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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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구태왕은 2세기 후엽에 즉위한 부여의 왕이다. 120년 후한에 사신으로 온 태자가 위구태였으며, 122년 고구려 등의 공격을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 후한 말 요동의 군벌 공손탁과 혼인 동맹을 맺고, 그의 종녀를 왕후로 맞이했다. 위구태 사후에는 아들 간위거가 왕위를 이었다. 백제의 시조 구태와 이름이 유사하여 관련성을 추정하기도 하며, 부여가 백제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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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위구태(尉仇台) |
원래 이름 | 해위구태(解尉仇台) |
한자 표기 | 尉仇台 |
가나 표기 | 위구데 (ウィグデ) |
로마자 표기 | উইগ্যুদে (Wigude) |
통치 정보 | |
즉위 | 위구태왕(尉仇台王) |
재위 기간 | 197년 ~ ? |
묘호 | 미상 |
시호 | 위구태왕(尉仇台王) |
개인 정보 | |
출생 | 생년 미상, 부여(夫餘) |
사망 | 몰년 미상, 부여(夫餘) |
배우자 | 공손씨(公孫氏), 공손도의 종녀(宗女) |
자녀 | 간위거왕(簡位居王) |
부모 | 아버지: 시왕(始王), 어머니: 미상 |
왕조 및 가문 | |
가문 | 동부여(東夫餘), 백제(百濟) |
왕조 | 동부여(東夫餘), 백제(百濟) |
기타 | |
계승 정보 | 전임: 부태왕, 후임: 간위거왕 |
2. 즉위 이전
위구태의 선대 및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20년에 부여왕의 태자 신분으로 후한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구태는 후한 안제로부터 인수(印綬)와 금태(金綵)를 받았다.[10] 122년 고구려, 마한, 예맥 연합군이 현도군을 공격했을 때 부여는 위구태를 보내 이들을 막았다.[10] 이후 위구태는 기록에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167년 부여왕이 부태(夫台)였던 것으로 보아, 위구태는 왕위 계승권과 가까웠으나 모종의 이유로 즉위가 늦춰진 것으로 추정된다.[10] 일설에는 위구태가 구태의 후손이며, '위'(慰, 位와 통하는 것으로 봄)가 '닮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다.[10]
2세기 후엽에 즉위하였다. 후한 말기 요동의 군벌 공손탁이 선비 및 고구려 등의 이민족과 대립하자 부여는 공손탁의 세력과 유대하였다. 공손탁은 부여의 왕 위구태에게 종녀(宗女 : 조카딸)를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었다.[11] 이후 위구태가 죽자 아들 간위거가 뒤를 이었다.[11]
2세기 후엽, 후한 말기 요동의 군벌 공손탁이 선비 및 고구려 등의 이민족과 대립하자 부여는 공손탁의 세력과 유대하였다. 공손탁은 부여의 왕 위구태에게 종녀(宗女 : 조카딸)를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었다.[11] 위구태는 고구려와 선비에게 압박받았기 때문에 요동에 세력을 떨치던 공손도의 종녀를 아내로 맞아 공손씨와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부여의 안전을 도모했다.[3] 부여왕 위구태와 요동태수 공손도의 종녀와의 결혼을 통해 맺어진 동맹을 "결혼 동맹"이라고 부른다.[4]
여러 중국 사서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구태(仇台)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위구태와 이름이 비슷하여 관련성이 제기된다.[12][13][14][15] 위나라 관구검의 고구려 공격 이후, 부여는 중국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7] 이는 훗날 백제 건국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백제 온조는 부여를 성씨로 삼았고, 왕도 또한 부여라고 칭했다.[7]
3. 즉위 이후
4. 공손씨와의 혼인 동맹
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 공손도는 요동후·평주 목을 자칭하며 요동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했다. 공손도는 요동의 중국인 사회를 장악하고 오환 등의 주변 종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와 오환 등의 주변 종족을 지배하는 데 장애가 된 것은 고구려와 선비였다.[4] 한편, 부여는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위구태와 공손도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동맹 체결은 고구려의 국력 증강에 따른 파급 효과이기도 하다.[4]
『삼국지』에도 공손도가 요동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을 때(190년부터 204년) 공손도의 종녀와 결혼하여 결혼 동맹을 맺은 부여왕 위구태의 이름이 나온다.[5]
5. 백제와의 관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주몽이다.[7]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쳐 부여왕에게 인정받아 왕위에 오르고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그러나 주몽의 전처 소생 태자가 나타나자, 두 왕자는 남쪽으로 향했다. 한산에서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례성에 정착하여 백제를 건국했다.[7] 이나바 이와키치는 285년 모용씨에게 쫓긴 부여 잔당이 대방에 들어간 것이 백제일 것이라고 추정했다.[8]
5. 1. 부여와 백제의 관계에 대한 학설
중국 역사서인 《주서》[12], 《북사》[13], 《수서》[14], 《책부원구》 〈백제전〉은 백제의 시조를 구태(仇台)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태는 위구태와 비슷한 이름이기 때문에 위구태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15] 다른 견해로는 구태를 고이왕의 다른 이름으로 보아 위구태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고이왕은 234년에 즉위해 189년경 재위한 위구태왕과는 활동 시기에 큰 차이가 있어 문제가 된다.[16]
정시 연간(240~249년)에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한 후, 현도태수를 파견하여 부여에 이르게 하였다. 이후 부여는 중국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7] 이 부여는 훗날 백제의 건국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백제의 온조는 부여를 성씨로 삼았으며, 그 왕도 또한 부여라고 칭했다. 한때 중국 동북 지역에 있던 부여가 남하하여 한반도 남서부에 왕조를 열었다는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참고하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7]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 또는 주몽이라고 한다.[7]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그 땅의 부여왕에게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왕의 딸과 결혼하여 즉위하고 비류·온조 두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전처가 낳은 태자가 나타나자, 두 왕자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도읍을 정할 땅을 찾으려 했고, 형 비류는 해변에 머물렀으나, 열 명의 신하는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추홀로 갔고, 동생 온조는 위례성에 즉위하여 백제를 건국했다.[7] 이나바 이와키치는 "태강 6년(285년) 선비족 모용씨에게 습격받은 부여의 잔당은 장백산의 동옥저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동하여 대방에 들어간 것이 곧 백제일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8]
6. 가족 관계
참조
[1]
뉴스
魏志「東夷伝」における原初の北東アジア諸民族に関する論攷
http://id.nii.ac.jp/[...]
島根県立大学
2001-03-30
[2]
뉴스
위구태 尉仇台,?~?
https://www.doopedia[...]
""
2022-06-26
[3]
뉴스
위구태(尉仇台)
http://encykorea.aks[...]
2022-06-26
[4]
뉴스
결혼동맹(結婚同盟)
http://encykorea.aks[...]
2022-06-26
[5]
뉴스
建武 연간(A.D.25~55; 高句麗 大武神王 8~太祖王 3)에
国史編纂委員会
[6]
서적
백제건국설화에 대한 재검토
""
1971
[7]
뉴스
魏志「東夷伝」における原初の北東アジア諸民族に関する論攷
http://id.nii.ac.jp/[...]
島根県立大学
2001-03-30
[8]
서적
朝鮮史・満洲史
平凡社
1941
[9]
문서
《중국정사조선전》〈후한서 동이전 부여조〉주석 017
국사편찬위원회
1987
[10]
문서
이병도,〈부여고〉《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1]
문서
진수(3세기),《삼국지》〈卷30 烏丸鮮卑東夷傳〉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부여왕 위구태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했다....(공손)탁은 부여가 이들 두 나라 사이에 끼여 있음을 보고 왕실의 딸로서 처를 삼았다. 위구태왕이 죽자, 간위거가 왕이 되었다. )
[12]
위키문헌
주서/권49 백제
[13]
위키문헌
북사/권094 백제
[14]
위키문헌
수서/권81 백제
[15]
문서
이홍직, 〈백제건국설화에 대한 재검토〉《한국고대사의 연구》
1971
[16]
문서
이병도, 〈백제의 건국문제와 마한중심세력의 변동〉《한국고대사연구》박영사, 1976, 467~470페이지 / 천관우, 〈삼한의 국가형성〉《한국학보》3호, 1976, 132~14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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