | 교정별감 |
임기2 시작 | 1209년 |
임기2 종료 | 1219년 |
전임2 | (신설) |
후임2 | 최우 |
생애 | |
출생 | 1149년, 개성 또는 경주 |
사망 | 1219년 10월 29일 (70세), 개경 |
다른 이름 | 최난(崔鸞) |
시호 | 경성(景成) |
가족 | |
배우자 | 송씨, 정화궁주, 숙성택주 |
자녀 | 최우, 최향, 최구, 이름 미상 아들, 최성 |
아버지 | 최원호 |
어머니 | 유씨 |
소속 | |
군사 복무 | 고려군 |
계급 | 상장군 |
가문 | |
가문 | 우봉 최씨 |
정치적 배경 | |
통치 시기 군주 |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
2. 생애
12세기 후반 고려는 무신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는데, 최충헌은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며 두각을 나타냈다.[1] 1196년에는 이의민을 암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1] 자신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진언했다.[1]
1197년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옹립한 최충헌은 친동생 최충수를 비롯한 반대파를 제거하고, 효심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등 강경한 행보를 보였다. 또한 "도방"이라는 사병 조직과 농장을 통해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1209년 교정도감 설치와 함께 교정별감에 임명되면서 최씨 정권의 합법성과 독재권이 확고해졌다.[1] 1219년 최충헌 사후에도 교정별감 지위는 최씨 일족에게 세습되었고, 최씨 정권은 1258년까지 4대 62년간 지속되었다.
최충헌은 숙청을 많이 하여 평판이 좋지 않지만, 교역 장려나 문인 등용 등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도쿄 국립 박물관에 묘지 석비가 소장되어 있다.
2. 1. 생애 초반
최충헌은 1149년 최고위 장군 최원호와 그의 부인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개성 또는 경주로 추정된다. 그는 남북국 시대의 유명한 유교 학자 최치원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의 시조였으나, 최원호가 우봉(牛峯)을 관향으로 받으면서 우봉 최씨가 되었다. 그는 장군 송청의 딸인 송씨 부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 최우와 최향을 두었다.음서로 관직에 올라 양온령(良醞令)이 된 그는,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오르고, 섭장군이 되었다.[1] 이후 중앙 및 지방 정부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2] 1176년 지안동부사부사, 1180년 응양부 섭낭장, 1181년 응양부 낭장을 거쳤다. 1187년 용호군 섭중랑장, 1188년 용호군 중랑장, 1193년 겨울 감문위중랑장 본위차장군, 1194년 감문위 섭장군, 1195년 여름 좌우위정용 섭장군을 역임했다.
명종 재위 기간 동안 군사 독재자 밑에서 복무했으나, 이의민의 통치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의민 집권기, 경상도 진주의 어사가 되었지만, 권력자들의 뜻에 반하여 탄핵을 받아 출세가 막히기도 했다.[2]
2. 1. 1. 출생과 가계
최충헌은 개성 우봉(牛峯)에서 상장군 증 문하시중 최원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미상으로, 그의 선조로는 아버지 최원호만이 이름이 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초에 발견되어 1918년 처음 공개된 최충헌 묘지명에 의해 할아버지 최정현(崔貞現)과 증조부 최주행(崔周幸)의 이름이 알려졌다. 조부 정현과 증조부 주행의 관직은 전하지 않지만, 모두 최충헌 집권 후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장군(守太師 開府儀同三司 中書令 上將軍)에 증직되었다.어머니는 진강국대부인 유씨(晉康國大夫人 柳氏)로, 진강국대부인은 그가 집권한 후에 추서된 작위이며, 외할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상장군(金紫光祿大夫 中書令 上將軍) 유정(柳挺)이다. 외삼촌 중 한 명은 유숙(柳淑)으로, 그는 최충헌의 누나 혹은 여동생으로 추정되는 우봉 최씨와 결혼하였다. 최충헌의 초명은 난(鸞)이고, 나중에 충헌으로 고쳤다. 아래로 동생 최충수와 여동생 1인, 그리고 누이 1명이 있는데, 이 누이는 외삼촌 유숙에게 시집갔다. 최충헌은 1149년 최고위 장군 최원호(최원호|崔元浩한국어)와 그의 부인 유씨(유씨|柳氏한국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개성 또는 경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남북국 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유교 학자 최치원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의 시조였지만, 최원호가 우봉의 관향을 받으면서 그의 가문은 경주 최씨에서 분파되어 우봉 최씨가 되었다. 그는 장군 송청의 딸인 송씨 부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 최우와 최향을 두었다.
2. 1. 2. 초기 활동
그는 일찍이 음보로 관직에 올라 양온령(良醞令)이 되고, 성릉직(成陵直)이 되었다가 위위시주부(衛尉侍注簿)로 승진했다. 다시 흥위위 보승산원(興威尉 保勝散員)으로 전임되었다가 1174년(고려 명종 4년) 무인 집권에 반발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출정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그해 전봉별초(戰鋒別抄)를 설치할 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올랐으며, 뒤에 섭장군이 되었다.[1] 이후 본위별장(本衛別將)이 되었다가, 1176년(명종 6) 지안동부사부사(知安東府事副使)로 나갔다. 1180년(명종 10년)에 응양부 섭낭장(鷹揚府 攝郞將)을 거쳐 1181년 응양부 낭장이 되었다.1187년 용호군 섭중랑장(龍虎軍 攝中郞將), 1188년 용호군 중랑장이 되었다. 1193년 겨울 감문위중랑장 본위차장군(監門衛中郞將 本衛借將軍)을 거쳐 1194년 감문위 섭장군이 되었다. 1195년 여름 좌우위정용 섭장군이 되었다.
최충헌은 아버지처럼 군에 입대하여 35세까지 대령으로 복무했으며, 40세에 장군 회의에 참여했다. 그는 명종 재위 기간 동안 군사 독재자 밑에서 복무했다. 군사 독재자 이의민의 통치 기간 동안 최충헌과 그의 형 최충수는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군대 내 지위를 인정받아 음서를 통해 양온령이 되었다. 이것이 최충헌이 맡았던 첫 번째 공식 직책이었으며, 왕족과 정부 기관에 술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는 양온서(良醞署)의 8품 벼슬이었다. 한동안 하위 직책을 전전했지만,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후, 그는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겠다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서기 직책에 머무르는 것에 수치심을 느껴, 군직으로 전직했다고 전해진다.[2]
1174년(명종 4년), 그는 조위총의 반란 동안 중앙 정치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기탁성(奇卓誠) 장군이 최충헌을 선택했고, 그는 최전선에서 큰 공헌을 하여 별초도령으로 승진했고, 이후 귀환 후에는 섭장군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이후 중앙 및 지방 정부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2]
이의민의 재위 기간 동안 그는 경상도 진주의 어사가 되었지만, 권력 있는 관리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탄핵을 받았고,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출세를 막았다고 전해진다. 경주 출신일 가능성이 높고 그 지역과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진 이의민 총독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야심에 가득 찬 최충헌은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2]
2. 2. 쿠데타와 집권
1196년(명종 26) 음력 4월 8일, 최충헌은 이지영의 하인이 자신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훔친 사건을 계기로 이의민 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최충수는 이지영에게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오히려 묶여 볼기를 맞고 이틀간 갇히는 수모를 당했다. 이에 분노한 최충수는 형 최충헌을 찾아가 함께 이의민과 그의 아들들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9]최충헌은 미타산에 있는 이의민의 별장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고, 머리를 저자에 효수했다. 이후 군사를 모아 이의민의 아들 지순, 지광이 거느린 가병을 물리쳤다. 당시 보제사에서 봄놀이를 하던 명종은 이 소식을 듣고 궁궐로 돌아와 최충헌에게 정권을 넘겼다. 최충헌은 이의민의 심복들을 모두 처치하고, 숨어 있던 이지영은 장군 한휴가 찾아내 죽였다.[9]
최충헌은 자신을 제거하려던 승려들의 반란이 있자 평장사 권절평, 손석, 대장군 이경유 등 36명을 인은관에 유폐한 뒤 죽였다. 또한 이의민 시기 무인 실력자였던 두경승을 숙청하고, 그의 사위 류삼백을 매수하여 두경승을 자연도로 유배 보냈다. 1197년 9월에는 류삼백마저 반역 혐의로 죽이고, 그의 부친 류득의를 남쪽 변방에 유배했다.[9]
이처럼 정적을 제거한 최충헌은 명종에게 10조목의 봉사(封事)를 올렸다(봉사십조).
2. 2. 1. 봉사십조
1196년(명종 26) 음력 4월 8일, 이의민이 제거된 후, 최충헌은 명종에게 10조목의 봉사(封事)를 올렸다(봉사십조). 이는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고 임금의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봉사십조는 당시의 폐단을 적절히 지적한 것으로 평가되며, 최충헌의 정치적 식견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었다. 최충헌이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능력 덕분이었다.[1]최충헌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생 최충수와 함께 봉사십조(封事十條)라는 개혁안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이 개혁안의 시작 부분은 이의민 암살을 정당화했다. 최충헌과 그의 형제는 이의민이 국가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백성을 위협했기 때문에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군사 쿠데타 이후 집권 군벌을 제거하여 권력을 공고히 했다.[1]
2. 3. 권력 강화와 독재
1196년 최충헌은 당시 고려의 집권 무신이었던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자신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명종에게 폐정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 10개 조를 올렸다.[1]1197년 명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여러 관직을 겸임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같은 해, 명종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자신의 신변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평량공 왕민(신종)을 옹립했다.[10] 이로써 정권은 완전히 최씨 일가가 독차지하게 되었고, 최충헌은 정국공신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주국[11]에 책봉되었다.
최충헌은 신종 즉위 후,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무력 충돌 끝에 최충수를 살해하고 군국(軍國)의 대권을 독점했다.[1]
1199년 병부상서와 이부지사를 겸하여 군권과 인사권을 장악했다.[1] 1200년 자신을 처치하려는 음모가 자주 발생하자 경대승이 설치했던 도방을 부활시켜 신변을 보호했다.[1]
1204년 신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강요하여 태자(희종)에게 왕위를 양위케 하였고, 문하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장군상주국, 병부어대판사, 태자태사[12] 등에 책봉되었다. 희종은 그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하였다. 얼마 뒤 문하시중 진강후(晋康候)가 되었으며, 진강군(晋康郡)[13]을 식읍으로 받았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화를 중흥시키려고 힘썼다. 그해 4월 청교역(靑郊驛) 관리들의 최씨 부자 살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영은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혐의자를 색출했는데, 이는 국정 전반을 감독하는 무인정권의 핵심 기관이 되었다.[1] 이 도감은 최씨 일가가 무단정치를 하는 동안 일본의 막부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2. 3. 1. 반란 진압
1198년(신종 1) 5월, 최충헌의 가노(家奴)였던 만적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미조이, 김윤성 등과 함께 개경 북산에서 반란을 모의했다. 이들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며 신분 해방을 주장했다.[1] 그러나 거사일에 흥국사에 모인 노비는 수백 명에 불과했고, 거사일을 연기하자 한충유의 종 순정이 주인에게 밀고하여 만적 등 100여 명이 강물에 수장되는 처벌을 받았다.[1] 최충헌은 한충유에게 합문지후 벼슬을 내리고, 순정에게는 백금 80냥과 함께 면천시켜주었다.1199년 김준거의 난을 진압했고,[1] 1202년에는 경주 별초군의 반란을 진압했다.[1]
신라 부흥 운동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저항은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1] 이 운동은 최충헌 정권에 실질적인 장애가 되었으며, 가혹한 진압 이후 더욱 강력한 통제 구조를 확립하게 했다.[1]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주도한 노비 반란은 주인을 죽이고 산에 모여 약 100명 규모의 군대를 이루었으나 곧 진압되었고, 죽은 자들의 시신은 수장되었다.[1] 이후 승려들의 반란 등 더 많은 반란이 발생했지만, 최충헌은 불교도들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하고 암살 음모에 가담한 불교도들을 체포하는 데 그쳤다.[1]
1207년, 박진재가 삼촌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최충헌은 그를 진압하고 박진재를 백령진으로 유배 보냈으며, 그에게 반항한 박진재의 추종자들을 많이 내쫓았다.[1]
2. 3. 2. 희종, 강종, 고종 옹립
1197년(명종 27년) 최충헌은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자신의 신변을 위협하자 명종을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평량공 왕민(신종)을 옹립하였다.[10] 이로써 정권은 완전히 최씨 일가가 독차지하게 되었고, 최충헌은 정국공신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주국[11]에 책봉되었다.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뒷날의 희종)의 비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무력 충돌이 발생, 최충수를 살해하였다. 이로써 최충헌은 군국의 대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1204년 신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강요하여 태자(희종)에게 왕위를 양위케 하였고, 최충헌은 문하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장군상주국, 병부어대판사, 태자태사[12] 등에 책봉되었다. 희종은 그를 신하의 예로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하였다. 얼마 뒤에 문하시중 진강후(晋康候)가 되었으며, 진강군(晋康郡)[13]을 식읍으로 받았다.
1211년 12월, 희종이 그의 권세에 눌려 불안한 생활을 하자 내시 왕준명 등이 최충헌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희종과 태자를 폐하고, 명종의 아들인 한남공 왕정(강종)을 옹립하였다.[14] 1212년 그의 식읍이 진강부로 변경됨과 동시에 공신[15]에 책봉되고, 1213년 강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 왕진(고종)을 세웠다.
2. 4. 생애 후반
최충헌에게는 두 아들 우와 향이 있었다. 만년에 병석에 누운 최충헌은 두 형제 간에 권력 다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곁에서 돌보던 아들 최이(최우)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16] 최이(최우) 역시 이후 병을 핑계로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16] 차남인 최향의 벼슬이 장남인 최이[17]보다 높았으나, 최우가 최향의 부하들을 죽이고, 뒤로 무신정권을 잡았다.최충헌의 관직은 다음과 같다.
- 벽상삼한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병부어사대사 태자태사
(壁上三韓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太師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上將軍 上柱國 判兵部御史臺事 太子太師)
1219년 9월에 개성부 안흥리(安興里) 집에서 사망했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그는 죽기 전 연회를 열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219년 12월 24일 개성부의 봉황산(鳳凰山) 서남쪽 기슭에 매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고려 임금의 장례식과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사후 4대에 걸쳐 '''최씨 무신정권'''의 세습 권력을 닦았으나, 고려 멸망 후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반역 열전에 길게 실렸다.
최충헌 묘지명에 의하면 공신호와 관직 시호는 다음과 같다.
'벽상삼한 삼중대광 익성정국 동심좌명 치리우모 일덕안사 제세희재 찬화협보 익량상즙 주번한주당경 광찬우익 복벽재조 격천관일 늑정기상 문경호위 향리조안 선기촉물 전주결승 한광한림 악강천수 평형보아 정전획일 금려갱매 연사득체 선▨명▨ 질진타초 대외소회 반국정세 제뇌인사 보상광구 총관 ▨사 종덕화민 계옥재성 제천보곤 섭리미륜 촉유정원 공신 특진 금자광록대부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주국 상장군 판어사대사 식읍일만호 식실봉이천호 진강공 증시 경성
(壁上三韓 三重大匡 翊聖靖國 同心佐命 致理訏謨 逸德安社 濟世熙載 贊化夾輔 翼亮商楫 周藩漢柱唐鏡 光贊羽翼 復辟再造 格天貫日 勒鼎紀常 文經虎緯 嚮理措安 先機燭物 轉籌決勝 寒纊旱霖 嶽降天授 平衡保阿 定典畫一 金礪羹梅 練事得體 先▨明▨ 叱秦吒楚 大畏小懷 磐國鼎世 帝ꜹ人師 輔相匡救 摠管▨事 種德和民 啓沃裁成 濟川補袞 燮理■綸 燭幽定遠 功臣 特進 金紫光祿大夫 守太師 開府儀同三司 中書令 上柱國 上將軍 判御史臺事 食邑一萬戶 食實封二千戶 晋康公 贈諡 景成)'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최주행(崔周幸) |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장군(守太師 開府儀同三司 中書令 上將軍) 증직 |
조부 | 최정현(崔貞現) |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장군 증직 |
아버지 | 최원호(崔元浩) | 상장군 역임[18] |
어머니 | 진강국대부인 류씨(晉康國大夫人 柳氏) | |
친동생 | 최충수(崔忠粹, 1151~1197) | |
친누이 | 우봉 최씨(牛峰崔氏) | 외삼촌 류숙과 결혼 |
매부 | 류숙(柳淑) | 외삼촌 |
누이 | 우봉 최씨(牛峰崔氏) | 박진재의 어머니 |
조카 | 박진재(朴晉材, 1166~1207) | |
부인 | 송씨(松氏)[16] | 상장군(上將軍) 송청의 딸 |
장남 | 최우(崔瑀, 1166~1249) | |
며느리 |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하동 정씨(河東 鄭氏, ? ~ 1231) | 정숙첨(鄭叔瞻)의 딸 |
손녀 | 우봉 최씨(牛峰崔氏) | |
후 며느리 | 대씨부인(大氏夫人, ? ~1251) | 대집성(大集成, ? ~1236)의 딸, 과부 출신, 전 남편 오씨는 대몽항쟁 때 전사. 최항(1209~1257)에 의해 독살. |
양손자 | 오승적(吳承績, ? ~1251) | 대씨와 전 남편 오씨 사이의 아들, 최항에 의해 살해. |
첩 며느리 | 서련방(瑞連房) | 창기 출신 |
손자 | 만종(萬宗) | 승려(최항의 친형) |
손자 | 최항(崔沆, 1209~1257) | |
차남 | 최향(崔珦, 1168~1230)[19] | |
장녀 | 우봉 최씨(牛峰崔氏) | 최충헌보다 먼저 사망 |
사위 | 임효명(任孝明) | 문하시중 임원후(任元厚)의 손자, 문하시랑평장사 임유(任濡)의 아들 |
부인 | 정화택주 왕씨(靜和宅主 王氏) | 강종(1152~1213)의 딸, 고종(1192~1259)의 누이 |
3남 | 최구(崔球)[16] | |
4남 | 조계종(曹溪宗) 승려 | 최충헌 묘지명에 이름은 전하지 않음 |
부인 | 수성택주 임씨(綏成宅主 任氏) | 문하시중 임원후(任元厚)의 손녀, 이부시랑 임부(任溥)의 딸. 최충헌이 정변을 일으키고 남편 손홍윤 등을 죽이고 빼앗아 온 여인. |
5남 | 최성(崔星)[16] | 최전(崔瑼)으로 개명. 희종의 딸 덕창궁주와 결혼. |
부인 | 자운선(紫雲仙) |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의 첩, 이지순을 죽이고 빼앗아온 여성. |
사돈 | 정숙첨(鄭叔瞻) | 하동 정씨의 친부, 최우의 장인. 1217년 최충헌 암살 모의에 연루, 전라도 하동으로 유배. |
장인 | 송청(宋淸) | 지추밀원사 역임 |
외조부 | 류정선(柳挺先) | |
외삼촌 | 류숙(柳淑) | |
외숙모 겸 누이 | 우봉 최씨 | 외삼촌과 결혼 |
4. 평가
최충헌은 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집권 초기에는 봉사 10조를 통해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후 권력 강화에 집중하며 반대파 숙청과 백성 탄압 등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최충헌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4. 1. 긍정적 평가
1196년 당시 고려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 이의민을 암살하고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독재 정권 확립 과정에서 많은 숙청을 단행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1]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교역 활동을 장려하고 명성이 높은 문인을 적극 등용하는 등 정치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1]최충헌은 민란을 잘 진압하여 기강을 확립하고 풍속을 순화했으며, 문운을 재흥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4] 그는 고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인 정치자로, 생전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최초의 무인 정권 가마쿠라 막부를 출범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유사하게 평가받는다. 최충헌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무인정권을 출범하였고, 권력 장악을 위해 친동생인 최충수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제거하였으며, 자식에게 정권을 세습하여 수십 년간 정권이 이어졌다는 유사점을 가진다.[4] 또한, 고구려의 연개소문,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흡사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전의 무신 정권 지도자들과 달리, 최충헌의 통치에는 이규보를 비롯한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4]
4. 2. 부정적 평가
최충헌은 독재 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숙청을 자행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다.[1] 1217년(고종 4년)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 승려들의 음모를 적발, 처형한 후로는 반대파를 대량 숙청하고 백성들에 대한 횡포가 심해졌다.[1] 최충헌 정권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무신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새로운 압제자의 특징을 보여주었다.[1]5. 기타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갑수, 류덕환, 강재가 최충헌 역을 연기했고,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주현이 최충헌 역을 연기했다. 최충헌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했던 동생 최충수를 처형하고, 외조카 박진재를 유배보냈으며, 정적이었던 손홍윤을 죽이고 그의 아내 임씨를 첩으로 삼았다. 동사강목에 따르면 '임씨는 장군 손홍윤(孫洪胤)의 아내였는데, 충헌이 홍윤을 살해한 뒤 그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차지하였다'는 것이다.[20]
1196년 3월에는 보현사의 승려들이 무신정권을 타도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전에 이를 접하고 승려들을 살해했다. 동시에 이강제, 문득려, 이인성, 이순우 등 기타 문,무신 30여 명을 인은관에 가두었다가 살해하였다.
명종을 폐위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복하던 두경승을 유배보내기도 했다. 다른 무인 지도자들과는 달리 문신들을 적극 중용하여 형식적으로는 문치정권을 가장하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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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4-08-0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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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Ch'oe Ch'unghŏn: His Rise to Power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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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History of Korea: 2nd edition
ABC-CLIO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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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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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h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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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서
고려사 세가 고종 6년(1219) 기묘년 9월 임자일 최충헌이 죽었다.
[8]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
[9]
문서
이의민의 아들
[10]
문서
명종의 친동생, 인종의 5남
[11]
문서
靖國功臣 三韓大匡大中大夫 上將軍柱國
[12]
문서
壁上三韓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守太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上將軍上柱國 兵部御史臺判事 太子太師
[13]
문서
지금의 진주 일대
[14]
문서
강종
[15]
문서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 文經武緯嚮理措安功臣
[16]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웅진씽크빅
2004
[17]
문서
최우
[18]
문서
선계가 미상으로 그의 아버지 최원호를 시조로 한다.
[19]
문서
최충헌 사후, 형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하여 숙청당하고 충청도 홍성에 유배를 가서 살다가 반란을 일으키다 관군에 의해 죽음.
[20]
문서
동사강목 고종 1년 1215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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