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레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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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레수안은 1555년 핏사눌록에서 태어난 아유타야 왕국의 왕자이자, 1590년부터 1605년까지 아유타야의 왕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버마의 인질로 생활하며 군사 훈련을 받았고, 1584년 버마로부터 독립을 달성했다. 이후 버마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확장했으며, 특히 1593년 코끼리 전투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떨쳤다. 나레수안은 1605년 북부 지역에서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태국 역사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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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티보디 1세는 1350년 아유타야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4개의 관청을 설립하고 타이 법전을 제정했으며,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사후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나레수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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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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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나레수안 대왕 |
태국어 | , , , |
다른 칭호 | 산펫 2세 (, , ) |
왕조 | |
왕가 | 수코타이 왕조 |
통치 | |
왕국 | 시암 |
즉위 | 1590년 7월 1일 |
퇴위 | 1605년 4월 25일 |
이전 통치자 | 마하 탐마라차 |
다음 통치자 | 에카톳사롯 |
부왕 | |
임명자 | 마하 탐마라차 |
직위 | 시암 부왕 |
재임 기간 | 1571년 – 1590년 7월 1일 |
이전 통치자 | 마힌트라티랏 |
다음 통치자 | 에카톳사롯 |
섭정 | Bayinnaung (1571–1581) Nanda (1581–1584)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555년/1556년, 917 CS |
출생지 | Chan Palace, 핏사눌록, 수코타이 왕국 |
사망일 | 1605년 4월 25일 (48–50세) |
사망 요일 | 월요일, 여섯 번째 태국 달 (바이샤카)의 8번째 초승달, 967 CS |
사망 장소 | 란나 |
배우자 | 마니 라타나 에카 카삿트리 요다야 미바야 |
아버지 | 마하 탐마라차 |
어머니 | 위숫카삿 |
2. 출생과 초기 생애
나레수안 왕자는 1555년 4월 25일 핏사눌록에서 마하 탐마라차티랏과 위숫까삿 왕비의 아들로 태어났다.[1] 어머니는 아유타야의 마하 짜끄라팟 왕과, 떠빈슈웨티의 아유타야 원정에서 왕을 구한 영웅적인 희생으로 유명한 시 수리요타이의 딸이었다. "검은 왕자"(พระองค์ดำ|프라옹담th)로도 알려진 나레수안 왕자는 "하얀 왕자"로 알려진 남동생 에카토삿과 누나 수판칸라야가 있었다.[2]
버마-시암 전쟁 (1563-1564) 동안 바고 (태국어로는 หงสาวดี|홍사왓디th)의 퉁구 왕조 국왕 바잉나웅은 시암을 침공하여 핏사눌록을 포위했다. 마하 탐마라차티랏은 식량 부족과 천연두 발병으로 인해 장기간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바잉나웅은 핏사눌록과 아유타야를 점령했고, 태국을 버마의 조공국으로 만들었다.[3] 바잉나웅은 마하 탐마라차티랏에게 아들 나레수안 왕자를 왕실 인질로 바고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2]
1563년 나레수안은 바잉나웅 왕에게 인질로 끌려갔으나, 1569년 태국이 미얀마의 속국이 되면서 아버지가 왕으로 옹립되었고, 같은 해 누나 수판칸라야를 바잉나웅에게 보내는 대신 귀국했다.
2. 1. 출생
마하 탐마라차티랏과 위숫까삿의 아들인 나렛 왕자(훗날 나레수안 왕)는 1555년 4월 25일 핏사눌록에서 태어났다.[1] 어머니는 아유타야의 마하 짜끄라팟 왕과, 떠빈슈웨티의 아유타야 원정에서 왕을 구한 영웅적인 희생으로 유명한 시 수리요타이의 딸이었다. "검은 왕자"(พระองค์ดำ|프라옹담th)로도 알려진 나레수안 왕자는 "하얀 왕자"로 알려진 남동생 에카토삿과 누나 수판칸라야가 있었다.[2]2. 2. 버마에서의 인질 생활
유년기에 나렛 왕자는 남동생 에까톳사롯과 함께 버마의 도성 버고로 보내진 인질이었다. 버고에서 나렛 왕자는 다른 왕국에서 보내 온 인질 신세의 왕자들과 함께 버마 및 포르투갈 식으로 무술과 전쟁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그는 이때 배운 신식 전술이 버마에 대한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고 술회했다. 나렛 왕자는 여기서 버인나웅의 손자이자 난다버인의 아들인 민칫 스라와 경쟁하기도 했다.[5]1569년, 버마의 정복 군주 바인나웅은 마침내 아유타야를 점령하고 마하 탐마라차티랏을 아유타야의 왕 자리에 앉혔다. 같은 해, 마하 탐마라차티랏이 아들들의 귀환을 위해 자신의 딸 수판깐라야를 바인나웅의 첩으로 보내 나렛 왕자는 동생과 함께 풀려나 7년 간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아유타야로 귀환하게 되었다.[2]
3. 아유타야 부왕 시절
1563년, 미얀마의 바잉나웅 왕이 나레수안의 아버지 마하 탐마라차가 지사를 맡고 있던 핏사눌록을 공격하자, 나레수안은 인질로 미얀마에 끌려갔다. 1569년, 태국이 미얀마의 속국이 되면서 마하 탐마라차는 괴뢰 왕으로 옹립되었고, 딸 수판칸라야를 바잉나웅에게 보내는 대신 나레수안을 돌려받았다. 미얀마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나레수안은 태국의 독립을 위해 무력을 강화했다.
마하 탐마라차는 15세의 나렛(나레수안)을 핏사눌록의 우파라자(왕세자)로 임명했다.[2] 나레수안은 아버지와 함께 란쌍의 수도 비엔티안 정복에 나섰으나, 천연두에 걸려 돌아와야 했다. 이후 아유타야에 찬카셈 궁전을 짓고 거처로 삼았다.[2]
1574년, 태국은 미얀마를 상대로 거병했다. 나레수안은 싯탕 강에서 적군의 선봉을 총살하는 등 우세를 보였지만, 독립에는 이르지 못했다. 1581년 바잉나웅 왕이 사망하고 미얀마가 쇠퇴하자, 나레수안은 1584년 아버지와 함께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독립을 이루었다.
3. 1. 캄보디아의 침공
1570년, 아유타야가 버마에 함락되는 것을 지켜본 크메르 왕 바라민레아차는 이 기회를 틈타 시암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그는 2만 명의 군대를 모아 나콘 나욕을 점령하고, 아유타야로 진군하여 반 크라툼 부근에 진지를 세웠다. 50척의 캄보디아 해군이 방콕에 도착하여 포위했다.[7] 마하 탐마라차티랏 왕은 아유타야를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캄보디아군은 3일 동안 아유타야를 포위했지만, 도시는 굳건히 버텼다. 결국 캄보디아군은 캄보디아로 후퇴하며 많은 포로를 데려갔다.[8]1574년, 마하 탐마라차티랏 왕과 나레수안 왕이 란쌍 공격을 위한 바잉나웅의 작전을 돕고 있을 때, 바라민레아차는 다시 아유타야를 공격했다. 나레수안 왕은 천연두에 걸려 회복을 위해 아유타야로 돌아왔고, 이때 캄보디아 해군이 나이 카이 요새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나레수안 왕은 캄보디아 해군을 강으로 유인하여 시암 포병과 맞닥뜨리게 했다. 격렬한 포격 후, 캄보디아 해군은 후퇴했다.
1578년, 캄보디아에서 복무하는 중국 귀족 프라야 친 찬투가 펫차부리 시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캄보디아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하 탐마라차에게 피난처를 요청했고, 허락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크선을 타고 도망쳤다. 나레수안 왕은 프라야 친 찬투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온 캄보디아 요원임을 알고 있었기에, 시암 배들에게 그를 추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중국 정크선은 시암 정크선보다 크고 바다 항해에 적합하여 프라야 친 찬투는 도망칠 수 있었다.[9][10]
1580년, 바라민레아차는 시암이 약하다고 믿고 토사 라차와 수린 라차에게 5,000명의 병력으로 시암을 침략하도록 명령했다. 이들은 사라부리 등 아유타야 주변 도시를 습격하여 전리품과 사람들을 포획하려 했다.[11] 나레수안은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크메르 군대와 교전하여 궤멸시키고 캄보디아로 몰아냈다. 이 전투로 나레수안 왕은 시암과 버마 궁정에서 존경을 받게 되었고, 이후 크메르족은 다시는 태국을 공격하지 못했다.[12]
3. 2. 버마와의 전쟁
버마는 버인나웅의 사후 각 정복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혼란을 틈타 나레수안은 버마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584년, 1585년, 1586년, 1590년, 1592년 총 5번의 침략을 모두 물리치고 오히려 버마에 반격을 가해 굴복시켰다. 이후 버마는 아유타야 왕국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소모한 결과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이 야기되었다.[2]1581년 바잉나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난다 바잉이 뒤를 이었다. 난다의 삼촌인 아와의 부왕 타도 민소가 1583년 반란을 일으키자 난다 바잉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쁘라의 부왕, 따웅우, 치앙마이, 비엔티안, 아유타야 왕국의 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584년 2월 2일, 나레수안은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바고로 떠났고 4월에야 국경에 도착했다.[13] 담롱 라차누팝에 따르면, 이로 인해 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그의 아들인 마하 우파라자 밍이지 스와에게 수도에 남아 나레수안을 죽이라고 명령했다.[2] 버마 연대기에는 난다가 1584년 3월 25일 아와로 진격하기 전에 밍이지 스와에게 페구를 지키도록 결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4]
담롱에 따르면, 나레수안은 국경 마을 크랭에 도착했을 때 파라야 람과 파라야 키엣이 마하 우파라트의 명령을 받아 마하 우파라트가 정면에서 공격하는 동안 나레수안을 배후에서 공격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레수안은 사제, 파라야 키앗, 파라야 람, 그리고 다른 몬족을 포함한 회의를 소집했다. 나레수안은 그런 다음 "모인 사람들 앞에서 그날부터 시암이 홍사와디 왕조와의 우정을 끊고 옛날처럼 친밀하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 금 술잔에서 땅에 물을 부어 데바타에게 선언했다."[2]
담롱에 따르면, 나레수안은 몬족에게 그의 원정에 참여하도록 징집한 다음 바고로 진격하여 그곳에 억류된 시암 가족들을 해방시키려 했다. 그러나 난다 바잉은 이미 인와의 부왕을 격파하고 수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레수안은 약 10,000명의 가족을 해방시킨 후 후퇴했다. 밍이지 스와는 선봉에서 수라캄마와 함께 추격했다. 버마군은 사통강에서 시암군을 따라잡았다. 그곳에서 수라캄마는 "사통강을 건너는 동안 솜뎃 프라 나레수안이 사용한 왕실 총"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마하 우파라트의 군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후퇴했고, 그는 수도로 돌아갔다.[2]

나레수안은 그런 다음 수코타이 사람들과 함께 "충성 서약 의식"을 거행하고 푸아이 시의 신성한 연못에서 물을 마셨다. 그의 군대는 그런 다음 사왕칼록 군을 점령했다. 1584년 나레수안은 바고 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북부 지방의 모든 병력을 시암의 수도 아유타야 왕국로 데려왔다.[2]
같은 해 난다 바잉은 두 개의 군대를 보냈는데, 하나는 파테인의 부왕인 삼촌이 이끌었고, 다른 하나는 치앙마이에서 그의 동생 노라타 밍소가 이끌었다. 둘 다 연합하기 전에 별도의 교전에서 패배했고 후퇴했다.[2] 그 후 1586년,[15] 나레수안은 파목과 방 카에오 근처에서 치앙마이의 부왕을 격파하고 반 사켓에서 그의 야영지를 점령했는데, 여기에는 병사 10,000명, 코끼리 120마리, 말 100마리, 보트 400척 외에 무기, 탄약, 식량이 있었다.[2]
1586년 10월,[16] 난다 바잉 자신이 버마 군대를 이끌고 아유타야 왕국로 가서 아유타야 왕국에 대한 세 번째 침략을 시작했다. 난다 바잉 군대는 5개월 동안 도시에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나레수안의 공격적인 방어 때문에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그는 후퇴했다.[2]
1590년, 마하 탐마라차티랏이 사망했다. 1590년 7월,[17] 나레수안은 '''산펫 2세'''로 아유타야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프라 마하 우파라트가 이끄는 버마군은 다시 시암을 공격했지만, 나레수안은 반 코이 근처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버마군은 많은 병사, 코끼리, 말, 무기, 탄약을 잃고 바고로 후퇴했다.[2]


4. 아유타야의 왕
버마의 정복군주 버인나웅 사후 각 정복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 혼란을 틈타 나레수안은 버마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버마는 1584년, 1585년, 1586년, 1590년, 1592년에 걸쳐 총 5번 침략했지만, 나레수안은 이를 모두 물리치고 오히려 버마에 반격을 가해 굴복시켰다. 이후 버마는 아유타야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소모하여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을 겪었다.[2]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임진왜란)하자 명나라에 조선 파병을 두 번 제안하기도 하였다.[45]
4. 1. 즉위
1590년 아버지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1594년부터 미얀마를 침공하여, 1600년에는 미얀마의 수도 페구를 함락시켰다.[45] 나레수안은 무인으로서 수많은 전투에서 직접 군을 지휘했으며, 캄보디아와의 전투에서는 프라야 라웨크 왕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그 피로 발을 씻는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행해지던 전승 의식을 치렀다.[45]4. 2. 코끼리 전투와 버마 격퇴
1592년 11월, 난다 바인은 아들에게 아유타야를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밍기 스와는 쓰리 파고다 패스를 통과했고, 다른 두 사단은 매 라마오를 거쳐 왔다. 나레수안은 수판부리로 진군하여 탁코이 강 근처 농 사라이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나레수안은 퇴각하는 작전을 세워 버마군이 따라오게 한 다음 혼란스러운 선봉대를 주력 부대로 공격했다.[2]1593년 1월 전투에서 나레수안의 전투 코끼리인 "차오프라야 차이아누팝"이 발정기에 들어가 버마군 한가운데로 돌진했고, 소수의 시암군만이 그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담롱의 재구성에 따르면, 나레수안은 나무 아래 코끼리에 탄 밍기 스와를 보고 "형제여, 어째서 나무 그늘 아래 코끼리에 머물고 있는가? 나와서 우리에게 영광을 돌릴 일대일 전투를 벌이지 않겠는가? 우리처럼 일대일 전투를 벌일 왕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라고 외쳤다.[2][19]

나레수안과 밍기 스와의 개인적인 전투는 "코끼리 전투" (สงครามยุทธหัตถี|Songkram Yuddhahatthith)[20]로 알려진 매우 낭만적인 역사적 장면이었다. 오랜 결투 끝에 나레수안은 자신의 응아오(검)로 밍기 스와를 베었다. 솜뎃 프라 에카토삿롯 왕자 또한 무앙 차차로의 총독을 죽일 수 있었다. 시암 주력 부대가 도착했고 버마군은 패주하여 흩어졌다. 바고의 왕은 다른 두 사단에게 퇴각을 명령했다.[2]
나레수안의 응아오인 "바고를 격파한 차오프라야 프랍 홍사와디"와 헬멧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나레수안은 코끼리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승리의 기념비로 탑을 세웠다.[2]

하지만, 버마 연대기에는 결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연대기는 1593년 1월 8일(1592년 12월 29일)에 두 군대가 전투를 벌였으며, 스와는 샴(Siamese) 화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고 기록하고 있다.[21][22] 테르비엘에 따르면, 현지 저자, 유럽 저자, 페르시아 저자가 기록한 전투에 대한 10가지 다른 기록이 있다. 단 하나의 샴 기록만이 나레수안과 스와 사이에 공식적인 코끼리 결투가 있었다고 말한다.[24] 하지만, 1630년대 초 예레미아스 반 플리트가 쓴 샴에 대한 기록에는 나레수안 왕의 동시대인이었던 샴 백성과의 인터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버마 왕세자가 나레수안(샴인들은 그를 "검은 왕자"라고 불렀다)의 손에 죽은 코끼리 전투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반 플리트의 "샴 왕국 묘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W]때때로 페구 왕자와 젊은 샴 왕자(둘 다 코끼리에 타고 왕실 복장을 하고 있었음)는 자제력을 잃고, 양쪽 군대를 떠나 서로 맹렬하게 공격했다. 샴 왕자는 창으로 상대방의 몸을 꿰뚫고, 상대방의 코끼리를 빼앗았다.
하지만, 테르비엘의 다른 기록 분석에 따르면 버마 왕세자와 나레수안은 모두 전투에서 그들의 군용 코끼리를 타고 싸웠지만, 공식적인 결투는 아마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테르비엘에 따르면, 스와가 공식적인 결투에 동의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26] 전투 중, 나레수안의 코끼리는 버마군에게 포위되었다. 그 중요한 순간에, 버마 군용 코끼리가 발정하여 스와의 코끼리를 공격했다. 스와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본 나레수안은 "가까이 다가가, 그(또는 그와 함께 타고 있던 전사 중 한 명, 아마도 포르투갈인)이 총을 쏴서 왕세자 스와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27] 나레수안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운이 좋았"지만, 또한 이를 재빨리 이용했다.[28]
4. 3. 버마 역공 및 영토 확장
버마는 버마의 정복군주 버인나웅의 사후 각 정복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혼란을 틈타 나레수안은 버마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584년, 1585년, 1586년, 1590년, 1592년 총 5번의 침략을 모두 물리치고 오히려 버마에 반격을 가해 굴복시켰다. 이후 버마는 아유타야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소모한 결과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이 야기되었다.[2]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자 명나라에 조선에게 파병하겠다고 2번을 청하기도 하였다.
1593년, 나레수안은 차오 프라야 차크리와 프라야 프라 클랑을 보내 몬족 도시인 탄닌타리와 다웨이를 공격하게 했다. 이 도시는 각각 15일과 20일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난다 바인은 이 도시들을 방어하기 위해 버마 함대를 출동시켰지만, 너무 늦게 도착하여 태국 연합 함대에 패배했다. 또한, 므타마에서 진격해 온 버마군은 차크리와 클랑 연합군에 매복 공격을 당하여 버마 지휘관 11명, 많은 코끼리, 말, 병사, 무기 및 탄약을 포획했다.[2]
시암-캄보디아 전쟁 (1591년–1594년) 이후 1593년, 나레수안은 캄보디아를 정복하기 위한 성공적인 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캄보디아의 왕 낙프라 삿타를 처형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고, 캄보디아, 스페인, 포르투갈 탐험가들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낙프라 삿타는 비엔티안으로 탈출하여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나레수안은 이후 크메르족 가족들을 데려와 북부 지역에 정착시켰다.[2]
버마가 지류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몬족은 이 기회를 틈타 독립을 꾀했다. 마울라먀잉의 몬족 총독은 바고에 반기를 들고 시암의 지원을 요청했다. 나레수안은 지원군을 파견했고 버마군은 마르타반 주둔지를 포기했다. 난다 바인은 타웅우의 부왕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패배했다. 몬족 지역은 이후 시암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2]Mon territories came under the rule of the Siam kingdom영어[29]
나레수안은 1595년 바고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3개월 동안 도성을 포위했으나, 프로메, 퉁구, 아바의 부왕들이 구원군을 파견하자 퇴각했다. 나레수안은 많은 전쟁 포로들을 데려와 버마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2]
프로메의 영주는 1595년 난다 바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퉁구, 라카인, 란나, 란쌍이 뒤를 이었다. 란쌍의 노케오 쿠마네 왕은 란쌍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란나를 거쳐 바고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란나 치앙마이의 부왕은 시암의 지배에 영토를 복속시켰고, 나레수안은 라오스 군대가 란나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암군을 파견했다.[2]
버마 제국에서 일련의 격변이 일어난 후, 나레수안은 1599년 다시 바고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아라칸과 퉁구를 동맹으로 삼았다. 그러나 나레수안이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아라칸과 퉁구의 군대가 이미 도시를 포위했다. 퉁구의 부왕은 백성을 퉁구로 데려가 도시를 아라칸 군대에 넘겨 남은 재산을 약탈하게 하고 궁궐과 사찰에 불을 질렀다.[2]
나레수안은 바고를 점령했고, 밍예 띠하뚜 2세는 이미 난다 바인을 타웅우로 데려갔다. 나레수안은 밍예 띠하뚜에게 난다 바인을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지만, 밍예 띠하뚜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나레수안은 타웅우를 두 달 동안 포위했지만 식량 부족으로 철수했다.[2]
4. 4. 외교 정책
나레수안은 대외 관계 구축에도 힘썼다.동쪽의 현재 베트남 지역에서는 베트남족의 남하에 따라 참족의 국가 참파가 약화되어, 그들이 태국으로 유입되었다.[45]
나레수안은 그 참족을 이용하여 해군을 창설하여, 남중국해에서 동중국해에 걸쳐 활약시켰다.
나레수안 왕은 일본인 상인의 급속한 부상을 우려하여, 아시아 지역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의 유지를 바랐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정보를 들었을 때, 일본의 행동을 저해하기 위해 명나라에 아유타야의 해군을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45]
4. 5. 죽음
낫신나웅은 퉁구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난다 바인을 살해했다. 그 후 냐웅얀 민은 퉁구와 프롬의 부왕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아바의 왕이 되었다. 시암은 아바 국왕이 샨족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떠나기 전까지 4년 동안 버마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그가 테이니까지 진격하자 나레수안은 자신의 왕국에 대한 위협에 맞서기 위해 20만 명의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병에 걸리기 전까지 치앙마이 주의 팡 군까지 진격했고, 1605년 4월 25일 3일 만에 사망했다.[30] 그의 동생 에카토삿롯 국왕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2]실라파콘 대학교의 역사가들이 버마 기록을 최근 연구한 결과, 그는 위앙 헹 군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아마도 천연두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많은 샨족은 나레수안 국왕이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가 샨 주 남부의 다엔 라오 산맥에 있는 몽톤의 탑에 안치되었다고 믿고 있다.[31]

5. 유산 및 평가
담롱 라자누밥에 따르면, "나레수안은 용감하고 영광스러운 왕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영광은 현재까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당시 시암 왕국은 가장 넓었고, 부유했으며, 영광으로 빛났다."[2]
- 1월 18일 태국군의 날은 1593년 코끼리 결투에서의 그의 승리를 기념한다.[34]
- HTMS Naresuan|태국어 발음|나레수안영어는 태국 해군 프리깃함이다.
- 핏사눌록 주의 나레수안 대학교는 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왕의 대형 동상이 있다.[35]
- 핏사눌록 주에 있는 두 개의 가장 큰 댐 중 하나는 나레수안 댐으로 명명되었다. 이 댐은 핏사눌록시 북쪽의 난 강의 수류를 제어한다.
- 퉁 야이 나레수안 야생동물 보호구역은 태국에서 가장 큰 보존 구역이다.[36]
- 2014년 태국 쿠데타 이후, '나레수안 왕' 영화의 무료 상영은 시청자들을 행복하게 했다고 평가받았다.[37]
현재 태국 역사에서 그 업적이 눈부시기에 "대왕"으로 칭송받는 왕은 7명이다. 그중 나레수안은 구국의 영웅으로서 "태국 삼대왕" 중 한 명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구 50바트지폐 뒷면에 초상이 사용되었다. 신격화도 이루어져, 무에타이의 창시자라는 전승에서 무에타이 선수들은 그의 상 앞에서 승전을 기원하기도 한다.
종류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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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 지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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