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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15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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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상준(1561년 ~ 1635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82년 이이에게 재능을 인정받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심수경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나,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면되었으며, 저서로 《강감요략》과 《속옥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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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1561년)
기본 정보
김상준 초상
김상준 초상
본관안동 김(安東 金氏)
사수(士脩)
기천(沂川), 탄옹(炭翁)
시호문정(文貞)
출생1561년 (명종 16년)
사망1624년 (인조 2년)
묘소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관력
주요 관직대사헌
예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좌찬성
우찬성
판중추부사
가족 관계
아버지김번(金璠)
어머니정부인 안동 권씨(貞夫人 安東 權氏)
배우자정부인 전주 이씨(貞夫人 全州 李氏)
아들김광혁(金光爀)
김광즙(金光熠)
김광전(金光爚)
이시방(李時昉)에게 출가

2. 생애

김상준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광해군 대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1582년(선조 15년) 22세에 이이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진사시에 합격했다. 1590년(선조 2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심수경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며 군사 전략 수립에 기여했고, 1593년(선조 26년) 승정원 주서를 거쳐 예문관 관직을 역임했다.

1595년(선조 28년) 강원도 어사로 파견되었으나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곧 영광 군수로 임명되어 3년간 재직하며 1596년(선조 29년) 이순신 장군과 만나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 발발 당시에는 관찰사 종사관으로 강항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1598년(선조 31년) 호남조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보급했고, 1599년(선조 32년) 공주목사로 부임해 산성을 쌓았다. 이후 병으로 잠시 관직을 떠났으나 사도조도사로 복귀, 여러 지역을 다니며 군량 확보에 힘썼다. 1604년(선조 37년) 해주목사를 거쳐 1605년 죽주부사로 부임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된 후, 경주부윤, 승정원 좌부승지를 역임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1610년(광해군 2년) 승정원 좌승지까지 올랐다. 명나라 만력제의 책봉 조서를 받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가선대부에 오르고 승정원 도승지, 동지중추부사를 겸임했다. 1612년(광해군 4년) 형조참판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영창대군 옹립을 꾀했다는 허위 자백을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1618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김상헌, 김광욱과 함께 은거하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샀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 이후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함경도 길주에 유배되었다. 1627년 충청도 아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633년 사면, 1635년에 풀려났다. 유배 중에도 학문에 힘써 많은 이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수학

1582년(선조 15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향시 초시와 발해시에서 2등으로 선발되어 율곡 이이에게 재능을 칭찬받았다. 같은 해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5년 모친상 때는 상을 잘 치렀다고 칭찬받았다. 3년상을 마친 후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함께 공부하던 종제들이 그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책 없이도 글을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1]

2. 2. 관직 생활과 임진왜란

1582년(선조 15년) 22세의 나이로 향시 초시와 발해시에 2등으로 선발되어 이이가 그의 재주를 칭찬하였다. 그해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5년 모친상 때 상을 잘 치렀다고 칭찬받았다. 3년상을 마치고 더욱 책 읽기에 힘써, 함께 공부하던 종제들이 그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책 없이도 글을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1590년(선조 23년) 30세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심수경이 호서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할 때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군중 계획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심수경이 그를 중하게 여겼다.

1593년(선조 26년) 행재소에서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었고, 예문관 검열, 대교를 거쳐 1594년(선조 27년) 예문관 봉교로 승진했다. 병조좌랑, 예조좌랑을 거쳐 1595년(선조 28년) 강원도 어사로 파견되었으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광 군수에 임명되어 3년 동안 근무하였으며, 1596년(선조 29년) 9월 이순신 장군을 만나 왜란 극복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관찰사의 종사관으로 강항과 함께 전라도 영광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비 확보에 힘썼다.

1598년(선조 31년) 호남조도사로 임명되어 명나라 수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군자감정, 성균관 사예를 거쳐 1599년(선조 32년) 6월 내섬시정이 되었다. 1599년 8월 공주목사가 되어 산성을 수축하였고, 1602년 병으로 사임했다가 사도조도사에 임명되어 관동, 영남, 호남, 호서 지방을 다니며 속량 수만 석을 확보하였다.

1604년(선조 37년) 해주목사를 지내고 사임했다가, 1605년 죽주부사에 발령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년) 3월 경주부윤을 거쳐 승정원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명나라에 천추사로 파견되어 북경에 다녀왔으며, 1609년 8월 승정원 우부승지, 1610년(광해군 2년) 1월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명나라 만력제가 태감 염등을 보내 책봉하는 글을 내릴 때 예방승지를 맡아 임무를 잘 수행하여 가선대부로 특진, 승정원 도승지로 기용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1612년(광해군 4년) 1월 가의대부에 올라 형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의금부사가 되었다.

2. 3. 공주목사, 사도조도사, 해주목사 시절

1599년(선조 32년) 8월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어 공주군에 산성을 수축하였고, 1602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대신(大臣)이 다시 김상준을 천거하여 사도조도사(四道調度使)에 임명되었다. 관동(關東)과 영남(嶺南), 호남(湖南), 호서(湖西) 지방을 다니며 험준한 수천 리의 험로를 거쳐 속량(粟糧) 수만 석을 확보하였다.

1604년(선조 37년)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내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 4. 중앙 관직과 외교 활동

1590년(선조 23년) 30세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외교문서를 담당한 관청인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1] 1593년(선조 26년)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는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승정원(承政院) 주서(主書)에 제수되었고, 곧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했다.[1] 1594년(선조 27년) 예문관 봉교(奉敎)에 승임되었고,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겨갔다.[1]

1598년(선조 31년) 호남조도사(湖南調度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수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1] 군자감정(君子監正)을 거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겼다가 1599년 6월 내섬시정(內贍寺正)이 되었다.[1]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1] 1609년 3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1] 이어 명나라에 파견될 천추사(千秋使)로 선발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으며,[1] 돌아와서 1609년 8월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1610년 1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1]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신종(神宗)이 태감(太監) 염등(冉登)을 보내어 책봉하는 글을 내릴 때에 김상준이 예방승지를 맡아서 신종의 책봉서를 주선하는데 임무를 잘 수행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기용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부총관(副總管)을 겸하였다.[1] 그 이듬해(1612년 1월)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형조참판(刑曹參判) 겸(兼) 동지춘추관사의금부사(同知春秋館事義禁府事)가 되었다.[1]

2. 5. 계축옥사와 유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무고로 체포된 뒤 광해군의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고문에 못 이겨, 김제남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하여 삭출당했다.

1618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때 사촌 동생 김상헌 및 아들 김광욱과 함께 정청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고 경기도 고양(高揚) 등에서 은거하며 지내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사직당했으며, 그 후 오랫동안 벼슬에 기용되지 못했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 후에는 계축옥사 때 연안부원군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함경도 길주(吉州)에 유배되고, 1627년 충청도 아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633년 사면을 받고 1635년에 풀려나왔다.

함경도 길주(吉州)에 귀양 가 있을 때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잘 이끌어 선유(善誘)하였기 때문에 신발이 처마 밑에 가득하여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점점 향학(向學)하는 이가 많았는데, 뒤에 공의 부음(1635년 8월 29일)을 듣고 모두 천리 밖에서 조부(弔賻)를 하였다고 한다.

2. 6. 인조반정 이후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 이후 계축옥사 때 연안부원군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함경도 길주에 유배되었고, 1627년 충청도 아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633년 사면을 받고 1635년에 풀려났다.

함경도 길주에 귀양 가 있을 때에는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잘 이끌어 주었기 때문에 신발이 처마 밑에 가득하여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점점 향학(向學)하는 이가 많았다. 이후 김상준의 부음(1635년 8월 29일)을 듣고 모두 천리 밖에서 조부(弔賻)를 하였다고 한다.

2. 7. 사망과 평가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무고로 체포된 뒤 광해군의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고문에 못 이겨, 김제남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하여 삭출당했다. 1618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때 사촌 동생 김상헌 및 아들 김광욱과 함께 정청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고 경기도 고양(高揚) 등에 은거하며 지내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사직당했으며, 그 후 오랫동안 벼슬에 기용되지 못했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 후에는 계축옥사 때 연안부원군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함경도 길주(吉州)에 유배되고, 1627년 충청도 아산에 이배되었다가 1633년 사면을 받고 1635년에 풀려났다. 함경도 길주에 귀양 가 있을 때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잘 이끌어 주었기 때문에 신발이 처마 밑에 가득하여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점점 향학(向學)하는 이가 많았는데, 이후 김상준의 부음(1635년 8월 29일)을 듣고 모두 천리 밖에서 조문하였다.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즐겨 읽었고, 손수 ≪강목≫ 20권의 목(目)을 초(抄)해서 ≪강감요략(綱鑑要略)≫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요점을 담으면서도 자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집으로 ≪속옥로(續玉露)≫가 있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 와부읍 율석리(싸리메기)에 있다.

3. 저술 및 작품

(저술 및 작품 관련 내용 없음)

참조

[1] 참고 선원록 참고
[2] 인물 태종의 4남 근녕군(謹寧君)의 현손
[3] 인물 이명 윤강(尹絳)
[4] 인물 이명 윤순(尹純)
[5] 인물 이명 윤적(尹績)
[6] 인물 이명 윤서(尹緖)
[7] 인물 이명 윤제(尹綈)
[8] 인물 이명 김응진(金應辰)
[9] 기록 왕실족보인 선원록에선 어째서인지 노비(婢) 출신 첩 고온(古溫)과 또 다른 이름 미상의 첩만이 나와있고 자녀들은 김광혼과 김광련만이 써있으며 모두 서자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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