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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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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수경은 조선 명종, 선조 때의 문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심정의 손자이다. 1546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 홍문관 직제학, 평안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관찰사 등을 거쳐 대사헌, 우의정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아 지휘하고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전란 후에는 해안가 왜적 토벌에 나섰다. 저서로는 《청천당 시집》 등이 있으며, 서얼 차별 완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83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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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경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심수경
한자 표기沈守慶
별칭청천당(聽天堂)
출생일1516년 12월 20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599년 윤 4월 20일 (84세)
사망지조선 경기도 과천
국적조선
직업문신, 의병대장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배우자정경부인 신씨
자녀2남 5녀, 서자 3남
아들심일장, 심일취
서자심일매, 심일준, 심일운
아버지심사손
어머니정경부인 전의 이씨
형제자매심수약(동생), 심수준(동생)
외조부이예장
장인신파
숙부심사순
사위정연, 홍기영, 전홍국, 조경인, 성립
손자심관
서손녀사위권민중, 남용, 김세걸
증손자심노
고손자심구
학력 및 관력
과거 급제1546년(명종 1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직책문신

2. 생애

심수경은 조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심정의 손자이자, 홍문관 직제학과 만포진 첨절제사를 지낸 심사손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심정은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신이며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을 제거한 인물로 사림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심수경은 할아버지의 과오를 씻으려는 듯 신망을 얻었다.[1]

13세에 아버지 심사손이 여진족에게 살해되었고, 17세에는 할아버지 심정이 사사되어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아들의 교육에 크게 신경 썼다고 한다.

1546년(명종 1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하였다. 이후 호당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등을 지냈다. 1550년에는 이조좌랑 겸 춘추기사관으로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1] 1551년 의정부 검상에 임명되고, 그 뒤, 홍문관 부응교, 응교, 전한, 직제학을 차례로 지냈다.

1558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고,[2] 1562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중종의 능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왕의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너도록 선창을 설치하지 않은 죄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후에 복직되어 대사헌, 대사성, 팔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74년(선조 7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1583년 병조판서, 1590년 우의정이 되고, 곧 기로소에 들어갔다. 70세 이후 여러번 사직할 것을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정에 출사를 거르거나 출사를 거부하고 마을의 노인들과 어울려 시를 쓰고 술마시며 활, 바둑 등으로 노년을 소일하였다. 81세에 이르러 비로소 사직이 받아들여져 벼슬을 그만 두고 경기도 과천으로 은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러 한성부로 달려갔으나 어가는 이미 서북으로 파천한 뒤였다. 스스로 왕을 모시지 못함을 반성하는 반성문을 공포한 뒤 창의하여 의병 모집에 힘썼고, 이 소식을 들은 선조에 의해 삼도도체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어 의병을 모아 지휘하였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전란 종결 후, 치사하면서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죄를 속죄한다며 스스로 '''건의대장''' 이라 자호하고 해안가에 침투한 왜적을 토벌하였다.

1598년 영중추부사를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과천에서 생을 마쳤다. 1599년 특별히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1]

선조는 심수경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녹봉을 지급하라는 영을 내렸다.[1][3]

그는 항상 자녀들에게 "과분하게도 내가 일품관을 지냈기에 신도비를 세워야 할 것이나 돌이켜 보면 기록할 만한 일이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1599년(선조 31년) 윤 4월 20일에 병으로 죽었다. 사망 당시 향년 83세였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조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 심정(沈貞)의 손자이자, 홍문관 직제학과 만포진 첨절제사(정3품 당상관)를 지낸 심사손(沈思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의 이예장(李禮長)의 딸이다.

할아버지 심정은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신이며 남곤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을 제거한 인물이다.[1] 이 일로 사림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심수경은 할아버지의 과오를 씻으려는 듯 신망을 얻었다.[1] 그는 할아버지에게 연좌되지 않고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13세에 아버지 심사손이 만포첨사로 재직 중 여진족에게 살해되었고, 17세에는 할아버지 심정이 사사되어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아들의 교육에 크게 신경 썼는데, 심수경의 차남 심일취에 의하면 '교육으로 입신양명하여 영달로써 봉양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2. 2. 관료 생활

1546년(명종 1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호당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등을 지냈다. 1550년(명종 5년) 이조좌랑 겸 춘추기사관으로 있을 때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에 이조정랑을 거쳐, 1551년 의정부 검상(檢詳)에 임명되고, 그 뒤, 홍문관 부응교, 응교, 전한, 직제학을 차례로 지냈다.

1558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2]

1562년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중종의 능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왕의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너도록 선창을 설치하지 않은 죄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후에 복직되어 대사헌, 대사성, 팔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574년(선조 7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1583년(선조 16년) 병조판서, 1590년 우의정이 되고, 곧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70세 이후 여러번 사직할 것을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정에 출사를 거르거나 출사를 거부하고 마을의 노인들과 어울려 시를 쓰고 술마시며 활, 바둑 등으로 노년을 소일하였다. 81세에 이르러 비로소 사직이 받아들여져 벼슬을 그만 두고 경기도 과천으로 은퇴하였다.

2. 2. 1. 임진왜란 전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러 한성부로 달려갔으나 어가는 이미 서북으로 파천한 뒤였다. 스스로 왕을 모시지 못함을 반성하는 반성문을 공포한 뒤 창의하여 의병 모집에 힘썼고, 이 소식을 들은 선조에 의해 삼도도체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어 의병을 모아 지휘하였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전란 종결 후, 치사(致仕)하면서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죄를 속죄한다며 스스로 '''건의대장''' 이라 자호하고 해안가에 침투한 왜적을 토벌하였다.

2. 3. 은퇴와 죽음

1598년 영중추부사를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과천에서 생을 마쳤다. 1599년 특별히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1]

선조는 심수경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녹봉을 지급하라는 영을 내렸다.[1][3]

그는 항상 자녀들에게 "과분하게도 내가 일품관을 지냈기에 신도비를 세워야 할 것이나 돌이켜 보면 기록할 만한 일이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후에 그의 둘째 아들 심일취(沈日就)는 간략하게 그의 관직 경력을 묘비에 적어두었다. 1599년(선조 31년) 윤 4월 20일에 병으로 죽었다. 사망 당시 향년 83세였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5대조부심귀령(沈龜齡)좌명공신(佐命功臣), 풍천군(豐川君), 의흥삼군부 좌군 도총제, 지의흥부사, 시호 정양(靖襄)
고조부심치(沈寘)남원부사, 증호조판서
증조부심응(沈膺)적개공신(敵愾功臣), 봉조하, 증영의정,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 시호 양호(襄胡)
조부심정(沈貞)정국공신(靖國功臣),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 좌의정, 시호 문정(文靖)
숙부심사순(沈思順)홍문관 부제학
아버지심사손(沈思孫)홍문관 직제학, 만포진 첨절제사, 증영의정
어머니전의 이씨정경부인, 참의 이예장(李禮長)의 딸
동생심수약(沈守約)
동생심수준(沈守準)
부인신씨정경부인,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신파(申坡)의 딸, ? ~ 1584년
장남심일장(沈日將)찰방, 1536년 ~ 1597년
손자심관(沈關)호조좌랑, 1569년 ~ 1608년
증손자심노(沈노)승지
고손자심구(沈玖)상의원정
차남심일취(沈日就)첨지중추부사 증이조참판, 1547년 ~ 1616년
둘째며느리광산 김씨정부인
맏딸풍산 심씨
맏사위정연(鄭淵)주부
둘째딸풍산 심씨
둘째 사위홍기영(洪耆英)문화현령
셋째딸풍산 심씨
셋째 사위전홍국(全弘國)
넷째딸풍산 심씨
넷째 사위조경인(曺景仁)예빈시주부
다섯째 딸풍산 심씨
다섯째 사위성립(成砬)선전관
이름 미상
서자심일매(沈日邁)관상감정, 심수경 사망 전 이미 출가
서손녀풍산 심씨
서손녀사위권민중(權敏中)
서손녀풍산 심씨
서손녀사위남용(南瑢)내의원
서손녀풍산 심씨
서손녀사위김세걸(金世傑)혜민서 교수
이름 미상비첩
서자심일준(沈日遵)인동부사, 1590년 ~ 1659년
서자심일운(沈日運)해미현감, 1596년 ~ ?
장인신파(申坡)
외조부이예장(李禮長)



그는 말년에 기생 첩에게서 서자 2명을 두었는데, 75세에 심일준(沈日遵)을, 81세에 심일운(沈日運)을 두었다. 이는 심수경의 생전에 본 정실부인 소생 첫 증손자 심로(沈𢋡, 1590~1664)하고 연령대가 비슷했다. 이는 견한잡록에 장난삼아 친구 서교 송찬(西郊 宋贊), 죽계 안한(竹溪 安翰)에게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둘도 화답시를 보냈고,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4. 저서 및 작품

심수경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
《청천당 시집》
《청천 유한록》
《견한잡록》
《상제잡의》
《귀전창수》



심강 신도비문에는 심수경의 작품에 대한 정보가 있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4. 1. 저서


  • 《청천당 시집》
  • 《청천 유한록》
  • 《견한잡록》
  • 《상제잡의》
  • 《귀전창수》

4. 2. 작품

심수경의 작품에 대한 정보는 심강 신도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5. 평가 및 기타

심수경은 기묘사화 때 중심 인물이었던 심정의 손자였다. 사림 집권기에 조광조 등을 숙청한 선대의 허물을 부끄러워하며 몸가짐을 조심했기에 청현직을 두루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기생과의 행적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심수경은 8도 관찰사를 모두 역임하고 우의정 등을 지내는 등 벼슬 운이 좋았다.[3]

5. 1. 기생과의 일화

심수경은 1560년(명종 15년) 전라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봄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를 했다. 그때 기생 금개와 함께 살았다.[4] 심수경은 금개를 첩으로 들이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조정 일이 바쁘게 되어 첩을 들이는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4]

1563년 경기 관찰사가 된 심수경은 문득 막종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성주로 안부를 묻자 경적에 뽑혀 갔다고 했다. 심수경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막종은 다시 성주로 돌아갔다. 심수경은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난다고 한탄했다. 얼마 후 막종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써서 보내 주었다.[4]

: 늙으니 낙신부를 지을 마음이 없네 / 老去無心賦洛神

: 물결에 버선 먼지 나는 것볼수 없네 / 凌波不見襪生塵

: 처음 만나던 그대 자태가 떠오르는데 / 當年만憶初呈態

: 오늘 죽었다는 소식 갑자기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 운우지정 나누던 그때 꿈 아련한데 / 暮雨朝雲迷舊夢

: 춤추던 옷과 노래하던 부채 누구에게 주었는가 / 舞衫歌扇付何人

: 성산은 이로부터 화려한 맛 덜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 적막한 임풍루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風座上賓[4]

참조

[1] 서적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 다산초당 2009
[2] 간행물 명종실록 1558-10-13
[3] 서적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 다산초당 2009
[4] 서적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 다산초당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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