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인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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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인겔드는 잉글랜드, 프랑키아, 키예프 루스 등에서 바이킹의 약탈을 막기 위해 지불했던 조공을 의미한다. 잉글랜드에서는 토지세의 일종으로 징수되었으며, 앵글로색슨 시대와 노르만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형태로 징수되었다. 데인겔드는 문학 작품에서도 언급되었으며, 특히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데인겔드"는 유명하다. 정치적으로는 강압적인 지불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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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겔드 | |
---|---|
기본 정보 | |
유형 | 세금 |
목적 | 바이킹 습격자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징수된 세금 |
역사적 맥락 | |
배경 | 바이킹 시대 동안 데인족의 침략과 위협 |
발생 국가 | 잉글랜드 왕국 |
징수 및 사용 | |
최초 징수 | 애설레드 2세 치세 |
주요 사용처 | 바이킹에게 공물을 지불하여 침략을 막거나 늦추기 위함 |
영향 및 결과 | |
장점 | 단기적으로 침략을 억제하는 효과 |
단점 | 장기적으로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바이킹의 추가적인 공격을 유발 국가적 자존심을 훼손하고 무력 저항 대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고착화 |
평가 | |
비판 |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는 비판 국가의 방어력을 약화시키고 외세에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비판 |
대안 | 군사력 강화 및 적극적인 방어 전략 수립 외교적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노력 |
기타 | |
관련 개념 | 공물, 조공, 매관매직 |
2. 잉글랜드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생략)
2. 1. 앵글로색슨 시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하이드는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토지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였으나, 실제 크기와 경제적 가치는 지역마다 크게 달랐다. 하이드는 토지 평가의 기준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토지 가치세가 부과되었는데, 이것이 데인겔드로 알려지게 된다. 데인겔드는 본래 바이킹 침략자들에게 지불하는 조공의 성격이었으나, 1016년 덴마크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에는 왕국 방위를 위한 영구적인 토지세로 유지되었다.[2]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의 원정은 주로 덴마크 왕들이 이끌었지만, 실제로는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온 전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100톤 이상의 은을 잉글랜드에서 가져갔다.[3]
노르만 정복 이전에 바이킹에게 지불된 조공은 일반적으로 데인겔드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이를 '세금' 또는 '조공'을 의미하는 ''가폴''(gafol)이라고 불렀다.[4] 1012년, 무방비왕 애설레드는 토르켈 더 톨이 이끄는 스칸디나비아 용병 부대를 고용하여 왕국을 방어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연간 토지세를 도입했다. 애설레드 이후의 잉글랜드 왕들도 상비군 유지를 위해 동일한 세금 징수 방식을 사용했으며, 이때는 이를 ''헤레길드''(heregild, 군대세)라고 불렀다. 헤레길드는 참회왕 에드워드에 의해 1051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노르만 행정부가 이 세금을 데인겔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5][6]
잉글랜드가 바이킹에게 처음으로 대규모 조공을 지불한 것은 991년 에식스에서 벌어진 말돈 전투에서 패배한 후였다. 당시 무방비왕 애설레드는 캔터베리 대주교 시게릭과 남서부 지방 앨더맨들의 조언에 따라, 무력으로 저항하는 대신 3300kg (10,000 로마 파운드)의 은을 지불하여 바이킹을 매수하기로 결정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바이킹 군대는 올라프 트리그바손이 이끌었다고 한다.[7]
994년에는 덴마크의 스베인 포크비어드 왕과 올라프 트리그바손이 이끄는 바이킹 군대가 다시 쳐들어와 런던을 포위했다. 잉글랜드는 또다시 이들을 매수했고, 이 사건은 바이킹들에게 약탈보다 조공을 뜯어내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후 1002년과 1007년에도 추가적인 지불이 이루어졌다. 특히 1007년에는 애설레드가 13400kg (36,000 트로이 파운드)의 은을 지불하고 덴마크인들과 2년간의 평화를 확보했다. 1012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바이킹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하고 캔터베리가 약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덴마크인들에게 17900kg (48,000 트로이 파운드)의 은을 지불하며 다시 매수했다.
1016년, 스베인 포크비어드의 아들인 크누트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2년 뒤인 1018년, 크누트는 자신의 왕국을 충분히 장악했다고 판단하고, 침략 함대의 대부분을 돌려보내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데인겔드를 징수했다. 그는 전국적으로 26900kg (72,000 트로이 파운드)의 은을, 추가로 런던에서 3900kg (10,500 파운드)의 은을 걷어 함대에게 지불했다. 다만 40척의 함선은 개인 경호 병력으로 남겨두었다.
이러한 형태의 조공 강요는 잉글랜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스노리 스투를루손과 림베르트의 기록에 따르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해 연안 지역들도 스웨덴에게 비슷한 종류의 조공을 바쳤다. ''초대 연대기''는 보호비를 지불하던 지역이 동쪽으로 모스크바까지 뻗어 있었으며, 핀족과 슬라브족이 반란을 일으켜 바랑기아인들을 몰아낼 때까지 조공이 계속되었다고 기록한다. 마찬가지로, 사미족 역시 종종 모피 형태로 조공을 강요받았다. 유사한 관행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존재했는데, 당시 기독교 왕국들은 이슬람 타이파 왕국들로부터 습격 대신 조공(''parias'')을 받아 재정을 충당했다.
앵글로색슨족이 바이킹에게 지불한 데인겔드의 총액은 약 6천만 페니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8] 실제로 스웨덴의 룬 문자 비문 Sö 260이 발견된 농장에서는 서쪽으로의 항해(잉글랜드 원정)를 언급하는 내용과 함께 수백 개의 잉글랜드 동전이 발견되기도 했다.[8]
2. 2. 노르만 시대
노르만 정복 이후, 앵글로색슨 시대에 왕국 방어를 위한 용병 고용 및 상비군 유지를 위해 징수되던 '헤레길드'(heregild, 군대세)는 노르만 행정부에 의해 데인겔드라고 불리게 되었다.[5][6] 정복자 윌리엄은 데인겔드를 더 이상 바이킹의 위협을 막기 위한 자금이 아니라, 대륙에서의 전쟁을 지원하고 왕실의 필요와 정복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주요 재원으로 활용했다.[11]윌리엄과 그의 후계자들은 앵글로색슨 왕들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높은 세율로 데인겔드를 징수했다. 예를 들어, 1084년에는 하이드당 6실링이라는 높은 세율의 겔드가 부과되어 악명이 높았고, 1096년 엘리에서 징수된 겔드는 평소 세율의 두 배에 달했다.[11][12] 주디스 그린(Judith Green)에 따르면, 1110년부터는 전쟁과 화이트 쉽 침몰 사건 등으로 인해 세금 징수 압박이 더욱 심해졌다.[13]
1130년까지 헨리 1세는 매년 하이드당 2실링의 데인겔드를 꾸준히 징수했다. 우스터의 존의 연대기에 따르면, 헨리 1세는 그해 데인겔드를 7년간 면제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이 약속은 스티븐 왕이 즉위식에서 다시 확인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헨리 2세가 1155년에서 1156년 사이에 데인겔드를 잠시 부활시켰으나, 1161년에서 1162년을 마지막으로 파이프 롤(Pipe Rolls, 왕실 재정 기록)에 데인겔드 징수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사실상 폐지되었다.[14]
데인겔드는 당시 왕실 재정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1129년에서 1130년 사이의 재무부 기록을 보면, 데인겔드 수입은 약 2.4천파운드로, 이는 그해 전체 세금 수입(약 2.3만파운드)의 약 10%에 달했다.[15]
하지만 12세기 초의 데인겔드 징수 방식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토지 생산성에 대한 오래된 평가 기준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왕의 호의에 따라 수많은 감면이나 면제가 주어져 세금을 계속 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하게 작용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면제 제도는 왕의 총애를 보여주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조정되기도 하여 데인겔드가 예상보다 유연한 과세 도구로 기능하기도 했다.[16] 예를 들어, 헨리 1세는 1133년에 런던 시민들에게 스콧(scot), 데인겔드, 머드럼(murdrum)과 같은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권을 부여했다.[17]
결국 12세기 후반부터는 데인겔드 대신 의회의 동의를 얻어 부과하는 동산(動産)에 대한 세금이 점차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세 원칙도 '동의 없이 면제 없음'에서 '동의는 구하되 면제는 없다'는 방향으로 변화했다.[18]
3. 프랑키아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845년에 처음으로 바이킹에게 데인겔드가 지불되었다. 당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이끄는 바이킹 군대가 파리를 공격하려 하자, 서프랑크 왕국은 도시 파괴를 막기 위해 약 6ton에 달하는 은과 금을 지불했다.[26] 858년 11월에는 전년도부터 센 강 유역을 약탈해 온 뵨 (베르노)에게 데인겔드가 지불되었다.[26]
862년에는 대머리 카를에게 센 강에서 쫓겨난 바이킹 무리와 지중해 원정에서 돌아온 바이킹 무리가 브르타뉴에서 합류했다. 이 중 지중해 원정대는 브르타뉴 공작 살로몬에게 고용되어 루아르 계곡을 약탈했다.[27]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인 강인공 로베르는 이들 중 일부를 격파한 후, 센 강에서 온 바이킹들과 협상하여 살로몬에 대항하도록 약 2721.55kg의 은을 지불하고 고용했다. 이는 살로몬이 이들을 용병으로 쓰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며, 로베르는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징수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사실상 조공 성격의 데인겔트였다. 그러나 이 협약은 오래가지 못했고, 863년 살로몬이 평화를 맺자 바이킹은 네우스트리아를 약탈했다.
3. 1. 브르타뉴
브르타뉴 공국 전체에서 데인겔드가 징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브르타뉴인들이 여러 차례 바이킹에게 대가를 지불한 것은 사실이며, 여기에는 돈이나 다른 귀중품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급료나 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위급 상황에서 지역 단위로 데인겔드와 유사한 성격의 자금이 모금되었을 가능성은 있다.[19]847년, 브르타뉴의 지도자 노미노에는 덴마크 바이킹에게 세 번 패배한 후, 그들의 지도자들과 협상하여 선물을 주고 떠나도록 유도했다. 이는 동시대의 ''베르틴 연대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Dani partem inferioris Galliae quam Brittones incolunt adeuntes, ter cum eisdem bellantes, superant; Nomenogiusque victus cum suis fugit, dein [per] legatos muneribus a suis eos sedibus amovit.lat''[19]
덴마크인들은 브르타뉴인들 사이에 정착하려는 의도로 갈리아를 떠났다. 세 번이나 그들과 싸우면서 그들을 이겼다. 패배한 노미노에는 자기 사람들과 함께 도망쳤고, 그런 다음 선물을 들고 온 사자들을 통해 같은 덴마크인들을 그들의 정착지에서 내쫓았다.
덴마크인들이 반드시 현금으로만 매수된 것은 아닐 가능성은 ''연대기''와 프륌의 레기노가 기록한 869년의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그 해 브르타뉴 왕 살로몬은 소 500마리를 지불하여 일부 이교도들의 습격을 멈추게 했다.[19]
더 지역적인 형태의 데인겔드는 반느 백작령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두 사건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레동 수도원의 카르툴라리에 따르면, 반느 교구의 주교 쿠랑트게누스는 854년에 바이킹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다.[19] 그의 몸값은 아마도 지역 차원에서 마련되었을 것이다. 855년에는 레동의 수도사들이 성작과 성반을 내주어 파스케트(Pascwet) 백작을 비슷한 상황에서 구출해야 했다. 이 두 성물의 무게는 합쳐서 금 67 솔리디였다. 얼마 후 파스케트는 이교도들로부터 성물을 되찾았는데, 이 지불 역시 일종의 데인겔드였을 수 있다. 실제로 프륌의 레기노에 따르면, 파스케트는 나중에(873년)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경쟁하던 뷔르판 렌 백작을 공격하기 위해 일부 바이킹을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밝혀지지 않은 금액의 급여를 지불했는데, 이 또한 데인겔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19]
3. 2. 동프랑크
동프랑크 왕국에서 징수된 가장 중요한 데인겔드는 882년에 뚱보 카를이 엘슬루 포위전을 끝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자금은 바이킹 지도자인 고드프리드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프리슬란트 공작으로 임명하는 데 쓰였다.[20] 프륌의 레기노의 기록에 따르면,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필요에 따라 지역적으로 데인겔드가 징수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880년에는 이베사라는 여성이 자신의 아들인 에버하르트 백작을 구출하기 위해 "엄청난 가격"의 몸값을 지불한 사례가 있다.[21]3. 3. 프리슬란트
최초의 데인겔드는 810년 프리슬란트에서 징수되었다.[22] 810년에 약 200척의 덴마크 함대가 프리슬란트에 상륙하여 해안 섬들을 약탈하고 본토를 공격했으며, 세 번의 전투에서 프리슬란트인들을 격파했다. 승리한 덴마크인들은 정복한 이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요구했다. 당시 덴마크 왕 고드프레드에 대한 원정을 고려하며 아헨에 있던 샤를마뉴에게 프리슬란트인들이 이미 세금을 통해 은화 100파운드를 징수하여 지불했다는 보고가 전달되었다. 이 사건들은 샤를마뉴 궁정 역사가인 아인하르트의 ''프랑크 왕국 연대기''와 ''카롤루스 대제 전기'', 그리고 ''메츠 연대기'', ''아날레스 막시미니아니'', 소위 "작센 시인"의 저작 등 여러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22] 지불된 총액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인하르트가 그의 ''전기''에서 언급했듯이 세금을 통해 징수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승리한 덴마크인들은 패배자들에게 공물을 부과했고, 과세라는 명목으로 프리슬란트인들로부터 은화 100파운드가 이미 지불되었다" (Danosque victores tributum victis inposuisse, et vectigalis nomine centum libras argenti a Frisionibus iam esse solutasla).[22]경건왕 루이 (840년 사망) 재위 말까지 프리슬란트에서는 더 이상 데인겔드가 징수되지 않았다. 836년, 노르만족이 안트베르펜과 빈트라 시장을 불태운 후, 얼마간의 공물을 받고 떠나기로 합의했으나 그 액수는 ''풀다 연대기''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23] 837년, 프리슬란트인들이 준비가 부족했거나 프랑크 지배자들로부터 이탈했을 때, 일부 바이킹들이 발헤렌에 상륙하여 여러 백작과 지도자들을 살해하거나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24] 그들은 이후 어디에서든 '인구 조사'(censusla)를 실시하여 막대한 양의 돈을 거두어들였다. 이후 본토로 이동하여 도레스타트를 공격하고 주민들로부터 공물을 갈취한 뒤 떠났다.[24] 이 사건은 ''풀다 연대기'', ''베르티니 연대기'', ''잔텐 연대기'', 그리고 트리어의 테간이 쓴 ''루도비쿠스 황제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846년, 루이의 아들 로테르 1세 재위 기간 동안, 바이킹들은 프리슬란트인들에게 공물을 지불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강요했다.[24] ''베르티니 연대기''와 ''잔텐 연대기''는 로테르 1세가 이 상황을 알면서도 막지 못했으며, 바이킹들이 약탈물과 포로들을 가득 싣고 프리슬란트를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리슬란트에서 징수된 마지막 데인겔드는 852년에 지불되었다. 그 해 252척의 바이킹 배가 프리슬란트 해안에 정박하여 종류를 알 수 없는 공물을 요구했고, 프리슬란트인들은 이를 수용했다. 요구가 충족되자 바이킹들은 영토를 파괴하지 않고 떠났으며, 이는 ''베르티니 연대기''와 성 바보의 생애를 다룬 ''미라큘라 산티 바보니''에 기록되어 있다.[24] 이러한 바이킹의 요구가 프리슬란트인들의 세금으로 지불되었다는 사실은 873년의 사건 기록에서 명확해진다. 그 해, ''풀덴시스'', ''베르티니아니'', ''잔텐시스'' 연대기에 따르면, 바이킹 지도자 로돌프가 오스테르가우에 공물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프리슬란트인들은 자신들이 동프랑크 왕국의 왕 루이와 그의 아들들(바이에른의 카를로만, 젊은 루이, 비만왕 카를)에게만 세금을 낼 의무가 있다고 답하며 저항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로돌프는 사망하고 그의 군대는 격파되었다.[24] 10세기 후반의 자료인 생 캉탱의 듀도의 저작에는 롤로가 프리슬란트인들에게 공물을 강요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24] 프리슬란트에서 징수된 다양한 데인겔드는 순전히 지역적인 성격을 띠며, 왕의 지원이나 승인 없이 지역 지도자와 주민들이 징수한 것이었다.
3. 4. 로타링기아
로타링기아에서 데인겔드는 단 한 번만 징수되었다. 864년 로타르 2세는 왕국 내 모든 맨서스에서 4개의 데나리우스를 징수했으며, 소와 많은 양의 밀가루, 포도주, 맥주도 함께 거두었다. 전체 금액이나 이것이 보수로 지급되었는지 공물로 지급되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로돌프가 이끄는 바이킹 무리에게 지급되었다.이는 로타르 2세가 860년 대머리 카롤루스(서프랑크 왕국의 왕)가 웨랜드가 이끄는 바이킹을 고용하여 센 강의 오셀루스 섬에 진을 치고 있던 다른 바이킹 무리를 공격하게 했던 사례를 모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로타르 2세의 지불 이유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는 유일한 동시대 자료인 ''베르티니아니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 생캉탱의 두도가 그의 저서 ''노르망디 공작의 풍습과 행적''에서 880년 레기나르 랑갈스가 그의 아내에 의해 에노 백작령의 모든 금으로 몸값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전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일 가능성이 높다.
4. 키예프 루스
키예프 루스(Kievan Rus) 시대, 스웨덴계 루스인(여기에서 러시아라는 이름이 유래)의 통치 기간 동안 슬라브족은 적어도 859년부터 바이킹에게 연간 조공을 바쳐야 했는데, 이를 단(''dan'')이라고 불렀다.[28] 바이킹 루릭의 친족이었던 올레그 공은 키예프로 이주한 후 노브고로드 사람들에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0 ''그리브나''의 단을 부과했다. 키예프에 대한 지불은 야로슬라프 공이 사망한 1054년까지 계속되었다.
올레그 공이 907년 콘스탄티노플 원정을 감행했을 때, 그는 로마인들에게 "그의 2,000척의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1인당 12 ''그리브나''를, 한 척에 40명을 계산하여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올레그와 로마 황제 레오 6세 사이의 조약에 따라 황제는 올레그의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떠나는 대가로 1 ''그리브나''를 지불해야 했다.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945년 이고르 공의 추종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스베이알드의 종들은 무기와 고운 의복으로 치장했지만, 우리는 옷을 입지 못했습니다. 왕자님, 우리와 함께 가서 당신과 우리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고르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조공(단)을 찾아 데레바를 공격했다. 그는 이전 조공을 요구했고 그의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폭력으로 사람들에게서 징수했다....
5. 유산
데인겔드는 후대에 셰익스피어나 러디어드 키플링과 같은 작가들의 문학 작품에서 소재로 다루어졌다. 특히 키플링의 시 "데인겔드"는 데인겔드를 지불하는 행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유명하다.[29]
또한, 영국을 비롯한 현대 사회에서는 데인겔드라는 용어가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 특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유화 정책과 같이 단기적인 평화를 위해 장기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타협을 비판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31][32]
5. 1. 문학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덴마크의 조공에 대해 언급했다. 햄릿 3막 1장에서 클로디어스 왕이 햄릿의 광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https://web.archive.org/web/20030303091221/http://tech.mit.edu/shakespeare/hamlet/hamlet.3.1.html 3막 1장]): ... 그는 잉글랜드로 급히 갈 것이오,
: 우리가 소홀히 한 조공을 요구하기 위해
데인겔드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데인겔드"의 주제이다. 가장 유명한 구절은 "데인겔드를 지불하면/ 당신은 결코 데인족을 없앨 수 없다"이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29]
: 어떤 국가든 유혹에 빠뜨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 그들이 굴복하여 길을 잃을까 두려워;
: 그러므로 당신에게 대가를 지불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라고 요청받을 때,
: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더 나은 정책임을 알게 될 것이다. –
:
: "우리는 '어떤' 데인겔드도 지불하지 않는다,
: 비용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 그 게임의 끝은 억압과 수치이기 때문에,
: 그리고 그 게임을 하는 나라는 멸망한다!"
키플링의 시는 필크 음악가 레슬리 피시가 1991년 앨범 ''The Undertaker's Horse''에서 음악으로 만들었다.[30]
5. 2. 정치
영국에서 "데인겔드"라는 용어는 돈이나 현물 등 강압적인 지불에 대한 일반적인 경고이자 비판을 의미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 하원에서 벨파스트 협정에 대한 토론 중 "나는 벨파스트 협정이 모래 위에 세워질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지만,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데인겔드는 지불되었고, 데인겔드에 관한 것은 계속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보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다음은 무엇이 될까?"[31] 와 같은 언급이 있었다.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키플링의 시 "데인겔드"를 인용하며, 특히 가장 유명한 두 구절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언론인 토니 파슨스는 2004년 10월 이탈리아 정부가 이라크에서 인질 2명을 석방하기 위해 100만달러를 지불했다는 발표에 대해 로마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가 "몸값을 지불했고,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라고 쓴 것을 비판하며 시를 ''데일리 미러''에 인용했다.[32]
영국에서 이 구절은 종종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과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경험과 결부된다. "역사에는 데인겔드이든, 최근의 사례이든, 유화 정책의 많은 예가 있으며, 유화 정책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지적이 있다. 1939년 7월 22일, 영국의 두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뉴스 크로니클''은 해외 무역부의 로버트 허드슨이 이틀 전 런던 주재 독일 대사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과 4개년 계획 기구의 헬무트 볼트하트를 만나 폴란드를 공격하지 않는 대가로 수억 파운드 상당의 거액의 차관을 독일에게 제공했다고 보도했다.[33] 허드슨의 차관 제안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으며, 신문들은 허드슨의 계획을 "데인겔드 지불"이라고 불렀다. 허드슨은 체임벌린이 하원에서 허드슨이 독자적으로 행동했으며, 영국은 단치히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독일에 그러한 차관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여 큰 굴욕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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