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공작은 911년 프랑스 왕 샤를 3세와 바이킹 롤로가 맺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으로 창설된 노르망디 공국을 통치하는 지배자를 의미한다.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다가 1204년 프랑스 왕령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공작 칭호는 프랑스 왕족에게 주어졌으며, 1792년 프랑스 군주제 폐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현재는 채널 제도를 통치하는 영국 군주를 비공식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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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공작 - 루이 프랑수아 드 부플레르 공작 루이 프랑수아 드 부플레르 공작은 프랑스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여러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지휘 능력으로 프랑스 원수와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레이스윅 조약 협상에도 참여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프랑스의 공작 - 카미유 도스튄 드 탈라르 공작 카미유 도스튄 드 탈라르 공작은 프랑스의 귀족, 외교관, 군인으로, 군 복무와 잉글랜드 대사 역임 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포로로 잡혔다가 귀국하여 공작으로 승작되고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장을 역임했다.
노르망디 공작 - 윌리엄 2세 (잉글랜드) 윌리엄 정복왕의 아들인 윌리엄 2세는 1087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여 형과의 전쟁으로 노르망디를 지배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갈등,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정복의 어려움, 그리고 사냥 중 의문사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던 통치자로 평가받는다.
노르망디 공작 - 헨리 1세 헨리 1세는 1100년부터 1135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으로, 자유 헌장 선포, 노르망디 정복, 성직 임명권 분쟁 해결, 행정 및 사법 개혁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졌지만 후계자 문제로 인해 내전의 씨앗을 남겼다.
영국의 군주 -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7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웨일스 공으로 오랜 기간 지내다가 1901년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외교에 힘쓰고 9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다 사망했다.
영국의 군주 - 조지 2세 조지 2세는 하노버 왕조의 두 번째 국왕이자 하노버 선제후로서 대브리튼과 아일랜드를 통치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을 겪었고, 헨델을 후원했으며, 그의 통치는 영국의 국제적 위상 강화와 입헌 군주제의 유지를 특징짓지만 평가가 다양하다.
1066년 노르망디 공 기욤은 잉글랜드 왕국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왕이면서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는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는 훗날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087년 기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들이 계승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이 분쟁은 1106년 앙리 1세가 로베르를 이김으로써 끝났는데, 이때 노르망디 공작의 계승권도 잉글랜드의 왕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1144년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노르망디를 정복했고, 이 공작령을 그의 아들 앙리에게 양도했으며, 앙리는 1154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되었다.
이후 노르망디는 프랑스 왕의 정복 목표가 되었고, 계속 도전을 받았으며, 결국 1204년채널 제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프랑스 왕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 채널 제도는 현재 왕실령으로서,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다.
1204년 이후, 프랑스 국왕은 노르망디 공국을 몰수하여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 이후, 공작 칭호는 여러 프랑스 왕자들이 가졌다. 프랑스 왕령이 된 이후 노르망디는 종종 친왕 재지가 되었다.
2. 1. 노르망디 공국의 성립
911년, 서프랑크 왕국(현재의 프랑스)의 왕 샤를 3세는 바이킹족 지도자 롤로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노르만족은 노르망디 지역을 봉토로 받았고, 롤로는 샤를 3세의 신하가 되었다.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샤를 3세는 그 대가로 노르망디 지역을 주고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노르망디 공작령이 성립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역은 노르망디로 불리게 되었다.
롤로는 어떠한 칭호도 소유하거나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의 아들과 손자인 윌리엄 1세와 리처드 1세는 "백작"(라틴어 ''comes'' 또는 ''consul'')과 "공작"(''princeps'')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 1066년 이전에는 노르망디 통치자의 가장 일반적인 칭호는 "노르망디 백작"(''comes Normanniae'') 또는 "노르만족의 백작"(''comes Normannorum'')이었다.[3]
공작(''dux'')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006년 노르망디의 리처드 2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리처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왕실 사무국은 노르만 통치자를 "노르만족의 공작"(''dux Normannorum'')이라고 처음으로 불렀다.[2] 윌리엄 2세(1035–87)의 통치 후반까지 노르망디의 통치자는 자신의 칭호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이 "공작이자 공작, 노르망디 백작"이라고 스스로 칭할 수 있었다.[3]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하고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망디 공작은 프랑스 왕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면서, 동시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훗날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2. 잉글랜드와의 관계
1066년 노르망디 공 기욤은 잉글랜드 왕국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왕이면서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었다.[2]
1087년 정복자 기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들이 계승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이 분쟁은 1106년 앙리 1세가 로베르를 이김으로써 끝났는데, 이때 노르망디 공작의 계승권도 잉글랜드의 왕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1144년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노르망디를 정복했고, 이 공작령을 그의 아들 앙리에게 양도했으며, 앙리는 1154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되었다.
이후로 노르망디는 프랑스 왕의 정복 목표가 되었고, 계속 도전을 받았으며, 결국 1204년채널 제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프랑스 왕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 채널 제도는 현재 왕실령으로서,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다.
1066년부터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윌리엄 1세가 되면서 노르망디 공작 칭호는 종종 잉글랜드 왕이 보유하게 되었다. 1087년 윌리엄이 사망하고 칭호는 그의 장남 로베르 커소즈에게로 넘어갔고, 그의 차남 윌리엄 루퍼스는 잉글랜드를 상속받았다. 1096년 로베르는 노르망디를 윌리엄에게 담보로 잡혔고, 윌리엄은 1100년 다른 형제인 헨리 1세에게 계승되었다. 1106년 헨리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노르망디는 아나키라고 알려진 내전 기간 동안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란타주네에게 정복된 1144년까지 잉글랜드 왕에게 남아 있었다. 조프루아의 아들 헨리 2세는 노르망디(1150년)와 잉글랜드(1154년)를 상속받아 두 칭호를 재결합했다. 1202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봉건적 주군으로서 노르망디를 몰수한다고 선언했고, 1204년까지 그의 군대가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헨리 3세는 마침내 파리 조약(1259년)에서 잉글랜드의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공작령은 프랑스 왕실 영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발루아 왕가의 왕들은 그들의 상속자에게 칭호를 수여하는 전통을 시작했다. 노르망디가 프랑스에 정복된 후부터 프랑스 군주제가 해체된 1792년까지 이 칭호는 네 번(1332년, 1350년, 1465년, 1785년) 수여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정치적 실체로서 종식시켰고, 당시에는 프랑스의 한 레지옹이었으며, 여러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대체되었다.
1204년채널 제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프랑스 왕에 지배를 받게 되었고, 채널 제도는 현재 왕실령으로서,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다.[14] 채널 제도에서 영국 군주는 남성 여부와 관계없이 비공식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 (예: 이 칭호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14] 채널 제도는 영국 군주가 통치하는 옛 노르망디 공작령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 영국 군주제는 1259년 파리 조약에서 대륙 노르망디와 기타 프랑스 권리를 포기했지만, 채널 제도(프랑스 주권 하의 쇼지 섬 제외)는 영국 왕실의 자치령으로 남아있다.
영국 역사가 벤 핌로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67년 5월 본토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 현지인들이 모자를 벗고 "비브 라 듀셰스!"(Vive la Duchesse!, 여공작 만세!)를 외치자 여왕이 "음, 나는 노르망디 공작인데!"라고 답했다고 언급했다.[15]
그러나 왕은 관례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불리며, 특히 충성 서약 중에 섬 주민들이 사용하는 칭호로, "노르망디 공작, 우리의 왕" 또는 "왕, 우리의 공작", 노르만어(각각 저지어와 건지어)로 "''L'Rouai, nouotre Duc''" 또는 "''L'Roué, note Du''", 표준 프랑스어로 "''Le Roi, notre Duc''"이라고 말하며, 영국에서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16][17]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칭호는 공식 정부 간행물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채널 제도 법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다.[18][17]
1204년, 프랑스 국왕은 노르망디 공국을 몰수했고(잉글랜드는 채널 제도를 통제) 이를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 이후, 공작 칭호는 여러 프랑스 왕자들이 가졌다.
존 (필리프 6세의 아들, 1332–1350)
샤를 (존 2세의 아들, 1350–1364)
샤를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형제, 베리 공작, 1465–1466)
요크 공작 제임스 (이후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 1660년 12월 31일, 찰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위에 복위된 지 몇 달 후, 루이 14세는 찰스의 동생인 요크 공작 제임스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선포했다. 이것은 아마도 정치적 지지의 몸짓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루이-샤를 (루이 16세의 아들, 이후 도팽 1789–1791, 명목상 왕 루이 17세 1792–1795), 1785–1792.
"노르망디 공작"의 문자적 라틴어 동등어인 ''dux Normanniae''는 1066년까지 사용되었지만,[8]앙주 시대(1144–1204)까지 ''dux Normannorum''을 대체하지 못했으며, 당시에는 노르만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있었다.[9]
1202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봉건적 주군으로서 노르망디를 몰수한다고 선언했고, 1204년까지 그의 군대가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헨리 3세는 마침내 파리 조약(1259년)에서 잉글랜드의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노르망디 공작령은 프랑스 왕실 영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발루아 왕가의 왕들은 그들의 상속자에게 칭호를 수여하는 전통을 시작했다. 노르망디가 프랑스에 정복된 후부터 프랑스 군주제가 해체된 1792년까지 이 칭호는 네 번(1332년, 1350년, 1465년, 1785년) 수여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정치적 실체로서 종식시켰고, 당시에는 프랑스의 한 레지옹이었으며, 여러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대체되었다.
3. 1. 초기 노르망디 가문 (911년–1135년)
롤로는 어떠한 칭호도 소유하거나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의 아들이자 손자인 기욤 1세와 리샤르 1세는 "백작"(라틴어 ''comes'' 또는 ''consul'')과 "공작"(''princeps'')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 1066년 이전에는 노르망디 통치자의 가장 일반적인 칭호는 "노르망디 백작"(''comes Normanniae'') 또는 "노르만족의 백작"(''comes Normannorum'')이었다.[3]
공작(''dux'')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006년 페캉 수도원에 유리한 행위에서 노르망디의 리샤르 2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작가 랭스의 리케루스가 리처드 1세를 ''dux pyratorum''이라고 불렀지만, 이는 단지 "해적의 지도자"를 의미할 뿐 칭호는 아니었다. 리처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왕실 사무국은 노르만 통치자를 "노르만족의 공작"(''dux Normannorum'')이라고 처음으로 불렀다.[2]
기욤 2세(1035–87)의 통치 후반까지 노르망디의 통치자는 자신의 칭호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이 "공작이자 공작, 노르망디 백작"이라고 스스로 칭할 수 있었다.[3]
리처드 1세는 966년경부터 "후작"(''marchio'')이라는 칭호를 실험했는데, 이는 또한 로테르 1세의 칙서에도 사용되었다.[10] 리처드 2세는 가끔 이 칭호를 사용했지만, 공작 칭호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1066년부터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윌리엄 1세가 되면서 노르망디 공작 칭호는 종종 잉글랜드 왕이 보유하게 되었다.
1204년, 프랑스 국왕은 노르망디 공국을 몰수했고(잉글랜드는 채널 제도를 통제) 이를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 이후, 공작 칭호는 여러 프랑스 왕자들이 가졌다.
1332년, 필리프 6세는 공국을 그의 아들인 장 2세에게 분봉령으로 주었고, 그는 1350년 프랑스의 장 2세가 되었다. 그는 다시 공국을 그의 아들 샤를 5세에게 분봉령으로 주었고, 그는 1364년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되었다. 1465년, 루이 11세는 강요에 의해 공국을 그의 형제 샤를 2세에게 주었다. 샤를 2세는 공국을 유지할 수 없었고, 1466년 다시 왕령에 편입되어 영구적으로 그 일부가 되었다.
이 칭호는 1792년 프랑스 군주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프랑스 왕실의 몇몇 젊은 구성원들에게 수여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정치적 실체로서 종식시켰고, 당시에는 프랑스의 한 레지옹이었으며, 여러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대체되었다.
3. 5. 부르봉 가문 (프랑스 왕령, 1785년-1792년)
1204년, 프랑스 국왕은 노르망디 공국을 몰수했고(잉글랜드는 채널 제도를 통제) 이를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 이후, 공작 칭호는 여러 프랑스 왕자들이 가졌다.
1332년, 필리프 6세는 공국을 그의 아들인 존에게 분봉령으로 주었고, 그는 1350년 프랑스의 존 2세가 되었다. 그는 다시 공국을 그의 아들 샤를에게 분봉령으로 주었고, 그는 1364년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되었다. 1465년, 루이 11세는 강요에 의해 공국을 그의 형제 베리 공작 샤를 드 발루아에게 주었다. 샤를은 공국을 유지할 수 없었고, 1466년 다시 왕령에 편입되어 영구적으로 그 일부가 되었다.
이 칭호는 1792년 프랑스 군주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프랑스 왕실의 몇몇 젊은 구성원들에게 수여되었다.
요크 공작 제임스의 경우, 1660년 12월 31일 찰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위에 복위된 지 몇 달 후, 루이 14세는 찰스의 동생인 그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선포했다. 이것은 아마도 정치적 지지의 몸짓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루이-샤를은 이후 도팽 (1789년–1791년) 및 명목상 왕 루이 17세 (1792년–1795년)이 되었다.
4. 현대의 노르망디 공작
채널 제도 저지 섬의 예술 센터에서 열린 다이아몬드 주빌리 전시회 제목 "La Reine, Notre Duc" (여왕, 우리의 공작)
채널 제도에서 영국 군주는 성별에 관계없이 비공식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이 칭호로 알려져 있다.[14] 채널 제도는 영국 군주가 통치하는 옛 노르망디 공국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 1259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 군주제는 대륙 노르망디와 기타 프랑스 권리를 포기했지만, 채널 제도(프랑스 주권 하의 쇼지 섬 제외)는 영국 왕실의 자치령으로 남아있다.
영국 역사가 벤 핌로트는 1967년 5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본토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 현지인들이 모자를 벗고 "비브 라 듀셰스!"(Vive la Duchesse!, 여공작 만세!)를 외치자 여왕이 "음, 나는 노르망디 공작인데!"라고 답했다고 언급했다.[15]
왕은 관례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불리며, 특히 섬 주민들이 충성 서약 중에 사용하는 칭호이다. "노르망디 공작, 우리의 왕" 또는 "왕, 우리의 공작"이라고 하며, 노르만어(저지어와 건지어)로 "''L'Rouai, nouotre Duc''" 또는 "''L'Roué, note Du''", 표준 프랑스어로 "''Le Roi, notre Duc''"이라고 말한다. 이는 영국에서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다.[16][17]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종종 전통적이고 관례적인 칭호인 노르망디 공작으로 불린다. 그러나 헌법적으로 공작이 아니며 여왕으로서의 권리로 통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주의자들은 이를 지역의 자부심으로 여겨 공식 만찬에서 '여왕 폐하' 대신 '여왕, 우리의 공작'에게 충성 서약을 바친다.[17]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칭호는 공식 정부 간행물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채널 제도 법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다.[18][17]
참조
[1]
웹사이트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the 'Lands of the Normans'
https://www.dhi.ac.u[...]
University of Sheffield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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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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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17, 942: Death of William I Longsword of Normandy
https://europeanroya[...]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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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The Earliest Norman Cou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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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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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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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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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dell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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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rmans: The History of a Dynasty
Hambledon Contin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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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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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The Earliest Norman Cou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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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The Complete Genealogy
Random House,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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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yal To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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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Google books
The Channel Islands
[18]
저널
Lé Rouai, Nouot' Duc
https://www.jerseyla[...]
1999
[19]
문서
Statue de Guillaume le Conquérant
[20]
문서
初代のロロはノルマンディーの領主となった後にロベールに改名しているため、ロベール1世と呼ぶ場合がある。この場合、同名の子孫の2人はそれぞれ2世、3世に繰り下がる。
[21]
문서
ギヨーム・クリトン、ギヨーム・アドランともノルマンディー公に含める場合がある。両方を含める場合には後者は4世と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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