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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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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징은 수나라 말기, 당나라 초기의 정치가로, 당 태종을 보좌하며 200번이 넘는 간언을 하여 당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세민의 형 이건성의 측근으로 있다가 현무문의 변 이후 이세민에게 중용되어 비서감, 시중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태종은 위징의 죽음을 슬퍼하며 "거울을 잃었다"고 표현했지만, 후에는 그를 의심하여 묘비를 부수기도 했다. 위징은 《수서》 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의 언행은 《정관정요》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칭송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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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위징의 동상
위징의 동상
본명위징 (魏徵)
다른 이름쉬안청 (玄成)
정 문정공 (鄭文貞公)
출생580년
출생지허베이성싱타이시줄루현
사망643년
사망지시안시산시성
아버지위완
배우자레이디 페이
자녀웨이수위 (魏叔玉)
웨이수위 (魏叔瑜)
웨이수완 (魏叔琬)
웨이수린 (魏叔璘)
직업정치가, 역사가
주요 작품수서
생애
초기 생애위징은 수나라 말기에 태어나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정치 입문당나라 초기에 이세민을 섬기며 그의 측근이 되었다.
간언위징은 당 태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아 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특히 사치와 낭비를 경계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칠 것을 강조했다.
사망643년에 사망하였으며, 당 태종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했다.
업적
정치적 업적위징은 당 태종의 정관의 치를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공정하고 청렴한 관리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역사적 업적수서 편찬에 참여하여 역사 기록을 남기는 데 공헌했다.
평가
후대의 평가위징은 중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관련 인물
군주당 태종
동료방현령, 두여회 등

2. 생애

위징은 거록(巨鹿) 곡양(曲陽) 사람으로,[5] 대중(大中) 6년(852년) 11월에 세워진 『위공선묘비』(魏公先墓碑)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교(釗), 아버지는 완(琬)이며, 부인은 하동 배씨(河東裴氏) 집안의 여자였다고 한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말기에 이밀이 지휘하던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가 이밀이 패한 뒤 당에 귀순하였다. 그 뒤 다시 두건덕의 포로가 되었는데, 두건덕은 그의 재능을 아껴서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건덕이 패한 뒤에 당으로 돌아가 태자 이건성(李建成)의 측근으로서 태자선마(太子洗馬)라는 지위에 올랐다.

당시 이세민의 인기와 권력을 불안히 여긴 태자 이건성에게 위징은 이세민을 독살하여 제거할 것을 진언했지만 이건성은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에게 살해당했다. 위징은 이를 당연한 결과라 받아들이고, 이세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고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위징을 문책하던 중, 그의 주장을 듣고 그의 솔직함을 높이 사서 그를 간의대부로 삼았다.

이후 비서감(秘書監), 시중 등의 직책을 두루 거쳤으며, 태종에게 2백 회가 넘는 간언을 올렸다. 《자치통감》권196에 따르면, 위징이 죽었을 때 태종은 몹시 슬퍼하며 "사람은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바로잡고, 옛 것을 거울로 삼아서 역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서 자신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음으로서 짐은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태종은 위징이 죽기 직전, 그의 장남 숙옥(叔玉)에게 딸 형산공주를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위징이 생전에 태종에게 올렸던 간언서의 부본을 사관(史官) 저수량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위징이 명성을 얻기 위해 그런 것이라 의심하면서 위징과 했던 약속을 깨고 형산공주를 장손의에게 시집보냈을 뿐 아니라, 위징의 무덤에 세웠던 묘비까지 부숴버렸다. 또한 생전에 위징은 중서시랑(中書侍郎) 두정륜(杜正倫)과 이부상서(吏部尙書) 후군집을 재상이 될 재목(宰相之才)이라며 천거했는데, 위징이 죽은 뒤 두 사람은 위징과 사사로이 파당을 맺었다는 당 태종의 의심을 사서, 두정륜은 죄를 지어 쫓겨나고 후군집도 모반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정관 18년(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위징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魏征若在,不使我有是行也)"이라며 한탄하고, 부숴버렸던 위징의 묘비를 다시 세우게 했다.

태종의 명으로 편찬하게 한 《수서》의 서론(序論)과 《양서》, 《진서》, 《제서》(齊書)의 총론(總論) 등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그의 발언은 《정관정요》에 대부분 수록되었다. "사람의 인생에 의기(意氣)가 있다면야/구구한 공명(功名) 따위 무슨 문제가 되랴"라는 구절로 유명한 「술회(述懷)」라는 시를 읊었다.

위징의 조각상


증조부는 북위에서 벼슬을 지낸 위소(魏釗)이다. 할아버지 위언(魏彦)은 북제북주에서 벼슬을 지냈고, 아버지 위장현(魏長賢)은 수나라에서 벼슬을 지냈다. 아들로는 위숙옥(魏叔玉), 위숙유(魏叔瑜), 위숙완(魏叔琬), 위숙린(魏叔璘) 등이 있으며, 딸은 곽왕(霍王) 이원궤의 부인이다.

젊은 시절에는 가난했지만 정업에 종사하지 않고 출가하여 도사가 되었다. 독서를 좋아하여 널리 사물에 통달했으며, 수나라 말기에 반란 집단이 난립하자 합종연횡의 책략에 관심을 가졌다.[4]

이밀에게 신종한 원보장의 서기를 맡았고, 이후 이밀을 섬겼다. 이밀이 왕세충에게 패하자 그를 따라 당나라에 의탁했다. 산둥으로 가서 당나라에 항복하도록 권유하여 려양에 근거지를 둔 서세적을 귀순시켰다. 두건덕이 려양을 함락했을 때 포로가 되어 기거사인에 임명되었다. 당나라가 두건덕을 평정(호뢰 전투)하자, 수나라의 중신이었던 배구를 데리고 당나라로 귀환했다.[4]

태자 이건성에게 불려 예우를 받았으나, 이건성은 동생인 이세민에게 살해당했다(현무문의 변). 많은 공을 세워 위신이 높아진 이세민을 경계하여 이건성에게 빨리 손을 쓸 것을 충고했다고 한다. 위징의 직언을 중요하게 여긴 이세민으로부터 첨사주부에 임명되었고, 이세민이 황위에 오르자 간의대부가 되었다. 후에 비서감, 시중 등의 직책을 전임했다.[4]

태종이 화를 냈을때도 200번 넘게 간언을 올렸다. 위징의 집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정당이 없었다. 위징이 병에 걸렸을 때, 태종은 작은 궁전을 지으려 했으나, 이를 멈추고 그 목재로 위징의 집에 정당을 5일 만에 짓게 했다. 위징의 검소한 생활을 존경했던 태종은 굳이 거친 침구를 하사했다. 사망했을 때,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태종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사람은 구리를 거울로 삼아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옛일을 거울로 삼아 흥망성쇠를 볼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으니, 짐은 한 거울을 잃었구나." (『자치통감』 권 196).

태종의 명으로 편찬한 『수서』의 서론, 『양서』・『진서』・『북제서』의 총론 등 많은 저작이 있다. 그의 언론은 『정관정요』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인생 의기에 감지(人生意氣に感ず)"와 "중원에서 사슴을 쫓는다(中原に鹿を逐う)"라는 구절로 유명한 "술회(述懐)"라는 를 읊었다.

2. 1. 초기 생애와 수나라 멸망

위징은 580년 수나라 건국(581년) 직전 거록군(鉅鹿, 대략 현재의 싱타이시, 허베이성)에서 태어났다.[5] 아버지 위장현(魏長賢)은 북제 현령이었다. 위징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했지만, 큰 뜻을 품고 학문에 정진했다. 한때 도교 승려가 되기도 했으나, 수 양제의 폭정으로 수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병법에 관심을 가졌다.[4]

수 말기, 이밀이 이끄는 반란군이 일어났다. 617년 무양군(武陽, 현재 허베이성한단시의 일부) 비서감 원보장(元寶藏)이 이밀에게 귀순하며 위징을 비서로 초빙했다. 위징은 원보장의 요청으로 이밀에게 서신을 보내 위군(魏郡, 역시 현대 한단의 일부)과 려양창(黎陽倉, 현대 허난성허비시)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이밀은 위징을 비서로 임명했다.

618년, 이밀은 낙양에서 권력을 장악한 왕세충과 대결을 준비했다. 위징은 이밀에게 방어적인 입장을 취해 왕세충의 식량을 소모시키라고 주장했으나, 이밀은 듣지 않았다. 이밀은 왕세충에게 패배하고 당나라에 항복했고, 위징도 그를 따랐다. 이후 위징은 당 고조에게 서세적을 설득해 당나라에 항복시킬 것을 요청하여 성공했다.

두건덕이 려양을 함락하면서 위징은 포로가 되어 기거사인을 맡았다. 당나라가 두건덕을 평정(호뢰 전투)하자, 위징은 배구를 데리고 당나라로 귀환했다.[4]

2. 2. 이건성과 이세민 형제 간의 갈등

당나라로 돌아온 위징은 태자 이건성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태자선마(太子洗馬)의 직책을 맡았다.[5] 당시 이세민의 명성과 권세를 경계하던 이건성에게 위징은 이세민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4] 626년, 현무문의 변이 발생하여 이건성이 이세민에게 살해당했다. 위징은 이세민에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만약 태자께서 제 말을 들으셨다면, 이런 재앙을 겪지 않으셨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주군을 위해 충언을 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세민은 위징의 강직함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하고 중용하였다.

2. 3. 당 태종의 치세와 간언 정치

당 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후, 위징은 비서감, 시중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태종에게 200번이 넘는 간언을 올렸다.[4] 그는 태종의 정책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위징은 태종에게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로 민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위징의 간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는 봉건제 시행 반대, 태산 봉선 의식 반대, 고창국 정벌 후 정책 제안 등 국가의 중대한 정책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특히, 위징은 태종에게 '십사소'(十思疏)[3]를 올려 황제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경계해야 할 열 가지를 제시했다. 이는 후대에 관료들이 황제에게 조언하는 모범 사례로 널리 알려졌다.

태종은 위징이 죽었을 때 몹시 슬퍼하며 "위징이 죽음으로써 짐은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자치통감 권196)

2. 4. 말년과 죽음

642년, 위징은 병에 걸려 태종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지막까지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4] 위징의 저택에는 큰 홀이 없었으므로, 태종은 황실 홀을 짓는 데 사용할 건축 자재를 위징에게 돌려 5일 만에 홀을 건설해 주었고, 병풍, 침구, 작은 탁자, 지팡이 등을 하사하며 그를 위로했다. 위징이 감사 편지를 보내자, 태종은 "짐은 경을 백성과 국가를 위해 존경하는 것이지, 경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째서 짐에게 감사하는가?"라고 답했다.[4]

643년 봄, 위징은 위독해졌다. 태종은 위징의 병세를 돌보기 위해 수많은 사신을 보냈고, 관료 이안엄을 위징의 저택에 머물게 하여 그를 돌보게 했다. 또한 이승건과 함께 직접 위징을 방문하여 딸 형산공주를 위징의 아들 위서유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지만, 위징의 부인 배씨는 남편의 검소한 생활을 이유로 대부분 거절했다. 위징은 태종이 묻힐 장손황후의 묘 근처에 묻혔고, 태종은 직접 비문을 쓰고 위징을 위한 비석을 세우게 했다. 태종은 위징을 그리워하며 "구리를 거울로 삼으면 옷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미래의 경향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으니, 짐은 거울을 잃었다."라고 탄식했다.[4]

그해 말, 태종은 당 통치에 크게 기여한 24명의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능연각이십사공신의 초상을 의뢰했는데, 위징의 초상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643년 말, 이승건이 태종을 전복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위징은 이전에 후군집두정륜을 재상감으로 여러 번 추천했고, 태종에게 한 간언을 황실 역사가 저수량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태종은 위징을 의심하여 형산공주와 위서유의 혼인을 취소하고 위징의 묘비를 부수었다.

645년,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실패한 후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그가 나를 이 원정에 가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후회하며 위징에게 제사를 지내고 묘비를 복원했으며, 위징의 부인과 자녀들을 크게 포상했다.[4]

3. 역사적 평가와 의의

위징은 당 태종의 치세를 보좌하며 당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추구하는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4] 특히, 위징은 권력에 굴하지 않고 황제에게 200회가 넘는 간언을 올렸으며, 태종의 정책 결정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징이 죽었을 때 태종은 몹시 슬퍼하며 "사람은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바로잡고, 옛 것을 거울로 삼아서 역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서 자신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음으로서 짐은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라고 말했다.(『자치통감』 권 196).

태종은 위징이 죽기 직전, 그의 장남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위징이 생전에 올렸던 간언서의 부본을 사관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약속을 깨고 묘비까지 부숴버렸다. 그러나 정관 18년(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위징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한탄하고, 부숴버렸던 위징의 묘비를 다시 세우게 했다.

위징의 사상은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한국 사회에서 더욱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4. 저술 및 어록

위징은 당 태종의 명으로 《수서》 서론, 《양서》, 《진서》, 《제서》(齊書) 총론 등 역사서 편찬에 참여했다.[4] 그의 발언은 《정관정요》에 대부분 수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인생 의기에 감지(人生意氣に感ず)"라는 구절로 유명한 「술회(述懷)」라는 를 읊었다.

당 태종은 위징이 죽었을 때 "사람은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바로잡고, 옛 것을 거울로 삼아서 역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서 자신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음으로서 짐은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라고 하며 슬퍼했다. (『자치통감』 권 196).

위징은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라고 하여, 민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5. 기타

위징은 당 태종을 200번 넘게 간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여, 손님을 맞이할 정당(正堂)조차 없었다. 태종은 위징의 검소함을 존경하여, 그가 병에 걸렸을 때 작은 궁전을 지을 목재로 5일 만에 정당을 짓게 하고 거친 침구를 하사하기도 했다. 위징이 사망하자 태종은 "위징이 죽으니, 짐은 한 거울을 잃었구나"라며 슬퍼했다.[4]

위징은 『수서』 서론, 『양서』, 『진서』, 『북제서』 총론 등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그의 언론은 『정관정요』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인생 의기에 감지(人生意氣に感ず)"와 "중원에서 사슴을 쫓는다(中原に鹿を逐う)"라는 구절로 유명한 "술회(述懐)"라는 를 읊기도 했다.

5. 1. 서유기에서의 묘사

명나라 백화 소설인 《서유기》에서 위징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인물로 묘사된다.[5] 그는 태종바둑을 두다 잠깐 조는 사이에 옥황상제의 명령에 따라 꿈속에서 경하용왕(涇河龍王)을 처형하기도 하고, 한을 품은 경하용왕이 태종의 꿈에 나타나 태종을 괴롭혀 점차 몸이 쇠약해지자 명부(冥府)로 가 태종의 수명을 늘리고 돌아오기도 한다.[5]

5. 2. 대중문화

2006년~2007년 서울방송 TV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맹호림이 위징 역을 맡았다.[5]

참조

[1] 서적 Xin Tangshu 1060
[2] 문서 sexagenary cycle Old Book of Tang
[3] 문서 Petition on Ten Thoughts
[4] 간행물 『旧唐書』魏徴伝
[5] 문서 곡양은 지금의 중국 [[하북 성]] 진현(晋縣)인데, 이미 당대의 문헌으로 오긍의 《정관정요》에 "위징은 거록 사람인데 근래에 상주의 내황으로 집을 옮겼다(魏徵,钜鹿人也。近徙家相州之內黄)"고 했고, 구양순(毆陽洵)이 지은 『당경조개원사종명(唐京兆開元寺鐘銘)』에도 "비서감(秘書監) 검교시중(檢校侍中)인 거록군(钜鹿郡) 위징이 찬(撰)한다"고 했으며, 두엄(杜淹)이 지은 《문중자세가(文中子世家)》에도 당시 이름높던 문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거록의 위징"을 언급하는 등 위징의 고향을 거록으로 명기하고 있다. [[오대 십국]] 시대에 편찬된 《구당서》 위징열전에서는 이 설을 따라서 거록 곡성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주의 대상경자에서 태어났다(生于周大象庚子)"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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