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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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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라쿠스 형제는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지칭한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팽창과 사회 변화 속에서 발생한 빈부 격차와 자영농 몰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티베리우스는 농지법을 통해 공유지 재분배를 시도했으나, 기득권층의 반발로 암살당했다. 가이우스는 형의 개혁을 계승하여 곡물법, 도로 건설 등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사망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로마 공화정의 정치적 갈등과 폭력을 심화시켰으며, 공화정 붕괴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역사적으로 사회 개혁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프랑스 혁명 시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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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그라쿠스 형제
로마자 표기법Gracchi
활동 시기기원전 2세기 후반
직업로마 공화정 정치가
개혁가
형제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
가문셈프로니우스 씨족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이름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로마자 표기법Tiberius Sempronius Gracchus
출생기원전 163년 ~ 162년
사망기원전 133년
주요 활동호민관
토지법 개혁 추진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름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로마자 표기법Gaius Sempronius Gracchus
출생기원전 154년
사망기원전 121년
주요 활동호민관
곡물법 제정
사법 개혁 추진
기사 계급 지위 강화
개혁 내용
주요 개혁토지법 개혁 (티베리우스)
곡물법 제정 (가이우스)
사법 개혁 (가이우스)
기사 계급 지위 강화 (가이우스)
목적로마 공화정 내부의 불평등 해소
빈민 문제 해결
사회 개혁 및 민주주의 강화
결과 및 영향
결과개혁 시도 중 귀족 세력의 반발로 형제 모두 암살됨
로마 공화정 후기 혼란의 단초 제공
로마 내전의 배경이 됨
영향로마 사회에 큰 파장과 변화를 가져옴
후대 로마 정치가들에게 영향
개혁 정신의 상징으로 기억됨
평가
평가로마 공화정의 개혁가로 평가됨
평민들의 지지를 받았음
귀족 세력의 반발을 불러왔음
개혁의 한계점 존재
참고 문헌
참고 문헌Russell Sturgis, The appreciation of sculpture: a handbook, 1904
로버트 키스 리들리, The History of Rome, 2000
Mitchell, The Cambridge Encyclopedia of Archaeology, 1980
P. Launaro, The Archaeology of Italy : From the Earliest Neolithic through to the Early Roman Empire, 2011
S. Roselaar, and H. I. Flower, The Oxford Handbook of Roman Social Relations, 2010
足立, 로마사

2. 역사적 배경

포에니 전쟁 등 로마의 팽창 과정에서 농지가 황폐해지고 중소농민이 몰락하여 로마 등 대도시로 유입되었다. 전승으로 부유해진 노빌레스 등 유력자들은 몰락한 중소농민의 농지를 매입하여 노예를 이용한 대토지 소유(라티푼디움)를 확대했다. 로마 군단의 주력이었던 중소농민의 몰락은 로마 군의 약체화를 초래했다. 이에 공유지(아게르 푸블리쿠스) 재분배와 중소농민 구제를 목표로 한 것이 그라쿠스 개혁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의 설명은 고고학적 증거와 모순되어, 최근 연구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2. 1. 로마의 팽창과 사회 변화

포에니 전쟁 등 장기간의 전쟁으로 로마의 영토는 확장되었지만, 농지는 황폐해지고 중소 자영농은 몰락하여 로마와 같은 대도시로 유입,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전쟁으로 부를 축적한 귀족(노빌레스)들은 몰락한 자영농의 농지를 사들여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대토지 소유(라티푼디움)를 확대했다. 로마 군단의 주축이었던 중소 자영농의 몰락은 곧 로마 군사력 약화를 의미했다.[2]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이탈리아 농촌에서 자유 농민의 급격한 감소는 고고학적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군 복무와 소농의 쇠퇴를 연결짓는 서술은 과장되었으며, 노예 운영 대농장의 확산과 자급자족적 소농의 생존 여부에 관한 이전 주장은 신뢰성이 훼손되고 있다.[2]

플루타르코스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트루리아의 황폐한 땅을 보고 개혁을 결심했다고 기록했지만, 최근 발굴 조사에 따르면 에트루리아에서 대규모 농장이 중소 농민을 몰아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농번기에는 중소 농민의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대규모 농장과 공존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4]

켄수스(국세조사) 결과로 소농의 몰락을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켄수스 수치가 징병 가능 연령층만 나타내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니발 전쟁 이후 켄수스 수치가 절반으로 줄었지만, 기원전 160년대에는 전쟁 이전보다 증가했기에 몰락을 단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는 라티푼디움과 중소 농민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로마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공화정 연구자와 제정 연구자가 대토지 소유의 정점을 각각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로 다르게 보는 등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2. 2. 그라쿠스 형제의 가문 배경

기원전 163년경에 태어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5]와 기원전 154년경에 태어난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6]는 기원전 177년과 163년에 집정관[7]을 지냈고 기원전 169년에는 검열관[7]을 지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아들들이었다. 그는 기원전 178년과 175년에 두 번 개선식을 거행했다.[8]

그들의 어머니는 저명한 장군이자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인 코르넬리아였다.[9] 그들의 여동생 셈프로니아는 또 다른 중요한 장군이자 정치가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내였다.[9]

그라쿠스 가문은 혈통적으로는 플레브스이지만, 기원전 238년에는 집정관을 배출했으며, 실질적으로는 노빌레스로 간주된다.

3.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 호민관에 당선된 후 농지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로마는 잦은 전쟁으로 병력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고, 자영농 몰락으로 군 복무 자격을 갖춘 시민 수가 감소하고 있었다.[3] 티베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법(Lex Sempronia Agraria)을 제안했다.[11]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은 국가 소유 토지(공유지) 소유 한도를 제한하고, 초과분을 가난한 시민에게 분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11]


  • 국가 소유 토지를 조사, 측량, 목록화할 위원회 설립.
  • 한 소유주가 소유할 수 있는 공유지의 양을 약 500유게라(jugera)로 제한하고, 자녀가 두 명인 경우 최대 1,000유게라까지 허용.
  • 나머지 토지를 가난한 로마 시민에게 분배하여 사유화 (이탈리아인은 제외).


이는 인구 증가를 유도하고, 군 복무 가능 인원을 늘리기 위함이었다.[11] 500유게라 제한은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Sextian-Licinian rogations)에 규정된 내용으로, 티베리우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법이 전통에 따른 것이며 급진적인 새 법이 아님을 강조하려 했다.[12]

분배된 토지는 양도 금지 및 세금 부과 대상이었는데, 이는 수혜자들이 토지를 쉽게 되팔지 못하게 하고, 토지 포기 시 국가가 환수하여 다른 사람에게 재분배하기 위함이었다.[11]

티베리우스의 개혁은 일부 귀족 지지를 얻었지만, 다른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등 반대 세력에 부딪혔다. 반대 세력은 몰수가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 지배 계급에 해를 끼치고, 토지 개량 투자자를 불공정하게 몰수하며, 상속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11]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 민회에서 옥타비우스를 파면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강수를 두었다.[11]

티베리우스가 제안한 셈프로니우스 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 이름내용
렉스 셈프로니아 아그라리아 (Lex Sempronia Agraria|셈프로니우스 농지법la)공유지(ager publicus|공공 토지la) 소유 한도를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개정, 500유게라로 정하고 자녀 1인당 250유게라 추가, 총 1,000유게라 허용. 초과분은 국가 매입, 매년 선출 토지 분배 위원 통해 분배.
렉스 셈프로니아 아그라리아 알테라 (Lex Sempronia Agraria Altera|제2 셈프로니우스 농지법la)토지 분배 위원 3인 선출, 공유지 관련 분쟁 판결 권한 부여.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데 키비타테 소키스 단다 (Rogatio Sempronia de civitate sociis danda|동맹시 시민권 부여 제안la)동맹시에 로마 시민권 부여 제안. (신빙성 낮음)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데 페쿠니아 레기스 아탈 (Rogatio Sempronia de pecunia regis Attali|아탈루스 왕 재산 관련 제안la)아탈로스 3세 유증 페르가몬 재산 관련 제안. 토지법 따라 토지 분배.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데 프로보카티오네 (Rogatio Sempronia de provocatione|상소 관련 제안la)상소 관련 제안. 특별 심문소(quaestiones extraordinariae|특별 재판소la) 판결에도 상소 인정.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밀리타리스 (Rogatio Sempronia militaris|군 복무 관련 제안la)군무 제안. 병역 의무 경감 호소, 시민 지지 목적. (공포 여부 불확실)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유디키아리아 (Rogatio Sempronia iudiciaria|심판인 관련 제안la)심판인 제안. 재판 심판인(다수결 판결, 배심원 유사)을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으로 나눔.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 제지.
렉스 셈프로니아 드 마기스트라투 M.옥타비오 아브로간도 (Lex Sempronia de magistratu M. Octavio abrogando|마르쿠스 옥타비우스 해임법la)정무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해임 법. 호민관 해임 최초 사례.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 해임, 아탈로스 3세 유증 페르가몬 독단 처리 시도, 호민관 재선 시도 이유로 반대파에 암살당했다.[10] 그의 죽음은 로마 정치 폭력화 신호탄이었다.

3. 1. 개혁 이전의 상황

기원전 2세기 동안 병력 모집의 어려움과 징집에 대한 저항이 기록되었다. 주로 징집할 병력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된 로마의 인구조사는 기원전 159년부터 이탈리아 자유민 인구 감소를 보이기 시작했다.[3] 정치인들은 자원병을 확보하려 했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징집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4]

하지만 전쟁을 위한 병력 모집의 어려움이 이탈리아 시골 지역 인구의 실제적인 감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130년대 인구조사에서 로마 공화국의 시민 인구 감소가 보고되었지만, 당시 이러한 인구 감소는 스페인에서의 로마의 인기 없는 원정에 대한 참전 의지 부족과 연결되지 않았다.[3] 징병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검열관에게 등록을 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검열관의 보고서를 설명하기 위해 인구의 실제 감소가 필요하지 않았다.[4]

2세기 이탈리아 전역에서 확인된 소규모 농장의 고고학적 증거와 수확철에 필요한 노동력의 일반적인 필요성으로 인해 학자들은 "2세기 소규모 독립 농민의 일반적인 감소를 추론할 만한 근거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3] 기원전 133년까지 시골 인구 감소에 대한 그라쿠스 형제의 서술은 "오래전에... 허위로 판명되었다"는데, 이는 시골 자영농의 일반적이고 실제적인 감소가 아니라, 상업적 노예 농장이 지배적인 해안 에트루리아의 지역적 감소로부터 일반화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4]

로마에 가까운 시골 지역에서는 인구 증가와 상속 분할로 인해 이전에는 적당했던 농장이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너무 작은 구획으로 분할되었다.[3] 이러한 소규모 농장의 상당수는 경제적으로 생존 가능하지 않았다. 로마 근처의 높은 토지 가격과 결합하여 이러한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고 대신 임금 노동에 종사했다. 임금 노동자들의 임시 노동은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특히 수확철에 그러했다.[4] 기원전 133년 이전 몇 년 동안 대규모 공공 기념물 건설의 중단은 도시 노동 수요를 감소시켰고, 장기간의 열악한 노동 시장 상황을 초래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경기 침체는 시칠리아에서의 진행 중인 노예 반란으로 인한 고물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시칠리아는 로마로 상당량의 곡물이 수송되던 섬이었다.[3]

기원전 133년 이전 수년 동안 여러 개혁이 시도되었다. 성공적인 개혁 중 하나는 기원전 139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집정관이 비밀투표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비밀투표를 확대한 법률은 기원전 137년에 카시아 법으로 통과되었다.[3] 비밀투표의 도입은 후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프로그램에 필요한 조건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인민회를 엘리트의 통제로부터 보호했기 때문이다.[4] 가비니우스의 법이 제정되기 직전인 기원전 140년에는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집정관이 토지 개혁을 제안했지만, 침략과 상원의 반대에 부딪혀 제안을 철회하고 Sapiens|사피엔스la라는 별명을 얻었다.[3]

고대 역사가들, 특히 플루타르코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형제들을 하나의 단위로 보았다. 현대 학자들은 그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정치적 맥락에서 보기 시작했다.[10]

그라쿠스 형제의 동기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긍정적인 고대 자료들은 그의 개혁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열정적인 옹호로 돌린다. 키케로와 같은 덜 긍정적인 고대 자료들은 그의 행동을 스페인에서 패배한 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굴욕적인 조약 이후에 그의 지위와 명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돌린다.[3]

플루타르코스는 티베리우스가 에트루리아를 지날 때 황폐한 땅을 보고 이 개혁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 에트루리아에서 대규모 농장이 중소 농민을 몰아냈는지는 의문이며, 오히려 농번기의 노동력으로 중소 농민이 필요로 되어 대규모 농장과 공존하고 있었다고 추측하는 설도 있다.[3]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33년에 호민관에 취임하여 현행법을 재적용하면서 개혁을 시작했지만, 그의 개혁 동기가 기존의 중소농민 구제가 아니라 중소농민의 자산을 고정시킴으로써 군무 자격자를 유지하는 데 있다는 설도 있다. 이는 셈프로니우스 법에 토지의 양도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3]

또한, 로마의 사회적 위기가 아니라 그가 속한 그룹의 당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풀케르 가, 티베리우스가 속한 셈프로니우스 가문의 그라쿠스 가, 무키우스 가문의 스카에볼라 가로 구성된 그룹의 수령은 티베리우스의 장인인 아피우스 풀케르(기원전 143년 집정관)였으며, 그들의 지지층을 확대하기 위해 개혁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설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3]

그의 동기를 젊은 시절의 "누만티아 사건"에서 찾는 설도 있다. 기원전 137년,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휘하에서 재무관이었던 티베리우스는 히스파니아 키테리올에 파견되었다. 이 지역은 그의 아버지가 제1차 켈티베리아 전쟁에서 활약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로마군은 적에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렸고, 티베리우스가 강화로 이끌었지만 귀국 후 고발당했다. 티베리우스는 무죄가 되었지만, 그에게 조상과 인연이 있는 땅에서의 실패는 큰 좌절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후일 강경한 태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3]

테오도르 모름젠은 "개인적인 동기가 그를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누만티아와의 평화 조약은 사실상 그의 공적이며, 원로원이 이 조약을 파기한 것, 그 때문에 집정관이 항복하고 그라쿠스도 죄를 뒤집어쓸 뻔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젊고 자존심 강한 그가 지배층 귀족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서술했다.[3]

3. 2. 티베리우스의 농지법 (Lex Sempronia Agraria)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에 호민관에 당선된 후 농지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 국가 소유 토지를 조사, 측량, 목록화할 위원회 설립.
  • 한 소유주가 소유할 수 있는 공유지의 양을 약 500유게라(jugera)로 제한하고, 자녀가 두 명인 경우 최대 1,000유게라까지 허용.[11]
  • 나머지 토지를 가난한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하여 사유화 (이탈리아인은 제외).[11]


이 개혁의 목적은 인구 증가를 유도하고, 로마 군대에 복무할 수 있는 재산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11] 500유게라 제한을 포함한 것은 이 법을 mos maiorum|전통la 및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Sextian-Licinian rogations)으로의 복귀로 보이게 하여, 새로운 법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12]

분배된 토지는 양도 금지와 세금(라틴어: vectigal, 지대)이 부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혜자들이 단순히 토지를 되팔지 못하도록 양도가 금지되었다. 세금은 시민이 토지 할당을 포기할 경우 국가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토지가 국가로 되돌아가면 국가는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11] veteres possessores|구 소유주la는 또한 최대 500유게라 또는 1,000유게라 제한까지 자신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받았다.[11]

티베리우스는 농촌 인구 감소라는 인식된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던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기원전 133년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와 그의 형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무키아누스 등이 그를 지지했다.[11] 그는 또한 로마에서 계획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기 위해 많은 수의 농촌 플레브스를 성공적으로 규합했다.[11]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다른 호민관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에는 크게 세 가지 근거가 있었다. 첫째, 몰수는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의 지배 계급에 해를 끼칠 것이었다. 둘째, 이 법은 토지 개량에 돈을 투자한 사람들을 불공정하게 몰수했다. 셋째, 몰수는 토지에 담보된 지참금과 소유권이 안전하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상속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었다.[11]

투표가 이루어지고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하자, 문제는 원로원으로 넘어갔지만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전례 없이 의회에서 옥타비우스를 파면하고 법안을 통과시켰다.[11]

그가 기원전 133년에 제안한 셈프로니우스 법은 다음과 같다.

법 이름내용
렉스 셈프로니아 아그라리아 (Lex Sempronia Agraria|셈프로니우스 농지법la)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공유지(ager publicus|공공 토지la)를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의 규정을 개정하여 500유게라까지로 정하고, 자녀 1인당 250유게라를 추가하여 총 1,000유게라까지 허용. 초과분은 국가가 매입하여 매년 선출되는 토지 분배 위원에 의해 분배.
렉스 셈프로니아 아그라리아 알테라 (Lex Sempronia Agraria Altera|제2 셈프로니우스 농지법la)위의 토지 분배 위원 3인을 선출하고, 공유지와 관련된 분쟁에 대한 판결 권한 부여.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데 키비타테 소키스 단다 (Rogatio Sempronia de civitate sociis danda|동맹시 시민권 부여 제안la)동맹시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셈프로니우스의 제안. (신빙성이 낮다는 지적이 있음)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데 페쿠니아 레기스 아탈 (Rogatio Sempronia de pecunia regis Attali|아탈루스 왕의 재산에 관한 제안la)아탈로스 3세가 유증한 페르가몬의 재산에 관한 셈프로니우스의 제안. 토지를 토지법에 따라 분배.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데 프로보카티오네 (Rogatio Sempronia de provocatione|상소에 관한 제안la)상소에 관한 셈프로니우스의 제안. 특별 심문소(quaestiones extraordinariae|특별 재판소la)의 판결에 대해서도 상소를 인정.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밀리타리스 (Rogatio Sempronia militaris|군 복무에 관한 제안la)셈프로니우스의 군무 제안. 병역 의무 경감을 호소하여 시민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 (공포되었는지 의심스러움)
로가티오 셈프로니아 유디키아리아 (Rogatio Sempronia iudiciaria|심판인에 관한 제안la)셈프로니우스의 심판인 제안. 재판의 심판인(다수결로 판결을 내리는, 현재의 배심원에 가까운)을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으로 나눔.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제지.
렉스 셈프로니아 드 마기스트라투 M.옥타비오 아브로간도 (Lex Sempronia de magistratu M. Octavio abrogando|마르쿠스 옥타비우스 해임법la)정무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해임에 관한 셈프로니우스 법. 호민관을 해임한 최초의 사례.



티베리우스는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를 해임하고, 아탈로스 3세가 유증한 페르가몬을 독단으로 처리하려 했으며, 호민관 재선을 노렸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10]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호민관 재선을 놓고 경쟁하던 중 찬반 양측의 다툼이 발생했고,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는 집정관 푸블리우스 스카에볼라에게 티베리우스를 제거하여 국가를 구할 것을 요구했다. 스카에볼라가 이를 거부하자, 나시카는 의원들을 이끌고 민회에 난입하여 티베리우스와 300명 이상을 살해했다.[10]

4.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에 취임하여 여러 셈프로니우스 법을 제안했다. 그는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정책을 이어받고 더욱 발전시켜, 로마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키케로는 가이우스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과 원로원에 대한 반감으로 개혁을 추진했다고 기록했다.[16]



누만티아와의 강화에 대한 비난과,


원로원이 이 조약을 파기했을 때의 엄격한 태도는,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에게 잊을 수 없는 비탄과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 때문에, 그 용감하고 위대한 인물은 원로원을 떠났던 것이다.


또한,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형의 죽음을 목격하고,


형제애, 분노, 자신의 위대한 정신에 이끌려,


가족의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키케로 『점쟁이의 답변에 관하여』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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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는 다음과 같은 셈프로니우스 법을 제안했다.

  • 셈프로니우스 토지법(Lex Sempronia agraria): 형 티베리우스의 토지법을 개정하고 새로운 조항을 추가했다.
  • 셈프로니우스 도로법(Lex Sempronia viaria): 아마도 토지법에 부수하는 법으로 보인다.
  • 셈프로니우스 곡물법(Lex Sempronia frumentaria): 매달 아마도 5모디우스의 밀을 6아스와 3분의 1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규정했다.
  • 셈프로니우스 재판관 제안(Rogatio Sempronia iudiciaria): 원로원의 정원을 300명 또는 600명 증원하는 것을 제안했다.
  • 셈프로니우스 군무법(Lex Sempronia militalis): 군장비를 국고에서 부담하고, 17세 이하의 징병을 금지했다. 기원전 109년의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시라누스의 군무법으로 폐지되었다.
  • 셈프로니우스 해임법(Lex Sempronia de abactis): 한번 해임된 정무관의 재임을 금지했다.
  • 로마 시민의 사형에 관한 셈프로니우스 법(Lex Sempronia de capite civis romani): 시민 재판의 명령 없이 로마 시민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하고, 프로보카티오(상소)를 강화했다.
  • 두 집정관의 속주에 관한 셈프로니우스 법(Lex Sempronia de provinciis consularibus): 예정 집정관의 담당 지역을 최초의 원로원 회의 전에 원로원 결의로 정하고, 그 결의의 방해를 금지했다.

4. 1. 티베리우스 사후의 상황과 가이우스의 등장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토지법(Lex agraria)과 위원회는 그의 사망 후에도 존속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정책에 대한 반대는 그의 방법론에 대한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상원의원들은 원칙적으로 개혁 프로그램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다.[15] 고고학자들은 위원회의 경계석(cippi)을 발굴했는데, 이는 기원전 133년부터 130년까지 세 명의 위원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15] 경계 위치와 설명에 따르면 기원전 몇 년 만에 약 3,268 평방킬로미터의 토지가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이는 이탈리아 남부에 집중되어 약 1만 5천 가구가 혜택을 받았다.

경계석(cippi)에는 주로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을 위원회에 임명했지만, 그의 사망 후 크라수스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기원전 130년까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크라수스가 사망하자,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그들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위원회의 목표 중 하나는 그 당시 이탈리아 동맹국이 오랫동안 점유해 온 토지에 대한 로마의 주장을 재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은 불공정하고 부정확하게 서둘러 진행된 측량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29년에 상원은 그러한 불만을 접수했고, 토지 위원회의 권한을 제한할 기회를 잡았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는 상원으로부터 분쟁이 있는 소유권을 결정할 권한을 집정관에게 할당하는 법령을 제안하고 받아들였다. 기원전 129년까지 위원회는 3년 이상에 걸쳐 이미 모든 이용 가능한 무분쟁 토지를 분배했기 때문에, 그라쿠스의 경계석(cippi)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은 기원전 129년 이후로 대부분 중단된다.

4. 2. 가이우스의 개혁 정책

가이우스는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에 취임하여 형 티베리우스보다 더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16] 가이우스는 다양한 셈프로니우스 법(Lex Sempronia)을 제안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률 이름내용
셈프로니우스 토지법 (Lex Sempronia agraria)형 티베리우스의 토지법을 개정하고 새로운 조항을 추가.
셈프로니우스 도로법 (Lex Sempronia viaria)토지법에 부수하는 법으로 추정.
셈프로니우스 곡물법 (Lex Sempronia frumentaria)매달 5모디우스의 밀을 6아스와 3분의 1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규정.
셈프로니우스 군무법 (Lex Sempronia militalis)군장비를 국고에서 부담하고, 17세 이하의 징병을 금지. 기원전 109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시라누스의 군무법으로 폐지됨.
셈프로니우스 해임법 (Lex Sempronia de abactis)한번 해임된 정무관의 재임을 금지.
로마 시민의 사형에 관한 셈프로니우스 법 (Lex Sempronia de capite civis romani)시민 재판의 명령 없이 로마 시민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하고, 프로보카티오(상소)를 강화.
두 집정관의 속주에 관한 셈프로니우스 법 (Lex Sempronia de provinciis consularibus)예정 집정관의 담당 지역을 최초의 원로원 회의 전에 원로원 결의로 정하고, 그 결의의 방해를 금지.
셈프로니우스 재판관 제안 (Rogatio Sempronia iudiciaria)원로원 정원을 300명 또는 600명 증원하는 것을 제안.



기원전 122년에 제정된 셈프로니우스 법에 따라, 상설 착취 재판소(속주에서의 불법 수입 환수 청구)의 재판관 자격이 변경되었다. 이전까지는 원로원 의원들이 독점했지만, 이 법으로 기사 계급이 재판관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기사들은 원로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경제 활동의 자유를 얻었고, 가이우스를 지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는 가이우스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과 원로원에 대한 반감으로 개혁을 추진했다고 기록했다.[16]



누만티아와의 강화에 대한 비난과,


원로원이 이 조약을 파기했을 때의 엄격한 태도는,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에게 잊을 수 없는 비탄과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 때문에, 그 용감하고 위대한 인물은 원로원을 떠났던 것이다.


또한,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형의 죽음을 목격하고,


형제애, 분노, 자신의 위대한 정신에 이끌려,


가족의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키케로 『점쟁이의 답변에 관하여』 43


4. 3. 가이우스의 죽음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에 반대하는 원로원은 '최종 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통해 집정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에게 폭력 진압을 허가했다. 가이우스는 지지자들과 함께 저항했지만, 결국 진압 과정에서 살해당하거나 자결했다.

5. 그라쿠스 형제 개혁의 영향과 역사적 평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로마 공화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은 후기 로마 공화정의 시작이자 공화정 몰락의 시작으로 널리 여겨진다.[27] 키케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과 그 이전의 호민관직이 하나였던 백성을 둘로 분열시켰다고 말했다.[32]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은 상원이 ''최고 권한 상원 결의''라는 새로운 도구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21]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고대에는 주로 협력 관계로 여겨졌으며, 플루타르코스는 이 시기의 역사를 과도하게 단순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1] 반면, 키케로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그라쿠스 형제를 반란을 일으킨 민중 호민관으로 묘사하는 부정적인 전통을 따랐다.[32][33]

근대 초기에는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로마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편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두 형제의 정치 활동을 별개로 보며, 사회 혁명가로 규정하는 것을 부정한다.[29][30]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가 프랑수아-노엘 바부프는 그라쿠스 형제의 이름을 따 자신을 "그라쿠스"라고 칭했지만, 그의 계획은 토지 국유화와 공동 소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랐다.[28]

19세기 영국의 토지 둘러싸기 운동(enclosure) 지도자들은 그라쿠스 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36] 19세기와 20세기 초 일부 학자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그리스 정치 철학, 특히 그리스 민주주의 원리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현대에는 이러한 주장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존 애덤스는 그라쿠스 형제를 선동적인 정치가로 여겼지만, 1830년경부터 정치인들에 의해 귀족에 맞서는 평민의 영웅으로 자주 언급되기 시작했다.

5. 1. 개혁의 결과와 한계

가이우스의 개혁 대부분은 유지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기원전 119년경 아프리카에서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식민 활동의 증거가 발견되었고, 토지위원회는 기원전 111년까지 운영되었다. 그 시점까지 분배 가능한 토지 대부분은 이미 분배되었다.[21] 전반적으로 "귀족들의 반응은 대부분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배후 조종자들을 처형하는 반란을 진압하는 장군의 반응과 유사했다."[21]

5. 2. 역사적 평가와 의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은 후기 로마 공화정의 시작이자 공화정 몰락의 시작으로 널리 여겨진다.[27] 키케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그리고 그 이전의 그의 호민관직의 전체 이념은 하나였던 백성을 두 개의 뚜렷한 집단으로 분열시켰다"고 말했다.[32]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은 상원이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고 권한 상원 결의''라는 새로운 도구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21]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고대에는 두 형제가 주로 협력하여 행동하는 조직된 세력으로 여겨졌다. 많은 고대 자료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의 이야기에 기반한 긍정적인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31]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문학적 목표에 따라 "이 시대의 복잡한 역사를 과도하게 단순화"했다.[31] 반면, 키케로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같은 자료들은 그라쿠스 형제를 반란을 일으킨 민중 트리뷴으로 묘사하는 부정적인 전통을 따랐다. 키케로는 청중에 따라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조절했다.[32][33]

근세 초기에는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 프로그램이 로마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편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두 형제의 정치 활동을 별개의 것으로 보며, 그들을 사회 혁명가로 규정하는 것을 부정한다.[29][30]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가 프랑수아-노엘 바부프는 그라쿠스 형제를 따라 자신을 "그라쿠스"라고 불렀다.[28] 그러나 바부프의 계획은 토지의 국유화와 공동 소유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그라쿠스 형제의 계획과는 달랐다.

19세기 영국의 토지 둘러싸기 운동(enclosure)의 지도자들은 그라쿠스 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36] 19세기와 20세기 초 일부 학자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그리스 정치 철학, 특히 그리스 민주주의 원리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현대에는 이러한 주장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존 애덤스는 그라쿠스 형제를 선동적인 정치가로 여겼지만, 1830년경부터 정치인들에 의해 귀족에 맞서는 평민의 영웅으로 자주 언급되기 시작했다.

6. 한국적 관점에서의 평가 (더불어민주당 관점)

그라쿠스 형제는 불평등 해소와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한 선구적인 정치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추진한 농지 개혁은 토지 소유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 자영농을 육성하려 한 시도로서, 현대 한국 사회의 토지 문제와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22] 당시 로마는 귀족들이 공유지를 사유화하여 대농장을 소유한 반면, 많은 평민은 토지가 없어 몰락하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유지 점유 면적을 제한하고 남는 땅을 무산 시민에게 분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24]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곡물법(lex frumentariala)을 통해 로마 시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곡물을 제공하여 빈민층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26] 이는 국가가 농업의 변동성을 완화하여 투기꾼의 영향을 줄이고, 속주 주민들에게서 곡물을 착취하는 경향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기득권층의 반발로 실패했지만,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과 폭력 사태가 발생한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보수 귀족 세력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폭력으로 살해했는데, 이는 민주주의를 훼손한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다.

그라쿠스 형제의 사례는 한국 사회의 개혁 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혁은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힐 수 있지만,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동시에, 개혁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은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으므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노력이 필요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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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웹사이트 Tiberius and Gaius Gracchus - the earliest 'socialists' in recorded history https://anthropology[...] 2023-07-05
[36] 서적 Classics in the modern world: a democratic turn? Oxford University Press 2013-10-01 #날짜 형식 변경 및 월 추가 (October를 10월로 가정)
[37] 서적 The Grandeur that was Rome https://books.google[...] Sidgwick & Jackson Limited 1912-01-01 #날짜 형식 변경 및 일 추가 (1월 1일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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