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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그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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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인으로, 군사 호민관과 퀘스토르를 거쳐 기원전 133년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그는 로마 사회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농지 개혁을 추진했으나, 원로원의 반발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암살당했다. 그의 개혁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목표로 했으며, 로마 공화정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정치적 폭력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개혁을 이어갔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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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그라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로마자 표기Tiberius Sempronius Gracchus
외젠 기욤의 그라쿠스 형제 기념 조각상의 티베리우스 흉상 (19세기)
외젠 기욤의 그라쿠스 형제 기념 조각상의 티베리우스 흉상 (19세기)
출생기원전 163년 경
사망기원전 133년 (추정 나이 29세)
사망 장소로마
사망 원인암살
업적농지 개혁
직위재무관 (기원전 137년)
호민관 (기원전 133년)
정당해당 사항 없음
자녀해당 사항 없음
부모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어머니: 코르넬리아
친척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
셈프로니아 (자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사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외할아버지)
군 경력
계급트리부누스 밀리툼 및 재무관
참전 전쟁제3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6년)
누만티아 전쟁 (기원전 137년)
전쟁 관련전쟁
상세 정보
라틴어 이름Ti. Sempronius Ti. f. P. n. Gracchus
출신 계급노빌레스
가문셈프로니우스 씨족
가계그라쿠스
관직트리부누스 밀리툼 (기원전 147년 - 146년)
재무관 (기원전 137년)
레가투스 (기원전 137년)
호민관 (기원전 133년)
토지 할당 재정 위원 (III vir agr. iud. assig.) (기원전 133년)
아우구르 (기원전 133년 이전)
지휘 전쟁해당 사항 없음

2. 배경과 군 경력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63년 또는 162년에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공화국귀족 가문 출신이었다.[2]

아버지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로, 집정관을 두 차례(기원전 177년, 기원전 163년) 역임하고 기원전 169년에는 감찰관을 지낸 유력 정치인이었다. 아버지는 또한 스페인에서의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두 번의 개선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인 코르넬리아였다. 티베리우스에게는 누이 셈프로니아와 남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있었다. 아버지는 티베리우스가 어릴 때 사망했고,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재혼하지 않고 자녀들의 교육에 헌신했다.[3] 누이 셈프로니아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결혼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지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 클라우디아와 결혼했다. 아피우스는 티베리우스의 외가 쪽 가문인 스키피오 가문의 주요 정치적 경쟁자였기에, 이 결혼은 두 가문 사이의 관계 개선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젊은 시절 군 경력을 시작하여, 기원전 147년 매형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에서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기원전 137년에는 콰이스토르(재무관)로서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하여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집정관을 따라 히스파니아로 갔다. 이 원정에서 로마군이 패배 위기에 처하자 티베리우스는 누만티아 측과 협상을 통해 조약을 맺었으나,[32] 이 조약은 로마 원로원에 의해 거부되었다.[33]

2. 1. 군 경력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47년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 동안 매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에서 사절 또는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하며 카르타고 함락 작전에 참여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파니우스와 함께 카르타고 성벽을 가장 먼저 오른 군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다음 해까지 복무했다. 청년 시절, 아마도 누만티아 원정 이전에 신조참사관으로 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튀니지의 카르타고 유적. 티베리우스는 제3차 포에니 전쟁 중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카르타고 함락에 기여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로 확장하여 기원전 2세기 중반에 누만티아와 충돌했다.


기원전 137년, 티베리우스는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의 콰이스토르[5]로서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하여 히스파니아 시테리오르(가까운 스페인)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만키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누만티아군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고, 혼란스러운 야간 퇴각 과정에서 결국 포위되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만키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항복 조약 협상을 맡겼다.

누만티아인들은 몇 년 전 퀸투스 폼페이우스와 조약을 맺었으나, 로마 원로원이 조약 비준을 거부하며 약속을 어긴 전례가 있었다. 그럼에도 티베리우스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과거 이 지역 총독을 지내며 쌓았던 신망 덕분이었다.[6] 협상 과정에서 티베리우스는 누만티아인들이 로마 야영지를 점령했을 때 빼앗긴 자신의 콰이스토르 회계 장부를 돌려달라고 요청했고, 누만티아인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 협상 덕분에 티베리우스는 포위된 많은 로마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32]

그러나 로마로 돌아오자 원로원은 이 조약이 로마에 굴욕적이라며 비준을 거부했다. 원로원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만키누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그를 벌거벗겨 누만티아인들에게 넘겨주었다. 티베리우스 역시 만키누스와 함께 쇠사슬에 묶어 보내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는 부결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체결한 조약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역사가 테오도어 몸젠은 원로원이 티베리우스가 체결한 조약을 파기한 이 사건이 그가 이후 반귀족적인 개혁 노선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33]

3. 로마 사회의 불안

연이은 전쟁으로 로마 사회는 불안정해졌고, 공화정 말기의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군 복무로 인해 자영농들은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고, 전쟁으로 획득한 속주에서 값싼 농작물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이탈리아 본토 농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유한 귀족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노예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라티푼디움(대농장)을 확장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반면, 전쟁에서 돌아온 자영농들은 경작지를 잃고 무산자가 되어 일자리를 찾아 로마 시로 몰려들면서 도시 빈민 문제를 심화시켰다.

로마의 영토 – '''' – 티베리우스의 호민관 임기 사건으로부터 약 40년 후인 사회 전쟁 직전에 붉은색으로 표시됨. 이 지도는 로마의 영토가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고, 동맹국들의 영토와 섞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130년대 후반, 티베리우스가 호민관으로 활동하던 시기 로마는 여러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공공 건설 사업의 부족으로 일자리가 줄었고, 시칠리아에서 발생한 노예 반란은 곡물 가격 상승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인구 증가로 식량 수요는 늘어났지만, 길고 힘든 군 복무에 대한 기피 현상이 심해지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는 도시 노동자들의 소득 감소로 이어져 생계를 위협했다. 농촌 지역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식민지 건설 중단으로 농촌의 자유 노동력이 과잉 공급되어 임금이 하락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 광대한 국유지, 즉 아게르 푸블리쿠스|ager publicusla를 확보했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거나 활용하지 못했다. 이론상 로마의 소유였으나 실제로는 많은 토지가 부유층에게 불법적으로 점유되었다. 아피아노스플루타르코스 같은 후대 역사가들은 부유한 지주들이 이 국유지를 불법 점유하여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라티푼디아|latifundiala를 운영했고, 이로 인해 가난한 농민들이 몰락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설명에 일부 의문을 제기한다. 대규모 상업 농업을 위한 국유지 점유는 도시 시장과의 거리 문제로 어려웠을 것이며, 노예를 동원한 대농장은 티베리우스의 개혁(렉스 셈프로니아 아그라리아|Lex Sempronia Agrariala) 이후인 기원전 1세기에 더 일반화되었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기원전 2세기 동안 이탈리아의 지속적인 인구 증가가 토지 부족 문제와 식량 압박을 심화시켰을 가능성이 더 크다. 분할 상속 관행은 농지를 가족 부양에 충분하지 않은 작은 규모로 계속 쪼개었고, 이는 농민들의 불완전 고용 상태를 야기했다. 특히 로마 근교처럼 토지 수요가 높은 지역에서는 가난한 농민들이 땅을 부유층에게 팔고, 수확기에만 일하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는 공공 사업이나 도시의 잡다한 일거리를 찾아 나섰지만, 기원전 140년 이후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줄면서 이들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군 복무 역시 더 이상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기원전 2세기 초와 달리, 130년대의 전쟁, 특히 히스파니아에서의 전쟁은 길고 희생이 컸으며 전리품도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탈영, 징병 회피, 사기 저하 현상이 만연했다. 당시 인구 조사에서는 로마 시민 수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는 실제 인구 감소라기보다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등록을 회피한 결과로 해석된다. 로마 당국은 기원전 125-124년 인구 조사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고 실제로는 인구가 증가했음을 확인했다.

정치적으로는 계속된 전쟁을 거치면서 원로원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권력은 소수의 유력 가문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심화와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몰락한 자영농의 증가는 로마 군단의 질적 저하라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졌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러한 로마 사회의 총체적인 위기를 인식하고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4. 농지개혁의 추진

기원전 134년 호민관에 당선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로마 사회의 고질적인 토지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 개혁을 추진했다.[15] 그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lex Sempronia agraria|렉스 셈프로니아 아그라리아la)'을 민회에 제안하여, 소수 귀족들이 과도하게 점유한 국유지(Ager publicus|아게르 푸블리쿠스la)를 제한하고 이를 토지 없는 빈민들에게 재분배하고자 했다. 티베리우스는 이 개혁을 통해 몰락한 자영농을 구제하고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하며 도시의 사회 문제를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플루타르코스는 티베리우스가 누만티아 전쟁 참전 길에 에트루리아 지방의 황폐화된 농촌 현실을 목격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민회 연설을 통해 병사들의 비참한 처지를 호소하며 지지를 얻었다고 전한다.

>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는 야생 동물들은 모두 은신처나 굴을 가지고 있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고 죽는 사람들은 공기와 빛을 누릴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다. ...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부와 사치를 지원하기 위해 싸우고 죽으며, 세계의 주인이라고 불리지만 그들 자신의 땅 한 덩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개혁안은 일부 진보적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대토지를 소유한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은 동료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통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으나, 티베리우스는 민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옥타비우스를 해임시키고 기원전 133년 법안을 통과시키는 강수를 두었다.[21]

이후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3세가 로마에 왕국을 유증하자, 티베리우스는 이 유산을 농지 개혁 재원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이는 원로원의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는 비판과 함께 극심한 반발을 샀다. 임기 만료 후 기소될 위기에 처하자 티베리우스는 관례를 깨고 호민관 재선에 도전했고, 이는 그가 독재를 추구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원로원과의 갈등을 극한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4. 1.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의 내용

기원전 134년 호민관에 당선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lex Sempronia agraria|렉스 셈프로니아 아그라리아la)'으로 알려진 농지 개혁 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오랫동안 유명무실했던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안(기원전 367년 추정)을 부활시켜 국유지 점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15] 당시 로마에서는 법적 상한선(500 유게라, 약 120ha)을 훨씬 초과하여 국유지를 점유하는 대토지 소유자들이 많았고, 이는 티베리우스가 해결하고자 했던 핵심 문제였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유지 점유 상한: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국유지(Ager publicus|아게르 푸블리쿠스la)의 상한선을 500 유게라(jugera, 약 1.3km2)로 제한한다. 추가로 성인 아들 명의로 1인당 250 유게라씩, 최대 두 아들까지 총 500 유게라를 추가 점유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따라 한 가문이 점유할 수 있는 국유지의 총 상한선은 1,000 유게라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 초과 토지 처리: 상한선을 초과하는 국유지는 국가에 반환해야 했다. 반환된 토지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확보된 토지는 토지가 없는 로마 빈민층에게 재분배되었다. 국가는 이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 재분배 토지 조건: 농민에게 재분배된 토지는 상속은 가능했지만, 매매나 양도는 금지되었다. 이는 소농의 몰락을 막고 자영농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분배된 토지에 대해 일정한 임대료(vectigal|벡티갈la)를 국가에 납부해야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누만티아 전쟁으로 가는 길에 에트루리아 지방에서 자영농이 사라지고 노예 노동이 만연한 현실을 목격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토지 없는 빈민들이 군 복무 자격을 잃어 국가의 군사력이 약화되고, 출산을 기피하여 인구가 감소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티베리우스가 다음과 같이 연설하며 빈민들의 처지를 호소하고 법안의 정당성을 역설했다고 전한다.

>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는 야생 동물들은 모두 은신처나 굴을 가지고 있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고 죽는 사람들은 공기와 빛을 누릴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다. 집도 없고 거처도 없이 그들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떠돌아다닌다. 그리고 그들의 [지휘관]이 전쟁에서 무덤과 신전을 적으로부터 지키라고 외치는 것은 거짓된 입술이다. 그들 중 누구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제단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 많은 로마인들 중 누구도 조상 무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부와 사치를 지원하기 위해 싸우고 죽으며, 세계의 주인이라고 불리지만 그들 자신의 땅 한 덩이도 가지고 있지 않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 존 리치의 그림으로, 길버트 아베트 아 벡켓의 ''로마의 유머 역사''에서 발췌. 티베리우스가 쓴 실크 해트는 그를 19세기 영국 정치인과 비교하기 위한 의도적인 시대착오이다.


따라서 이 법안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국유지의 공정한 재분배를 넘어, 토지를 잃은 농민들을 구제하여 자영농을 육성하고, 이를 통해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하며, 도시로 몰려든 빈민들을 농촌으로 돌려보내 사회 불안을 해소하는 데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개혁안은 당시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 장인이자 유력 원로원 의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그리고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무키아누스 등 일부 개혁적인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기존의 기득권을 침해당하게 된 대토지 소유자들과 원로원의 보수파 의원들은 법안에 강력히 반발했다. 이들은 수 세대에 걸쳐 점유해 온 토지에 투자한 비용과 사실상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법안 통과를 저지하려 했다. 특히,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동료 호민관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설득하여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와의 타협이 실패하자, 민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옥타비우스를 호민관직에서 해임시키는 초유의 조치를 단행했다.[21] 이는 로마 공화정의 관례와 규범을 깨는 행위로 평가받으며, 이후 로마 정치의 극심한 갈등을 예고하는 사건이 되었다. 옥타비우스가 해임된 후,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은 기원전 133년 민회에서 최종적으로 통과되었다. 법안 집행을 위해 티베리우스 자신과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장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로 구성된 3인 위원회가 설치되어 국유지 측량 및 재분배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4. 2. 원로원의 반발과 법안 통과

기원전 134년 호민관에 당선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제안한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은 대토지를 소유한 원로원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 법안은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공유지의 상한선을 500 유게라(jugera) (두 아들까지 각 250 유게라 추가 인정, 총 1,000 유게라 상한)로 제한하고, 초과된 토지를 국가에 반환받아 토지 없는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는 실질적으로 사유지처럼 사용되던 토지를 몰수하는 조치였기에, 해당 토지에 이미 많은 투자를 했거나 대대로 점유해 온 기득권층에게는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부는 해당 토지가 아내의 지참금의 일부이거나 가족 묘지 부지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원로원 세력은 티베리우스의 동료 호민관이었던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끌어들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21] 당시 로마의 정치 문화는 타협과 조정을 중시했지만, 티베리우스는 물러서지 않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는 옥타비우스에게 거부권 철회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평민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옥타비우스를 호민관직에서 해임하는 초유의 조치를 단행했다. 호민관이 동료 호민관을 해임시킨 것은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옥타비우스가 해임된 후,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은 기원전 133년 평민회에서 통과되었다. 법안 집행을 위해 토지 분배를 담당할 농지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승인 없이 법안을 민회에 직접 상정하고, 동료 호민관을 강제로 해임하는 등 기존의 정치적 관례와 규범을 깨뜨렸다. 이는 원로원과의 극심한 대립을 초래했으며, 로마 공화정 체제 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3. 아탈루스 3세의 유증과 갈등 심화

기원전 133년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 통과된 직후,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루스 3세가 사망하면서 자신의 왕국 전체와 재산을 로마에 유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농지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위원회 운영 자금이 부족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아탈루스 3세가 남긴 막대한 유산을 농지 개혁의 재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이 재산으로 토지 분배 대상이 된 농민들에게 농기구 등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거나, 토지 재분배를 위한 추가 토지 매입, 혹은 위원회 운영 경비 자체에 충당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원로원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외교 문제와 국가 재정, 특히 속주의 재산 처분은 원로원의 고유 권한으로 여겨졌는데, 호민관인 티베리우스가 이 권한을 침범하려 한다는 것이 반발의 주된 이유였다. 원로원은 티베리우스가 아탈루스 3세의 유산을 개인적인 정치 자금으로 사용하거나 왕처럼 행세하려 한다고 의심하며 비난했다. 특히 퀸투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공격했다. 또한, 농지법 통과 과정에서 동료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민회 투표로 해임시킨 전례 없는 조치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호민관직의 신성함과 동료 정무관 사이의 관계를 훼손하고, 강력한 호민관이 나타날 경우 견제 없이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는 지적이었다.

원로원의 반대로 농지 개혁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고, 임기가 끝나면 옥타비우스 해임 등의 혐의로 기소될 위험에 놓이자, 티베리우스는 당시 로마의 관례를 깨고 호민관직 재선에 도전했다. 로마의 정무관은 재임 중 면책 특권을 가졌으므로, 재선에 성공하면 기소를 피하고 개혁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 연임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설령 합법이라 하더라도 로마의 헌정 질서와 관례를 명백히 위반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반대파는 티베리우스가 재선을 통해 독재 권력을 추구한다고 비난하며 그의 재선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이로 인해 티베리우스와 원로원 사이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5. 죽음과 그 이후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 통과된 후, 원로원은 개혁을 방해할 목적으로 농지 분배 위원회에 매우 적은 예산만을 배정하여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3세가 사망하며 자신의 왕국과 재산을 로마에 유증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티베리우스는 이 유산을 농지 개혁 자금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으나, 이는 전통적으로 재정과 외교 정책을 관장해 온 원로원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져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원로원 내에서는 티베리우스가 유산을 사적인 야심을 위해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과 함께, 퀸투스 폼페이우스 같은 인물들은 그가 왕위를 노린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동료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у스를 평민회 투표를 통해 해임시킨 조치는 전례가 없는 일로, 호민관직의 권위를 훼손하고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티베리우스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의 폐지를 막고 옥타비우스 해임 등의 혐의로 기소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기원전 132년 호민관 재선에 출마했다. 당시 로마법상 호민관의 연속 임기는 불법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설령 합법이라 하더라도 이는 명백히 정치적 관례를 깨는 행위였다. 행정관은 재임 중 기소 면책 특권을 누렸으므로, 연임은 곧 면책 기간의 연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에 대한 반대는 그의 개혁 정책 자체보다는 이러한 후속 행동들에 더욱 집중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호민관 선거 당일, 카피톨린 언덕에서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원로원 회의에서는 티베리우스의 재선을 저지하기 위한 논의가 격화되었다. 최고 제사장이자 티베리우스의 사촌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는 집정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에게 무력 개입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qui rem publicam salvam esse volunt me sequaturla" (국가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자는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원로원 의원들과 지지자들을 이끌고 폭력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 수백 명이 살해당했으며, 이들의 시신은 티베르강에 던져졌다. 이 사건은 로마 공화정 역사상 정치적 갈등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비화된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5. 1. 암살

기원전 132년 호민관 선거날, 로마 광장에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수많은 지지자들이 모여들어 그의 재선이 유력해 보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이날 아침 불길한 징조를 겪었다고 한다. 집을 나서다 문에 발을 부딪혔고, 까마귀들이 기왓장을 그의 앞에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티베리우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이자 평민의 대표인 호민관인 내가 겁쟁이라고 적에게 욕을 먹을 수는 없다"고 말하며 만류를 뿌리치고 카피톨린 언덕에서 열리는 선거 투표장으로 향했다.

선거 결과를 지켜보던 원로원 회의에서, 티베리우스의 사촌이자 최고 제사장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는 티베리우스의 재선을 막기 위해 당시 집정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에게 무력 사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카에볼라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스키피오 나시카는 "qui rem publicam salvam esse volunt me sequatur|퀴 렘 푸블리캄 살밤 에세 볼룬트 메 세콰투르la" (국가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자는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직접 행동에 나섰다. 그는 머리에 토가를 덮어쓴 채 철제 곤봉 등으로 무장한 반대파 무리를 이끌고 투표가 진행 중이던 카피톨린 언덕의 코미티아로 난입했다. 나시카는 이 행위를 초기 독재관으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키는 종교적 의식(consacratio|콘사크라티오la)처럼 포장하려 했다.

나시카가 이끄는 반대파 폭도들은 광장에서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고, 돌, 나무 의자, 몽둥이 등 둔기에 맞아 살해당했다. 이 폭력 사태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포함하여 수백 명의 지지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해된 티베리우스와 지지자들의 시신은 티베르강에 던져졌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후, 원로원은 평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폭동의 주동자인 스키피오 나시카를 사실상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농지 개혁 법안 자체는 유지되었으나, 강력한 추진력을 잃고 지지부진해졌다. 티베리우스의 개혁 의지는 10년 후 호민관이 된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계승된다.

5. 2. 그 이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살해된 후, 원로원은 평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그라쿠스 살해의 주동자였던 스키피오 나시카를 사실상 추방하는 형태로 페르가뭄에 파견했고, 그는 다음 해 그곳에서 사망했다.[26] 이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 살해를 최소한 암묵적으로 승인했음을 시사하는 조치였다. 또한, 논란의 중심이었던 티베리우스의 농지 개혁 법안(lex Semproniala)은 폐지되지 않고 그대로 통과되었다.

그라쿠스 형제 시대의 가 발견되었거나 티베리우스의 의 결과로 예상되는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티베리우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농지 위원회 자리는 채워졌고, 위원회는 이후 몇 년간 활동을 지속했다. 이 시기 활동은 위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경계석(cippus|키푸스la)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대부분 가이우스 그라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위원회 활동 기간 동안 상당한 양의 토지가 분배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서 발견되는 그라쿠스 시대의 경계석들을 근거로 추정할 때, 약 130만 jugerala(약 3268km2)의 토지가 분배되어 7만에서 13만 명 사이의 시민이 정착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10년간 로마 시민 등록 수가 증가했는데, 이는 토지 분배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도 있지만, 위원회로부터 토지를 얻을 기회가 생기면서 시민들의 등록 의지가 높아졌거나, 센서스 등록에 필요한 재산 자격 요건이 4,000 아세스에서 1,500 아세스로 낮아진 영향일 수도 있다.

그러나 농지 위원회의 활동은 기원전 129년 이후 둔화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농지 위원회가 자신들의 토지를 부당하게 몰수하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들의 편에 서서 개입했다. 그의 설득으로 이탈리아 토지에 대한 결정권이 농지 위원회에서 집정관에게 넘어갔지만, 집정관들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위원회가 분배할 새로운 토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개입 직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그의 아내(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여동생)나 가이우스 그라쿠스 등 그라쿠스파가 그를 살해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24][25]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혐의를 신뢰하지 않는다.

한편, 기원전 132년에는 집정관의 감독 아래 원로원이 설립한 특별 법원에서 일부 그라쿠스 지지자들이 기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대대적인 정치적 숙청이라기보다는 주로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나 비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인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라는 강력한 지도자를 잃은 상황에서 토지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점차 동력을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다시 한번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6. 유산과 영향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은 고대 로마와 현대 학계 모두에서 로마 정치가 양극화되고 정치적 폭력이 일상화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키케로는 티베리우스의 죽음이 로마 사회를 두 파벌로 나누었다고 보았으나,[29] 현대 역사가 메리 비어드는 이를 수사적 단순화로 비판하며 이전부터 계층 갈등이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기원전 133년을 로마 공화정 쇠퇴와 위기의 시작점으로 간주한다.[31] 그의 죽음 이후 로마 정치에서는 극단적인 정치적 폭력이 용인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공화정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티베리우스의 살해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티베리우스의 살해를 사실상 승인하면서, 스키피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및 그라쿠스 가문 사이의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티베리우스의 개혁 시도와 죽음은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가이우스 역시 호민관이 되어 개혁을 추진했으나 결국 살해당했다. 다만 가이우스가 제안했던 정책 중 이탈리아 외부에 로마 식민지를 건설하는 방안은 이후 로마의 표준 정책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이는 늘어나는 인구와 토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6. 1. 한국적 관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은 고대 로마 사회가 직면했던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현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토지 소유 집중, 빈부 격차 문제와 유사한 측면이 있어 주목할 만하다.

당시 로마는 계속된 전쟁으로 사회가 불안정했고, 주력 군인이었던 자작농들은 장기간의 병역 의무로 인해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게다가 전쟁으로 획득한 속주에서 값싼 농작물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이탈리아 본토 자작농들의 경제적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수의 귀족과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은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라티푼디움(대농장) 경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빈부 격차는 극심해졌다. 결국 토지를 잃은 수많은 자작농들은 생계를 위해 로마 시내로 몰려들어 무산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는 로마 군단의 질적 저하라는 문제로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도 전쟁을 거치며 원로원의 권한은 강화되었고, 권력은 소수 가문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러한 로마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기원전 134년 호민관에 당선된 티베리우스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lex Sempronia agrariala)이라 불리는 농지 개혁 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의 핵심은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국유지를 재분배하여 자작농을 육성하고 사회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목내용
개인당 500 유게라(jugera, 약 1.3km2), 아들 1인당 250 유게라 추가 인정 (단, 한 가문당 총 1,000 유게라 초과 불가)
상속은 가능하나 타인에게 양도 불가
기준(1,000 유게라)을 초과하는 국유지는 국가에 반환하고, 국가는 해당 토지에 대해 보상. 반환된 토지는 토지 없는 농민에게 재분배하며, 정착 지원을 위해 국고에서 보조금 지급



이 법안은 약 백 년 전에 제정되었으나 사실상 사문화된 기존 법률을 부활시키는 형태였고, 완전한 평등보다는 과도한 토지 집중을 막고 공정한 분배를 추구했기 때문에, 원로원의 보수파들도 처음에는 명시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당할 것을 우려한 보수파는 티베리우스의 동료 호민관이었던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사주하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민중의 지지를 동원하여 옥타비우스를 탄핵하는 초유의 조치를 단행하고 농지법을 통과시켰다(기원전 133년).

이후 농지 분배 실행을 위한 재원 마련이 문제로 떠올랐는데, 때마침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루스 3세가 자신의 왕국 전체를 로마에 유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티베리우스는 이 유산을 농지 개혁 자금으로 활용하여 자작농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외교권과 해외 재산 처분권 등 전통적으로 원로원이 독점해 온 권한을 호민관이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보수파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반대파는 티베리우스의 호민관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그를 기소할 계획을 세웠다. 위기를 느낀 티베리우스는 당시 관례적으로 허용되지 않던 호민관직 재선에 도전하며 민중의 지지에 호소했다. 이에 반대파는 티베리우스가 왕이 되려 한다거나 독재를 꿈꾼다는 등의 비난을 퍼부으며 그의 재선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시도는 토지 소유의 불균형과 극심한 빈부 격차라는 로마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토지 문제와 자산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현대 한국 사회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특히, 그의 개혁이 결국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저항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좌절되었다는 사실은,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사회적 합의 및 정치적 안정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개혁의 명분과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의 조직적인 반발과 정치적 공세는 개혁의 동력을 약화시키고 결국 실패로 이끌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6. 2. 정치적 영향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은 로마 정치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살해는 귀족 세력이 민중 운동을 힘으로 억누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전까지 로마 공화정에서는 정치적 갈등이 있더라도 정적을 살해하거나 정치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극단적인 방식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27] 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도 도시를 떠나 영구 추방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28]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죽음 이후, 정치적 폭력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치는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미래의 더 심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길을 열었다.[27] 중기 공화정 시대의 정치적 분쟁 해결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티베리우스의 죽음은 또한 그의 시도가 보여주듯이, 공화정 체제 자체가 필요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시사했다.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 한 것은 아니었으며, 전통적인 정치 경력을 추구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했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의 공격적인 정치 방식은 공화정의 규범과 제도가 생각보다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냈으며, 토지 분배와 같은 중요한 정치 문제가 공화정의 근간을 흔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원로원이 티베리우스 사후에도 그의 지지자들을 계속 탄압하면서 로마 정치 공동체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이는 동료 시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사적인 폭력 사용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티베리우스의 살해는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이후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최후 원로원 결의라는 이름 아래 공공연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폭력의 사용은 결국 합의를 바탕으로 운영되어야 할 공화정의 기본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후, 원로원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폭력 사태의 주동자였던 스키피오 나시카를 사실상 추방하고 농지 개혁 법안 자체는 통과시켰다. 그러나 개혁을 강력하게 이끌던 티베리우스가 사라지자 토지 개혁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고, 결국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다시 한번 개혁의 깃발을 들고 보수파와 맞서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적 혼란과 폭력의 시대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 3. 이탈리아 동맹국에 대한 영향



아피아누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에게 토지를 주기 위해 행동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이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었다는 징후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토지 개혁 프로그램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이탈리아 동맹국들이었다. 아피아누스의 기록에서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지지자들은 결코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단지 시골의 평민들뿐이었다.

로마가 정복을 통해 국유지(ager publicusla)를 확보한 후, 이탈리아인들은 그 국유지를 계속 사용할 권리가 충성스러운 행동에 대한 보증이라고 예상했다. 가장 불만을 제기한 사람들은 부유한 과점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피아누스는 농지 위원회의 작업이 서두르고 부정확했다고 보고한다. 또한, 농지법(lex agrariala)에 따라 빼앗긴 토지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토지가 품질이 떨어졌을 수도 있어 불만을 부추겼다.

기원전 129년 이후 농지 위원회의 활동은 둔화되기 시작했다. 원로원은 농지 위원들이 이탈리아 동맹국들로부터 토지를 부당하게 몰수하고 있다는 불만에 주목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탈리아인들을 옹호하며, 이탈리아 토지에 대한 결정을 농지 위원회에서 집정관으로 옮기도록 설득했다. 집정관들은 즉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이는 위원회가 분배할 새로운 토지를 확보하는 능력을 늦추었다. 이 개입 직후, 스키피오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아내(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여동생이기도 함), 가이우스 그라쿠스 또는 그라쿠스 형제의 다른 동맹자들이 그를 살해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다. 이러한 혐의는 현대 역사가들이 믿지 않는다.[24][25]

결과적으로 로마가 오랫동안 행사하지 않았던 국유지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면서, 포에니 전쟁과 다른 분쟁 동안 보여준 이탈리아 동맹국들의 충성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는 불만을 부추기고 반란에 대한 동기를 제공하여, 결국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 간의 사회 전쟁 발발에 기여했다. 이탈리아인들과 토지 개혁 간의 상호 작용은 또한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제안을 포함하여, 이탈리아 귀족의 점유 토지를 로마 시민권 또는 provocatiola 권리와 교환하는 것과 같은 후속 제안을 가져왔다.

6. 4. 근대적 유산

"그라쿠스 바뵈프"의 판화. 그는 그라쿠스 형제의 이름을 따서 '그라쿠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프랑스 혁명에서 그라쿠스 형제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의 혁명가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는 스스로를 '그라쿠스 바뵈프'라고 칭했다. 이는 당시 그라쿠스 형제를 사유 재산 제한을 추구한 혁명적인 인물로 보는 시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Le Tribun du peuple|르 트리뷴 뒤 푀플프랑스어("인민의 호민관")이라는 이름의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뵈프가 사유 토지 소유를 완전히 폐지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전복시키려 했던 목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추구했던 개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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