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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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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란나는 1292년 멩라이에 의해 건국된 옛 왕국으로, 현재 태국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다. 란나 왕국은 다양한 외래어로 불렸으며, 치앙마이를 수도로 두었다. 1558년 버마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으며, 이후 톤부리 왕조와 차크리 왕조의 지배를 거쳐 19세기 말 차크리 왕조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란나의 경제는 농업을 기반으로 했으며, 상업 또한 발달하여 주변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란나어는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며, 다양한 역사 기록을 통해 란나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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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란나 왕국의 문장
란나 왕국의 문장
공식 명칭란나 왕국
현지 명칭언어: 란나어
표기: ᩋᩣᨱᩣᨧᩢᨠ᩠ᨠ᩼ᩃ᩶ᩣ᩠ᨶᨶᩣ
언어: 태국어
표기: อาณาจักรล้านนา
일반 명칭란나
역사
존속 기간1292년 – 1775년
주요 사건사건: 치앙마이 건설
날짜: 1292년
사건: 파야오 합병
날짜: 1338년
사건: 아유타야-란나 전쟁
날짜: 1441년–1474년
사건: 버마의 지배
날짜: 1558년–1775년
사건: 톤부리에 정복됨
날짜: 1775년 1월 15일
이전응오에냥
파야오 왕국
이후치앙마이 왕국
톤부리 왕조
람팡 공국
난 공국
람푼 공국
프래 공국
위치
1400년경의 란나와 주변 국가
1400년경의 란나와 주변 국가
수도치앙마이
현재 국가태국
미얀마
라오스
중국
정치
정치 체제만달라 왕국
언어공식 언어: 북부 태국어 (1292년–1579년), 버마어 (1579년–1775년)
사용 언어: 북부 태국어, 샨어, 태국어
종교상좌부 불교
통치자
직책군주
주요 인물이름: 멩라이
기간: 1292년–1311년 (초대)
이름: 틸록카랏
기간: 1441년–1487년
이름: 메쿠티
기간: 1551년–1564년
이름: 나우라타 민사우
기간: 1579년–1607/08년
이름: 포 마유-응우안
기간: 1768년–1775년 (마지막)
기타
로마자 표기Lan Na
태국어 표기อาณาจักรล้านนา
태국어 음성 표기/ʔāː.nāː.tɕàk láːn nāː/

2. 명칭

란나 왕국은 이웃 언어들에서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 연대기에서는 '''진메 피'''(ဇင်းမယ်ပြည်|zɪ́ɰ̃mɛ̀ pjì|my) 또는 '''윤 피'''(ယွန်းပြည်|yʊ́ɰ̃ pjì|my)라고 불렀다. '진메'는 치앙마이버마어 표기이고, '윤'은 북부 태국인을 가리키는 버마어 용어이다. 라오어에서는 '''아나착 란나'''(ອານາຈັກລ້ານນາlo)라고 불렀다.

팔리어 연대기에서는 '''요나랏타'''(윤 왕국) 또는 '''빙가랏타'''(메핑 왕국)라고 불렀다. 중국 원사에서는 '''바바이 시푸'''(c=八百媳妇|p=Bābǎi Xífù중국어)라고 불렀으며, 1292년에 처음 기록되었다.[6]

현재 일본어에서는 '''란나'''(ล้านนาth)로 표기하지만, 과거에는 태국어로 「란나」를 ล้านนาth(백만의 밭)로 표기할지 ลานนาth(많은 밭)로 표기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백만의 밭」 표기는 16세기 경 비문에서 볼 수 있지만, 당시 문자 표기는 엄밀하지 않아 이 표기가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난(น่าน) 주변 지역 고문서에 따르면, 란나는 팔리어에서 유래한 국호(태국어로 변형된 「타사락카케타나카라(ทสลกฺขเขตฺตนครth)」, 「백만의 밭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고문서에 따르면 「백만의 밭」 표기가 옳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많은 밭」 표기는 차크리 왕조 초기부터 나타나 20세기에는 널리 유포되어 학술서에도 등장했다. 1967년 이후 연구자들은 명확한 근거 없이 「백만의 밭」 표기를 권장했다.

1980년, Hans Penth|하느스 펜트de는 1553년 치앙라이에서 작성된 치앙사이 비문을 조사하여 「백만의 밭」 표기가 존재함을 확인했고, 이 표기가 학계 정설이 되었다.

1983년, 치앙마이의 멘라이, 수코타이의 람캄행, 파야오의 Ngam Mueang|응암므앙de의 태족 삼왕 동맹 기념 역사서 편찬을 맡은 지역 향토사 연구 그룹은 「백만의 밭」 표기를 채용한 '''란나타이'''(ล้านนาไทยth)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에 따라 '''란나타이 왕조'''라고도 불린다.

1987년, 역사학자 Prasert na Nagara|쁘라셋 나 나콘영어는 란나(ล้านนาth)의 「란」(ล้านth)과 란창(ล้านช้างth, 「백만의 코끼리」라는 뜻)의 「란」(ล้านth)이 평행한다는 설을 발표하여 널리 받아들여졌다.

3. 지역

태국 북부치앙마이주, 치앙라이주, 람푼주, 람빵주, 주, 파야오주, 프레주, 매홍쏜주 등을 가리킨다. 광의의 란나 지역은 좁은 의미의 란나 지역에 더하여, 남쪽으로는 주 Ban Tak District|반탁군영어 북부까지, 서쪽으로는 살윈강 동쪽 지역까지, 동쪽으로는 메콩강 서쪽 지역 즉 라오스의 사이야부리주까지, 북쪽으로는 미얀마샨주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쌍반나 다이족 자치주까지 확대하여 해석된다.

4. 역사

멍라이는 라와차카라자 왕조의 25대 왕으로, 어머니는 시쌍반나("12개의 나라") 왕국의 공주였다. 그는 응웬양(현 치앙센)의 여러 무앙(mueang)들을 통합된 왕국 또는 만달라로 통합하고 이웃 파야오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1262년, 멍라이는 응웬양에서 새로 건설된 치앙라이로 수도를 옮겼고—자신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 1292년, 남중국해로 가는 무역항로 개척을 위해 하리푼차이 왕국을 공격하여 몬족을 멸망시켰다. 멍라이는 그 후 남쪽으로 확장하여 1281년 몬족 왕국 하리푼차이(현대 람푼을 중심으로 함)를 정복했다. 멍라이는 수도를 여러 차례 옮겼다. 람푼을 떠난 후 홍수로 인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1286/7년에 위앙 쿰 캄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1292년까지 머물렀다. 그 후 현재의 치앙마이가 될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는 1296년 치앙마이를 건설하여 확장하여 란나의 수도로 만들었다.

왓 도이 수텝의 중앙 체디, 치앙마이


1311년경, 망라이가 사망하고 그의 둘째 아들 그라마 또는 자야상그라마(쿤 함)가 계승하였다. 그는 곧 치앙라이로 은퇴하여 그의 아들 싸엔푸를 치앙마이우파라자(왕세자)로 임명하였다. 망라이의 막내아들인 몽 나이의 통치자는 왕위를 주장하기 위해 돌아와 하리푼자야를 점령하였다. 싸엔푸와 그의 형제 남투엠은 치앙라이에 있는 아버지에게 도망쳤다. 남투암은 삼촌을 몰아내고 1322년 또는 1324년에 싸엔푸를 왕위에 복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싸엔푸는 1325년 또는 1328년에 치앙센 도시를 건설하였다. 1334년에 왕위에 오른 캄푸는 파야오 왕국을 침공하고 프래 왕국을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336년에 왕위에 오른 파유는 역대 왕으로서 처음으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곳에서 도시를 요새화하고 왓 프라 싱을 건설하였다.[6]

상좌부 불교는 종교 지도자 꿰 나의 통치 기간 동안 란나에서 번영하였다. 그는 1386년에 도이 수텝의 다투를 세웠다. 꿰 나는 실론 계파를 장려하고 수코타이에서 승려들을 초청하여 하리푼차이로부터 란나가 물려받은 기존의 몬 상좌부 불교를 대체하였다.

란나는 싸엔무엉마(만 개의 도시가 조공을 바치러 온다는 의미) 치하에서 평화를 누렸다. 유일한 불안 요소는 그의 삼촌인 마하 프롬마탓 왕자의 실패한 반란이었다. 마하 프롬마탓은 아유타야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아유타야의 보롬마라차 1세는 그의 군대를 파견하여 란나를 침략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이는 두 왕국 사이의 첫 번째 무력 충돌이었다. 란나는 삼팡카엔 통치 기간에 새로 설립된 명나라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틸록카랏 왕(재위 1441~1487) 시대 란나 왕국의 지도


란나 왕국은 틸록카랏(1441~1487) 치세에 가장 강성했다. 틸록카랏은 1441년 아버지 삼팡 카엔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 틸록카랏의 형제인 타우 초이는 아버지를 위해 왕위를 되찾으려고 반란을 일으켜 아유타야의 지원을 요청했다. 보롬마라차 2세는 1442년 군대를 란나로 파병했지만 격퇴당했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틸록카랏은 1456년 인근 파야오 왕국을 정복했다.

남쪽으로는 신흥 아유타야 왕국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타우 초이의 반란에 아유타야가 지원한 이후 두 왕국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51년, 아유타야의 트라이로카낫과 갈등을 빚었던 수코타이의 왕족 유티티라가 틸록카랏에게 귀순했다. 유티티라는 트라이로카낫에게 자신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피사누록을 침략하도록 부추겼고, 이는 상류 차오프라야 강 유역(즉, 수코타이 왕국)을 둘러싼 아유타야-란나 전쟁을 촉발시켰다. 1460년, 찰리앙(현재 시삿차나라이 군)의 총독은 틸록카랏에게 항복했다. 트라이로카낫은 새로운 전략을 사용하여 수도를 피사누록으로 옮겨 란나와의 전쟁에 집중했다. 란나는 패배를 겪었고 틸록카랏은 결국 1475년 강화를 요청했다.

틸록카랏은 상좌부 불교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1477년, 트리피타카(삼장)를 재편집하기 위한 불교 공의회가 치앙마이 근처에서 열렸다. 틸록카랏은 또한 많은 주목할 만한 사원들을 건립하고 재건했다. 그 후 틸록카랏은 서쪽으로 라이카(라이카 주), 시파우(시파우 주), 몽나이(몽나이 주), 요웅웨(요웅웨 주) 등 샨족들의 영토로 확장했다.[1]

틸로카랏 왕 사후, 란나 왕국은 왕족 간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고, 주변 국가들의 침략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틸로카랏에게 복속되었던 샨족은 독립을 선언했다. 틸로카랏의 증손자인 파야 카우는 1507년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513년에는 라마티보디 2세에게 람빵을 약탈당했다. 1523년 켄퉁 주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자, 란나는 켄퉁 주를 지원했지만 시파우 군대에 패배하면서 란나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

1538년, 파야 카우의 아들 켓클라오 왕은 아들 타우 사이 캄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나, 1543년 복위되었다. 그러나 켓클라오는 정신 질환을 앓다가 1545년 처형되었고, 그의 딸 치라프라파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란나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아유타야 왕국버마는 란나를 침략하려 했다. 1545년 아유타야의 차이라차가 침략했으나, 치라프라파는 평화 협상을 통해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이듬해 차이라차는 다시 침략하여 람빵과 람푼을 약탈하고 치앙마이를 위협했고, 결국 치라프라파는 란나를 아유타야의 속국으로 복속시켜야 했다.[1]

1546년, 치라프라파는 왕위에서 물러났고, 귀족들은 란쌍의 차이야셋타 왕자를 왕으로 추대했다. 차이야셋타는 란나로 와서 왕위에 올랐다가, 1547년 란쌍으로 돌아가 셋타티랏으로 즉위했다. 셋타티랏은 에메랄드 불상을 루앙프라방으로 가져갔다. 이후 귀족들은 몽 나이의 샨족 사오파인 메쿠티를 란나 왕으로 선택했다. 샨족 출신인 메쿠티 왕은 란나의 전통적인 관습과 신앙을 침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바인나웅이 이끄는 버마 따웅우 왕조는 팽창주의 정책으로 란나 왕국과 샨 주를 둘러싼 분쟁을 일으켰다. 1558년 4월 2일, 바인나웅의 군대는 북쪽에서 란나를 침략했고, 메쿠티 왕은 항복했다.[7] 1563년-1564년 버마-시아암 전쟁 중, 메쿠티는 세타티랏의 격려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1564년 11월 버마군에 체포되어 버마의 수도 빼구로 보내졌다. 이후 바인나웅은 란나 왕족 출신 위숩디떼위를 란나의 여왕으로 임명했다. 1579년 1월, 위숩디떼위 사후 바인나웅은 자신의 아들 나우라타 민소를 란나 총독으로 임명했다.[7] 버마는 란나에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했지만, 징용과 세금은 엄격하게 통제했다.

바인나웅 사후, 그의 거대한 제국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1584년-1593년 버마-시아암 전쟁에서 시암이 성공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1596년-1597년까지 빼구의 모든 속국들이 독립했다. 1596년, 란나의 나우라타 민소도 독립을 선포했다. 1602년, 나우라타 민소는 시암 왕 나레수안의 속국이 되었지만, 시암의 지배는 1605년 나레수안의 죽음으로 효력을 상실하며 단명했다. 1614년까지 시암의 란나 지배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버마인들이 돌아오자, 란나 통치자 타도 꺄우는 명목상 종주국인 시암 대신 란쌍에 도움을 요청했고, 시암은 실제로 아무런 도움도 보내지 않았다.[8] 1614년 이후, 버마계 속왕들이 100년 이상 란나를 통치했다. 1662년-1664년 버마-시아암 전쟁에서 시암은 란나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720년대 통구 왕조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727년, 높은 세금에 반발한 치앙마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저항군은 1727년-1728년과 1731년-1732년에 버마군을 격퇴했고, 치앙마이와 핑 계곡은 독립을 쟁취했다.[9] 1757년, 치앙마이는 새로운 꼰바웅 왕조 버마의 속국이 되었다. 1761년 시암의 격려를 받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1763년 1월 진압되었다. 1765년, 버마는 란나를 발판 삼아 라오스 여러 주와 시암을 침략했다.

1770년대 초, 버마는 시암(1765-67)과 중국(1765-69)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된 버마 군 지휘관들과 주지사들의 억압적인 행동은 란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0] 치앙마이의 새로운 버마 주지사 타도 민딘은 지역 수장들과 백성들에게 무례했고, 극도로 인기가 없었다. 람빵의 지역 수장 중 한 명인 까윌라는 시암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1775년 1월 15일 도시를 함락시켜 200년간 지속된 버마의 지배를 끝냈다. 까윌라는 람빵의 왕자로, 프라야 차반은 치앙마이의 왕자로 임명되었으며, 둘 다 시암의 봉신이 되었다.

버마는 1775-76년, 1785-86년, 1797년에 란나를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1790년대에 까윌라는 치앙센을 장악하며 란나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그런 다음 버마의 샨 주인 껭뚱과 시쌍반나(1803-1808)를 장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시암의 봉신국인 치앙마이 왕국이 탄생했다. 시암의 종주권 하에서 란나 왕국은 치앙마이, 난, 람빵, 람푼, 프래 등 5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뉘었다. 란나는 현대 시암 왕국에 편입된 후 독자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4. 1. 초기 역사

멍라이는 라와차카라자 왕조의 25대 왕으로, 어머니는 시쌍반나("12개의 나라") 왕국의 공주였다. 그는 응웬양(현 치앙센)의 여러 무앙(mueang)들을 통합된 왕국 또는 만달라로 통합하고 이웃 파야오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1262년, 멍라이는 응웬양에서 새로 건설된 치앙라이로 수도를 옮겼다.

1261년, 응웬양(현재의 치앙센군)의 군주가 된 만라이는 콕강 주변의 욘 지역에 있는 여러 도시(무앙)를 동맹 또는 공격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몽골 제국윈난성 침입(윈난·달리 원정)에 시달리던 만라이는 1262년에 치앙라이로 천도했다.

1292년, 만라이는 남중국해로 가는 무역항로 개척을 위해 차오프라야강 상류의 핑강에 있던 하리푼차이 왕국을 공격하여 몬족을 멸망시켰다. 한편, 침략한 傣那|타이-유완족중국어보다 문화적으로 발전했던 몬족으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아 건축, 란나탐 문자, 불교 등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란나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멍라이는 그 후 남쪽으로 확장하여 1281년 몬족 왕국 하리푼차이(현대 람푼을 중심으로 함)를 정복했다. 멍라이는 수도를 여러 차례 옮겼다. 람푼을 떠난 후 홍수로 인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1286/7년에 위앙 쿰 캄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1292년까지 머물렀다. 그 후 현재의 치앙마이가 될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는 1296년 치앙마이를 건설하여 확장하여 란나의 수도로 만들었다.

4. 2. 분열과 번영



1311년경, 망라이가 사망하고 그의 둘째 아들 그라마 또는 자야상그라마(쿤 함)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곧 치앙라이로 은퇴하여 그의 아들 싸엔푸를 치앙마이우파라자(왕세자)로 임명하였다. 망라이의 막내아들인 몽 나이의 통치자는 왕위를 주장하기 위해 돌아와 하리푼자야를 점령하였다. 싸엔푸와 그의 형제 남투엠은 치앙라이에 있는 아버지에게 도망쳤다. 남투암은 삼촌을 몰아내고 1322년 또는 1324년에 싸엔푸를 왕위에 복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싸엔푸는 1325년 또는 1328년에 치앙센 도시를 건설하였고, 1334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캄푸가 그를 대신하였지만 몇 년 동안만 통치하였고, 그 후 그의 아들 파유가 계승하여 수도를 다시 치앙마이로 환원시켰다. 그는 그곳에서 도시를 요새화하고 왓 프라 싱을 건설하였다.[6]

상좌부 불교는 종교 지도자 꿰 나의 통치 기간 동안 란나에서 번영하였다. 그는 1386년에 도이 수텝의 다투를 세웠다. 꿰 나는 실론 계파를 장려하고 수코타이에서 승려들을 초청하여 하리푼차이로부터 란나가 물려받은 기존의 몬 상좌부 불교를 대체하였다.

란나는 싸엔무엉마(만 개의 도시가 조공을 바치러 온다는 의미) 치하에서 평화를 누렸다. 유일한 불안 요소는 그의 삼촌인 마하 프롬마탓 왕자의 실패한 반란이었다. 마하 프롬마탓은 아유타야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아유타야의 보롬마라차 1세는 그의 군대를 파견하여 란나를 침략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이는 두 왕국 사이의 첫 번째 무력 충돌이었다. 란나는 삼팡카엔 통치 기간에 새로 설립된 명나라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1294년, 멩라이는 핑강 상류의 Wiang Kum Kam|위엥쿰캄영어(현재 치앙마이 남부)로 천도했고, 1296년에 치앙마이로 다시 천도했다. 일반적으로 이것이 란나 왕조의 성립으로 여겨진다. 그 후 멩라이의 말년에는 원의 침략을 막기 위해 샨족에게 원군을 보냈지만, 1311년 멩라이가 죽을 무렵 원의 조공국이 되었다.

1325년에 왕위에 오른 싸엔푸는 치엔센(チエンセーン)을 건설하여 북방 도시들의 방어 거점을 구축했다. 1334년에 왕위에 오른 캄푸는 파야오 왕국을 침공하고 프래 왕국을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336년에 왕위에 오른 파유는 역대 왕으로서 처음으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4. 3. 틸록카랏 왕의 확장 정책



란나 왕국은 틸록카랏(1441~1487) 치세에 가장 강성했다. 틸록카랏은 1441년 아버지 삼팡 카엔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 틸록카랏의 형제인 타우 초이는 아버지를 위해 왕위를 되찾으려고 반란을 일으켜 아유타야의 지원을 요청했다. 보롬마라차 2세는 1442년 군대를 란나로 파병했지만 격퇴당했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틸록카랏은 1456년 인근 파야오 왕국을 정복했다.

남쪽으로는 신흥 아유타야 왕국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타우 초이의 반란에 아유타야가 지원한 이후 두 왕국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51년, 아유타야의 트라이로카낫과 갈등을 빚었던 수코타이의 왕족 유티티라가 틸록카랏에게 귀순했다. 유티티라는 트라이로카낫에게 자신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피사누록을 침략하도록 부추겼고, 이는 상류 차오프라야 강 유역(즉, 수코타이 왕국)을 둘러싼 아유타야-란나 전쟁을 촉발시켰다. 1460년, 찰리앙(현재 시삿차나라이 군)의 총독은 틸록카랏에게 항복했다. 트라이로카낫은 새로운 전략을 사용하여 수도를 피사누록으로 옮겨 란나와의 전쟁에 집중했다. 란나는 패배를 겪었고 틸록카랏은 결국 1475년 강화를 요청했다.

틸록카랏은 상좌부 불교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1477년, 트리피타카(삼장)를 재편집하기 위한 불교 공의회가 치앙마이 근처에서 열렸다. 틸록카랏은 또한 많은 주목할 만한 사원들을 건립하고 재건했다. 그 후 틸록카랏은 서쪽으로 라이카(라이카 주), 시파우(시파우 주), 몽나이(몽나이 주), 요웅웨(요웅웨 주) 등 샨족들의 영토로 확장했다.[1]

티로카랏 왕(1441~1487년)은 란나 왕조의 절정기 왕으로, 즉위 후 10년 동안 난과 프레를 영토에 추가하여 국력을 증강했다. 이후 남진하여 욤 강 상류의 피칫을 공격하고, 1460년 수코타이 지배하의 찰리엔(현재 시삿차나라이 군)이 란나에 귀순하자 피사누록과 캄펭펫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아유타야의 왕 트라이로카낫은 피사누록으로 천도하고 란나와 표면적인 우호 관계를 맺었다. 란나와 아유타야의 대립은 147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전쟁은 문학 작품 『리릿 유완파이』에 영향을 주었다.

1480년, 후 레 왕조 다이베트레 타인톤이 란상 왕국을 침공하자, 틸록카랏은 란나로 도망친 란상의 왕자를 보호하고 레 타인톤을 격퇴했다. 이후 란상의 왕자는 왕위에 올라 란나와 강력한 우호 관계를 맺었고, 틸록카랏은 명나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틸록카랏은 스리랑카식 불교인 시혼파를 도입하여 왓 파댄을 건설하고, 팔리어 학습을 장려했다. 1477년에는 왓 포타라람(왓 쳇요트)에서 결집이 이루어져 트리피타카가 편찬되었다.

4. 4. 쇠퇴

틸로카랏 왕 사후, 란나 왕국은 왕족 간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고, 주변 국가들의 침략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틸로카랏에게 복속되었던 샨족은 독립을 선언했다. 틸로카랏의 증손자인 파야 카우는 1507년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513년에는 라마티보디 2세에게 람빵을 약탈당했다. 1523년 켄퉁 주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자, 란나는 켄퉁 주를 지원했지만 시파우 군대에 패배하면서 란나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

1538년, 파야 카우의 아들 켓클라오 왕은 아들 타우 사이 캄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나, 1543년 복위되었다. 그러나 켓클라오는 정신 질환을 앓다가 1545년 처형되었고, 그의 딸 치라프라파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란나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아유타야 왕국버마는 란나를 침략하려 했다. 1545년 아유타야의 차이라차가 침략했으나, 치라프라파는 평화 협상을 통해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이듬해 차이라차는 다시 침략하여 람빵과 람푼을 약탈하고 치앙마이를 위협했고, 결국 치라프라파는 란나를 아유타야의 속국으로 복속시켜야 했다.[1]

1546년, 치라프라파는 왕위에서 물러났고, 귀족들은 란쌍의 차이야셋타 왕자를 왕으로 추대했다. 차이야셋타는 란나로 와서 왕위에 올랐다가, 1547년 란쌍으로 돌아가 셋타티랏으로 즉위했다. 셋타티랏은 에메랄드 불상을 루앙프라방으로 가져갔다. 이후 귀족들은 몽 나이의 샨족 사오파인 메쿠티를 란나 왕으로 선택했다. 샨족 출신인 메쿠티 왕은 란나의 전통적인 관습과 신앙을 침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쇠퇴기의 란나 왕국에서는 국왕의 권위가 약화되고, 유력한 관리들이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 1525년 켓클라오의 즉위는 관리들의 추대에 의한 것이었다. 켓클라오는 이전까지 무앙노이라는 작은 지역의 군주였을 뿐, 치앙마이에 정치적 기반이 없어 권력이 취약했다. 1535년 람푼의 군주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1538년 켓클라오는 관리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고, 그의 아들 차이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차이는 5년 만에 암살당했고, 켓클라오가 다시 왕위에 올랐으나 2년 만에 암살되었다.[4]

이후 관리들은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혼란을 겪었으나, 결국 란쌍 왕국에서 켓클라오의 조카인 세타티랏을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세타티랏이 루앙프라방에서 치앙마이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할머니인 치라프라파가 섭정을 맡았다. 1546년 세타티랏이 란나 왕위에 올랐으나, 2년 후 란쌍 왕국의 왕이었던 그의 아버지 포티사랏이 사망하자 루앙프라방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란나 왕국은 다시 치라프라파가 섭정을 맡았으나, 왕위가 공석 상태가 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4]

1551년 메크(메크티)가 왕위에 올랐으나, 1558년 동쪽으로 영토 확장을 추진하던 타웅우 왕조의 바인나웅에게 침략당해 지배를 받게 되면서, 독립 국가로서의 란나 왕조는 멸망했다. 이후 멘라이 왕조는 치앙마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았으나, 1564년부터 1578년까지는 위숫티테위 여왕이 치앙마이를 통치했다.[4]

4. 5. 버마의 지배

바인나웅이 이끄는 버마 따웅우 왕조는 팽창주의 정책으로 란나 왕국과 샨 주를 둘러싼 분쟁을 일으켰다. 1558년 4월 2일, 바인나웅의 군대는 북쪽에서 란나를 침략했고, 메쿠티 왕은 항복했다.[7] 1563년-1564년 버마-시아암 전쟁 중, 메쿠티는 세타티랏의 격려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1564년 11월 버마군에 체포되어 버마의 수도 빼구로 보내졌다. 이후 바인나웅은 란나 왕족 출신 위숩디떼위를 란나의 여왕으로 임명했다. 1579년 1월, 위숩디떼위 사후 바인나웅은 자신의 아들 나우라타 민소를 란나 총독으로 임명했다.[7] 버마는 란나에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했지만, 징용과 세금은 엄격하게 통제했다.

바인나웅 사후, 그의 거대한 제국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1584년-1593년 버마-시아암 전쟁에서 시암이 성공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1596년-1597년까지 빼구의 모든 속국들이 독립했다. 1596년, 란나의 나우라타 민소도 독립을 선포했다. 1602년, 나우라타 민소는 시암 왕 나레수안의 속국이 되었지만, 시암의 지배는 1605년 나레수안의 죽음으로 효력을 상실하며 단명했다. 1614년까지 시암의 란나 지배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버마인들이 돌아오자, 란나 통치자 타도 꺄우는 명목상 종주국인 시암 대신 란쌍에 도움을 요청했고, 시암은 실제로 아무런 도움도 보내지 않았다.[8] 1614년 이후, 버마계 속왕들이 100년 이상 란나를 통치했다. 1662년-1664년 버마-시아암 전쟁에서 시암은 란나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720년대 통구 왕조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727년, 높은 세금에 반발한 치앙마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저항군은 1727년-1728년과 1731년-1732년에 버마군을 격퇴했고, 치앙마이와 핑 계곡은 독립을 쟁취했다.[9] 1757년, 치앙마이는 새로운 꼰바웅 왕조 버마의 속국이 되었다. 1761년 시암의 격려를 받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1763년 1월 진압되었다. 1765년, 버마는 란나를 발판 삼아 라오스 여러 주와 시암을 침략했다.

4. 6. 버마의 지배 종식과 시암의 영향력 확대

1770년대 초, 버마는 시암(1765-67)과 중국(1765-69)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바인나웅 이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10] 승리에 도취된 버마 군 지휘관들과 주지사들은 거만하고 억압적인 행동을 보였고, 이는 란나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10] 치앙마이의 새로운 버마 주지사 타도 민딘은 지역 수장들과 백성들에게 무례했고, 극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람빵의 지역 수장 중 한 명인 까윌라는 시암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1775년 1월 15일 도시를 함락시켜 200년간 지속된 버마의 지배를 끝냈습니다. 까윌라는 람빵의 왕자로, 프라야 차반은 치앙마이의 왕자로 임명되었으며, 둘 다 시암의 봉신이었습니다.

버마는 1775-76년, 1785-86년, 1797년에 란나를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습니다. 1790년대에 까윌라는 치앙센을 장악하며 란나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그런 다음 버마의 샨 주인 껭뚱과 시쌍반나(1803-1808)를 장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암의 봉신국인 치앙마이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시암의 종주권 하에서 란나 왕국은 치앙마이, 난, 람빵, 람푼, 프래 등 5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뉘었습니다.

4. 7. 란나의 종말

1770년대 초, 버마는 시암(1765-67)과 중국(1765-69)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된 버마 군 지휘관들과 주지사들의 억압적인 행동은 란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0] 치앙마이의 새로운 버마 주지사 타도 민딘은 지역 수장들과 백성들에게 무례했고, 극도로 인기가 없었다. 람빵의 지역 수장 중 한 명인 까윌라는 시암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1775년 1월 15일 도시를 함락시켜 200년간 지속된 버마의 지배를 끝냈다. 까윌라는 람빵의 왕자로, 프라야 차반은 치앙마이의 왕자로 임명되었으며, 둘 다 시암의 봉신이 되었다.

버마는 1775-76년, 1785-86년, 1797년에 란나를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1790년대에 까윌라는 치앙센을 장악하며 란나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그런 다음 버마의 샨 주인 껭뚱과 시쌍반나(1803-1808)를 장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시암의 봉신국인 치앙마이 왕국이 탄생했다. 시암의 종주권 하에서 란나 왕국은 치앙마이, 난, 람빵, 람푼, 프래 등 5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뉘었다. 란나는 현대 시암 왕국에 편입된 후 독자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796년, 카위라는 치앙마이를 재건하고 멘라이 왕조의 옛 의식을 부활시켜 왕권의 상징을 제정하고, 불교를 보호하며 사원을 건립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였다. 또한 카위라는 1805년 람푼도 재건하여 치앙마이, 람푼, 람푼의 국주 자리를 자신의 형제들로 독점했다. 이로써 카위라의 쩻톤 왕가는 란나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자 왕조를 건설했다.

그 후 쩻톤 왕가에 의한 치앙마이 지배는 9대를 이어갔고, 8대 인타위차야논 (1901~1909년) 시대에 몬톤 파야오가 성립되면서 쩻톤 가문의 전제 지배는 종식되었고, 실질적으로 차크리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깨오나와랏 (1911~1939년)을 마지막으로 란나 왕조는 막을 내렸다.

5. 정치

만라이 왕조 시대에는 만라이 법전이라 불리는 법전이 국가의 기본 법전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통치, 형벌, 거래 등이 이 법전에 따라 이루어졌다. 수도는 치앙마이였고, 람푼은 치앙마이의 위성 도시였다. 치앙라이는 부도(副都)였으며, 이른바 부왕(우파라트, อุปราช)이 다스리는 도시였고, 그 외 소수의 왕족이 다스리는 도시들이 존재했다.[1]

그 외의 므앙 프라테사랏(เมืองประเทศราช, 이하 '''므앙'''이라 칭함)이라 불리는 도시의 수장(국주)은 치앙마이 왕의 임명에 의해 선출되었다. 임명된 국주는 왕으로부터 봉급을 받지 못했고, 자신이 소유한 므앙의 세수(稅收)로 관리들을 부양하고 치앙마이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1]

하나의 므앙에는 '''판나'''(พันนา, “천 개의 밭”)라 불리는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다. 판나마다 국왕에게 바치는 세금 부담이 할당되었으며, 판나의 수에 따라 므앙의 규모가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치앙라이는 32개의 판나를 가지고 있었고, 파야오는 36개의 판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 도시는 비교적 큰 도시였다. 판나의 수장은 므언(หมื่น)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아래에는 “므언나(หมื่นนา)”, “람나(ล่ามนา)”, “판나랑(พันนาหลัง)”, “센나(แสนนา)”라는 칭호를 받은 관리들이 있었다.[1]

또한 판나 아래에는 '''팍나'''(ปากนา, “백 개의 논”)라 불리는 마을의 연합체가 있었다. 팍나에는 판(พัน)이라는 칭호를 가진 수장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팍(ปากนา)이라 불리는 관리들이 있었다. 가장 하위 행정 구역은 마을('''무반''')이었고, 그 수장은 “케반”이라 불렸다.[1]

이곳에 사는 하급 백성은 “카”라 불리는 노예와 “프라이”라 불리는 평민으로 구성되었지만, 둘 다 국주의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또한 이들의 영토와 백성은 국왕의 허락 없이 사원에 기증할 수 있었다.[1]

이처럼 각 므앙마다 자주성이 높아 란나 전체의 통일성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국왕은 국주를 파면하거나 처형하기도 했다. 또한 문학과 종교를 이용하여 만라이 왕가의 위엄을 높였다. 예를 들어, 『만라이의 가르침』은 “왕족이 아니라면 왕위를 탐내지 말라. 귀족이 아니라면 관직을 탐내지 말라”는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다. 또한 사원에 대한 기증은 종종 국왕의 위엄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1]

또한, 란나에서는 같은 타이족인 아유타야 왕조와 달리 Thai honorifics|라차삽영어이라 불리는 복잡한 존대어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이것은 란나 왕조가 크메르 왕조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 때문에 힌두식 계급 구조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왕의 이름 등에 힌두교 신의 이름(예를 들어, 아유타야의 '''라마티보디''' 등)이 나타나지 않았고, 국왕이 현인신(Devaraja|데바라자영어)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란나 사회의 규모가 작았던 점도 들 수 있다. 국왕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존대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불교의 수호자로서의 불법왕(Dharmaraja (Buddhism)|달마라자영어)의 개념은 존재했고, 이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의 위엄을 고양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국왕의 계승 방식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고, 실력과 권력, 관리들의 지지자 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1]

특히 란나에서는 어디에서나 인구 부족 현상이 심각했고, 만라이 법전은 백성들이 땅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백성들은 1년에 1개월에서 4개월 동안 정부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인구가 극도로 부족했기 때문에, 통치자 측에서도 백성들이 도망치지 않도록 배려해야 했다. 그래도 전시 등에는 병역에 대한 규칙과 처벌의 무게를 피하기 위해 혼란을 이용하여 도망치는 자도 적지 않았다.[1]

또한, 므앙의 중심에는 세수를 늘리기 위한 시장이 설치되어 다른 므앙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특히 관리들이 이러한 상업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수지, 꿀, 상아, 코뿔소의 뿔, 카테큐(흑색 염료), 수오우(수목, 적갈색 염료), 사슴의 뿔과 가죽 등의 산림 유래 제품은 전매품으로 간주되어 백성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진상되었고, 주로 아유타야로 수출되었다. 이러한 전매품과 금지품(아편 등)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운 교역이 허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국왕은 적절한 거래 가격을 지키는 것만 요구했다.[1]

1650년부터 1663년까지 치앙마이의 국주였던 프라 샌므앙(พระแสนเมือง)은 아유타야에, 버마에 대한 전쟁을 위한 원군을 요청했다. 1660년경, 이에 응답하는 형태로 아유타야 왕 나라이가 치앙마이에 군대를 파병했지만, 그 무렵 상황은 변화하여 버마의 보복을 두려워한 치앙마이는 아유타야에 반기를 들었다. 이 무렵부터 란나는 버마의 속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버마의 일부로 여겨지게 되었다.[1]

버마가 꼰바웅 왕조로 교체되면서 란나는 2분할되어 1701년,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역과 치앙센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으로 나뉘었다. 한편 란나는 버마와 각국의 중과세로 인해 피폐해지면서 점차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1]

1732년, 왓 나얀(ワット・ナーヤーン)의 톤분(トンブン)이라는 승려와 그 집단이 "주술을 사용한다"는 명목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여 결국 집단으로 환속하여 무장 봉기했다. 결국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란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해 버마의 신표신(Hsinbyushin)은 1763년 치앙마이 토벌에 나섰다. 이후 치앙마이의 통치는 버마어로 "뽀"(ポー)라고 불리는 장군이 통치하게 되었다. 버마 점령하 마지막 치앙마이 국주 뽀 마융완(ポー・マーユグワン)(โป่มะยุง่วน)은 노이프롬(ノーイプローム)과 짜오프라야 탁신의 반란을 진압했다.[1]

그러나 버마는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고, 남쪽에 새로 생긴 톤부리 왕조의 지원도 있어 1774년, 마침내 치앙마이를 잃었다. 짜오프라야 탁신(짜오프라야 탁신)은 치앙마이 국주로 임명되었고, 후에 치앙마이의 왕이 된 카위라는 람빵의 국주가 되었다.[1]

버마의 점령에 의해 란나는 남쪽의 치앙마이 관구와 북쪽의 치앙센 관구로 나뉘었다. 이들 관구의 수도인 치앙마이와 치앙센에는 미오운(myowun)이라 불리는 총독이 임명되었고, 시토케(Sitke, เชคคาย, ชคาย, จักกาย라고도 함)가 군사적인 면에서 미오운의 보좌역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수도의 농작지는 나사이(นาซ้าย, 왼쪽 논), 나크와(นาขวา, 오른쪽 논)의 두 곳으로 나뉘어 그 아래에서 판나를 관리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또한 국왕의 비밀 감찰관도 파견되었다.[1]

각 므앙의 수장은 파야 또는 차오파(대부분 샨족 왕족)가 파견되었지만, 미오운이나 시토케에 비해 제한된 권력만 가지고 있었다.[1]

한편, 부흥된 란나 왕조(쩻톤 왕조)는 짜끄리 왕조의 속국이자 조공국이었다. 특히 산림 유래 제품에 대한 조공이 의무화되었지만, 쩻톤 왕조는 하나의 왕국이었고, 내정 면에서는 큰 간섭을 받지 않았다. 또한 조공국은 란나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왕조에 의무화되었으며, 필요에 따라 짜끄리 왕조에 군대를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었다.[1]

6. 경제

란나는 농업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다. 명목상 란나의 영토는 국왕의 소유였으며, 백성은 국왕의 노동력으로 삥 제도 하에 관리되었다. 하지만 국왕 혼자서는 관리가 불가능했기에, 관리와 사찰에 토지와 백성을 할당하여 통치하게 했다는 것이 전제 조건이었다.[1]

영토는 비옥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했고, 마을 단위로 사회가 성립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촌락 사회는 메콩강과 그 지류인 욤강, 핑강에서 관개용 수로를 파고 논을 경작했으며, 생산량이 풍부하여 운남의 호족(ホー族)에 약 540톤의 쌀을 조공하기도 했다.[1]

국왕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징용된 백성을 이용하여 경작했다. 명목상으로는 모든 토지가 국왕의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것일 뿐이므로, 강제로 "회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성에게도 어느 정도의 토지 소유권이 보장되었고, 개간도 장려되어 개간 후 3년간은 세금이 면제되었다.[1]

상업 또한 번성했다. 치앙마이 상인은 멀리 파간까지 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치앙마이에는 호족, 버마인, 샨족 등이 방문하여 무역의 중심지였다. 치앙마이가 접한 핑강은 차오프라야강과 연결되어 아유타야와의 무역 중심지이기도 했다. 수지, 꿀, 상아, 코뿔소 뿔, 카테큐, 쑤오우, 사슴 뿔 및 가죽 등의 산림 부산물은 아유타야로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아유타야에는 치앙마이에서 온 산림 제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으며, 특히 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므엉 선남풍(ムーン・セーンナムプン)이라는 관리 직책이 설치되어 꿀을 엄격하게 관리했으며, 다른 품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무역을 통해 란나는 큰 부를 축적했다.[1]

7. 외교

란나는 주변 대부분이 타이족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북방계 타이족 및 남방계 타이족과의 교류가 외교의 중심이었다. 원과 의 조공국이기도 했다.

북쪽의 타이족과는 종교, 언어, 문화가 비슷하여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쩨른(깟시(십송판나)), 징홍(景洪市))은 란나의 수도가 치앙센에 있던 시절 메콩강으로 연결되어 좋은 관계였다. 멩라이 사후 원에 조공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고, 쎈무앙마의 아내는 쩨른 출신이었다. 쎈무앙마는 불교를 전파하고 란나 문자를 보급하여 타일루 문자의 기초를 마련했다. 껫텅(쩨른텅)은 멩라이 시대에 원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건설된 요새 도시였으며, 조공 이후에는 운남과 란나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서쪽의 무앙나이는 멩라이가 아들 쿠아를 보내 통치하게 한 지역으로, 쿠아가 현지 샨족에게 "나이(นาย, 주인님)"라고 불렸던 것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이 지역들은 란나의 조공국이었지만, 란나가 쇠퇴하면서 치앙마이를 공격하기도 했다.

동쪽의 라오족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며, 란쌍 왕국과는 친밀했다. 티롤로카랏은 다이비엣의 침략에 원군을 보내 격퇴했고, 란쌍의 왕자 세타티랏은 란나 관리들의 초청으로 란나 왕위에 올랐다. 난년대기에 따르면, 수코타이 왕국과도 란나와 란쌍은 모두 친밀한 관계였다.

란나가 부흥하면서, 북쪽 도시들은 버마 측 도시가 되어 우호적이지만은 않게 된다. 차크리 왕조는 란나 왕조에 쩨른, 껫텅 지역으로의 원정을 명령했다. 1849-1850년 란나는 쩨른 내란을 이용해 원정했고, 1852년 라마 4세(몽꿋)는 버마가 대영제국과의 전쟁으로 지쳐가던 틈을 타 웡사 디라지 스닛 왕자를 파견해 침공했다. 1854년에는 차오프라야 시 수리웡세를 원군으로 보냈다. 이러한 침략은 현지 타이족 관리나 국왕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지만, 현지 군대의 협조를 얻지 못해 실패했다.

북쪽 지역 영토 확장은 란나와 차크리 왕조의 숙원이었다. 라마 5세(출랄롱껀)는 1884년 차크리 개혁에 따라 란나에 몬톤을 설치했지만, 관리들은 쩨른을 태국 영토에 편입하려 했다. 그러나 1885년 대영제국이 버마 침략을 완료하자 강대국을 상대하는 것을 주저하며 샨족이나 타이 루족에 대한 영토 확장은 보류되었다.

남쪽의 타이족 국가인 수코타이, 아유타야와 란나는 미묘한 관계였다. 세 국가 모두 핑강, 차오프라야강으로 연결되어 무역에서는 밀접했다. 수코타이는 람캄행 대왕 시대에 란나와 대등했지만, 아유타야와 란나 사이에서 지위가 낮아졌다. 티로카랏 왕 시대에는 아유타야와 란나가 옛 수코타이 영토를 놓고 경쟁했다.

부흥 후 란나에서 짜크리 왕조 시대가 되어 란나는 버마와의 군사적 완충 지대가 되었다. 또한 란나는 짜크리 왕조의 조공국이 되었다.

8. 란나어

'''캄므앙'''(Kham Mueang) 또는 '''파사므앙'''(''Phasa Mueang'')(ภาษาเมือง|파사므앙th)은 옛 란나어의 현대 구어 형태이다. '''캄므앙'''은 주변 산악 지역의 많은 산악 부족의 언어와는 달리 "도시의 언어"를 의미한다(''캄''(Kham)은 언어 또는 단어; ''므엉''(mueang)은 도시, 공국, 왕국). 이 언어는 태국어와 다소 유사하지만 철자 규칙이 크게 다른 옛 란나 문자로 쓸 수 있다. 후자의 영향으로 현대 캄므앙의 발음과도 상당히 다르다.[11]

9. 역사 기록

란나 왕국은 이웃 언어들에서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 연대기에서는 '''진메 피'''(ဇင်းမယ်ပြည်|my) 또는 '''윤 피'''(ယွန်းပြည်|my)라고 불렀다.[6] '진메'는 치앙마이버마어 표기이고, '윤'은 북부 태국인을 가리키는 버마어 용어이다. 라오어에서는 '''아나착 란나'''(ອານາຈັກລ້ານນາ|lo)라고 불렀다.[6]

팔리어 연대기에서는 란나 왕국을 '''요나랏타'''(윤 왕국) 또는 '''빙가랏타'''(메핑 왕국)라고 불렀다. 중국 원사에서는 '''바바이 시푸'''(c=八百媳妇|p=Bābǎi Xífù중국어)라고 불렀으며, 1292년에 처음 기록되었다.[6]

란나 왕국에 대한 역사 기록은 다음과 같다.

종류사료
팔리어 사료
태국 북부의 사료
샴의 사료
미얀마의 사료
한문 사료
유럽과 미국의 기록



พระยาประชากิจกรจักร์ (แช่ม บุนนาค)th가 1899년 『요녹 연대기』를 편집, 출판한 것이 란나 역사 연구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치앙마이 대학교에서는 1964년 개교 당시부터 『요녹 연대기』를 교재로 란나 역사를 교육·연구했다. 1970년대부터 연구가 가속화되었으며, 치앙마이 사범대학교, 파야오 대학교 등에서도 란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란나 역사 연구는 비판적 검토가 부족하고, 1차 사료가 존재하며, 고고학적 조사도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란나 왕조가 발전한 지역은 운남, 미얀마, 라오스 등 여러 국가에 걸쳐 있어 문헌 및 고고학 자료 수집이 어렵다. 또한 태국 국내에도 미발견 사료(탐난)가 사찰 등에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조

[1] 서적 Siamese Melting Pot: Ethnic Minorities in the Making of Bangkok ISEAS-Yusof Ishak Institute 2017-06-29
[2] 서적 Metropolis and Nation In Thailand: The Political Economy of Uneven Development Routledge 2019-03-13
[3] 서적 The Encyclopedia of Empire John Wiley & Sons 2016-01-11
[4] 서적 Thailand's political history : from the 13th century to recent times River Books 2011
[5] 서적 The lost territories : Thailand's history of national humiliation University of Hawai'i Press
[6] 서적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University of Hawaii Press
[7] 서적 Hmannan
[8] 서적 Hmannan
[9] 서적 Hmannan
[10] 서적 Htin Aung
[11] 서적 A Brief History of Lan Na Chiang Mai City Arts and Cultural Centre
[12] 서적 (정보 부족)
[13] 서적 (정보 부족) 20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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