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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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서치요는 당 태종의 명으로 위징, 우세남 등이 편찬한 통치 서적으로, 오제 시대부터 진대까지의 고적에서 발췌한 내용을 담고 있다. 67종의 책에서 1만 4천여 부에 달하는 자료를 수집하여, 다스림에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뽑아 631년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일본으로 전해져 닌묘 천황과 우다 천황 등이 애독했으며, 청나라 가경 연간에는 중국으로 역수입되기도 했다. 군서치요는 현존하지 않는 고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으며, 현대에도 고증학 연구에 활용된다. 2014년과 2020년에는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당 태종 정관(貞觀) 원년에 천하가 평정되자, 당 태종은 이전 시대 군주들의 통치 사례를 참고하고자 위징, 우세남, 저량, 소덕언 등에게 명하여 《군서치요》를 편찬하게 하였다.[2]
《군서치요》는 당 태종이 전대 군주들의 통치 사례를 참고하고자 위징(魏徵), 우세남(虞世南), 저량(褚亮), 소덕언(蕭德言)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책이다. 정관 5년(631년)에 완성되었으며, 위징이 서문을 썼다.[2] 위징은 서문에서 이 책이 치세의 보전(寶典)으로서 현재와 미래에 훌륭한 지침을 제공할 것이라고 하였다.
2. 편찬 배경 및 과정
이 책은 육경(六经) 및 제자(諸子) 등 67종의 서적과 오제(五帝)부터 진대(晋代)까지 1만 4천여 부(部), 8만 9천여 권의 고적에서 통치에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발췌하여 구성되었다. 《군서치요》는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고, 내용을 자르거나 고친 흔적은 드물다. 정문(正文)은 큰 글자로, 주석문은 작은 글자로 작성되었다. 정관 5년(631년) 9월 27일에 완성되어 위징의 이름으로 당 태종에게 바쳐졌고,[2] 당 태종은 10여 부를 필사하여 태자와 여러 친왕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위징은 서문에서 이 책이 “현금의 사회에 사용되어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삼을 수 있게 하며, 후세에 전하여 자손들에게 훌륭한 방략을 제시할 수 있는” 치세의 보전(寶典)이라고 평가하였다.
2. 1. 편찬자
정관 원년에 당 태종의 명으로 위징, 우세남, 저량, 소덕언 등이 편찬에 참여하였다.[2]
2. 2. 편찬 시기
정관(貞觀) 원년(627년)에 당 태종이 위징(魏徵), 우세남(虞世南), 저량(褚亮), 소덕언(蕭德言)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하였다. 이 작업은 육경(六经) 및 제자(諸子)에 이르기까지 67종의 서적과 오제(五帝)부터 진대(晋代)에 이르는 1만 4천여 부(部) 8만 9천여 권의 고적에서 다스림에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발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2] 정관 5년(631년)에 《군서치요》가 완성되어 9월 27일에 위징의 이름으로 당 태종에게 바쳐졌다.
3. 내용 및 구성
《군서치요》는 원문을 대체로 그대로 발췌하였고, 문장을 잘라내거나 고친 흔적은 드물다.[2]
《군서치요》는 송나라 때 이미 10권밖에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산실되었으나,[3] 일본에는 전해져 청나라 때 역수입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닌묘 천황 때 궁중에서 강독되었고,[4] 우다 천황은 후계 천황들에게 남기는 글에서 《군서치요》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가나자와 문고(金沢文庫)에도 보존되었는데, 청나라 학자 완원(阮元)이 이를 입수하여 《원위별장》(宛委別藏)에 실었다. 그러나 가나자와 문고본도 47권만 남아 있었고, 구조 가문 소장본은 13권만 남아 있었다. 결권된 책은 권4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상, 권13 《한서》(漢書)1, 권20 《한서》8이다. 가나자와 문고판 《군서치요》는 일본 궁내청 서릉부(宮内庁書陵部)에 소장되었다.
일본에서 《군서치요》는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명으로 간행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인쇄되었다. 1989년에는 가나자와 문고본이 영인본으로 출판되었다. 중국으로 역수입된 《군서치요》는 완원이 입수하여 가경제(嘉慶帝)에게 진상되었고, 완원은 당대 초기의 책으로 판단하며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5] 1990년대에는 시중쉰(習仲勲)이 연구를 명하여 『군서치요고석』(群書治要考訳)이 간행되기도 하였다.[6][7]
3. 1. 인용 서적
《군서치요》는 오제(五帝) 시대부터 진대(晋代)까지의 다양한 고서들을 인용하였다.[2] 육경(六经) 및 제자(諸子)에 이르기까지 67종의 서, 1만 4천여 부(部) 8만 9천여 권의 고적에서 다스림에 참고가 될 만한 말들을 발췌하였다.[2]
인용된 책 가운데에는 산일되어 완본이 현존하지 않는 책도 포함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5] 현존하는 서적 중에도 현행본과는 다른 부분이 있어 중요하다. 전적을 인용할 때 주석까지 같이 인용하였는데, 예를 들어 《사마법(司馬法)》은 원래 주해가 없는데[8] 《군서치요》에 인용된 《사마법》의 글에는 주석이 붙어 있다.
방현령(房玄齡), 저수량(褚遂良) 등이 《진서》(晉書)를 중찬한 것은 정관 20년의 일인데, 《군서치요》에 실린 《진서》 2권은 장영서(臧榮緒)가 쓴 《진서》에 십팔가진사(十八家晉史)까지 참고하였다.[5]
3. 2. 내용 구성 방식
《군서치요》는 원문(정문)을 큰 글자로, 주석문을 작은 글자로 쓰는 방식을 채택하였다.[2]
4. 가치 및 영향
《군서치요》는 당대에 위징이 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금의 사회에 사용되어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삼을 수 있게 하며, 후세에 전하여 자손들에게 훌륭한 방략을 제시할 수 있는” 치세의 보전(寶典)으로 평가받았다.
송대에는 10권 밖에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산실되었으나,[3] 일본에는 온전히 전해져 다양한 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청 가경 연간에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역수입되기도 했다. 특히 청나라의 학자 완원은 중국에 없는 서적들이 많이 실려 있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5]
《군서치요》는 당대 이전의 옛 문헌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으며, 인용된 책 가운데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책도 포함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현존하는 서적과 비교했을 때 내용상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어 고증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4. 1. 당대
정관 원년(627년), 당 태종은 위징(魏徵), 우세남(虞世南), 저량(褚亮), 소덕언(蕭德言) 등에게 명하여 《군서치요》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 책은 육경(六經) 및 제자(諸子) 등 67종의 책에서, 오제(五帝)부터 진대(晋代)까지 1만 4천여 부 8만 9천여 권의 고적에서 정치에 참고할 만한 내용을 발췌하여 구성되었다.[2]《군서치요》는 원문을 그대로 발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정문(正文)은 큰 글자로, 주석문은 작은 글자로 작성되었다. 정관 5년에 완성된 《군서치요》는 위징의 이름으로 당 태종에게 바쳐졌다.[2] 당 태종은 10여 부를 필사하여 태자와 여러 친왕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위징은 서문에서 《군서치요》가 “현금의 사회에 사용되어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삼을 수 있게 하며, 후세에 전하여 자손들에게 훌륭한 방략을 제시할 수 있는” 치세의 보전(寶典)이라고 평가하였다.
4. 2. 일본으로의 전래 및 영향
헤이안 시대에 일본에 전래되어 닌묘 천황은 《군서치요》를 궁중에서 강독하게 하였고[4], 우다 천황은 후계 천황들에게 남기는 《관평어유계》에서 "천자는 경사백가에 통달하지 못해도 한탄할 것이 없다. 다만 《군서치요》는 읽어 익혀야 한다. 잡문 때문에 세월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군서치요》를 애독하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가나자와 문고(金沢文庫)에도 《군서치요》가 전해져 보존되었다. 에도 시대인 1616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군서치요》 간행을 명하여 고활자본(스루가판駿河版)으로 만들어졌다.[5]4. 3. 중국으로의 역수입
청나라 가경 연간에 일본에서 중국으로 역수입되었다. 완원은 《군서치요》에 실린, 중국에 현존하지 않는 서적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5]4. 4. 현대적 의의
《군서치요》는 당대 이전의 고대 문헌 초본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인용된 책 중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책도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서적과 비교했을 때 내용상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어 고증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5] 예를 들어 《군서치요》에 인용된 《사마법》(司馬法)에는 원래 주석이 없는데도 주석이 붙어 있으며,[8] 《진서》(晉書)의 경우 방현령(房玄齡) 등이 정관 20년에 중찬한 내용과 달리, 《군서치요》에는 장영서(臧榮緒)가 쓴 《진서》에 십팔가진사(十八家晉史)까지 참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5. 한국어 번역
대한민국에서는 2014년과 2020년에 각각 다른 판본을 저본으로 한 《군서치요》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5. 1. 샤오샹젠의 《군서치요심득》 번역본
2014년 도서출판 싱긋에서 중국의 고전 연구자 샤오샹젠(蕭祥劍)이 풀어 엮은 《군서치요심득(群書治要心得)을 저본으로 《군서치요 -3천 년 리더십의 집대성-》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하였다.[1]5. 2. 말레이시아 중화문화교육센터 선집본 번역본
2020년 도서출판 3에서 말레이시아 중화문화교육센터 선집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군서치요群書治要|-세상을 다스리는 360가지 원칙중국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참조
[1]
서적
《舊唐書》‧ 經籍下「《群書理要》五十卷」;《新唐書》‧藝文志「《群書治要》五十卷」
[2]
문서
《唐會要》“貞觀五年九月二十七日。祕書監魏徵。撰《群書政要》。上之。”
[3]
문서
진규(陳騤)의 《중흥관각서목》(中興館閣書目)에는 10권이라고 하였고 《송사》(宋史)도 같다. 완원은 〈《群書治要》五十卷提要〉에서 “《송사》 예문지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그 사라진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미 송대에 《군서치요》가 산실되었다고 썼으나 완원의 설에는 오류가 있는데, 《송사》예문지(藝文志)6에 《군서유종》이 10권으로 실려 있다.
[4]
웹사이트
e-국보 군서치요
https://emuseum.nich[...]
[5]
서적
四庫未収書提要
[6]
웹인용
中国の支配者・習近平が引用する奇妙な古典
https://ji-sedai.jp/[...]
ジセダイ
2015-04-23
[7]
웹인용
習近平の父が守った伝統文化の価値
http://agora-web.jp/[...]
アゴラ
2017-11-04
[8]
문서
閻禹錫《司馬法集解》“久無註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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