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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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와왕은 부여의 왕으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해부루의 아들로, 곤연에서 발견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였다.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으며, 하백의 딸 유화부인을 만나 주몽을 낳았다. 주몽이 성장하자 대소 등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 했지만 금와는 주몽을 보호했다. 유화가 죽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으며, 이후 대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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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금와왕 |
한글 | 금와왕 |
한자 | 金蛙王 |
로마자 표기 | Geumwa Wang |
한국어 매큔-라이샤워 표기 | Kŭmwa Wang |
다른 이름 | 해금와 (解金蛙) |
왕조 | |
왕가 | 해씨 |
왕국 | 동부여 |
재위 기간 | |
즉위 | 기원전 48년 |
퇴위 | 기원전 8년 |
통치 | 기원전 48년 – 기원전 8년 |
전임 | 부루왕 |
후임 | 대소왕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부루왕 또는 해부루왕 |
배우자 | 미상 유화부인 |
자녀 | 대소, 갈사왕, 동명성왕 |
생애 |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전 7년 ~ 기원전 8년 경 |
기타 | |
칭호 | 금와왕 |
묘호 | 금와 |
2. 생애
해부루는 아들이 없어 곤연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발견하고 아들로 삼았는데, 이 아이가 곧 금와왕이다.[10][11] 금와는 해부루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우발수(優渤水)에서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만나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鄒牟王)을 낳았다.
추모가 장성하자 대소를 비롯한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였으나, 금와는 추모를 보호하였다. 추모가 대소왕의 음모를 피해 도피한 후 고구려를 건국하고,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죽자 금와는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얼마 후 금와가 죽고 대소왕이 왕위를 이었다.
2. 1. 출생과 성장
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였다. 어느 날 해부루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렸다. 해부루가 신하들에게 바위를 치워보게 하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는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며 기뻐하며 아들로 삼았는데, 이 아이가 곧 금와이다.[10][11]2. 2. 즉위와 유화부인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만났다. 하백은 압록강의 신이거나, 다른 해석에 따르면, 태양신 해밝이었다.[1][2][3][4] 금와는 유화부인을 방에 가두었는데, 햇빛을 받고 잉태하여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알을 버렸으나, 짐승들이 알을 보호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유화부인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그 알에서 고구려의 시조가 된 추모왕(鄒牟王)이 나왔다. 여기서 ‘추모’를 ‘주몽’이라는 하는 것은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중국이 낮춰 부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12][13]2. 3. 동명성왕과의 관계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만났다. 하백은 압록강의 신이거나, 다른 해석에 따르면, 태양신 해밝이었다.[1][2][3][4] 유화부인은 햇빛에 의해 잉태하여 알을 낳았는데, 금와왕은 알을 버리게 하였으나 짐승들이 알을 품어주는 등 기이한 일이 생기자 유화부인에게 돌려주었다.[12][13] 그 알에서 후에 고구려의 시조가 된 추모왕(鄒牟王)이 나왔다. ‘추모’를 ‘주몽(朱蒙)’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뜻으로 중국이 낮춰 부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12][13]추모가 장성하자 대소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시기하여 처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금와는 허락하지 않고 추모에게 말을 기르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추모가 대소의 음모를 피해 도피하자 추격대를 파견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인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죽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5] 얼마 후 금와가 죽고 대소왕이 뒤를 이었다.
2. 4. 죽음
기원전 24년 유화가 죽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12][13] 얼마 후 금와가 죽고 대소왕이 뒤를 이었다. 대소는 고구려의 2대 국왕인 유리명왕 재위 기간에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3대 국왕인 대무신왕은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를 살해했다. 내부 분열 이후 동부여는 멸망했고, 그 영토는 고구려에 흡수되었다.3. 금개구리 설화
해부루가 늙어 아들이 없자 후계자를 구하던 중, 鯤淵중국어(곤연)이라는 연못에서 왕이 탄 말이 바위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왕이 이상히 여겨 바위를 치우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있었다.[9] 왕은 하늘이 내린 아들이라 여겨 아이 이름을 금와라 짓고 태자로 삼았다.[7][8]
삼국유사에는 해부루가 곤연 호숫가 큰 바위 밑에서 금색 개구리(혹은 금색 달팽이) 모양의 아이를 발견하여 금와라 이름 짓고 태자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鯤淵중국어은 동부여 멸망 후 고구려가 관리하는 졸본 땅에 있었으며, 금와 일족은 곤연의 호족이었다고 전해진다.
4. 가계
해부루는 나이가 많아 후사가 없었는데, 곤연(鯤淵) 호수 근처 큰 바위 아래에서 금색 개구리 모양(혹은 금색 달팽이 모양)의 아이를 발견했다. 해부루는 아이의 이름을 금와(金蛙), 즉 황금 개구리(또는 황금 달팽이)라 지었고, 후에 그를 태자로 삼았다.
5. 대중 문화
참조
[1]
서적
Doosan Encyclopedia 유화부인 柳花夫人
http://terms.naver.c[...]
Doosan Encyclopedia
[2]
서적
Doosan Encyclopedia 하백 河伯
http://terms.naver.c[...]
Doosan Encyclopedia
[3]
서적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하백 河伯
http://terms.naver.c[...]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4]
웹사이트
유화부인
http://folkency.nf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2018-04-30
[5]
서적
Samguk Sagi
http://www001.upp.so[...]
2007-01-18
[6]
문서
近代の偽書では紀元前48年 - 紀元前7年とする説がみられる。
[7]
Wikisource
三國史記/卷13
[8]
웹사이트
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本紀第一 始祖東明聖王
https://web.archive.[...]
[9]
문서
金色のカエルの姿をした子供とは人間にとって不気味に思えるかもしれないが、古代中国ではカエルを神聖なものとして扱うことが多く、その文化の影響を受けた朝鮮半島でも神聖なものとして扱ったのではと推測する説もある。また別の説では鯤淵と金蛙が同じ音であることから金蛙はもともと鯤淵という湖沼の神格化で、水神だったという。水神が蛙の姿で現われると考えられていた。
[10]
문서
'김부식 (1145)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涙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 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왕이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할주|개구리는 또는 달팽이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고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금빛이 나는 개구리)이다.)'
[11]
문서
'일연 (1281) 북부여조, “夫婁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流。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兒金色蛙形。王喜曰。此乃天賚我令胤乎。乃收而養之。名曰金蛙。”(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구하였다. 〔부루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하고 의기롭게 우는 것을 보았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은 나에게 내려준 자식이로구나!” 하였다. 이에 맡아서 그를 키웠다. 이름하여 금와라 부르고...)'
[12]
뉴스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의 창씨개명"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7-03-12
[13]
문서
고구려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서길수 박사는 발표문에서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의 중국식 표기일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글자를 빌려 써 추모를 비하했다고 지적했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5세기 중엽의 고구려 모두루무덤에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로 표기했지만 6세기 중엽 이후 편찬된 위서(魏書)ㆍ주서(周書)ㆍ북사(北史)ㆍ수서(隋書) 등에서는 주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것, 서 박사는 "'주(朱)'자는 '난쟁이(侏)'라는 뜻이 있고 '몽(蒙)'자는 '속이다'ㆍ'어리석다'는 뜻으로 고구려의 시조를 '어리석은 난쟁이'로 폄하한 작명(作名)"이라며 "일본의 창씨개명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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