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비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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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비 십자군은 13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역의 카타리파를 진압하기 위해 선포한 십자군이다. 카타리파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물질세계를 악으로 여기며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반하는 주장을 펼쳤다. 교황은 평화적 개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교황 특사의 암살을 계기로 십자군을 선포했다. 1209년부터 1255년까지 이어진 십자군은 세 시기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랑그도크 지역 점령, 카타리파의 반란과 프랑스 왕의 개입, 종교재판을 거쳐 카타리파를 거의 소멸시켰다. 알비 십자군은 프랑스 왕권 강화에 기여했지만, 대규모 학살과 종교재판으로 인해 인권 침해와 사상 탄압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의 폭력과 종교재판은 이단 심판에 대한 교황청의 통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트루바두르 문화의 쇠퇴에도 영향을 미쳤다. 알비 십자군에 대한 집단 학살 논란이 있으며, 관련 인물과 가계도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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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비 십자군 - 카타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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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 십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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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알비주아 십자군 |
일부 | 십자군 |
날짜 | 1209년 7월 - 1229년 4월 12일 (19년) |
장소 | 랑그도크, 프랑스 |
결과 | 십자군 승리 |
관련 논쟁 | 일부 학자들은 카타리파에 대한 집단 학살로 간주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십자군 십자군 자원병 주교 종교재판 도미니코회 프랑스 왕국 |
교전국 2 | 카타리파 툴루즈 백국 베지에 및 알비 자작령 아라곤 왕국 푸아 백국 카르카손 자작령 잉글랜드 왕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시몽 드 몽포르 아르노 아말릭 아모리 6세 드 몽포르 필리프 2세 루이 8세 |
지휘관 2 | 레몽 로저 드 트랑카벨 레몽 6세 레몽 7세 로저베르나르 2세 드 푸아 페로 2세 |
피해 규모 | |
사상자 2 | 최소 200,000명에서 최대 1,000,000명의 카타리파 사망자 발생. |
추가 정보 | |
관련 논쟁 | 집단 학살이라는 단어를 만든 라파엘 렘킨을 포함한 일부 학자들은 카타리파에 대한 집단 학살로 간주함. |
전투 목록 | |
1209년 남작들의 십자군 | 베지에 학살 1차 카르카손 포위전 |
랑그도크 전쟁 | 미네르브 포위전 테름 포위전 라보르 포위전 몽제 전투 1차 툴루즈 포위전 카스텔노다리 포위전 뮈레 전투 |
랑그도크 반란 | 보케르 포위전 살베타 전투 2차 툴루즈 포위전 마르망드 포위전 바지에 전투 3차 툴루즈 포위전 |
왕실 개입 및 여파 | 아비뇽 포위전 2차 카르카손 포위전 아비뇨네 학살 몽세귀르 포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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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는 이단에 대한 심판과 처벌을 해 왔으나, 12세기 이전까지 이단으로 규정된 교파는 극소수였으며 처벌 역시 미미했다. 랑그도크의 카타리파는 대중적인 교파 운동 가운데 이단으로 규정된 최초의 집단이었다.[10]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기에는 평화적인 방법을 시도했다.[12] 도미니코를 포함한 설교단을 파견하여 카타리파 신자들을 가톨릭 교회로 복귀시키려 노력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3] 카타리파 지도자들은 지역 귀족들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지역 주교들조차 카타리파에 동조하는 상황이었다.[14]
1204년, 교황은 카타리파에 동조하는 주교들을 처벌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고,[15] 1206년부터는 카타리파를 후원하는 귀족들을 파문하기 시작했다.[16] 1207년에는 툴루즈의 강력한 백작이었던 툴루즈의 레몽 6세가 파문되었다. 교황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카타리파를 후원하는 귀족들을 토벌하도록 요청했으나, 필리프 2세는 이를 거절하였다.
1208년, 교황 특사 피에르 드 카스텔노가 툴루즈 백작의 가신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8]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 십자군을 선포하고, 프랑스 북부 귀족들에게 카타리파 토벌을 촉구했다.
2. 1. 카타리파의 발흥과 교세 확장
카타리파는 중세 유럽의 광범위한 영적 개혁 운동의 일부였다. 이 운동은 653년경 콘스탄티누스-실바누스가 아르메니아에 복음서 사본을 가져온 때 시작되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카리스마적인 설교자들을 중심으로 여러 이단 집단이 생겨났고, 이들은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거부했다. 이러한 집단들은 교회의 교리가 아닌 복음서에 그들의 신념과 관습을 기반으로 하였고, 초대 교회로의 복귀와 사도들의 신앙을 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성경에 뿌리를 두고 사도적 전통의 일부라고 주장했다.아리우스주의와 마르키온주의 이후 대중적인 세력을 지닌 교파가 이단으로 규정된 것은 900년 만의 일이었다. 12세기 경부터 남부 프랑스에 카타리파의 교세가 확장되었고 다른 지방으로 영향력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카타리파는 아라곤 왕국에서 기원했으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던 랑그도크에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1176년 알비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알비파라고도 불렸다.[11]

1147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는 알비파가 증가하고 있던 지역에 설교자들을 파견하여 알비파 신자들을 온건하게 가톨릭교회로 복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등 몇몇 성공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패했다.
그 후, 투르 교회회의(1163년)와 제3라테란 공의회(1179년)에서 카타리파(알비파)의 금지가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처음에는 교황이 남프랑스에 특사를 파견하여 알비파 신자들에게 가톨릭교회로 복귀를 촉구했지만, 남프랑스에 할거하고 있던 영주들이 프랑스 왕권의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싫어했고, 그들의 지원을 받은 현지 주교들도 교황 사절의 개입을 거부했다.
12세기가 되자 왈덴세파와 카타리파와 같은 조직적인 반체제 집단들이 새롭게 도시화된 지역의 도시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 중 하나였던 서지중해 프랑스에서 카타리파는 대중적인 대규모 운동으로 성장했고,[3] 그 신념은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롬바르디아는 그러한 지역 중 하나였는데, 1170년대에는 카타리파 공동체가 자리 잡았다. 카타리 운동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성직자들의 부패하고 세속적인 생활 방식에 대한 반응이자, 교황 권력에 대한 불만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랑그독에서 카타리 운동이 성공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되었다. 전통적인 설명으로는 성직자들의 악명 높은 부패와 질이 낮은 것이 있으며, 많은 기록에 따르면 이는 돈에 대한 욕심과 성적인 방탕으로 나타났다. 특히 시골 교구의 랑그독의 많은 사제들은 교육 수준이 낮고 문맹이었다. 많은 사제들은 평신도에 의해 임명되었다. 성직자의 부적절함이 주요 요인이라는 이론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이야기가 있지만 종교적 일탈자가 많은 지역은 없다는 근거로 반박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랑그독의 주교들 사이에서 더 큰 부패의 증거가 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편지를 써서 나르보네 대주교가 주교로 10년 동안 자신의 교구를 방문한 적이 없고 주교로 서임하는 대가로 누군가에게 돈을 요구했다고 비난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결국 랑그독의 네 명의 주교(나르보네 대주교와 툴루즈 대교구, 베지에 교구, 비비에 교구의 주교)를 직무에서 정직시켰다.
2. 2. 랑그도크 지역의 정치적 상황
13세기 초, 랑그도크 지역은 프랑스 왕국의 일부로 인식되기는 했지만, 프랑스어와 상호 이해가 불가능한 오크어를 사용하며, 카탈루냐어와 더 가까운 언어적 특성을 보였다. 이 지역은 툴루즈 백작령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아키텐 공국을 지배했던 앙주 제국의 봉토였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아라곤 왕관과 카탈루냐 공국의 영향력이 강했다.[1]랑그도크는 정치적 통제와 토지 소유가 여러 지역 영주와 상속인들 사이에 분열되어 있었고, 툴루즈시는 이 지역의 주요 도시 중심지로서 높은 수준의 정치적 자치권을 누렸다.[1] 툴루즈 백작은 도시 안의 샤토 나르보네에 거주했지만 실질적인 통제력은 거의 없었다. 소도시들은 방어를 위해 두꺼운 성벽과 높은 산, 절벽 옆에 세워져 ''카스트룸''이라 불렸다.[1]
이러한 도시화된 특성은 상대적인 종교적 관용 분위기를 조성하여, 유대인들은 차별을 거의 받지 않았고, 이슬람교도들은 동일한 수준의 관용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이슬람 문학과 학문은 존중받았다.[1]
당시 아라곤 왕국의 세력 범위는 피레네 산맥 북쪽으로 뻗어 있었고, 남프랑스의 영주들 중에는 아라곤 국왕을 군주로 삼는 자가 많았다.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국왕의 압력 속에서 아라곤 국왕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1] 한 명의 영주가 여러 영지를 소유하고 다스리는 경우가 있었고, 그럴 경우 각 영지를 관할하는 여러 상급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세 사람을 동시에 군주로 모시는 경우도 있었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의지하는 상대를 자주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1]
역사가 조셉 스트레이어는 북부와 남부의 문화적 차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상황은 가톨릭 교회가 랑그도크 지역의 카타리파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2. 3. 교황청의 대응과 십자군 선포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기에는 평화적인 방법을 시도했다.[12] 도미니코를 포함한 설교단을 파견하여 카타리파 신자들을 가톨릭 교회로 복귀시키려 노력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3] 카타리파 지도자들은 지역 귀족들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지역 주교들조차 카타리파에 동조하는 상황이었다.[14]1204년, 교황은 카타리파에 동조하는 주교들을 처벌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고,[15] 1206년부터는 카타리파를 후원하는 귀족들을 파문하기 시작했다.[16] 1207년에는 툴루즈의 강력한 백작이었던 툴루즈의 레몽 6세가 파문되었다.[17] 교황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카타리파를 후원하는 귀족들을 토벌하도록 요청했으나, 필리프 2세는 이를 거절하였다.
1208년, 교황 특사 피에르 드 카스텔노가 툴루즈 백작의 가신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8] 투델라의 윌리엄은 이 살인이 백작의 승인을 얻고자 하는 "악의적인 무장 기사"의 책임이라고 기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 십자군을 선포하고, 프랑스 북부 귀족들에게 카타리파 토벌을 촉구했다. 교황은 십자군 참여자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정복한 땅을 소유할 권리를 약속함으로써 십자군 참여를 독려했다.
3. 경과
알비 십자군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시기는 십자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랑그도크의 상당 지역을 점령한 1209년부터 1215년까지이다. 두 번째 시기는 카타리파의 반란과 지역 귀족의 반격이 지속된 1215년부터 1225년까지이다. 1226년 프랑스의 루이 8세가 사망하고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즉위하면서, 새 국왕은 카타리파를 직접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1217년 툴루즈 탈환에 성공한 툴루즈 백작을 공격하던 십자군 총사령관 시몽 드 몽포르는 1218년 사망했다. 뒤를 이은 아들 아모리 6세 드 몽포르는 십자군을 잘 이끌지 못하고 점령지를 조금씩 잃어갔다. 1224년에 툴루즈의 레몽 7세가 카르카손에 입성하자 아모리 6세는 지배지를 버리고 도망쳤고,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게 남프랑스(랑그도크) 전체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1229년 랑그도크 지역을 다시 정복한 루이 9세는 툴루즈의 레몽 7세와 모의 조약을 맺음으로서 알비 십자군을 종결시켰다. 1223년부터 카타리파에 대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카타리파의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이미 예전의 세력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1255년 카타리파를 전멸시킴으로써 알비 십자군의 군사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알비 십자군은 1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학살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카타리파뿐만 아니라 무고한 랑그도크 주민들이었다.[1]
다음은 알비 십자군과 관련된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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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9년 |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카타리파에 대한 파문 선고, 카타리파에 대한 원정을 “십자군”으로 인정. |
1184년 | 베로나 칙령 - 발도파, 움밀리아티에 대한 파문 선고, 주교에 의한 이단 심문 시작. |
1208년 1월 | 아를에서 교황 특사 피에르 드 카스텔노가 암살당함. |
1217년 9월 | 툴루즈의 레몽 6세, 툴루즈 입성. |
1218년 6월 | 시몽 드 몽포르 전사. |
1222년 8월 | 툴루즈의 레몽 6세 사망. |
1223년 3월 | 포아 백작 레이몽 르제 사망. |
1223년 7월 |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사망, 루이 8세 즉위. |
1224년 1월 | 툴루즈의 레몽 7세, 카르카손 입성. |
1226년 1월 | 브뤼주 교회 회의. 이후 프랑스 왕가가 십자군을 주도. |
1229년 4월 | 루이 9세와 툴루즈의 레몽 7세가 모의 조약을 맺고, 알비 십자군 종결. |
1233년 | 그레고리오 9세, 이단 심문 설치의 칙령을 발포. |
1240년 10월 | 레이몽 탕카벨의 반란, 카르카손 포위. |
1244년 3월 | 몽세귀르 함락. |
1255년 8월 | 케리뷔스 함락. |
3. 1. 초기 진압 (1209년 - 1215년)
1209년 리옹에 집결한 1만여 명의 십자군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베지에, 카르카손 등 카타리파의 주요 거점을 공격했다.[19] 툴루즈의 레몽 6세는 십자군에 협조하기로 약속하여 파문이 철회되었지만,[20] 십자군은 레몽 로저 드 트랑카발의 영지로 방향을 돌려 알비와 카르카손의 카타리파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레몽 로저는 십자군과의 회담을 취소하고 카르카손으로 돌아가 방어 준비를 했다.[21]십자군은 7월 21일 베지에에 도착하여 도시를 함락시키고 베지에 학살을 자행했다.[22] 이 과정에서 7천에서 2만 명의 시민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십자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베지에 함락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후 여러 도시들은 전투 없이 항복하였다.
십자군은 카르카손을 포위 공격하여 1209년 8월 15일에 함락시켰다.[25] 카르카손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지만, 십자군이 물길을 차단하자 결국 항복했다. 시민들은 살해당하지 않았지만, 알몸으로 쫓겨났다. 카르카손 함락 이후, 많은 도시들이 전투 없이 항복하거나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213년 아라곤 왕국의 아라곤의 페테르 2세가 카타리파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지만, 뮈레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이 전투는 알비 십자군의 전세를 십자군 측에 유리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215년 랑그도크 지역의 대부분 도시가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십자군 사령관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 백작으로 임명되어 랑그도크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다음은 초기 진압(1209년 - 1215년) 동안 발생한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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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년 7월 | 십자군, 베지에 포위 및 학살[22] |
1209년 8월 | 십자군, 카르카손 포위 및 점령[25] |
1209년 12월 | 라스투르 전투[26] |
1210년 3월 | 브람 점령[27] |
1210년 6월 | 미네르브 포위[28] |
1210년 7월 | 미네르브 함락, 카타리파 140명 화형[30] |
1211년 | 툴루즈의 레몽 6세 파문, 십자군의 툴루즈 공격[31] |
1213년 | 아라곤의 페테르 2세 참전, 뮈레 전투에서 전사 |
1215년 | 랑그도크 대부분 지역 십자군에 점령,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백작으로 임명 |
3. 2. 툴루즈 백작 레몽의 반란 (1216년 - 1225년)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4] 십자군은 일시적인 혼란에 빠졌다. 지휘권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넘어갔지만, 그는 십자군을 적극적으로 이끌지 않았다. 당시 그는 잉글랜드의 존 왕과의 전쟁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툴루즈 백작툴루즈의 레몽 6세와 그의 아들 툴루즈의 레몽 7세는 1216년 4월, 지역으로 돌아와 불만을 품은 도시들로부터 병력을 모았다. 1216년 5월에는 보케르를 포위하였고, 석 달 후 점령자들은 보급품 부족으로 항복했다. 시몽 드 몽포르가 보케르를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몽포르는 빅고르를 점령하기 전 툴루즈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지만, 1216년 12월 루르드에서 패배했다. 1217년 9월 12일, 몽포르가 푸아 지역에 있는 동안 레몽 6세는 툴루즈를 탈환했다. 몽포르는 서둘러 돌아왔지만, 병력 부족으로 도시를 다시 빼앗지 못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요청으로 십자군은 1218년 봄에 툴루즈 공성전을 재개했다. 1218년 6월 25일 또는 29일, 십자군 사령관 시몽 드 몽포르는 수비군의 공격을 막던 중 돌에 맞아 사망했다. 툴루즈는 함락되지 않았고, 십자군은 격퇴되었다. 툴루즈의 포병은 툴루즈의 여성들과 소녀들이 운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십자군은 새로운 활력을 얻어 계속 진군했다. 필리프 2세는 직접 지휘를 거부했지만, 그의 아들 루이 왕자가 원정대를 이끄는 데는 동의했다. 루이의 군대는 1219년 5월부터 남쪽으로 진군했다. 6월, 시몽의 아들인 아모리 드 몽포르의 군대가 루이와 합류하여 마르망드를 포위했고, 1219년 6월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마르망드 점령 후 루이는 툴루즈를 탈환하려 했으나, 6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작전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이 원정을 "비참한 패배"라고 불렀다. 루이의 군대가 없자 아모리는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고, 알비파는 땅 대부분을 되찾았다.
1222년 레몽 6세가 사망하고 레몽 7세가 뒤를 이었다. 1223년 필리프 2세가 사망하고 루이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1224년 아모리는 카르카손을 버리고 도망쳤고, 레몽 7세는 망명에서 돌아와 지역을 탈환했다. 같은 해, 아모리는 남은 땅을 루이 8세에게 양도했다.
3. 3. 프랑스 국왕의 개입 (1226년 - 1229년)
1226년 프랑스 국왕 루이 8세는 직접 십자군을 이끌고 랑그도크 지역을 침공했다. 국왕이 직접 이끄는 십자군은 매우 강력하여, 요새화된 도시들은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아비뇽은 처음에는 항복하지 않았으나, 3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항복하였다.[1]루이 8세는 1226년 11월에 사망하였고, 루이 9세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어머니 블랑카 데 카스티야가 섭정을 맡아 십자군을 계속 지휘했다. 1229년 툴루즈 백작 툴루즈의 레몽 7세는 프랑스 왕실과 모 조약을 체결하고 항복했다. 이 조약으로 랑그도크 지역은 프랑스 왕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
4. 종교재판
1229년 툴루즈에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1]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도미니코회에 종교재판 권한을 위임하였다.[1] 1233년부터 랑그도크 전역에서 종교재판이 진행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산 채로 불에 태워지기도 하였다.[1]
1234년 그레고리오 9세는 카타리파를 포함한 이단 운동을 근절하기 위해 종교재판을 설립하였다. 종교재판은 13세기와 14세기 대부분 동안 남부 프랑스 도시들에서 활동하며 카타리파를 대중 운동에서 몰아내고, 남은 신도들을 지하로 숨게 만들었다.[2]
카타리파에 대한 처벌은 다양했다. 가장 흔한 것은 옷 위에 노란 십자가를 달아 속죄의 표시로 삼는 것이었다.[3] 무슬림과의 전투를 포함한 순례를 강요받기도 했다.[3] 매달 나체로 지역 교회를 방문하여 채찍질을 당하는 것도 흔한 처벌이었다.[3] 회개가 늦거나 재발한 카타리파는 투옥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3] 회개를 거부한 사람들은 화형당했다.[3]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단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카타리파를 기소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4] 종교 재판관들은 카타리파를 찾는 방법으로 고문을 사용하기도 했지만,[5] 많은 사람들을 잡지는 못했다.[6]
1244년 몽세귀르 함락 이후, 200명이 넘는 카타리파 완전 신도들이 화형당하는 대학살이 발생했다.[7] 이후 카타리파는 비밀리에 활동하게 되었다.[8]
프랑스의 필립 4세는 1290년대에 종교재판 자금을 제한하고 활동을 제약했지만, 1303년 남부 프랑스 방문 이후 제한을 해제했다.[9] 클레멘스 5세는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규칙을 도입했다.[10] 베르나르 기[5]는 카타리파의 관습과 종교 재판관이 이단과 싸우는 방법을 설명하는 설명서를 썼다.[11] 그의 지휘 아래 카타리파에 대한 마지막 공세가 시작되었고, 1350년까지 모든 잔재가 사라졌다.[10]
5. 결과 및 영향
알비 십자군은 프랑스 왕권 강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을 통해 프랑스 왕실은 랑그도크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결국 아비뇽 유수로 이어졌다.[3] 십자군은 랑그도크 지역의 카타리파를 거의 완전히 소멸시켰다.[1]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카타리파 뿐만 아니라 무고한 랑그도크 주민들을 포함하여 1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학살당하고[1], 지역 문화가 파괴되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
에드워드 피터스(Edward Peters)는 알비 십자군의 폭력이 인노첸시오 3세의 개혁과 계획과는 일치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피터스는 폭력의 원인을 십자군이 교황의 통제를 벗어나 폭도, 소규모 통치자, 지역 주교들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통제 불가능한 폭도와 이단 사냥꾼들의 편견, 세속 법정의 폭력, 그리고 알비 십자군의 유혈 사태는 교황청 내부에서 이단 기소에 대한 더 큰 통제를 시행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이단을 다루기 위한 조직적인 법적 절차, 즉 종교재판의 발달로 이어졌다.[2]
알비 십자군 이후 종교재판이 강화되어[1]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229년부터 종교재판이 시작되어 알비파로 인정되면 화형에 처해졌고, 심지어 시체를 파내어 화형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앙을 포기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은 목숨보다 중요했기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1240년에는 카르카손 백작의 아들 레이몽 트랑카벨이 봉기했지만 진압되었고, 1244년까지 반란은 거의 종식되었다.[4]
알비 십자군에 관한 수많은 노래가 트루바두르 시인-작곡가들로부터 전해진다. 예를 들어, 트루바두르 라몽 드 미라발(Raimon de Miraval)은 시몽에게 점령당한 자신의 성을 탈환해 달라고 페트루스 2세에게 간청하는 노래를 지었고, 트루바두르 토미에르와 팔라이지(Tomier and Palaizi)는 레이몽 6세의 대우를 비난하고 그에게 반격을 촉구하는 노래를 공동 작곡했다.[5] 서사시 ''Canso de la Crozada''(십자군의 노래)는 13세기 초에 쓰여졌으며 알비 십자군을 묘사한다.[6] 십자군과 그 직후의 여파는 트루바두르 전통의 쇠퇴를 가져왔다. 많은 오크어 지역의 궁정이 트루바두르들의 후원자였고, 그들의 파괴는 트루바두르 활동의 점진적인 악화와 남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의 왕궁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7]
6. 유산
알비 십자군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개혁 의지와는 달리, 통제 불능의 폭력 사태로 이어져 이단 심문 강화와 같은 제도적 변화를 야기했다.[1] 또한, 프랑스 왕권 강화를 초래하여 아비뇽 유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
알비 십자군은 트루바두르(음유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어, 라몽 드 미라발과 같이 십자군에 저항하는 노래들이 만들어졌다.[3] 서사시 ''Canso de la Crozada''(십자군의 노래)는 십자군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4] 그러나 십자군과 그 여파는 오크어 지역 궁정의 파괴로 이어져 트루바두르 전통 쇠퇴를 가져왔고, 많은 트루바두르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5]
6. 1. 집단 학살 논란
알비 십자군을 집단학살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20세기에 "집단학살"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라파엘 렘킨은 알비 십자군을 "역사상 가장 명백한 집단학살 사례 중 하나"로 언급했다. 마크 그레고리 페그는 "알비 십자군은 신성한 구원을 대량학살과 연결하고, 도살을 십자가상의 희생만큼 사랑스러운 행위로 만들어 서구에 집단학살을 불러들였다"고 썼다.
로버트 E. 러너는 페그가 알비 십자군을 집단학살로 분류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그것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선포되었지, '종족'이나 민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고,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은 남부 프랑스 인구를 전멸시킬 의도가 없었다… 페그가 알비 십자군을 현대의 민족 학살과 연결하려 한다면, 글쎄—나는 (그가 그랬듯이)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다.
로렌스 마빈은 페그의 알비 십자군이 집단학살이라는 주장에 대해 러너만큼 냉담하지는 않지만, 알비 십자군이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후대의 집단학살에 중요한 역사적 선례를 형성했다는 페그의 주장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쿠르트 요나손과 카린 솔베이그 비외른손은 알비 십자군을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집단학살"로 묘사한다. 쿠르트 요나손과 프랭크 챌크(함께 몬트리올 집단학살 및 인권 연구소를 설립함)는 스트레이어와 말리스 루스벤이 저술한 집단학살 연구 교과서 ''집단학살의 역사와 사회학: 분석과 사례 연구''에 알비 십자군에 대한 자세한 사례 연구를 포함시켰다.
7. 관련 인물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알비 십자군을 선포하고 십자군 원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1213년 1월 15일 교황 특사와 시몽 드 몽포르에게 편지를 써서 시몽을 기독교인 공격 혐의로 비난하고 점령지를 반환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1] 그러나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시몽을 툴루즈 백작으로 공식 선포하여 십자군의 지배를 공고히했다.[2]
- '''시몽 드 몽포르''': 알비 십자군의 초기 사령관으로, 잔혹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1211년 4월 라보르를 포위하고, 5월에는 에메리 드 몽레알의 성을 탈환하여 고위 기사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수백 명의 알비파 신자들을 화형에 처했다.[3] 1215년 툴루즈를 점령하고,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툴루즈 백작으로 공식 선포되었다.[2]
- '''툴루즈의 레몽 6세''': 툴루즈 백작으로, 알비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1209년 6월 18일 회개 의사를 밝히고 교회와 일치를 회복, 다음 날 십자군에 충성을 맹세하고 지원을 약속하며 십자군 십자가를 받았다.[4] 그러나 1211년 십자군과 대립하여 다시 파문당했고, 1214년 잉글랜드로 망명했다.[5]
- '''툴루즈의 레몽 7세''': 툴루즈의 레몽 6세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알비 십자군에 저항했지만 결국 프랑스 왕실에 항복했다. 1229년 4월 12일 모에서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알비 십자군을 종결시켰다.[6]
- '''아라곤의 페테르 2세''': 아라곤 왕국의 국왕으로, 카타리파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지만, 뮈레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무어인과 전투에서 승리한 명성을 바탕으로 교황에게 십자군 중단을 명령하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7] 1213년 9월 12일 뮈레 전투에서 십자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8]
8. 가계도
툴루즈 백작가와 프랑스 왕가, 아라곤 왕국 사이의 복잡한 혼인 관계는 알비 십자군의 전개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툴루즈 백작가 | 프랑스 국왕 |
---|---|
알퐁스 주르당 | 루이 6세 |
레이몽 5세 콘스탕스 | 루이 7세 |
레이몽 6세 아델라이드 | 필리프 2세 |
레이몽 7세 | 루이 8세 블랑슈 |
잔느 알퐁스 | 루이 9세 |
아라곤 국왕 | 잉글랜드 국왕 | 툴루즈 백작 |
---|---|---|
알폰소 2세 | 헨리 2세 | |
페드로 2세 엘레오노르 | 레이몽 6세 잔느 | |
산차 | 레이몽 7세 | |
잔느 |
참조
[1]
백과사전
Albigenses
[2]
백과사전
Arnold of Brescia
[3]
서적
Chanson de la croisade albigeoise
1931-196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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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잡지
Torturer's Apprentice
https://www.theatlan[...]
2017-09-26
[6]
웹사이트
Lemkin, Raphael
http://www.unhcr.org[...]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2017-07-30
[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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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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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ime.com/[...]
2008-10-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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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sers.erols.c[...]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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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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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s.google.[...]
W. Tegg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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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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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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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 §156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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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 §194
[32]
문서
VC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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