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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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옌은 아키텐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12세기에는 가스코뉴와 함께 잉글랜드 왕의 지배를 받았다. 13세기 프랑스 왕들의 정복으로 좁은 영역으로 축소되었으며,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잉글랜드가 주권을 얻었으나, 이후 프랑스에 의해 최종적으로 병합되었다. 기옌은 행정 구역으로 존재하다가 17세기부터 가스코뉴와 통합되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지롱드 등 여러 행정 구역의 기반이 되었다. 기옌의 지역 언어는 오크어이며, 기옌 공작의 칭호는 프랑스 왕이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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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옌 | |
---|---|
지리 | |
일반 정보 | |
이름 | 기옌 |
프랑스어 | Guyenne, Guienne |
오크어 | Guiana |
오크어 발음 | /ˈɡjanɔ/ |
역사 | |
유형 | 공국 |
국가 | 프랑스 왕국 |
위치 | |
현재 위치 | 프랑스 |
수도 | 보르도 |
역사적 맥락 | |
기원 | 10세기: 가스코뉴 공국의 일부 |
합병 | 1154년: 앙주 제국의 일부 1259년: 프랑스 왕국에 합병 |
2. 명칭
기옌(Guyenne)이라는 이름은 아키텐(Aquitania)의 변형된 형태인 아귀옌(Aguyenne)에서 유래했다.[1] 아키텐의 옛 이름 아키타니아(Aquitania)에서 유래하여 Aguidaina → l'Aguienne → la Guienne으로 변화하였다. Guyenne의 표기가 고정된 것은 프랑스 왕국에 병합된 이후이다.
기옌은 아키텐의 옛 이름 아키타니아(Aquitania)에서 유래하여 Aguidaina → l'Aguienne → la Guienne으로 변화하였다. Guyenne의 표기가 고정된 것은 프랑스 왕국에 병합된 이후이다.
기옌은 아키텐의 형식적인 명칭이다.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현지 주민들이 가장 흔히 사용한 것은 아키텐이었다. 아키텐은 더욱 오래된 문헌에서 많이 발견되며, 후대에 기옌이 주의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3. 역사
기옌은 아키텐의 형식적인 명칭이었다.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현지 주민들이 가장 흔히 사용한 것은 아키텐이었다. 아키텐은 더욱 오래된 문헌에서 많이 발견되며, 후대에 기옌이 주의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남서부의 이들 주는 보르도를 주도로 하였고, 가스코뉴 북동부가 아키텐과 일치하게 되었다. 기옌이라는 명칭은 1259년 파리 조약 이후 프랑스 본토 내에 있는 잉글랜드 영토 자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잉글랜드와 가스코뉴의 연합 시대, 기옌 공국의 국경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평화 조약과 백년 전쟁의 흥망에 따라 변화하였다. 기옌은 당시 프랑스의 주들 중에서 가장 큰 면적과 권력을 가졌다. 15세기부터 17세기에는 보르도, 바자드, 리무쟁, 페리고르, 켈시, 뤼엘그, 아자네, 생통주, 앙굴렘, 가스코뉴를 포함하였다. 17세기까지는 가스코뉴가 기옌의 일부로 여겨졌기 때문에 기옌과 가스코뉴를 구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옌 자체는 보르도, 페리고르, 생통주, 리무쟁, 켈시, 뤼엘그로 구성되고, 나머지는 가스코뉴로 간주되었다. 리무쟁과 생통주는 1789년 다른 지역 구분을 만들기 위해 분리되었다.
현재 기옌이라는 명칭은 정치적, 행정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기옌 공작 칭호는 종주국 프랑스의 정복으로 약화된 아키텐 공국에 주어졌다. 이 칭호는 1229년 루이 9세와 툴루즈 백작 레이몽 7세가 체결한 파리 조약(랑그도크의 대부분을 프랑스가 병합하고 알비 십자군이 종결됨)에서 처음 등장했다. 1188년부터 1453년까지 잉글랜드 왕이 기옌 공작을 겸했지만, 카스티용 전투 이후 프랑스 왕이 기옌 공작을 칭하게 되었다. 샤를 드 발루아가 1469년 특권을 부여받았고, 1472년 상속자 없이 샤를이 사망하면서 공국은 왕국으로 환원되었다.
3. 1. 중세 시대
1259년 파리 조약에 의해 필리프 2세, 루이 8세, 루이 9세의 정복으로 기옌은 좁은 영역으로 한정되었고, 아키텐과 구분되었다. 기옌은 보르도의 옛 백작령인 보르드레(Bordelais), 바자다(Bazadais), 페리고르, 리무쟁, 케르시(Quercy), 루에르그(Rouergue)의 일부, 그리고 필리프 3세가 1279년 아미앵 조약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양도한 아제네(Agenais)를 포함하였다. 가스코뉴와 여전히 통합되어 샤랑트 강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이르는 공국을 형성하였다. 이 공국은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Homage (feudal))) 의무를 지닌 봉토(fief)로서 존재하였으며, 1296년과 1324년에는 봉건적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국왕에 의해 몰수되었다.[2]
1360년 브레티뉴 조약에 의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오니(Aunis), 생통주, 앙굴렘(Angoumois), 푸아투와 함께 기옌 공국의 완전한 주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곧 베르트랑 뒤 게스클랭과 가스통 3세의 승리로 공국은 13세기의 영역으로 회복되었다. 1451년 샤를 7세에 의해 정복되어 최종적으로 프랑스 왕관에 통합되었다. 1469년 루이 11세는 샹파뉴와 브리(Brie)의 영토와 교환하여 그의 형제인 베리 공작 샤를에게 기옌을 주었고, 1472년 샤를 사후 다시 프랑스 왕실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2]
3. 2. 근세 시대
13세기, 필리프 2세, 루이 8세, 루이 9세의 정복으로 기옌은 1259년 파리 조약에 의해 좁은 영역으로 한정되었고, 아키텐과 구분되었다. 기옌은 보르도(Bordeaux)의 옛 백작령인 보르드레(Bordelais), 바자다(Bazadais), 페리고르, 리무쟁, 케르시, 루에르그의 일부, 그리고 필리프 3세가 1279년 아미앵 조약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양도한 아제네(Agenais)를 포함하였다. 가스코뉴와 여전히 통합되어 샤랑트 강(Charente River)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이르는 공국을 형성하였다. 이 공국은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Homage (feudal)) 의무를 지닌 봉토(fief)로서 존재하였으며, 1296년과 1324년에는 봉건적 의무(feudal duties)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국왕에 의해 몰수되었다.[2]
1360년 브레티뉴 조약에 의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오니(Aunis), 생통주, 앙굴렘, 푸아투와 함께 기옌 공국의 완전한 주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곧 베르트랑 뒤 게스클랭과 가스통 3세의 승리로 공국은 13세기의 영역으로 회복되었다. 1451년 샤를 7세에 의해 정복되어 최종적으로 프랑스 왕관에 통합되었다. 1469년 루이 11세는 샹파뉴와 브리(Champagne and Brie)의 영토와 교환하여 그의 형제인 베리 공작 샤를(Charles, Duke of Berry (1446–1472))에게 기옌을 주었고, 1472년 샤를 사후 다시 프랑스 왕실 영토(crown lands of France)의 일부가 되었다.[2]
기옌은 그 후 행정구역(gouvernement général)을 형성하였고, 17세기부터는 가스코뉴와 통합되었다.[2] 1779년 루이 16세는 기옌의 지방 의회를 소집하고 다른 지방으로 의회를 확장하는 것을 고려하였으나, 기옌의 특권 계급의 반대에 부딪혀 이 계획을 포기하였다.[3] 보르도를 수도로 하는 기옌과 가스코뉴(Guienne et Gascogne)의 행정구역은 1792년 프랑스 옛 제도(Ancien Régime)가 끝날 때까지 존속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기옌 자체에서 형성된 프랑스 행정구역(departments of France)은 지롱드, 롯에가론, 도르도뉴, 롯, 아베롱 그리고 탕에가론의 대부분이었다.[2]
3. 3. 프랑스 혁명 이후
1360년 브레티뉴 조약으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오니, 생통주, 앙굴렘, 푸아투와 함께 기옌 공국의 완전한 주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곧 베르트랑 뒤 게스클랭과 가스통 3세의 승리로 공국은 13세기 영역으로 회복되었다. 1451년 샤를 7세에 의해 정복되어 최종적으로 프랑스 왕관에 통합되었다. 1469년 루이 11세는 샹파뉴와 브리의 영토와 교환하여 그의 형제인 베리 공작 샤를에게 기옌을 주었고, 1472년 샤를 사후 다시 프랑스 왕실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2]
기옌은 그 후 행정구역을 형성하였고, 17세기부터는 가스코뉴와 통합되었다.[2] 1779년 루이 16세는 기옌의 지방 의회를 소집하고 다른 지방으로 의회를 확장하는 것을 고려하였으나, 기옌의 특권 계급의 반대에 부딪혀 이 계획을 포기하였다.[3] 보르도를 수도로 하는 기옌과 가스코뉴의 행정구역은 1792년 프랑스 옛 제도가 끝날 때까지 존속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기옌 자체에서 형성된 프랑스의 행정 구역은 지롱드, 롯에가론, 도르도뉴, 롯, 아베롱 그리고 탕에가론의 대부분이었다.[2]
4. 언어
기옌의 지역 언어는 오크어이다. 가스코뉴와 겹치는 지역에서는 가스콩어(지롱드주 서부, 로트에가론주 일부)이고, 나머지는 랑그도크어이다. 도르도뉴주 북부에서는 리무쟁어이다.
5. 기옌 공작
기옌 공작이라는 칭호는 종주국 프랑스의 정복으로 약화된 아키텐 공국에 주어졌다. 이 칭호는 1229년 루이 9세와 툴루즈 백작 레이몽 7세가 체결한 파리 조약(랑그도크의 대부분을 프랑스가 병합하고 알비 십자군이 종결됨)에서 처음 등장했다. 1188년부터 1453년까지 잉글랜드 왕이 기옌 공작을 겸했지만, 카스티용 전투 이후 프랑스 왕이 기옌 공작을 칭하게 되었다. 샤를 드 발루아가 1469년 특권을 부여받았고, 1472년 상속자가 없는 채 샤를이 사망하면서 공국은 왕국으로 환원되었다.
참조
[1]
서적
An Historical Geography of France
Cambridge
[2]
백과사전
Guienne
[3]
서적
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
http://www.revoltlib[...]
New York: Vanguard Printings
[4]
서적
An Historical Geography of France
Cambridge
[5]
백과사전
Guie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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