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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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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망디 공작은 911년 프랑스 왕 샤를 3세와 바이킹 롤로가 맺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으로 창설된 노르망디 공국을 통치하는 지배자를 의미한다.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다가 1204년 프랑스 왕령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공작 칭호는 프랑스 왕족에게 주어졌으며, 1792년 프랑스 군주제 폐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현재는 채널 제도를 통치하는 영국 군주를 비공식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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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작
개요
칭호노르망디 공작
관할 지역노르망디 공국
임명 방식세습
역사
기원911년, 롤로가 서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노르망디를 할양받음
소멸1790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공국 폐지
목록
초대 공작롤로 (911년 - 927년)
마지막 공작루이 16세 (1774년 - 1790년)
기타
후계 칭호영국 국왕 (현재)

2. 역사

911년 서프랑크 왕 샤를 3세와 바이킹족 지도자 롤로가 맺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으로 노르망디 공작령이 창설되었다. 이 조약으로 노르만족은 이 지역을 봉토로 수여받았고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었다.

1066년 노르망디 공 기욤은 잉글랜드 왕국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왕이면서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는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는 훗날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087년 기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들이 계승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이 분쟁은 1106년 앙리 1세가 로베르를 이김으로써 끝났는데, 이때 노르망디 공작의 계승권도 잉글랜드의 왕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1144년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노르망디를 정복했고, 이 공작령을 그의 아들 앙리에게 양도했으며, 앙리는 1154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되었다.

이후 노르망디는 프랑스 왕의 정복 목표가 되었고, 계속 도전을 받았으며, 결국 1204년 채널 제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프랑스 왕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 채널 제도는 현재 왕실령으로서,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다.

1204년 이후, 프랑스 국왕은 노르망디 공국을 몰수하여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 이후, 공작 칭호는 여러 프랑스 왕자들이 가졌다. 프랑스 왕령이 된 이후 노르망디는 종종 친왕 재지가 되었다.

2. 1. 노르망디 공국의 성립

911년, 서프랑크 왕국(현재의 프랑스)의 왕 샤를 3세는 바이킹족 지도자 롤로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노르만족은 노르망디 지역을 봉토로 받았고, 롤로는 샤를 3세의 신하가 되었다.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샤를 3세는 그 대가로 노르망디 지역을 주고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노르망디 공작령이 성립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역은 노르망디로 불리게 되었다.

롤로는 어떠한 칭호도 소유하거나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의 아들과 손자인 윌리엄 1세와 리처드 1세는 "백작"(라틴어 ''comes'' 또는 ''consul'')과 "공작"(''princeps'')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 1066년 이전에는 노르망디 통치자의 가장 일반적인 칭호는 "노르망디 백작"(''comes Normanniae'') 또는 "노르만족의 백작"(''comes Normannorum'')이었다.[3]

공작(''dux'')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006년 노르망디의 리처드 2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리처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왕실 사무국은 노르만 통치자를 "노르만족의 공작"(''dux Normannorum'')이라고 처음으로 불렀다.[2] 윌리엄 2세(1035–87)의 통치 후반까지 노르망디의 통치자는 자신의 칭호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이 "공작이자 공작, 노르망디 백작"이라고 스스로 칭할 수 있었다.[3]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하고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망디 공작은 프랑스 왕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면서, 동시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훗날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2. 잉글랜드와의 관계

1066년 노르망디 공 기욤은 잉글랜드 왕국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왕이면서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었다.[2]

1087년 정복자 기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들이 계승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이 분쟁은 1106년 앙리 1세가 로베르를 이김으로써 끝났는데, 이때 노르망디 공작의 계승권도 잉글랜드의 왕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1144년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노르망디를 정복했고, 이 공작령을 그의 아들 앙리에게 양도했으며, 앙리는 1154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되었다.

이후로 노르망디는 프랑스 왕의 정복 목표가 되었고, 계속 도전을 받았으며, 결국 1204년 채널 제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프랑스 왕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 채널 제도는 현재 왕실령으로서,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다.

1066년부터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윌리엄 1세가 되면서 노르망디 공작 칭호는 종종 잉글랜드 왕이 보유하게 되었다. 1087년 윌리엄이 사망하고 칭호는 그의 장남 로베르 커소즈에게로 넘어갔고, 그의 차남 윌리엄 루퍼스는 잉글랜드를 상속받았다. 1096년 로베르는 노르망디를 윌리엄에게 담보로 잡혔고, 윌리엄은 1100년 다른 형제인 헨리 1세에게 계승되었다. 1106년 헨리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노르망디는 아나키라고 알려진 내전 기간 동안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란타주네에게 정복된 1144년까지 잉글랜드 왕에게 남아 있었다. 조프루아의 아들 헨리 2세는 노르망디(1150년)와 잉글랜드(1154년)를 상속받아 두 칭호를 재결합했다. 1202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봉건적 주군으로서 노르망디를 몰수한다고 선언했고, 1204년까지 그의 군대가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헨리 3세는 마침내 파리 조약(1259년)에서 잉글랜드의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공작령은 프랑스 왕실 영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발루아 왕가의 왕들은 그들의 상속자에게 칭호를 수여하는 전통을 시작했다. 노르망디가 프랑스에 정복된 후부터 프랑스 군주제가 해체된 1792년까지 이 칭호는 네 번(1332년, 1350년, 1465년, 1785년) 수여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정치적 실체로서 종식시켰고, 당시에는 프랑스의 한 레지옹이었으며, 여러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대체되었다.

초상화이름재위 기간결혼전임자와의 관계기타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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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1135년 ~ 1144년마틸다 1세
자녀 5명
윌리엄 2세의 손자, 노르망디의 아델라를 통해
헨리 1세의 조카
잉글랜드 국왕



초상이름재위 기간결혼전임자(들)와의 관계다른 칭호기타 세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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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루아
미남왕
(Geffrai le Biau)
1144–1150잉글랜드의 마틸다
세 명의 자녀
사위 헨리 1세앙주 백작스테판 1세로부터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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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
(Henri Court-manté)
1150 – 1189년 7월 6일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여덟 명의 자녀
제프루아의 아들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는 아들인 젊은 헨리(1155–1183)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지만, 이는 후계자를 지정하는 노르만 관습이었으며, 젊은 헨리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자신의 권리로 통치하지 못했으므로, 공작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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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4세
(R'chard le Quor de Lion)
1189년 9월 3일 – 1199년 4월 6일나바라의 베렝가리아
후사 없음
헨리 2세의 아들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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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sans Terre)
1199 – 1204(1) 글로스터 백작부인 이사벨라리처드 4세의 형제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
1204년에 본토 노르망디를 잃었다


2. 3. 프랑스의 지배와 채널 제도

1204년 채널 제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프랑스 왕에 지배를 받게 되었고, 채널 제도는 현재 왕실령으로서,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다.[14] 채널 제도에서 영국 군주는 남성 여부와 관계없이 비공식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 (예: 이 칭호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14] 채널 제도는 영국 군주가 통치하는 옛 노르망디 공작령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 영국 군주제는 1259년 파리 조약에서 대륙 노르망디와 기타 프랑스 권리를 포기했지만, 채널 제도(프랑스 주권 하의 쇼지 섬 제외)는 영국 왕실의 자치령으로 남아있다.

영국 역사가 벤 핌로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67년 5월 본토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 현지인들이 모자를 벗고 "비브 라 듀셰스!"(Vive la Duchesse!, 여공작 만세!)를 외치자 여왕이 "음, 나는 노르망디 공작인데!"라고 답했다고 언급했다.[15]

그러나 왕은 관례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불리며, 특히 충성 서약 중에 섬 주민들이 사용하는 칭호로, "노르망디 공작, 우리의 왕" 또는 "왕, 우리의 공작", 노르만어(각각 저지어건지어)로 "''L'Rouai, nouotre Duc''" 또는 "''L'Roué, note Du''", 표준 프랑스어로 "''Le Roi, notre Duc''"이라고 말하며, 영국에서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16][17]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칭호는 공식 정부 간행물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채널 제도 법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다.[18][17]

2. 4. 프랑스 왕령 시대

미남왕
Geffrai le Biau프랑스어1144–1150잉글랜드의 마틸다
(1128년 결혼)
세 명의 자녀사위 헨리 1세앙주 백작스테판 1세로부터 노르망디를 정복했다.헨리 2세
Henri Court-manté프랑스어1150 – 1189년 7월 6일아키텐의 엘레오노르
(1152년 결혼)
여덟 명의 자녀제프루아의 아들
스테판의 먼 사촌잉글랜드 국왕헨리 2세는 아들인 젊은 헨리(1155–1183)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지만, 이는 후계자를 지정하는 노르만 관습이었으며, 젊은 헨리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자신의 권리로 통치하지 못했으므로, 공작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리처드 4세
R'chard le Quor de Lion프랑스어1189년 9월 3일 – 1199년 4월 6일나바라의 베렝가리아
(1191년 결혼)
후사 없음헨리 2세의 아들잉글랜드 국왕
Jean sans Terre프랑스어1199 – 1204(1) 글로스터 백작부인 이사벨라
(1189년 결혼, 1199년 무효)
후사 없음리처드 4세의 형제
헨리 2세의 아들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1204년에 본토 노르망디를 잃었다



1204년, 프랑스 국왕은 노르망디 공국을 몰수했고(잉글랜드는 채널 제도를 통제) 이를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 이후, 공작 칭호는 여러 프랑스 왕자들이 가졌다.



프랑스 왕령이 된 이후 노르망디는 종종 친왕 재지가 되었다.

3. 노르망디 공작 목록

롤로부터 헨리 3세까지 노르망디 공작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름재위 기간
롤로911년-927년
노르망디의 기욤 1세927년-942년
베르나르 르 다누아942년 (임시 섭정)
리샤르 1세942년-996년
리샤르 2세996년-1027년
리샤르 3세1027년-1028년
로베르 1세 악마공1028년-1035년
로베르 2세1087년-1106년
조프루아 플랜태저넷1144년-1150년
기욤 2세 (Guillaume II)1066년1087년
기욤 3세 (Guillaume)1087년1100년
앙리 1세 (Henry I)1100년1135년
에티엥 (Étienne)1135년1141년
마틸드 (Mathilde)1141년
에티엥 (Étienne)1141년1154년
앙리 2세1154년 - 1189년
리샤르 4세 (Richard IV)1189년 - 1199년
(Jean)1199년 - 1216년
앙리 3세1216년 - 1255년



"노르망디 공작"의 문자적 라틴어 동등어인 ''dux Normanniae''는 1066년까지 사용되었지만,[8] 앙주 시대(1144–1204)까지 ''dux Normannorum''을 대체하지 못했으며, 당시에는 노르만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있었다.[9]

1202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봉건적 주군으로서 노르망디를 몰수한다고 선언했고, 1204년까지 그의 군대가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헨리 3세는 마침내 파리 조약(1259년)에서 잉글랜드의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노르망디 공작령은 프랑스 왕실 영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발루아 왕가의 왕들은 그들의 상속자에게 칭호를 수여하는 전통을 시작했다. 노르망디가 프랑스에 정복된 후부터 프랑스 군주제가 해체된 1792년까지 이 칭호는 네 번(1332년, 1350년, 1465년, 1785년) 수여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정치적 실체로서 종식시켰고, 당시에는 프랑스의 한 레지옹이었으며, 여러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대체되었다.

3. 1. 초기 노르망디 가문 (911년–1135년)



롤로는 어떠한 칭호도 소유하거나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의 아들이자 손자인 기욤 1세와 리샤르 1세는 "백작"(라틴어 ''comes'' 또는 ''consul'')과 "공작"(''princeps'')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 1066년 이전에는 노르망디 통치자의 가장 일반적인 칭호는 "노르망디 백작"(''comes Normanniae'') 또는 "노르만족의 백작"(''comes Normannorum'')이었다.[3]

공작(''dux'')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006년 페캉 수도원에 유리한 행위에서 노르망디의 리샤르 2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작가 랭스의 리케루스가 리처드 1세를 ''dux pyratorum''이라고 불렀지만, 이는 단지 "해적의 지도자"를 의미할 뿐 칭호는 아니었다. 리처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왕실 사무국은 노르만 통치자를 "노르만족의 공작"(''dux Normannorum'')이라고 처음으로 불렀다.[2]

기욤 2세(1035–87)의 통치 후반까지 노르망디의 통치자는 자신의 칭호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이 "공작이자 공작, 노르망디 백작"이라고 스스로 칭할 수 있었다.[3]

리처드 1세는 966년경부터 "후작"(''marchio'')이라는 칭호를 실험했는데, 이는 또한 로테르 1세의 칙서에도 사용되었다.[10] 리처드 2세는 가끔 이 칭호를 사용했지만, 공작 칭호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1066년부터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윌리엄 1세가 되면서 노르망디 공작 칭호는 종종 잉글랜드 왕이 보유하게 되었다.

초상이름통치 기간결혼전임자와의 관계기타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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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911년–928년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에 의해 승인공식 칭호 없음[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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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1세927년–942년 12월 17일롤로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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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1세942년 12월 17일 – 996년 11월 20일기욤 1세의 아들1차 자료에서 노르망디 백작으로 불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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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2세996년–1026년리샤르 1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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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3세1026년 8월 28일 – 1027년 8월 6일결혼하지 않음리샤르 2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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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1세1027년–1035년결혼하지 않음, 에를레바와 사생 관계 (아들 1명, 딸 1명)리샤르 3세의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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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2세1035년경 – 1087년 9월 9일플랑드르의 마틸다 (자녀 10명, 1051/2년 결혼, 1083년 사망)로베르 1세의 아들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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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2세1087년 9월 9일 – 1106년시빌라 드 콘베르사노 (아들 1명, 1100년 결혼, 1103년 3월 18일 사망)기욤 2세의 장남
헨리 1세1106년 – 1135년 12월 1일로베르 2세의 형제, 기욤 2세의 아들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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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3세1106년–1128년bgcolor="#FBDDBD" |로베르 2세의 장남플랑드르 백작


3. 2. 블루아 가문 (1135년–1144년)

에티엔 (1135년-1144년)은 1135년부터 1154년까지 잉글랜드 왕이었다.

3. 3. 플랜태저넷 가문 (1144년–1259년)

미남왕
(Geffrai le Biau)1144년–1150년잉글랜드의 마틸다
세 명의 자녀
(mariage|1128년|결혼프랑스어)사위 헨리 1세앙주 백작스테판 1세로부터 노르망디를 정복했다.헨리 2세
(Henri Court-manté)1150년 – 1189년 7월 6일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여덟 명의 자녀
(mariage|1152년|결혼프랑스어)제프루아의 아들
스테판의 먼 사촌잉글랜드 국왕헨리 2세는 아들인 젊은 헨리(1155년–1183년)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지만, 이는 후계자를 지정하는 노르만 관습이었으며, 젊은 헨리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자신의 권리로 통치하지 못했으므로, 공작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리처드 4세
(R'chard le Quor de Lion)1189년 9월 3일 – 1199년 4월 6일나바라의 베렝가리아
후사 없음
(mariage|1191년|결혼프랑스어)헨리 2세의 아들잉글랜드 국왕
(Jean sans Terre)1199년 – 1204년(1) 글로스터 백작부인 이사벨라
후사 없음
(mariage|1189년|결혼프랑스어; annulé|1199년|무효프랑스어)리처드 4세의 형제
헨리 2세의 아들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1204년에 본토 노르망디를 잃었다


3. 4. 발루아 가문 (프랑스 왕령, 1332년-1466년)

1204년, 프랑스 국왕은 노르망디 공국을 몰수했고(잉글랜드는 채널 제도를 통제) 이를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 이후, 공작 칭호는 여러 프랑스 왕자들이 가졌다.

1332년, 필리프 6세는 공국을 그의 아들인 장 2세에게 분봉령으로 주었고, 그는 1350년 프랑스의 장 2세가 되었다. 그는 다시 공국을 그의 아들 샤를 5세에게 분봉령으로 주었고, 그는 1364년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되었다. 1465년, 루이 11세는 강요에 의해 공국을 그의 형제 샤를 2세에게 주었다. 샤를 2세는 공국을 유지할 수 없었고, 1466년 다시 왕령에 편입되어 영구적으로 그 일부가 되었다.

이 칭호는 1792년 프랑스 군주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프랑스 왕실의 몇몇 젊은 구성원들에게 수여되었다.

이름재위 기간
장 2세 (필리프 6세의 아들)1332년–1350년
샤를 5세 (장 2세의 아들)1350년–1364년
샤를 2세 (루이 11세의 형제)1465년–1466년
요크 공작 제임스 (이후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1660년 12월 31일[11]
루이-샤를 (루이 16세의 아들, 이후 도팽 1789년–1791년, 명목상 왕 루이 17세 1792년–1795년)1785년–1792년



프랑스 혁명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정치적 실체로서 종식시켰고, 당시에는 프랑스의 한 레지옹이었으며, 여러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대체되었다.

3. 5. 부르봉 가문 (프랑스 왕령, 1785년-1792년)

1204년, 프랑스 국왕은 노르망디 공국을 몰수했고(잉글랜드는 채널 제도를 통제) 이를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 이후, 공작 칭호는 여러 프랑스 왕자들이 가졌다.

1332년, 필리프 6세는 공국을 그의 아들인 존에게 분봉령으로 주었고, 그는 1350년 프랑스의 존 2세가 되었다. 그는 다시 공국을 그의 아들 샤를에게 분봉령으로 주었고, 그는 1364년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되었다. 1465년, 루이 11세는 강요에 의해 공국을 그의 형제 베리 공작 샤를 드 발루아에게 주었다. 샤를은 공국을 유지할 수 없었고, 1466년 다시 왕령에 편입되어 영구적으로 그 일부가 되었다.

이 칭호는 1792년 프랑스 군주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프랑스 왕실의 몇몇 젊은 구성원들에게 수여되었다.

이름기간
존 (필리프 6세의 아들, 나중 프랑스의 존 2세)1332년–1350년
샤를 (존 2세의 아들, 나중 프랑스의 샤를 5세)1350년–1364년
샤를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형제, 또한 베리 공작)1465년–1466년
요크 공작 제임스 (나중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1660년
루이-샤를 (루이 16세의 아들)1785년–1792년



요크 공작 제임스의 경우, 1660년 12월 31일 찰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위에 복위된 지 몇 달 후, 루이 14세는 찰스의 동생인 그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선포했다. 이것은 아마도 정치적 지지의 몸짓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루이-샤를은 이후 도팽 (1789년–1791년) 및 명목상 왕 루이 17세 (1792년–1795년)이 되었다.

4. 현대의 노르망디 공작

채널 제도 저지 섬의 예술 센터에서 열린 다이아몬드 주빌리 전시회 제목 "La Reine, Notre Duc" (여왕, 우리의 공작)


채널 제도에서 영국 군주는 성별에 관계없이 비공식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이 칭호로 알려져 있다.[14] 채널 제도는 영국 군주가 통치하는 옛 노르망디 공국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 1259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 군주제는 대륙 노르망디와 기타 프랑스 권리를 포기했지만, 채널 제도(프랑스 주권 하의 쇼지 섬 제외)는 영국 왕실의 자치령으로 남아있다.

영국 역사가 벤 핌로트는 1967년 5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본토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 현지인들이 모자를 벗고 "비브 라 듀셰스!"(Vive la Duchesse!, 여공작 만세!)를 외치자 여왕이 "음, 나는 노르망디 공작인데!"라고 답했다고 언급했다.[15]

왕은 관례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불리며, 특히 섬 주민들이 충성 서약 중에 사용하는 칭호이다. "노르망디 공작, 우리의 왕" 또는 "왕, 우리의 공작"이라고 하며, 노르만어(저지어건지어)로 "''L'Rouai, nouotre Duc''" 또는 "''L'Roué, note Du''", 표준 프랑스어로 "''Le Roi, notre Duc''"이라고 말한다. 이는 영국에서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다.[16][17]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종종 전통적이고 관례적인 칭호인 노르망디 공작으로 불린다. 그러나 헌법적으로 공작이 아니며 여왕으로서의 권리로 통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주의자들은 이를 지역의 자부심으로 여겨 공식 만찬에서 '여왕 폐하' 대신 '여왕, 우리의 공작'에게 충성 서약을 바친다.[17]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칭호는 공식 정부 간행물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채널 제도 법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다.[18][17]

참조

[1] 웹사이트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the 'Lands of the Normans' https://www.dhi.ac.u[...] University of Sheffield
[2] 서적 The Normans Blackwell 2006
[3] 서적 The Image of Aristocracy in Britain, 1000–1300 Taylor and Francis 1992
[4] 웹사이트 December 17, 942: Death of William I Longsword of Normandy https://europeanroya[...] 2021-12-17
[5] 논문 The Earliest Norman Counts 1946
[6] 논문 The Earliest Norman Counts 1946
[7] 서적 The Normans in Europ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0
[8] 간행물 The Participation of Aquitanians in the Conquest of England 1066–1100 Boydell Press 1987
[9] 서적 The Evolution of Norman Identity, 911–1154 Boydell Press 2005
[10] 서적 The Normans: The History of a Dynasty Hambledon Continuum 2002
[11] 서적 The Normans Blackwell 2006
[12] 논문 The Earliest Norman Counts 1946
[13]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The Complete Genealogy Random House, London 1996
[14] 웹사이트 Crown Dependencies https://www.royal.uk[...] 2021-07-10
[15] Google books The Queen: Elizabeth II and the Monarchy HarperCollins UK 2012
[16] 웹사이트 The Loyal Toast http://www.debretts.[...] 2016-01-25
[17] Google books The Channel Islands
[18] 저널 Lé Rouai, Nouot' Duc https://www.jerseyla[...] 1999
[19] 문서 Statue de Guillaume le Conquérant
[20] 문서 初代のロロはノルマンディーの領主となった後にロベールに改名しているため、ロベール1世と呼ぶ場合がある。この場合、同名の子孫の2人はそれぞれ2世、3世に繰り下がる。
[21] 문서 ギヨーム・クリトン、ギヨーム・アドランともノルマンディー公に含める場合がある。両方を含める場合には後者は4世と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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