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토 단다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가토 단다이는 1276년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가마쿠라 막부가 설치한 기관이다. 호조 무네요리가 초대 나가토 슈고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나가토, 스오 지역을 관할하는 나가토 스오 단다이, 산요도, 산인도 지역을 통괄하는 주고쿠 단다이로 불리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잠시 나가토 단다이로 임명되었으나, 나가토 단다이의 실체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나가토 단다이의 위치는 시모노세키시 조후 또는 야스오카로 추정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중세사 - 불입권 (일본)
불입권은 일본 중세 봉건 시대에 장원에 부여된 권리로, 국왕이나 조정의 간섭 없이 자치권을 행사하며 세금 징수, 재판, 치안 유지 등 운영 전반에 걸쳐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 가마쿠라 시대 - 슈고다이
슈고다이는 무로마치 시대에 수호를 대신하여 임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한 인물로, 점차 세습화되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으나, 국인과의 갈등, 내부 분열, 가신의 배신 등으로 흥망성쇠를 겪으며 전국 시대의 격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 가마쿠라 시대 - 겐포
겐포는 1213년부터 1219년까지 사용된 일본의 연호이며, 이 기간 동안 가마쿠라에서 지진, 화재, 주요 인물들의 사망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나가토 단다이 |
---|
2. 연혁
1274년(분에이 11년) 원나라의 침공(분에이의 역) 이후, 1276년 호조 무네요리가 나가토 슈고로 임명되며 나가토 단다이가 시작되었다. 1280년 무네요리의 아들 호조 가네토키가 나가토 슈고를 이었다. 1281년 원나라의 2차 침공(고안의 역) 당시 원군이 쳐들어왔다는 전승이 있으나, 사료 부족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289년 무렵부터 호조 사네마사가 나가토와 스오 양국의 슈고를 겸임하였고, 이후 두 지역 슈고는 동일인이 겸임하게 되었다. 1296년 사네마사가 진제이 단다이로 취임한 후, 호조 도키나카, 호조 도키무라가 차례로 양국 슈고에 임명되었다. 1305년 가겐의 난으로 도키무라가 살해된 후, 손자 호조 히로토키가 슈고직을 이었으나, 이후 동생 도키나카가 다시 임명되었다. 도키무라, 히로토키, 도키나카는 모두 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1323년 호조 도키나오가 슈고에 임명되었으나, 1333년 겐코의 난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면서 나가토 단다이도 막을 내렸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잠시 나가토 단다이로 임명되기도 했다.
2. 1. 설치 배경
1274년(분에이 11년) 10월, 몽골-고려 연합군이 규슈 북부 방면으로 쳐들어왔다. 일본에서 분에이의 역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가마쿠라 막부는 1276년에 최전선 방위의 강화를 위해 싯켄(執権) 호조 도키무네의 동생인 호조 무네요리를 나가토 슈고로 임명해[2] 나가토로 파견했다. 이것이 나가토 단다이의 시초라고 여겨지고 있다. 몽고습래라 불리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무네요리에게는 여느 슈고들 보다도 강대한 권능이 주어졌던 것으로 보이나,[3] 그 권능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세하지 않다.나가토에는 나가토경고번역이 설치되었고 1281년(고안 4년)의 원나라의 제2차 일본 원정(고안의 역)에 즈음해 몽골군이 나가토까지 쳐들어왔다는 전승도 있지만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비교적 후대의 자료를 통해서이다.[4] 때문에 나가토로까지 몽골군이 쳐들어 왔다는 것은 사료의 부족 등으로 상세한 것을 알 수 없다.
2. 2. 나가토 단다이의 권한과 역할
1274년(분에이 11년) 10월, 몽골-고려 연합군이 규슈(九州) 북부 방면으로 쳐들어온 사건(분에이의 역)을 계기로, 1276년 가마쿠라 막부는 최전선 방위 강화를 위해 싯켄(執権)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의 동생인 호조 무네요리(北条宗頼)를 나가토 슈고(守護)로 임명해[2] 나가토로 파견했다. 이를 나가토 단다이의 시초로 본다. 몽골습래(蒙古襲来)라 불리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무네요리에게는 여느 슈고들보다도 강대한 권능이 주어졌던 것으로 보이나,[3] 그 권능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세하지 않다.나가토에는 나가토경고번역이 설치되었고 1281년(고안 4년) 원나라의 제2차 일본 원정(일본명 고안의 역) 때 몽골군이 나가토까지 쳐들어왔다는 전승도 있지만,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비교적 후대의 자료를 통해서이다.[4] 따라서 몽골군이 나가토까지 쳐들어왔다는 것은 사료 부족 등으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나가토 슈고는 스오 슈고(周防守護)직도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가토 스오 단다이'''('''長門周防探題''')라는 호칭도 이로 인해 붙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세에는 나가토 단다이의 권능이 확대되어 산요도(山陽道) ・ 산인도(山陰道) 전역의 검단까지 통괄한 시기도 있었기에, '''주고쿠(中国) 단다이'''('''中国探題''')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1333년(겐코 3년), 일본 전국 각지에서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규슈에서는 막부의 중요기관이었던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가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당시의 나가토 단다이 호조 도키타다는 진제이 단다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미처 닿기도 전에 진제이 단다이는 멸망하였고, 도키타다는 부젠(豊前)의 야나기가우라(柳ヶ浦)에서 항복했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나가토 단다이도 역사의 막을 내렸다. 훗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는 쇼군(将軍)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서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足利直冬)가 잠시 나가토 단다이로 임명되기도 했다.
2. 3. 가마쿠라 막부 멸망과 나가토 단다이
1274년(분에이 11년) 10월, 몽골-고려 연합군이 규슈(九州) 북부로 쳐들어왔다. 일본에서 분에이의 역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가마쿠라 막부는 1276년 최전선 방위 강화를 위해 싯켄(집권) 호조 도키무네의 동생인 호조 무네요리를 나가토 슈고(守護)로 임명해[2] 나가토로 파견했다. 이것이 나가토 단다이의 시초로 여겨진다. 몽고습래(蒙古襲来)라 불리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무네요리에게는 여느 슈고보다도 강대한 권능이 주어졌던 것으로 보이나,[3] 그 권능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세하지 않다.나가토에는 나가토경고번역이 설치되었고, 1281년(고안 4년) 원나라의 제2차 일본 원정(일본명 고안의 역) 때 몽골군이 나가토까지 쳐들어왔다는 전승도 있지만,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비교적 후대의 자료를 통해서이다.[4] 때문에 나가토로까지 몽골군이 쳐들어 왔다는 것은 사료 부족 등으로 상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나가토 슈고는 스오 슈고(周防守護)직도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가토 스오 단다이'''('''長門周防探題''')라는 호칭도 그로 인해서 붙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세에는 나가토 단다이의 권능이 확대되어 산요도(山陽道) ・ 산인도(山陰道) 전역의 검단까지 통괄한 시기도 있었기에, '''주고쿠(中国) 단다이'''('''中国探題''')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1333년(겐코 3년), 일본 전국 각지에서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반기가 일어났다. 규슈에서는 막부의 중요기관이었던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가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당시의 나가토 단다이 도키타다는 진제이 단다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미처 닿기도 전에 진제이 단다이는 멸망하였고, 도키타다는 부젠국(豊前)의 야나기가우라(柳ヶ浦)에서 항복했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나가토 단다이도 역사의 막을 내렸다. 훗날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쇼군(将軍)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足利直冬)가 잠시 나가토 단다이로 임명되기도 했다.
2. 4.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나가토 단다이
1274년(분에이 11년) 10월,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규슈 북부로 쳐들어온 사건(분에이의 역)을 계기로, 가마쿠라 막부는 1276년에 최전선 방위 강화를 위해 싯켄(집권) 호조 도키무네의 동생인 호조 무네요리를 나가토 슈고(守護)로 임명해[2] 나가토로 파견했다. 이것이 나가토 단다이의 시초로 여겨진다. 몽고습래(蒙古襲来)라 불리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무네요리에게는 여느 슈고들보다도 강대한 권능이 주어졌던 것으로 보이나,[3] 그 권능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세하지 않다.나가토에는 나가토경고번역이 설치되었고, 1281년(고안 4년) 원나라의 제2차 일본 원정(고안의 역) 때 몽골군이 나가토까지 쳐들어왔다는 전승도 있지만,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비교적 후대의 자료를 통해서이다.[4] 때문에 나가토로까지 몽골군이 쳐들어 왔다는 것은 사료 부족 등으로 상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나가토 슈고는 스오 슈고직도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가토 스오 단다이'''('''長門周防探題''')라는 호칭도 그로 인해서 붙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세에는 나가토 단다이의 권능이 확대되어 산요도 ・ 산인도 전역의 검단까지 통괄한 시기도 있었기에, '''주고쿠 단다이'''('''中国探題''')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1333년(겐코 3년), 일본 전국 각지에서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규슈에서는 막부의 중요기관이었던 진제이 단다이가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당시의 나가토 단다이 호조 도키타다는 진제이 단다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미처 닿기도 전에 진제이 단다이는 멸망하였고, 도키타다는 부젠국 야나기가우라(柳ヶ浦)에서 항복했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나가토 단다이도 역사의 막을 내렸다. 훗날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쇼군(将軍)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아시카가 나오후유)가 잠시 나가토 단다이로 임명되기도 했다.
3. 명칭과 실제
사료상으로는 호조 도키타다만이 나가토 단다이로 알려져 있지만, 호조 무네요리 이후 호조 일문이 맡은 나가토 슈고는 다른 슈고들보다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여러 사료에서 나타난다. 후세에 '나가토 단다이'라는 명칭은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되지만,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3. 1. 나가토 단다이의 실체에 대한 논란
사료상으로는 호조 도키타다가 나가토 단다이로 알려져 있으나, 호조 무네요리 이후 호조 일문이 맡아온 나가토 슈고는 다른 슈고들보다 강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 사료 곳곳에 나타나고 있어, 후세에 '나가토 단다이'라는 명칭은 이로부터 생겨났다고 여겨진다. 다만 그 실제는 자세하지 않다.이에 대해 실체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나가토 단다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존재한다. 이 설에 따르면, 『구쓰나 문서』(忽那文書)의 '구쓰나 시게키요(忽那重清) 군충장'(忽那重清軍忠状) 외에 '나가토 단다이'라고 기록된 문서가 오늘날까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또한 '나가토 단다이'라는 직제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나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처럼 막부의 명령을 직접 받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행정 문서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는, 막부에서 나가토 단다이에 대한 명령이 원나라와의 전투 이후에도 로쿠하라 단다이를 경유해서 집행되었으며, 그 밖의 분야에서도 나가토 슈고는 로쿠하라 단다이의 지휘 및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고, 그 명령하의 범주를 넘는 직권을 행사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리고 원나라의 일본 원정 이후 호조 씨(北条氏) 일문 내 유력자가 나가토 ・ 스오(周防)의 슈고를 겸하는 상태가 지속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출자(出自) 때문에 '나가토 단다이'라는 속칭이 사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의 가마쿠라 막부에는 '나가토 단다이'라 불리는 역직(役職) 및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스오 슈고'(防長守護)라 불려야 할 존재였다는 것이다.[5]
4. 설치된 위치
1276년 호조 무네요리가 나가토 슈고직에 임명되기 전에는 닛카이도 씨가 나가토 슈고직을 맡았으나, 가마쿠라에 머물렀기 때문에 현지 대리인으로 미이 씨가 나가토 슈고다이를 맡았다. 미이 씨의 저택 터는 시모노세키시 야스오카 도미토의 '산타이 야시키 터' 유적이다.
일반적으로 가마쿠라 시대 슈고는 가마쿠라에 머물렀지만, 호조 무네요리는 원나라 침공 방어 최전선 사령관으로서 나가토 국에 부임할 필요가 있었다. 호조 무네요리가 주재한 슈고도코로(守護所)로 가장 유력시되는 곳은 나가토 고쿠가(国衙)가 있던 조후(현 시모노세키시 조후)이다.
훗날 미이 씨는 도요우라 군 무로쓰(현 시모노세키 시 도요우라 군 무로쓰)로 옮겨갔고, 야스오카 지역의 도미토 저택을 호조 무네요리에게 넘겼다는 설도 있다.[7]
4. 1. 조후 설 (시모노세키 시 조후)
1276년 호조 무네요리가 나가토 슈고직에 임명되어 나가토 단다이가 실질적으로 창시되기 이전에는 닛카이도 씨(二階堂氏)가 나가토 슈고직을 맡았다. 그러나 닛카이도 씨는 가마쿠라에 상주하고 있었으므로, 현지 대리인 자격으로 미이 씨(三井氏)가 나가토 슈고다이(守護代)를 맡고 있었다. 미이 씨의 저택 터로 여겨지는 곳은 시모노세키시 야스오카(安岡)의 도미토(富任)에 있는 "산타이 야시키 터"(三太屋敷跡) 유적이다.일반적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슈고는 가마쿠라에 머물러 있었고 현지에 부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나가토 슈고로 임명된 호조 무네요리의 경우는 원나라의 침공에 대한 방위의 최전선 사령관으로써 실제로 나가토 국에 부임해 갈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호조 무네요리가 주재했던 슈고도코로(守護所)로 가장 유력시되는 곳은 나가토 고쿠가(国衙)가 존재하고 있었던 조후(長府) 즉 시모노세키시 조후이다.[6]
훗날 미이 씨는 도요우라 군(豊浦郡)의 무로쓰(室津, 오늘날의 시모노세키 시 도요우라 군 무로쓰)로 옮겨갔고, 연고지인 야스오카 지역에 미이 씨가 가지고 있었던 도미토 저택(富任の屋敷)을 호조 무네요리의 거처 즉 나가토 단다이의 거점으로써 호조 무네요리에게 넘겼다는 설도 있다.[7]
4. 2. 야스오카 설 (시모노세키 시 야스오카)
1276년 호조 무네요리가 나가토 슈고직에 임명되어 나가토 단다이가 실질적으로 창시되기 이전에는 닛카이도 씨(二階堂氏)가 나가토 슈고직을 맡았다. 그러나 닛카이도 씨는 가마쿠라에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현지 대리인 자격으로 미이 씨(三井氏)가 나가토 슈고다이(守護代)를 맡고 있었다. 미이 씨의 저택 터는 오늘날 일본 시모노세키시(下関市) 야스오카(安岡) 도미토(富任)에 있는 「산타이 야시키 터」(三太屋敷跡)라는 유적이다.[7]훗날 미이 씨는 도요우라 군(豊浦郡) 무로쓰(室津, 오늘날 시모노세키시 도요우라 군 무로쓰)로 옮겨갔고, 연고지인 야스오카 지역에 있던 미이 씨 소유 도미토 저택(富任の屋敷)을 호조 무네요리의 거처, 즉 나가토 단다이 거점으로 호조 무네요리에게 넘겼다는 설도 있다.[6]
참조
[1]
문서
忽那文書 元弘三年三月二十八日「忽那重清軍忠状」
[2]
문서
凝然自筆『梵網戒本疏日珠鈔』巻第八紙背文書建治元年「守護交代注文」
[3]
문서
『日名子文書』建治二年三月八日「北条宗頼書状」
[4]
문서
『風土注進案』先大津宰判神田上村
[5]
논문
佐藤秀成「防長守護小考」
[6]
서적
中世諸国一宮制研究会『中世諸国一宮制の基礎的研究』
[7]
서적
安岡郷土史同好会編『下関市安岡 歴史探訪と観光案内図』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