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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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는 독일 국방군의 엘리트 부대로, 1921년 베를린 근위 연대로 창설되어 여러 차례 개칭 및 개편을 거쳐 1942년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확대되었다. 이 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동부 전선 등 다양한 전역에 참전했으며, 특히 쿠르스크 전투와 동부 전선에서의 치열한 전투로 유명하다. 그로스도이칠란트는 독자적인 부대 표식과 제복을 사용했으며, 전차 및 기갑 장비를 갖춘 정예 부대로 활약했으나, 전쟁 범죄에도 연루되었다. 1944년 기갑군단으로 재편성된 후, 동프로이센과 발트 3국에서 격전을 치르고 1945년 필라우 전투에서 괴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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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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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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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명칭 | 기갑척탄병 사단 "Großdeutschland" |
원어 명칭 | Panzergrenadier-Division "Großdeutschland" |
별칭 | "Die Feuerwehr" ("소방대") |
표어 | "Gott, Ehre, Vaterland" ("신, 명예, 조국") |
복무 기간 | 1942년 5월 19일 – 1945년 5월 9일 (베를린 경비 연대, 1921년) |
국가 | 독일 |
충성 | 해당 없음 |
군종 | 독일 육군 |
종류 | 기갑척탄병 사단 |
규모 | 사단 |
주둔지 | 그라펜뵈어 훈련장, 그라펜뵈어 근처, 바이에른 주, 독일 Zielenzig 근처 군사 훈련 지역, 브란덴부르크 주, 독일 |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공방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비알리스토크-민스크 전투 태풍 작전 청색 작전 르제프 전투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제1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트르구 프룸모스 전투 비스와-오데르 공세 동프로이센 공세 메멜 전투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빌헬름-후놀트 폰 슈토크하우젠 게르하르트 그라프 폰 슈베린 발터 회르늘라인 헤르만 발크 하소 폰 만토이펠 카를 로렌츠 디트리히 폰 자우켄 게오르크 야우어 |
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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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 |
관련부대 | 베를린 경비 연대 (Wachregiment Berlin) 독일 국방군 (Wehrmacht) "Großdeutschland" 보병 사단 (Infanterie-Division Großdeutschland) "Großdeutschland" 기갑척탄병 사단 (Panzergrenadier-Division Großdeutschland) "Großdeutschland" 기갑 군단 (Panzerkorps Großdeutschland) |
2. 부대 창설과 초기 역사 (1921-1939)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군은 10만 명 이하로 제한되었다. 많은 퇴역 군인들이 독일 의용군과 같은 민병대를 조직했고,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간의 충돌로 정권 전복의 위협이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1921년 초 '''베를린 근위 연대'''(Wachregiment Berlin)가 창설되어 수도 방어와 경비 임무를 맡았다. 이 부대는 잠시 해산되었다가 '''근위대 사령부'''(Kommando der Wachtruppe)로 재편성되었고, 이후 '''베를린 근위대'''(Wachtruppe Berlin), 다시 '''베를린 근위 연대'''(Wachregiment Berlin)로 여러 차례 개칭되었다.
2. 1. 베를린 경비 연대 (1921-1939)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군은 총 10만 명 이하로 제한되었고, 국내의 퇴역 군인들은 각자의 정치 이념에 따라 독일 의용군과 같은 민병대를 결성했다.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그룹은 거리에서 싸움을 벌였고, 정권 전복의 위험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그러한 혁명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921년 초, '''베를린 근위 연대'''(Wachregiment Berlin)가 창설되었다. 근위 연대는 아직 창립된 지 얼마 안 된 공화국을 수비하는 것 외에도 퍼레이드와 수도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근위 연대는 오래가지 못하고, 같은 해 6월에 해산했다. 그러나 곧 '''근위대 사령부'''(Kommando der Wachtruppe)로 재편성되어, 근위 연대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 1934년, 부대는 '''베를린 근위대'''(Wachtruppe Berlin)로 개칭되었고, 1936년에는 사령부 및 관리 중대가 추가되어 8개 중대가 되었다. 1937년 6월, 부대는 다시 '''베를린 근위 연대'''(Wachregiment Berlin)로 개칭되었고, 보급 중대도 전투 서열에 추가되었다. 베를린 근위 연대는 국제 회의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등에서 방문한 귀빈 경호도 수행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보디가드 부대를 창설하려고 했을 때, 무장 친위대와 함께 베를린 근위 연대에서도 인원을 차출했다. 이 보디가드 부대는 총통 호위대라고 불렸으며, 최종적으로 사단 규모의 Führer-Begleit-Bataillon|퓌러 베글라이트 바탈리온de이 되었다.
2. 2. 총통 호위대 (Führer-Begleit-Division)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경호 부대를 창설하려고 했을 때, 무장친위대와 함께 베를린 근위 연대에서도 인원을 차출했다. 이 경호 부대는 총통 호위대라고 불렸으며, 최종적으로 사단 규모의 총통 호위 사단이 되었다.3. 보병 연대 그로스도이칠란트 (1939-1942)
1939년 6월 14일,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 연대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 부대는 다른 육군 연대와 달리 전국에서 병사를 징집할 수 있었다. 같은 해 9월 재편성을 거쳤지만, 폴란드 침공에는 참가하지 않았다.[1] 파리에서 열린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후, 바다사자 작전과 펠릭스 작전 준비를 위해 이동했지만, 두 작전 모두 중단되었다.[1]
이후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전하여 베오그라드 점령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폴란드로 이동했다. 독소전 발발 후, 연대는 중앙군 집단 제2 기갑군에 배속되어 민스크, 스몰렌스크, 오룔 등 주요 전투에 참가했다.[3] 특히 모스크바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1942년 2월 증원을 받아 재편성되었고, 4월 1일에는 기동화 보병 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로 확대 개편되었다.[3]
3. 1. 프랑스 침공 (1940)
1940년 5월, 연대는 하인츠 구데리안 지휘 하의 제19군단에 배속되었다. 동 군단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에 속해 "황색 작전(Fall Gelbde) (저지대 국가 및 북부 프랑스 침공)"에 참가했다.[1]연대 중 1개 대대는 헤르만 괴링 원수의 요청에 따라 진격로 후방에 있는 벨기에 남부 위틀리(바스토뉴 남쪽)로 공수되었다.[1]
작전 첫날인 5월 10일, 연대의 주력은 제10기갑사단에 배속되어 룩셈부르크를 통과하며 벨기에 남부의 요새를 측면에서 포위하기 위해 적과 교전했고, 그날 밤 군단 예비로 차출되었다. 제19군단은 5월 13일 뫼즈강을 세단 부근에서 건넜다. 제3대대가 멀리 북부 벨기에의 공수 공격에 관여하는 동안, 연대 주력은 제1전차사단과 함께 도하 작전을 수행했다. 6월 14일부터 15일에 걸쳐 연대는 제10전차사단과 함께 전선을 남쪽으로 밀어내어 프랑스군의 반격을 봉쇄하는 동시에 교두보를 완전히 확보했다. 구데리안은 서쪽으로의 진격을 제1, 제2전차사단만을 이끌고 재개했고, 연대는 제10전차사단과 함께 잠시 제14군단으로 이관되어 교두보를 지켰다. 이윽고 제29기동보병사단이 합류하여 구데리안의 제19군단과 라인하르트의 제41군단의 선봉 부대(제6전차사단)로 구성된 돌파 부대의 남익을 지켰다. 5월 17일이 되자 제10전차사단과 연대는 그곳의 수비를 후속 부대에 인계하고, 다시 제19군단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연대는 여러 번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의 예비로 차출되었다. 스토느 부근에서 연대는 프랑스 기갑 부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그들은 선전했다.[1]
연대는 됭케르크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했을 때, 아라스에서 영국군의 반격을 받았다. 이후 다시 제19군단에 배속되어, 새로 동 군단에 배속된 SS 보병 연대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제2전차사단에 배속되어 됭케르크 포위전에 참가했다. 그 후 구데리안은 신편성된 구데리안 전차 집단(제1전차사단 및 제2전차사단과 제29기동보병사단으로 구성된 제39군단 및 제41군단이 소속)과 함께 남동쪽으로 진격하여 스위스 국경으로 향했고, 연대는 제10전차사단과 함께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에 소속되어 남서쪽으로 진격하여 센 강 도하 공격 이후, 리옹에 있었을 때 프랑스가 항복했다.[1]
3. 2. 유고슬라비아 침공 (1941)
1941년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주로 붕괴된 유고슬라비아군을 추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1대대는 베오그라드 점령을 담당했다.3. 3. 바르바로사 작전 (1941-1942)
1939년 6월 14일에 창설된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 연대는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중앙군 집단 제2 기갑 집단에 배속되었다.[3]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었지만, 연대는 예비대로 대기하다가 25일에 전진을 시작했다. 연대는 27일 새벽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북쪽에서 부크 강을 넘어 30일에 제2기갑집단 직할이 되어 민스크 서쪽에서 포위된 소련군의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바라노비치 북동부에 전개하여 방어전을 수행했다.7월 3일, 연대는 전진 명령을 받고 이동, 제10기갑사단의 지휘하에 들어가 11일에 치클로프 남쪽에서 드네프르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 후속 부대가 도착하는 16일까지 모길레프 포위의 한 축을 담당했다. 17일에 명령을 받고 전진하여 21일부터 스몰렌스크 구원을 위한 소련 카차로프 집단의 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바시코보(Васьково)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교전했다.
9월 2일,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에서 데스나강을 건너 교두보를 유지하고, 7일 글루히프를 점령했다. 전진을 계속하여 11일에 푸티블을 제압하고 푸티블 남쪽에서 세임강을 건너 교두보를 구축, 14일 젤로프카(Жиловка)를 함락시키고 코노토프 동부의 세임강 남부의 소련군을 포위하기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이동하여 22일 클리모프카 분기점에 도달했다.
10월 3일, 오룔로 이동했지만 11일 히틀러의 명령으로 브랸스크 북동부에서 포위된 소련군의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로슬라블에서 카라체프로 전진, 제18기갑사단의 지휘하에 들어가 교전했다. 17일부터 오룔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했다. 24일 므첸스크 북동쪽 고지대 공격 참가를 위해 오룔에서 이동, 25일 제3기갑사단과 함께 체르니를 돌파, 26일 프라브스크 근교에 도달, 29일 툴라 점령을 목표로 공격을 시작했지만 실패, 연대는 31일부터 11월 말까지 툴라 교외에서 방어전을 수행했다.
12월 2일의 툴라 공격을 위해 연대는 베니요프 남쪽으로 이동하여 공격을 시도했으나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7일 툴라 남동쪽으로 후퇴를 시작, 21일 보르호프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전을 수행했다.
소련군의 동계 공세로 연대는 큰 손실을 입었고, 1942년 2월 마지막 날, 연대의 잔존 병력은 노이루핀에서 도착한 두 개 대대의 증원을 흡수하여 재편성되었다. 이후 오룔로 이동했고, 4월 1일에 ''Infanterie-Division ''Großdeutschland'' (mot.)'' (기동화 보병 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로 강화 및 확대되었다.[3]
4. 기갑척탄병 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1942-1944)
1942년 4월, 보병 연대 그로스도이칠란트는 기동화 보병 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Infanterie-Division Großdeutschland (mot.))로 확대 개편되었다. 기존 연대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제1보병연대가 되었고, 새롭게 그로스도이칠란트 제2보병연대, 오토바이 저격병대대 GD가 더해졌다. 그 외에도 제100전차연대 제1대대를 기간으로 전차대대 GD, 제192돌격포대대를 기간으로 돌격포대대 GD, 제643전차구축대대를 기간으로 전차구축대대 GD, 제622포병연대 본부·제400포병대대·제109포병연대 제1대대·제646포병대대로부터 포병연대 GD가 편성되었고, 제285육군 대공포대대가 대공포대대 GD, 제43돌격공병대대가 공병대대 GD로서, 각각 사단에 편입되었다.[9] 이후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재지정되었다.
사단은 청색 작전, 르제프 전투,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각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하위 섹션을 참조)
1943년 남은 기간 동안,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후퇴 작전을 수행했고, 1944년에는 루마니아로 진격하여 제1차 타르구 프로모스 전투에 참전했다.[3]
1944년 초, 사단은 키로보흐라드로 이동했다. 3월에는 제2 및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에 밀려 로브노예로 후퇴했고, 3월 말에는 드네스트르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들어갔다.[9]
4월에는 야시 근교에서 방어전을 펼치며 몰도바의 투르구・프루모스(Târgu Frumos)로 후퇴하여 격전을 벌였다. 5월 2일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벌어진 투르구・프루모스 전투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방어전은 냉전 시대 NATO에서 연구되기도 했다.[9]
5월 하순, 투르구・프루모스 전투 이후 경보병연대가 재편성되고 수색대대에 장갑 차량이 배치되었다. 7월 하순부터 사단은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여 빌카비슈키스 탈환 작전에 투입된 후 발트 3국을 전전했다. 10월부터 11월 하순까지 메멜 교두보에서 방어전을 펼치며 큰 손실을 입었다.[9]
11월 말, 메멜 교두보에서 동프로이센으로 돌아와 재편성 명령을 받았다.[9]
4. 1. 청색 작전 (1942)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청색 작전에서 제48기갑군단 소속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돈 강 도하 및 보로네시 점령의 역할을 맡았다.[9] 8월에 도네츠 강 북안으로 후퇴하여 기동 예비 및 반격 부대로 배치되었다.[9]4. 2. 르제프 전투 (1942)
1942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소련의 동계 공세인 천왕성 작전과 화성 작전에서 사단은 르제프 전투 근처에서 싸웠고, 전투력을 상실했다.[3] 1942년 11월 18일 기준으로 이 사단은 작동 가능한 2호 전차 7대, 3호 전차 1대, 4호 전차 19대, Sd.Kfz. 265 Panzerbefehlswagen 3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4] 붉은 군대의 "화성 작전"(소련군의 르제프(Rzhev) 돌출부 공격 작전)에 의해, 사단은 르제프 근교에서 격렬한 설상전을 벌였다.4. 3.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1943)
1943년 1월-2월에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제2 SS 기갑 군단과 함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참가했다.[3] 이 사단은 제1 SS 기갑 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제2 SS 사단 "다스 라이히", 제3 SS 사단 "토텐코프"와 함께 싸웠다.[4]당시 사단은 2호 전차 5대, 3호 전차 20대, 4호 전차 85대, 티거 1 9대, Panzerbefehlswagen 2대, Flammpanzer III 26대를 보유하고 있었다.[5] 이 기간 동안 전차 연대가 편성되어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티거 1 전차 1개 중대가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기갑사단이 티거 전차를 보유하는 경우는 없었고, 무장친위대 사단 외에 유일하게 티거 전차가 배치된 사단이었다 (일반적으로 티거 전차는 독립 중전차대대에 배치된다).[6] 하르코프 점령 후,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재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물러났다.[7]
4. 4. 쿠르스크 전투 (1943)

새롭게 재장비를 마친 사단은 발터 모델 원수의 제4 기갑군 예하 제48 기갑군단에 배속되어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했다.[3] 준비 기간 동안 2개 대대 규모의 연대는 신형 판터 전차를 장비했지만, 이 전차는 기술적인 문제에 시달려 전장에 도착하기 전에 엔진 화재와 기계적 고장을 겪었다. 7월 7일까지, 사단은 300대의 전차 중 80대만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다. 쿠르스크 공세가 취소된 후, 사단은 중부 집단군으로 다시 이동하여 기동 예비대 역할을 재개했다. 티거 I 전차 중대는 대대 규모로 확장되어 기갑 연대의 III. 대대가 되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는 8월 말에 제48 기갑군단으로 다시 이동하기 전 카라체프 인근에서 격전을 치렀다.
4. 5. 1943-1944년 동부 전선
1943년 남은 기간 동안,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후퇴 작전을 수행했고, 1944년에는 루마니아로 진격하여 제1차 타르구 프로모스 전투에 참전했다.[3] 1944년 5월 31일까지, 사단은 4호 전차 14대, 판터 전차 90대, 티거 I 40대를 보유했다.
8월 초, 사단은 남부 우크라이나 집단군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동프로이센에서 격렬한 전투에 참여했으며, 빌코비슈켄에 대한 반격과 발트 3국에서의 전투를 포함하여 인원과 물자 모두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사단은 메멜 교두보 전투에서 거의 전멸했다.

1944년 초,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키로보흐라드로 이동했다. 1월 하순, GD 전차연대 제9중대(티거 I)가 체르카시 포위전에 참여했다.
3월 4일, 제2 및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에 의한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로브노예로 후퇴했다. 3월 말에는 드네스트르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들어갔다.
4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야시 근교에서 방어전을 펼치며, 점차 몰도바의 투르구・프루모스(Târgu Frumos)로 후퇴하여, 여기서 한 달 이상 격전을 벌였다. 5월 2일, 소련군의 새로운 공세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벌어진 투르구・프루모스 전투에서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방어 전투는 냉전 시대, NATO에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5월 하순, 투르구・프루모스 전투 이후, 경보병연대 제1대대가 Sd Kfz 251를 장비하기 위해 귀국했고, 경보병연대는 4개 대대에서 3개 대대로 축소되었으며, 수색대대에 장갑 차량이 배치되었다. 6월 초, 야시에 새로운 공세 징후가 있어 사단은 Podul Iloaiei 지역에서의 작전에 투입되었다. 작전 종료 후, 바커우 지역으로 이동하여 7월 하순까지 휴식을 취했다.
7월 하순부터 사단은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여, 8월 초, 빌카비슈키스 탈환 작전에 투입된 후 발트 3국을 전전했다. 10월부터 11월 하순까지 사단은 메멜 교두보에서 방어전을 펼쳤다. 일련의 전투에서 병력 및 장비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11월 말부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붕괴되어 가던 메멜 교두보에서 페리로 동프로이센으로 돌아와 재편성하도록 명령받았다.
5. 기갑군단 그로스도이칠란트 (1944-1945)
1944년 11월, 사단과 여러 부속 부대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군단으로 재편되었다.
5. 1. 메멜 전투 (1944-1945)
1944년 8월 초, 사단은 남부 우크라이나 집단군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로스도이칠란트"는 동프로이센에서 빌코비슈켄에 대한 반격을 포함하여 격렬한 전투에 참여했으며, 발트 3국에서의 전투로 인원과 물자 모두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사단은 메멜 교두보 전투에서 거의 전멸했다.[3] 1945년 3월, 기갑척탄병 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는 메멜 전투 이후 약 4,000명으로 줄어들었으며, 3월 15일에는 1대의 StuG III, 1대의 4호 전차, 5대의 판터, 6대의 티거 I 전차만 보유했다.[4]5. 2. 필라우 전투 (1945)
1944년 11월, 사단과 여러 부속 부대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군단"으로 재편되었다. 1945년 3월까지, 기갑척탄병 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는 메멜 전투 이후 약 4,000명으로 줄어들었다. 1945년 3월 15일에는 1대의 StuG III, 1대의 4호 전차, 5대의 판터 전차, 6대의 티거 I 전차만 보유했다. 1945년 4월 25일까지, 사단은 필라우 주변의 전투에서 격전을 벌였다. 사단 병력 800명은 발트해를 통해 페리로 대피하여 5월 9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했다. 나머지는 필라우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일부는 5월 9일 비스와 곶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했다.6. 전쟁 범죄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 함부르크 사회 연구소의 ''독일군과 집단 학살''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판체보에서 일어난 사건을 언급한다.
이 사건은 책에 사진과 함께 기록되었으며, 사진에는 장교의 ''그로스도이칠란트'' 커프스 타이틀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6][7] 헬무트 슈페터의 공식 사단사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일반 시민의 집단 약탈을 막기 위해 때때로 극히 엄격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판체보 사건은 직접 심의된 적은 없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 행해진 "치안 유지 임무"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오마 바르토프의 ''동부 전선, 1941-45, 독일군, 그리고 전쟁의 야만화''는 그로스도이칠란트의 전쟁 범죄 공모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와 잔혹 행위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6. 1. 프랑스 (1940)
프랑스 전투 동안, 사단 병사들은 프랑스군 소속 흑인 전쟁 포로 수백 명을 즉결 처형했다. 이러한 처형은 인종차별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는데, 독일군은 나치 선전에 의해 흑인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흑인 전쟁 포로들은 백인 포로들과 분리되어 사단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1940년 6월 10일에는 에르캥빌리에에서 150명의 흑인 포로가 학살되었다. 사단이 저지른 또 다른 대량 학살은 샤슬레 학살로, 6월 19일과 20일에 수백 명의 흑인 전쟁 포로가 론 주 샤슬레에서 살해되었다.[5]6. 2. 유고슬라비아 (1941)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판체보에서 독일군 병사 1명이 사살되고 1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는 약 100명의 민간인을 무작위로 체포했다.[6][7] 도시 사령관 프리츠 반델로우 중령이 주재한 군사 재판에서 SS-슈름반 퓌러 루돌프 호프만은 3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941년 4월 21일, 민간인 4명이 처음으로 총살당했다.[6][7] 다음 날, 묘지에서 18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 처형 부대에 의해 묘지 벽에서 14명이 추가로 총살당했다.[6][7] 이 사건은 ''독일군과 집단학살''이라는 책에 사진과 함께 기록되었으며, 사진에는 장교의 ''그로스도이칠란트'' 커프스 타이틀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6. 3. 동부 전선 (1941-1945)
프랑스 전투 동안, 사단 병사들은 프랑스군 소속 흑인 전쟁 포로 수백 명을 즉결 처형했다. 이 처형은 인종차별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는데, 독일군은 나치 선전에 의해 흑인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흑인 전쟁 포로들은 백인 포로들과 분리되어 사단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1940년 6월 10일에는 에르캥빌리에에서 150명의 흑인 포로가 학살되었고, 6월 19일과 20일에는 샤슬레 학살에서 수백 명의 흑인 전쟁 포로가 론 주 샤슬레에서 살해되었다.[5]함부르크 사회 연구소의 ''독일군과 집단 학살''(ISBN 1565845250)은 유고슬라비아 침공 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책에 게재된 사진에는 GD 완장을 찬 장교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헬무트 슈페터의 공식 GD 사단사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일반 시민의 집단 약탈을 막기 위해 때때로 극히 엄격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이 4월 21일의 판체보 사건은 직접 심의된 적은 없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 행해진 "치안 유지 임무"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오마 바르토프의 ''동부 전선, 1941-45, 독일군, 그리고 전쟁의 야만화''(1986, ISBN 0-312-22486-9)는 그로스도이칠란트의 전쟁 범죄 공모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와 잔혹 행위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7. 부대 특징
그로스도이칠란트는 독일 국방군 육군 내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정예화된 부대 중 하나였다.[8] 동부 전선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기동 방어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7. 1. 독자적인 부대 표식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엘리트 부대의 증표로서 독자적인 부대 표장을 사용했다. 사단명의 머리글자를 딴 "GD" 조립 문자를 견장에 부착했으며, 사단명을 새긴 커프 타이틀 (무장 친위대와 비슷한 스타일)을 지급받았다. 커프 타이틀은 초기형과 후기형이 존재하는데, 1939년에 제정된 초기형은 프락투어 서체로 쓰여진 녹색 바탕이었고, 1940년에 제정된 후기형은 주터린체 서체로 쓰여진 검은색 바탕이었다(이미지 참조). 훈련을 종료한 모든 사단 요원은 이 커프 타이틀을 착용할 수 있었다. 친위대는 소매 표장을 왼쪽 소매에 착용했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육군 부대임을 나타내기 위해 오른쪽 소매의 소매구에서 15cm 떨어진 위치에 착용했다. 하지만 당시 사진을 보면 위치가 항상 정확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7. 2. 제복

1939년 6월, 독일 국방군은 가장 명예로운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 연대에 새로운 제복을 도입하여 구 육군과의 유대를 새롭게 하고자 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 연대의 새로운 제복은 가늘고 긴 깃장과, 하사관에게는 하나의 Litze (Geflecht)|리첸슈피겔de, 병졸에게는 리첸을 두 개 합친 도펠리첸(Doppellitzen)이 부착되었다. 이는 제정 시대의 예복을 의식하여 만들어졌다. 이 새로운 제복은 언론에 공개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부대에 지급되지 못하고 창고에 보관되어 대원들이 착용하는 일은 없었다.[1]
8. 편제 (1943년 9월 기준)
- 사단 사령부 및 사령부 부속 중대
- 헌병대 (소대 규모)
- 보도대 (소대 규모)[10]
- GD 기갑척탄병 연대 (Panzergrenadier-Regiment “Großdeutschland”|판처그레나디어 레기멘트 그로스도이칠란트de)
- GD 기갑 경보병 연대 (Panzerfüsilier-Regiment “Großdeutschland”|판처퓌질리어 레기멘트 그로스도이칠란트de)[11]
- GD 전차 연대 (Panzer-Regiment “Großdeutschland”|판처 레기멘트 그로스도이칠란트de)
- GD 기갑 포병 연대 (Panzer-Artillerie-Regiment “Großdeutschland”|판처 아틸러리 레기멘트 그로스도이칠란트de)
- GD 기갑 수색대대 (Panzer-Aufklärungs-Abteilung “Großdeutschland”|판처 아우프클레룽스 압타일룽 그로스도이칠란트de)
- GD 전차구축대대 (Panzerjäger-Abteilung “Großdeutschland”|판처예거 압타일룽 그로스도이칠란트de)
- GD 육군 대공포 대대 (Heeres-Flakartillerie-Abteilung “Großdeutschland”|헤레스 플라카틸러리 압타일룽 그로스도이칠란트de)
- GD 돌격공병대대 (Sturmpionier-Bataillon “Großdeutschland”|슈투름피오니어 바탈리온 그로스도이칠란트de)
- GD 돌격포 대대 (Sturmgeschütz Battalion “Großdeutschland”|슈투름게쉬츠 바탈리온 그로스도이칠란트de)
- GD 통신대대 (Nachrichten-Abteilung “Großdeutschland”|나흐리히텐 압타일룽 그로스도이칠란트de)
- 위생대대
- 보급 부대
9. 역대 지휘관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여러 지휘관을 거쳤다. 다음은 역대 지휘관 목록이다.
지휘관 | 기간 |
---|---|
Oberstleutnant|오버스트로이테난트de 빌헬름-훈올트 폰 슈토크하우젠 | 1939년 7월 – 1940년 2월 |
Oberstleutnant|오버스트로이테난트de 게르하르트 그라프 폰 슈베린 | 1940년 2월 – 1940년 3월 |
Oberst|오버스트de 빌헬름-훈올트 폰 슈토크하우젠 | 1940년 3월 – 1941년 8월 |
Oberst|오버스트de 발터 횔라인 | 1941년 8월 – 1942년 4월 |
발터 횔라인 Generalmajor|소장de (후에 Generalleutnant|중장de으로 진급) | 1942년 4월 1일 - 1944년 1월 27일 |
헤르만 발크 General der Panzertruppe|기갑병과 대장de (임시) | 1943년 4월 3일 - 1943년 6월 30일 |
하소 폰 만토이펠 General|대장de | 1944년 1월 27일 - 1944년 9월 1일 |
카를 로렌츠 Generalmajor|소장de | 1944년 9월 1일 - 1945년 5월 |
9. 1. 보병 연대 그로스도이칠란트
- Oberstleutnant|오버스트로이테난트de 빌헬름-훈올트 폰 슈토크하우젠: 1939년 7월 – 1940년 2월
- Oberstleutnant|오버스트로이테난트de 게르하르트 그라프 폰 슈베린: 1940년 2월 – 1940년 3월
- Oberst|오버스트de 빌헬름-훈올트 폰 슈토크하우젠: 1940년 3월 – 1941년 8월
- Oberst|오버스트de 발터 횔라인: 1941년 8월 – 1942년 4월
9. 2. 보병/기갑척탄병 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발터 횔라인 소장(후에 중장으로 진급)은 1942년 4월 1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보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를 지휘했다.[1] 1943년 4월 3일부터 6월 30일까지는 헤르만 발크 기갑병과 대장이 임시로 사단을 지휘했다.[2]하소 폰 만토이펠 대장은 1944년 1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사단장을 역임했고,[3] 이후 카를 로렌츠 대령이 1944년 9월 1일부터 1945년 5월까지 사단을 이끌었다.[4]
지휘관 | 기간 |
---|---|
발터 횔라인 소장 (후 중장) | 1942년 4월 1일 - 1944년 1월 27일 |
헤르만 발크 기갑병과 대장 (임시) | 1943년 4월 3일 - 1943년 6월 30일 |
하소 폰 만토이펠 대장 | 1944년 1월 27일 - 1944년 9월 1일 |
카를 로렌츠 대령 | 1944년 9월 1일 - 1945년 5월 |
참조
[1]
서적
Panzer Soldiers for "God, Honor, and Fatherland": The History of Panzerregiment Grossdeutschland
J.J. Fedorowicz
2000
[2]
웹사이트
GD History
http://infantryregim[...]
2018
[3]
서적
Tigers In Combat
https://books.google[...]
Stackpole Books
2013-05-12
[4]
웹사이트
Organizational History of Miscellaneous German Named Infantry and Panzer Grenadier, Brigades, Verbands & Divisions, 1939-1945
http://www.cgsc.edu/[...]
US Army Combined Arms Center
2016-07-10
[5]
서적
Hitler's African Victims. The German Army Massacres of Black French soldiers in 1940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Treaties, States parties, and Commentaries - Geneva Convention (I) on Wounded and Sick in Armed Forces in the Field, 1949. Article 46: Prohibition of reprisals - Commentary of 2016
https://ihl-database[...]
[7]
논문
The Escalation of German Reprisal Policy in Occupied France, 1941-42
2006-01
[8]
서적
German Order of Battle, Volume 3 : Panzer, Panzer Grenadier, and Waffen SS Division in WWII
Stackpole Books
[9]
서적
1945年のドイツ国防軍戦車部隊
[10]
문서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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