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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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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아들이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자였다.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누만티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아프리카누스"와 "누만티누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헬레니즘 문화를 장려하고, 폴리비오스 등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로마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에 반대했으며, 기원전 129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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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남성 두상 청동상
"소위 '헬레니즘 군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로 잠정 확인됨"
이름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아이밀리아누스
로마자 표기P. Cornelius P. f. P. n. Scipio Africanus Aemilianus
별칭소(小) 스키피오
출생기원전 185년
사망기원전 129년 (55–56세)
출신 계급파트리키
가문스키피오 가문
씨족코르넬리우스 씨족
배우자셈프로니아
경력
트리부누스 밀리툼기원전 151년, 149-148년
레가투스기원전 150년, 140-139년
집정관 I기원전 147년
프로콘술기원전 146년
켄소르기원전 142년
집정관 II기원전 134년
프로콘술기원전 133-132년
아우구르기원전 ? -129년
군사 경력
참전 전쟁제3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 항구 전투
제2차 네페리스 전투
카르타고 포위전
누만티아 전쟁
누만티아 포위전
최종 계급프로콘술
수훈무랄 코로나
그라스 코로나
2 개선식
가족 관계
아버지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양아버지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처남티. 그라쿠스

2. 가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원래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으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영웅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대 스키피오의 장남이자 병약했던 사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양자로 입적되어 스키피오 가문에 들어가게 되었다.[44] 이로 인해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아이밀리아누스'는 그의 원래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임을 나타낸다.

그의 친고모인 아이밀리아는 양할아버지가 된 대 스키피오의 아내였으며, 대 스키피오는 의붓 삼촌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대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와 대 그라쿠스의 딸인 셈프로니아와 결혼하여[45],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처남-매부 관계가 되었다. 그의 친형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역시 파비우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는 등, 당시 로마 귀족 사회의 복잡한 입양 및 혼인 관계를 보여준다.

2. 1. 친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의 승리를 이끈 지휘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파피리아 마소니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 마케도니쿠스의 자녀들 중 가장 기대를 받던 활발한 아이였다고 한다.[44]

그의 친형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저명한 지휘관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의 아들이나 손자에게 입양되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본인 역시 스키피오 가문에 입양되었는데,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대 스키피오의 병약했던 장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양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아이밀리아누스'는 그의 원래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임을 나타낸다.

이 입양 과정에서 친가와 양가의 관계는 다소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그의 친고모 아이밀리아는 양할아버지가 된 대 스키피오의 아내였으며, 따라서 대 스키피오는 의붓 삼촌이기도 했다. 또한, 양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친고모 아이밀리아의 아들이었다.

대 스키피오의 딸이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양고모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는 대 그라쿠스와 결혼하여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딸 셈프로니아를 낳았다. 이 셈프로니아가 바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내가 되었다.[45] 이로 인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라쿠스 형제와 혈연 관계일 뿐 아니라 처남-매부 관계이기도 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밑에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며,[46]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밑에서 종군했다.[47]

  • 주요 가족 관계 (친가 중심)

관계이름비고
친조부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친아버지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승리 지휘관
친어머니파피리아 마소니스마케도니쿠스의 첫 부인
친형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에 입양됨
본인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스키피오 가문에 입양됨 (원래 이름: 불명, 아이밀리우스 가문)
친고모아이밀리아대 스키피오의 아내 (즉, 양조모)
양조부/의붓 삼촌대 스키피오제2차 포에니 전쟁 영웅, 친고모의 남편
양아버지/고모의 아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대 스키피오의 장남
양고모/고모의 딸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대 스키피오의 딸,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장인대 그라쿠스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의 남편
아내셈프로니아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의 딸
처남티베리우스 그라쿠스그라쿠스 형제
처남가이우스 그라쿠스그라쿠스 형제


2. 2. 양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파피리아 마소니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의 승리를 이끈 유명한 지휘관이었다. 스키피오의 친고모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결혼했으므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그의 고모부가 된다.

스키피오는 고모 아이밀리아와 고모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맏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입양되었다. 이 푸블리우스는 병약했다고 전해진다.[44] 이 입양으로 스키피오는 스키피오 가문의 일원이 되었으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양할아버지로 두게 되었다. 입양 후 그의 이름은 양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되었다. '아이밀리아누스'라는 이름은 그의 원래 노멘 젠틸리키움(가문 이름)인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해 유지한 것이다. 그의 친형 역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의 아들이나 손자에게 입양되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어릴 적부터 마케도니쿠스의 자녀들 중 가장 기대를 받던 활발한 아이였다고 한다.[44]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양고모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와 대 그라쿠스의 딸 셈프로니아와 결혼했다.[45] 이로 인해 유명한 개혁가인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의 처남이 되었다. 즉, 스키피오는 그들과 혈연 관계(사촌)이자 인척 관계(처남-매부)를 동시에 맺게 된 것이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젊은 시절 스키피오 밑에서 군 복무를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며,[46]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스키피오 밑에서 종군한 경험이 있다.[47]

아래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복잡한 가족 관계를 나타낸 표이다.

관계인물설명
친조부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친아버지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승리자
친형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에 입양됨
본인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친고모아이밀리아 테르티아대 스키피오의 아내
양조부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대 스키피오)제2차 포에니 전쟁 영웅, 친고모부
양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대 스키피오의 장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사촌
양고모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대 스키피오의 딸, 양부의 여동생
양고모부대 그라쿠스코르넬리아의 남편
아내셈프로니아코르넬리아와 대 그라쿠스의 딸
처남티베리우스 그라쿠스그라쿠스 형제 중 형
처남가이우스 그라쿠스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


3. 생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모 아이밀리아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내였다. 그는 사촌이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장남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양자가 되어 스키피오 가에 입적하였다.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하며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를 함락시키는 큰 공을 세웠고, 이 공적으로 '소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또한 기원전 134년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어 누만티아 전쟁을 지휘했으며, 기원전 133년 누만티아를 함락시키고 '누만티누스'라는 존칭을 추가로 얻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군사적 업적 외에도 스토아적 생활 신조를 지키며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여 헬레니즘 문화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치적으로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기원전 129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그 사인에 대해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주요 연보'''
연도내용
기원전 185년탄생
기원전 168년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종군 (피드나 전투)
기원전 151년누만티아 전쟁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부관으로 히스파니아에서 복무 시작
기원전 147년첫 번째 집정관 선출, 제3차 포에니 전쟁 지휘
기원전 146년카르타고 함락, 소 아프리카누스 칭호 획득
기원전 142년감찰관 선출
기원전 134년두 번째 집정관 선출, 누만티아 전쟁 지휘
기원전 133년누만티아 함락, 누만티누스 칭호 획득
기원전 129년사망


3. 1. 초기 생애와 군사 경력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모 아이밀리아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내였으므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그의 고모부가 된다. 이후 사촌이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장남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양자로 입적하여 스키피오 가의 일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자질을 보였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여러 아들 중에서도 스키피오를 가장 총애했으며, 그 이유를 "타고난 성품이 형제들보다 더 훌륭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스키피오는 전쟁과 공공 봉사에 적합한 천성을 지녀 일찍부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2]

기원전 168년, 17세의 나이로 아버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종군하여 피드나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뛰어난 용맹을 보였다. 전투 후 잔당 소탕 작전 중 잠시 행방불명되어 아버지를 비롯한 로마군 전체가 크게 걱정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의 피로 뒤덮인 채 무사히 귀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48]

피드나 전투의 승리로 마케도니아안티고노스 왕조는 멸망했고, 로마는 아카이아 동맹의 지도층 인사 1,000명을 인질로 로마에 연행했다. 이들 중에는 역사가이자 아카이아 동맹의 기병대장이었던 폴리비오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폴리비오스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의 친분으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스토아 학파 철학자 파나이티오스와 함께 어린 스키피오 형제의 가정교사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폴리비오스는 특히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의 우정은 책을 빌려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49] 어느 날 스키피오는 폴리비오스에게 자신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며, 법정 활동에 소극적인 자신을 사람들이 조용하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폴리비오스는 그의 기개를 칭찬하며 학문적, 인격적 성장을 돕겠다고 약속했다.[50] 폴리비오스는 이후 스키피오의 중요한 스승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기원전 151년, 히스파니아에서 누만티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로마 내에서 참전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당시 장래가 유망했던 젊은 스키피오는 마케도니아에서 중재 요청을 받기도 했지만, 군사 경력을 쌓기 위해 스스로 집정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휘하의 군사 호민관으로 누만티아 전쟁 참전을 자원했다. 그의 이러한 결정은 로마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덕분에 자원병 모집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한다.[53] 히스파니아 전선에서 스키피오는 뛰어난 용맹을 발휘했다. 그는 야만족과의 일기토에서 승리했으며[54], 인테르카티아(Intercatia) 공성전에서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오르는 공을 세웠다.[55] 그의 활약상은 로마에도 알려져, 당시 카르타고의 처리를 두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대립하던 대 카토조차 스키피오를 칭찬하며 다른 지휘관들의 무능함을 한탄했다고 전해진다.[57]

3. 2. 누만티아 전쟁 (151–150 BC)

기원전 152년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에 켈트이베리아인과의 평화 조약 체결을 제안했으나, 원로원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기원전 151년 집정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히스파니아로 파견하여 전쟁을 계속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아에서의 끊임없는 전투와 로마군의 막대한 피해에 대한 소문은 심각한 징병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마르켈루스마저 전쟁 지속을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공황 상태가 확산되었고, 젊은이들은 여러 핑계로 징병을 회피했다. 심지어 레가투스(군단장)나 군사 호민관(고위 장교) 자격을 갖춘 이들조차 자원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전쟁 수행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마케도니아로 파견되는 것이 더 안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상황을 이유로 원로원에 자신을 군사 호민관 또는 레가투스로 히스파니아에 파견해 달라고 자청했다. 원로원은 처음에 그의 결정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솔선수범은 징병을 기피하던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의 모범을 따라 레가투스로 자원하거나 병사로 입대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키피오는 루쿨루스 휘하에서 복무하며 뛰어난 용맹과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역사가 벨레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스키피오가 포위된 적의 성벽을 가장 먼저 올라 군기를 꽂은 공로로 수여되는 군사 훈장인 성벽 관(Corona Muralis)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플로루스는 스키피오가 켈트이베리아인 왕이 제안한 일대일 대결에서 승리하여, 적장의 갑옷과 무기를 빼앗는 가장 영예로운 전리품인 스폴리아 오피마(spolia opima)를 획득했다고 전했다.

3. 3. 제3차 포에니 전쟁 (149–146 BC)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지만, 로마 공화국 내에서는 카르타고에 대한 적대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카토 장로는 모든 연설을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라는 말로 끝맺을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기원전 150년,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가 로마 내 반(反)카르타고 세력의 지원을 받아 지속적으로 카르타고 영토를 침범하자, 카르타고인들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 패배 이후 로마의 허가 없이는 군사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로마는 카르타고가 누미디아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한 것을 조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기원전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선포하며 군대를 파견했다.[7]

전쟁 초기, 로마군은 카르타고 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고전했다. 당시 트리부누스 밀리툼(군사 호민관)으로 참전 중이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여러 차례 위기 상황에서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로마군이 카르타고 본토 공격에 실패했을 때, 그는 군대가 무질서하게 철수하는 것을 막아 큰 피해를 막았고,[8] 카르타고군이 켄소리누스 집정관의 진영을 야습했을 때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측면을 공격하여 격퇴했다.[9] 또한 물자 조달 중 매복 공격을 막아내고,[10] 로마 수송선을 보호하는 요새에 대한 카르타고군의 야습을 기발한 계책으로 물리쳤다.[10] 네페리스 근처 전투에서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 로마군을 공격하는 카르타고의 반격을 막아내며 또다시 군대를 위기에서 구했다.[11] 기원전 149년에는 제4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마니우스 마닐리우스 휘하에서 복무하며 튀니스 호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마시니사(Masinissa)의 임종을 지켜보는 스키피오


이듬해인 기원전 148년에는 죽음을 앞둔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마시니사는 스키피오가 자신의 임종을 지켜주기를 바랐으나, 스키피오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 가족들에게 로마와 스키피오 가문을 따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 사후 이틀 만에 도착하여 그의 유언에 따라 세 아들에게 누미디아 왕국을 분할해주고, 카르타고의 용병대장 파메아스 히밀코(en)를 설득하여 로마 편으로 끌어들였다.[58][59]

이러한 군사적 공적과 명망 덕분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기원전 147년, 법적으로 요구되는 최소 연령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7] 그는 관례적인 추첨 절차 없이 아프리카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년 동안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고, 카르타고 군민들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스키피오는 마침내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 시를 함락시켰다. 함락 과정에서 약 5만 명의 생존자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는 당시 카르타고 인구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불태웠으며, 땅을 갈아엎어 폐허로 만들었다. 이로써 제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과거에는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땅에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으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12][13][14][15] 로마로 개선한 스키피오는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그의 양할아버지이자 고모부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업적을 기리는 '아프리카누스'(Africanuslat)라는 아그노멘(칭호)에 '소(小)'를 더한 '소 아프리카누스'(Africanus Minorlat)라는 칭호를 얻었다.[7]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전쟁 중 아프리카에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풀관을 수여받았다고 한다.[16]

카르타고 함락 직후, 스키피오는 자신과 동행했던 역사가 폴리비오스에게 함대를 주어 아프리카 대륙 서쪽 해안을 탐사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과거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잠재적 위협 요소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폴리비오스는 탐사를 마치고 별다른 위협이 없다고 보고했으며, 이후 기원전 146년 루키우스 뭄미우스 집정관이 코린토스를 파괴하는 현장을 목격했다(코린토스 전투).

3. 4. 누만티아 전쟁 (143–133 BC)

기원전 151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루키우스 루키니우스 루쿨루스의 부관으로 히스파니아에서 복무하며 누만티아 전쟁에 처음 참여했다.

기원전 134년, 스키피오는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당시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오직 스키피오만이 9년간 교착 상태에 빠진 누만티아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여겼다. 법적으로 집정관 재선은 금지되었으나, 제3차 포에니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민회 결의를 통해 특례가 인정되어 히스파니아에서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75] . 그의 동료 집정관은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였다.

당시 히스파니아 주둔 로마군은 사기가 저하되고 군기가 문란했다. 기원전 137년에는 퀘스토르(재무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휘하에서 로마군의 패배를 막았으나, 이후 원로원으로부터 책임 추궁을 받기도 했다[76] . 스키피오는 부임 즉시 군 기강 확립에 착수했다. 병사들이 누리던 사치를 금하고, 2,000명에 달하는 종군 매춘부를 내쫓았으며, 짐 운반용 동물을 팔아 병사들이 직접 짐을 지게 했다[79] . 매일 장거리 행군, 야영지와 요새 건설 및 철거, 참호 파기와 메우기 등 혹독한 훈련을 실시하고 군율 위반자를 엄벌하며 군기를 바로잡았다.

군대가 준비되자 스키피오는 누만티아로 진군했다. 그는 누만티아인들의 게릴라 전술을 피하기 위해, 누만티아에 식량을 공급하던 바카에이족 영토를 거치는 우회로를 택했다. 도중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했다. 물이 부족한 지역을 통과할 때는 밤에 행군하고 쓴 물 우물을 파는 등 어려움을 극복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이후 로마와의 조약을 파기했던 카우카에이족 영토를 지나 누만티아 영토로 돌아왔다. 이때 누미디아 왕 미킵사는 아들 유구르타가 이끄는 궁수, 투석병, 코끼리 12마리를 원군으로 보냈다[17] . 유구르타는 스키피오 밑에서 활약했지만, 스키피오는 그에게 로마인의 우정을 돈으로 사려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77] . 이 원정에는 가이우스 그라쿠스, 실형 파비우스 막시무스, 그리고 젊은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기병으로 참전하여 활약했다. 스키피오는 마리우스를 차세대 지도자로 칭찬했다고 전해진다[78] .

스키피오는 6만 대군을 이끌었으나, 누만티아 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택했다(누만티아 포위전). 히스파니아 동맹 부족들의 지원을 받아 총 길이 9km, 높이 3m, 폭 2.5m의 거대한 포위 요새를 건설했다. 인접 늪지대에도 제방을 쌓고, 두에로 강(도루 강)에는 칼과 창끝을 박은 통나무를 연결한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의 탈출을 봉쇄했다.

기원전 133년, 오랜 포위로 식량이 떨어진 누만티아는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고, 인육을 먹는 참상까지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결국 누만티아는 항복했다. 일부 시민은 자결했고, 스키피오는 생존자들을 노예로 팔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했으며, 개선식을 위해 50명의 포로만 남겼다[18] . 이 승리로 누만티아 전쟁은 종결되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규모 저항은 막을 내렸지만, 완전한 평정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로마로 귀환한 스키피오는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으며[81] , 이 공로로 '누만티누스'(Numantinus|누만티누스la)라는 아그노멘(별명)을 얻었다[7] .

3. 5. 정치 경력



기원전 137년, 스키피오는 누만티아 전쟁에서 퀘스토르(재무관)로 복무하던 친척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도왔다. 당시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적에게 포위되어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티베리우스가 협상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로마에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원로원에서 거부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많은 병사의 친척과 친구들은 만키누스에게 책임을 돌렸고, 티베리우스 덕분에 많은 시민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조약 파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협상에 참여했던 퀘스토르와 군사 호민관들을 적에게 넘겨 책임을 묻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중은 티베리우스에 대한 호의를 보이며, 집정관 만키누스만 누만티아인에게 넘기고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다른 장교들은 살려주도록 투표했다. 스키피오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들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만키누스를 구하지 않고 티베리우스를 통해 맺어진 조약을 지키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받기도 했다.[20]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귀족파인 옵티마테스에 동조하지는 않았다고 본다.[21] 하지만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평민 호민관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려 했던 개혁 운동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만약 스키피오가 그라쿠스의 정치 활동 시기에 로마에 있었다면, 그라쿠스가 살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면서도[22], 스키피오가 그라쿠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에서 전쟁 중이었는데, 누만티아에서 티베리우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는 호메로스의 시구(오디세이아 1.47)를 인용하며 "이런 악행을 감행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멸망하라."고 말했다고 한다.[23] 로마로 돌아온 후,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민회에서 티베리우스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스키피오는 그의 개혁 조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답변을 했고 이로 인해 민중의 인기를 잃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 민중이 그의 연설을 방해하기 시작했고, 스키피오 역시 민중을 비난하게 되었다.[24]

스키피오는 그라쿠스법 시행 과정에서도 민중과 대립했다.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풀비우스 플라쿠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그라쿠스법 시행을 위한 토지 위원회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토지 소유자들과 분쟁이 발생했는데, 특히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소송에 불만을 품고 스키피오에게 변호를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전쟁에서 자신을 도왔던 동맹국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원로원에서 그라쿠스법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소송 당사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 위원회 대신 법원에서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집정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판결을 맡게 되었으나, 그는 문제의 어려움을 느끼고 일리리아 원정을 핑계로 떠나버렸다. 이 일로 민중은 스키피오에게 크게 분노했다. 아피아누스는 민중이 "자신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종종 귀족에 반대했던 스키피오가 이제 자신들을 상대로 이탈리아 동맹국의 편을 들면서, 법에 어긋나게 두 번이나 집정관으로 선출해 준 은혜를 저버렸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의 정적들은 스키피오가 그라쿠스법을 폐지하고 무력 충돌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스키피오는 자택 침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아피아누스는 그의 몸에 외상은 없었다고 기록했다.[25]

현대 역사가들은 스키피오의 죽음이 자연사 외에 다른 원인이라는 강력한 증거나 신뢰할 만한 주장은 없다고 본다.[26][27] 그러나 고대 기록에는 여러 암살 의혹이 남아있다.

아피아누스는 스키피오가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와 그의 아내이자 그라쿠스의 누이인 셈프로니아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아니면 그라쿠스 법안 폐지를 우려해 자살했는지 불확실하다고 기록했다. 또한 "[고문받은] 노예들은 밤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집 뒤편으로 침입하여 그를 질식사시켰다고 증언했으며,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에게 화가 나 있고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민중 때문에 말하기를 주저했다"고 덧붙였다.[28]

플루타르코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저녁 식사 후 집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어떤 이들은 그가 허약한 체질이라 자연사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그가 자신의 손으로 독극물을 투여하여 죽었다고 하며, 어떤 이들은 그의 적들이 밤에 그의 집에 침입하여 그를 질식사시켰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한 다른 기록에서는 "그의 몸에 난 몇몇 타박상은 그가 폭력을 당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고 언급하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스키피오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지목했다.[29]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의심을 받았으나,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저질러진 이 엄청난 만행에 대해 처벌이나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민중이 가이우스가 기소될 것을 우려하여 사법 조사를 반대하고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30]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또한 용의선상에 올랐으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재판 과정에서 카르보가 스키피오 살해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31]

3. 6. 의문의 죽음 (기원전 129년)

기원전 129년, 소 스키피오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비문에 따르면 그는 아우구르(조점관)였으며, 사망 시점은 봄의 라틴 축제 이후로 추정된다.[7]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에서 다양한 설명이 존재한다.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다음 날 연설을 위해 준비하던 스키피오가 침대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28] 아피아누스는 그가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와 그의 아내이자 그라쿠스의 누이인 셈프로니아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아니면 그라쿠스 법안 폐지를 우려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기록했다. 셈프로니아는 기형이 있었고 자녀가 없어 부부 사이의 애정은 없었다고 한다.[85] 또한 아피아누스는 고문받은 노예들이 "밤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집 뒤편으로 침입하여 그를 질식사시켰다"고 증언했지만, 스키피오에게 반감을 가진 민중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렸다고 덧붙였다.[28]

플루타르코스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언급하며, 허약한 체질로 인한 자연사, 스스로 독약을 먹고 자살, 또는 적들이 밤에 침입하여 질식사시켰다는 여러 가능성을 제시했다.[29] 그는 스키피오의 시신이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다고 전했다.[29] 다른 기록에서는 플루타르코스가 "그의 몸에 난 몇몇 타박상은 그가 폭력을 당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고 언급하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그날 스키피오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였다고 한다.[30]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용의선상에 올랐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로마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저질러진 이 엄청난 만행에 대해 처벌이나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민중이 가이우스가 기소될 것을 우려하여 사법 조사를 반대하고 방해했기 때문"이다.[30]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또한 고발되었는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재판 과정에서 카르보가 스키피오 살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31]

스키피오의 죽음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해석되기도 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에게 살해당한 후에도 그의 농지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토지 분배를 위한 3인 위원회는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가이우스 그라쿠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아피아누스는 이 토지 분배에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계 동맹시 주민들이 소 스키피오를 의지했고, 그가 3인 위원회에 반대했기 때문에 일부 과격파에게 노려졌다고 한다.[86] 이 토지 분배 문제는 이후 동맹시 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동맹시 전쟁#토지 이용을 둘러싼 갈등) 스키피오는 또한 원로원 의원을 에퀴테스(기사 계급)에서 배제하는 법안기원전 129년경으로 추정되는, 말 반환 민회 결의 (Plebiscitum reddendorum equorum). 의원으로부터 공유마를 빼앗고, 우선적 투표권을 빼앗는다.[87]과 카르보가 제출한 호민관 재선 가능 법안기원전 131년의 Rogatio Papiria de tribunis plebis reficiendis에도 반대했으며, 이탈리아계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은 일부 민중에게 배신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자연사 외의 다른 가설을 뒷받침할 강력한 증거 또는 신뢰할 만한 주장이 없다"고 평가한다.[26][27] 플루타르코스가 언급한 타박상이 없었다면, 과로나 폭음으로 인한 수면 중 질식사 가능성도 제기된다.

4. 인물 평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기원전 146년) 누만티아 전쟁에서 누만티아를 파괴(기원전 133년)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세워 각각 '소(小) 아프리카누스'와 '누만티누스'라는 존칭을 얻었다. 그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를 넘어 당대 로마에서 손꼽히는 교양인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스토아적 생활 신조를 지키며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였고, 특히 헬레니즘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여 로마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32][33][34][35][36]

역사가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스키피오가 "자유 연구와 모든 형태의 학습을 숭배하고 후원하며, 항상 집과 현장에서 재능이 뛰어난 두 사람, 폴리비오스파나이티오스를 곁에 두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스키피오보다 활동적인 삶의 의무를 여가 시간을 더 세련되게 활용하거나, 전쟁이나 평화의 기술에 더 헌신한 사람은 없었다. 항상 무기나 학문을 추구하며, 그는 위험에 노출하여 몸을 단련하거나, 학습을 통해 마음을 단련했다."[32]고 평가했다. 실제로 폴리비우스는 스키피오와 함께 아프리카를 탐험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3]

기원전 146년 친구 폴리비우스와 함께 카르타고의 폐허 앞에 있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묘사한 1797년 판화


카르타고 함락 당시, 스키피오는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친구이자 역사가인 폴리비우스에게 인간사와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드러내며, 호메로스일리아스 구절을 인용했다고 한다.[41][42]

''스키피오는 도시가 완전히 멸망하고 완전한 파멸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면서, 그의 적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공개적으로 울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모든 도시, 국가, 권위가 인간처럼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한때 번영했던 도시인 트로이와, 당시 가장 위대했던 아시리아 제국, 메디아, 페르시아, 그리고 그 영광이 매우 최근이었던 마케도니아 왕국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의도적으로 또는 그에게서 빠져나가는 구절을 통해 그는 말했다.''

:::''거룩한 트로이가 멸망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은 살해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스승이었던 폴리비우스가 자유롭게 그에게 그 말의 의미를 묻자, 그는 인간의 모든 일의 운명을 생각하며 두려워했던 자신의 조국을 숨기려는 시도 없이 언급했다고 한다. 폴리비우스는 실제로 그의 말을 들었고 그의 역사에 기록했다.''[42]


이러한 일화는 스키피오의 인간적인 면모와 깊은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또한 카르타고 함락 후, 시칠리아에서 약탈당했던 문화재들을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고[61], 노예로 팔려가던 마시니사의 친족을 구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61] 인도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겔리우스는 스키피오가 "당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어조를 사용했다"[34]고 평가했으며, 키케로는 그를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강조했지만, 폐를 쥐어짜거나 소리치지 않았다"[35]고 묘사하며 뛰어난 웅변가로 언급했다. 또한 키케로는 스키피오의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36] 스키피오는 키케로의 저서 국가론 제6권, 즉 스키피오의 꿈으로 알려진 부분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문화적으로 스키피오는 친헬레니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 그는 스키피오 서클이라 불리는 지식인 그룹의 후원자였는데, 이 그룹에는 역사가 폴리비오스, 스토아 철학자 파나이티오스와 같은 그리스 학자들뿐만 아니라, 로마의 풍자 작가 루킬리우스와 희극 작가 테렌스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친헬레니즘 성향은 로마의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이 로마 고유의 미덕과 관습을 해친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로마의 전통과 관습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겔리우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감찰관 시절 "백성들에게 조상들의 관습을 따르도록 촉구하는" 연설을 했으며[37], 당시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우리 조상들의 관습에 반하여 행해진" 것이라고 비판했다.[38] 또한 감찰관 재임 중 기사 작위를 박탈했던 호민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셀루스에게 고발당했을 때도, 관례와 달리 평상복 차림으로 당당하게 대응했다고 전해진다.[39][40]

스키피오 서클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서는 현대에 와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19세기 학자들은 키케로의 저술을 바탕으로 스키피오 서클을 헬레니즘화의 상징으로 간주했지만,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키케로 시대의 상황을 투영한 것일 수 있으며, 실제 정치적·문화적 그룹으로서의 실체에 대해서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키케로는 『웅변가에 관하여』에서 스키피오, 라일리우스, 필루스 등이 그리스 학자들을 가까이 두었다고 언급했다.

누마 폼필리우스피타고라스 학파였다는 설도 있지만,
그는 피타고라스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인물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배출해 온 인물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소(小) 스키피오, 레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필루스는
그리스에서 초빙한 학자를 항상 곁에 두었다.
키케로 『웅변가에 관하여』 2.37.154


테오도어 몸젠은 스키피오의 아버지 마케도니쿠스가 그리스 문화의 신봉자로서 자녀들에게 그리스식 교육을 시켰으며, 이러한 교육이 대 카토와 같은 보수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로마 상류층에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한다. 몸젠에 따르면 스키피오 서클에는 키케로가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스푸리우스 뭄미우스, 테렌스, 루킬리우스, 폴리비오스, 파나이티오스 등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5. 연표



6. 키케로의 작품 속 소 스키피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여러 작품에서 소 스키피오를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키며 그의 면모를 조명했다. 키케로는 스키피오를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강조했지만, 폐를 쥐어짜거나 소리치지 않았다…"[35]고 평가하며 뛰어난 웅변가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또한 유머 감각이 뛰어났음을 시사하며 그의 말장난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36]

키케로의 저작 중 『노년에 관하여』에서는 30대 중반의 젊은 스키피오가 연장자인 대 카토의 지혜로운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대 카토님, 저는 여기에 있는 라일리우스와 자주 이야기합니다.


모든 면에서 당신의 지혜는 탁월하시다고요.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당신에게 늙어가는 것이 조금도 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정에 관하여』는 스키피오 사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가 스키피오와의 깊은 우정을 회상하며 사위인 스카이볼라 아우구르와 가이우스 파니우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키케로는 이 작품을 통해 스키피오와 라일리우스의 이상적인 우정을 묘사했다. 전쟁 중에는 라일리우스가 스키피오를, 평시에는 스키피오가 연장자인 라일리우스를 존경하며 맺었던 그들의 관계는 후세에도 귀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스키피오는 갑자기 사라졌지만,


제 안에서는 살아있고, 계속 살아있을 것입니다.


제가 사랑했던 그의 미덕은 불멸이며, 언제나 제 앞에 있으며,


후세에까지 선명하게 기억될 것입니다.

기원전 54년에서 기원전 51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론』은 플라톤의 『국가』를 모델로 하여, 기원전 129년 스키피오의 저택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 제6권은 「스키피오의 꿈」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 스키피오가 꿈속에서 양할아버지인 대 스키피오를 만나 우주와 영혼의 불멸성, 그리고 로마 공화국에 대한 헌신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부분은 마크로비우스의 주석을 통해 전해지며, 고결한 사상을 담은 내용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하늘을 보라. 불멸의 집, 고향이기도 한 이 하늘을,


한결같이 보라. 자신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생각한다면,


세속의 평판, 보상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직 미덕만이 저절로 너를 높은 곳으로 이끌 것이다.

"스키피오의 꿈"이라는 제목은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의 서사시 『푸니카』 제15권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 즉 젊은 스키피오(대 스키피오)가 '덕'과 '쾌락' 사이에서 갈등하는 에피소드와 혼동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의 그림 『기사의 꿈』은 바로 이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또한, 18세기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세리아 『스키피오의 꿈』(Il sogno di Scipione|일 소뇨 디 시피오네ita, 1772년 발표)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는 키케로의 우주론적 내용과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의 선택 이야기를 결합한 것이다.

참조

[1] 서적 Coarelli p. 187
[2] 서적 Plutarch, Parallel Lives, The Live of Aemilius, 22.2–7
[3] 서적 Polybius, The Histories, 35.4.1–7
[4] 서적 Polybius, The Histories, 35, 4.8–14
[5] 서적 Velleius Paterculus, Roman History, I.12.3
[6] 서적 Florus, Epitome of Roman History 1.17
[7] EB1911
[8] 서적 The Fall of Carthage
[9] 서적 The Fall of Carthage
[10] 서적 The Fall of Carthage
[11] 서적 The Fall of Carthage
[12] 학술지 To Be Taken with a Pinch of Salt: The Destruction of Carthage
[13] 학술지 Jericho and Shechem: A Religio-Literary Aspect of City Destruction
[14] 학술지 A Legend of the Destruction of Carthage
[15] 학술지 The Destruction of Carthage: A Retractatio
[16] 서적 Natural History
[17] 서적 Roman History, Book 6, The Wars in Spain, 84–89
[18] 서적 Roman History, Book 6, The Wars in Spain, 90–98
[19] 서적 Les Scipions
[20] 서적 Parallel lives, The live of Tiberius Gracchus, 7.1–3
[21] 백과사전 Scipio Africanus the Younger http://www.britannic[...] 2013-05-04
[22] 서적 Parallel lives, The live of Tiberius Gracchus, 7.4
[23] 서적 Parallel Lives, The life of Tiberius Gracchus, 20.1
[24] 서적 Parallel Lives, The life of Tiberius Gracchus, 21.4–25
[25] 서적 Roman History, Book 13 The Civil Wars, 1.18–20
[26] 학술지 A survey of recent scholarship on the age of the Gracchi (1985-2005) https://www.persee.f[...] 2007
[27] 학술지 The Death of Scipio Aemilianus https://www.jstor.or[...] 1989
[28] 서적 Roman History, Book 13, The Civil Wars, 1.20
[29] 서적 Parallel Lives, The live of Romulus, 27.4–5
[30] 서적 Parallel lives, The live of Caius Gracchus, 10.4–5.
[31] 서적 De Oratore, II.40
[32] 서적 Roman History, 1.13.3
[33] 서적 The Histories, 34, 15.7, 16.2
[34] 서적 Attic Nights, 2.20.4
[35] 서적 De Oratore, 2.60
[36] 서적 De Oratore
[37] 서적 Attic Nights
[38] 서적 Attic Nights
[39] 서적 Attic Nights
[40] 서적 Attic Nights
[41] 웹사이트 Polybius - Livius https://www.livius.o[...] 2022-04-30
[42] 웹사이트 The Fall of Carthage https://penelope.uch[...]
[43] 서적 Les Scipions
[44] 서적 対比列伝
[45] 서적 対比列伝
[46] 서적 対比列伝
[47] 서적 対比列伝
[48] 서적 対比列伝
[49] 서적 歴史 (ポリュビオ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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