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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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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는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의 장남으로, 1087년 아버지의 사후 노르망디 공작위를 물려받았으나, 동생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와의 권력 다툼에 휘말렸다. 그는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으며, 1100년 귀환 중 헨리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것을 확인했다. 이후 잉글랜드 왕위 찬탈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106년 틴체브레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노르망디 공작위를 잃고 평생 투옥되었다. 로베르 2세는 십자군에서 돌아와 콘베르사노의 시빌라와 결혼하여 윌리엄 클리토를 낳았고,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 그는 글로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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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기본 정보
로베르 쿠르토즈 중세 사본 {{c.}} 1300–1340
로베르 쿠르토즈 중세 사본 (1300–1340년경)
칭호노르망디 공작
재위 기간1087년 9월 9일 – 1106년
이전윌리엄 1세
이후헨리 1세
배우자시빌라 디 콘베르사노
자녀기욤 클리토
가문노르망디 가문
아버지윌리엄 1세
어머니마틸다 오브 플랑드르
출생지노르망디 공국
사망1134년 2월 (약 83세)
사망 장소카디프 성, 글러모건
매장 장소글로스터 대성당, 글로스터셔
개인 정보
출생 연도 (추정)1051년경
통치
재위 시작1087년
재위 종료1105년
사망
사망일1134년 2월 10일
사망 장소그래모건 카디프 성

2. 초기 생애 및 가족 관계

로베르는 초대 노르만 잉글랜드 국왕인 윌리엄 1세와 플랑드르의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그의 출생 연도는 1051년에서 1053년 사이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 그는 메인의 상속녀였던 마가렛과 약혼했으나, 그녀가 결혼 전에 사망하면서 로베르는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결혼했다.

젊은 시절 로베르는 용감하고 군사 훈련에 능숙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동시에 게으르고 성격이 유약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나 프랑스 국왕이 그를 이용하여 아버지 윌리엄 1세와의 불화를 조장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로베르 자신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버지 및 동생들인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와 자주 격렬하게 다투었다. 1063년, 아버지는 그를 메인 백작으로 임명했지만, 1069년 반란으로 인해 메인 지역은 노르만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1077년에는 동생들과의 사소한 장난이 발단이 되어 아버지에 대한 첫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로베르는 아버지의 신임을 더욱 잃고 추방당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순탄치 않은 관계를 이어갔다. 전투 중에 실수로 아버지를 공격하여 부상을 입힌 적도 있었으며, 추방 기간 동안 여러 지역을 떠돌며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데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군사적인 능력은 있었으나, 변덕스러운 성격 탓에 실무적인 통치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리엄 1세는 로베르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인 노르망디 공국의 후계자로 삼았지만, 자신이 정복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훗날 로베르와 그의 동생들 사이에 벌어질 왕위 계승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2. 1. 출생 및 유년 시절

로베르는 초대 노르만 잉글랜드 국왕윌리엄 1세플랑드르의 마틸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도는 1051년에서 1053년 사이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 그는 메인의 상속녀였던 마가렛과 약혼했으나, 마가렛이 결혼 전에 세상을 떠나면서 로베르는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결혼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로베르는 용감하고 군사 훈련에 능숙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게으르고 성격이 유약하다는 평가도 받았는데, 이 때문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나 프랑스 국왕이 그를 이용하여 아버지 윌리엄 1세와의 불화를 조장하기도 했다. 로베르 자신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버지 및 형제들과 자주 격렬하게 다투었다.

1063년, 아버지 윌리엄 1세는 로베르가 마가렛과 약혼한 것을 고려하여 그를 메인 백작으로 임명했다. 로베르는 한동안 메인에서 독자적인 통치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메인 지역은 1069년 반란이 일어나 메인의 위그 5세에게 넘어가면서 노르만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1077년, 로베르는 동생들인 윌리엄 2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그의 머리에 변기를 쏟는 장난을 친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에게 첫 번째 반란을 일으켰다. 격분한 로베르는 동료들의 부추김을 받아 형제들과 싸움을 벌였고, 이는 아버지 윌리엄 1세가 중재에 나서면서 겨우 멈추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자신의 위신이 손상되었다고 느꼈고, 아버지가 동생들을 처벌하지 않자 더욱 분노했다. 다음 날, 로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루앙 성을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윌리엄 1세가 이들의 체포를 명령하자, 로베르와 그의 동료들은 샤토뇌프-앙-티메레의 위그에게 피신했다. 이후 윌리엄 1세가 레말라르에 있는 그들의 근거지를 공격하자 다시 도망쳐야 했다.

2. 2. 가족 관계

로베르는 초대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 국왕인 윌리엄 1세와 플랑드르의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그의 출생 연도는 1051년에서 1053년 사이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 그는 메인의 상속녀 마가렛과 약혼했으나, 마가렛이 결혼 전에 사망하면서 로베르는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결혼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로베르는 용감하고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한편으로는 게으르고 성격이 유약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나 프랑스 국왕은 그를 이용하여 아버지 윌리엄 1세와의 불화를 조장하기도 했다. 로베르 자신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버지 및 형제들과 자주 충돌했다.

1063년, 아버지 윌리엄 1세는 로베르를 메인 백작으로 임명했다. 이는 약혼녀 마가렛의 상속권을 고려한 조치였으며, 로베르는 한때 메인에서 독자적인 통치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1069년, 메인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메인의 위그 5세에게 통치권이 넘어가 노르만 왕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1077년에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동생들인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가 그의 머리에 변기를 쏟는 장난을 치자, 로베르는 크게 격분하여 동생들과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은 아버지 윌리엄 1세의 중재로 겨우 멈췄지만, 로베르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느꼈고, 아버지가 동생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자 불만이 더욱 커졌다. 다음 날, 로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루앙 성을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윌리엄 1세가 체포 명령을 내리자 샤토뇌프-앙-티메레의 위그에게 피신했다. 이후 윌리엄 1세가 레말라르에 있는 그들의 근거지를 공격하자 다시 도망쳐야 했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던 로베르는 전투 중에 실수로 아버지를 공격하여 부상을 입힌 적도 있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추방당하기도 했다. 추방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지역을 떠돌았으며,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데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윌리엄 1세는 로베르에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주기로 했지만, 자신이 정복한 잉글랜드 왕위의 후계자는 명확히 지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087년 윌리엄 1세가 사망하자, 둘째 동생 윌리엄이 재빨리 런던으로 가 윌리엄 2세(적안왕)로 즉위했다. 로베르는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윌리엄 2세와 여러 차례 충돌했지만, 결국 서로가 상대방의 후계자가 되기로 합의하며 화해했다. 즉, 둘 중 한 명이 먼저 죽으면 살아남은 쪽이 상대방의 영토를 계승하기로 한 것이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로베르는 참가를 결심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담보로 동생 윌리엄 2세에게서 자금을 빌렸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세력(대표적으로 보에몽)과 합류하여 성지로 향했다.

1100년,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로베르는 윌리엄 2세가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막내 동생 헨리 1세(학자왕)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한 뒤였다. 로베르는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침공을 감행했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결국 헨리 1세의 왕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로베르는 잉글랜드 내 반란 세력과 연계하여 헨리 1세에게 계속 대항했다. 이에 헨리 1세는 1105년부터 노르망디를 침공했고, 1106년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힌 로베르는 노르망디 공작위를 빼앗기고 남은 생애 동안 유폐되어 지냈다.

2. 3. 초기 권력 투쟁

로베르는 초대 노르만 잉글랜드 국왕윌리엄 1세플랑드르의 마틸다의 장남으로, 1051년에서 1053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 그는 메인의 상속녀 마가렛과 약혼했으나 그녀가 결혼 전에 사망하여, 로베르는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결혼했다. 젊은 시절 그는 용감하고 군사 훈련에 능숙했지만, 한편으로는 게으르고 성격이 유약하여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나 프랑스 국왕이 아버지 윌리엄 1세와의 불화를 조장하는 데 이용하기 쉬운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버지 및 형제들과 자주 다투었다.

1063년, 아버지 윌리엄 1세는 로베르가 마가렛과 약혼한 것을 고려하여 그를 메인 백작으로 임명했다. 로베르는 메인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인 통치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백작령은 1069년까지 노르만 왕조의 통제를 받았지만, 반란이 일어나 메인의 위그 5세에게 넘어가면서 노르만 왕조는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1077년, 로베르는 동생들인 윌리엄 2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그의 머리에 오물이 든 요강을 쏟아붓는 장난을 친 것에 격분하여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로베르는 동료들의 부추김을 받아 형제들과 싸움을 벌였고, 이는 아버지 윌리엄 1세가 개입하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로베르는 자신의 위신이 손상되었다고 느꼈으며, 아버지가 동생들을 처벌하지 않자 더욱 분노했다. 다음 날, 로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루앙 성을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윌리엄 1세가 이들의 체포를 명령하자, 로베르와 추종자들은 샤토뇌프-앙-티메레의 위그에게 몸을 피했다. 이후 윌리엄 1세가 레말라르에 있는 그들의 근거지를 공격하자 다시 도망쳐야 했다.

3. 추방과 방랑 생활

아버지 윌리엄 1세와의 계속된 불화 끝에 로베르는 결국 추방되었다. 그는 삼촌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의 궁정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무력 충돌을 빚기도 했다. 1080년 어머니 마틸다 여왕의 중재로 잠시 부자 관계가 회복되었으나, 1083년 마틸다 여왕이 사망하자 로베르는 다시 궁정을 떠나 긴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 등 유럽 각지를 수년간 떠돌아다녔다. 이탈리아에서는 부유한 상속녀였던 토스카나의 마틸다에게 청혼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방랑 시기에 로베르는 여러 사생아를 두었는데, 아들 리처드와 딸 하나가 기록에 남아있다.

3. 1. 추방 배경

로베르는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 윌리엄 1세에게 반항하여 여러 차례 추방당했다. 그는 삼촌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의 궁정으로 달아나 벡생 지역을 약탈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아버지 윌리엄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동맹을 맺어 아들을 막으려 했다. 윌리엄 1세가 아내이자 로베르의 어머니인 마틸다 여왕이 몰래 로베르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자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079년 1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로베르는 말을 탄 채 싸우던 중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리고 부상을 입혔는데, 그가 바로 아버지 윌리엄 1세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후에야 공격을 멈췄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굴욕감을 느낀 윌리엄 1세는 아들을 저주했고, 포위를 풀고 루앙으로 돌아갔다.

1080년 부활절, 마틸다 여왕의 중재로 부자는 잠시 화해했으나, 1083년 마틸다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로베르는 다시 궁정을 떠났다. 이후 그는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 등지를 수년간 떠돌아다녔다. 이탈리아에서는 부유한 상속녀였던 토스카나의 마틸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시기 방랑 기사로 생활하며 여러 사생아를 두었는데, 아들 리차드는 훗날 삼촌 윌리엄 2세의 궁정에서 지내다 1100년 뉴 포레스트에서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다. 같은 해 윌리엄 2세 역시 사망했다. 사생아 딸은 나중에 생-생의 엘리아스와 결혼했다.

로베르는 무예는 어느 정도 갖추었으나, 변덕스럽고 몽상적인 성격 탓에 실무적인 통치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성향과 아버지와의 지속적인 갈등은 그의 추방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3. 2. 유럽 각지 방랑

로베르는 아버지 윌리엄 1세에게 반항하여 그의 삼촌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의 궁정으로 달아났고, 벡생의 영지를 약탈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윌리엄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동맹을 맺어 아들을 막으려 했다. 로베르의 어머니이자 윌리엄 1세의 아내인 마틸다 여왕이 로베르에게 몰래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자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079년 1월 전투에서는 로베르가 윌리엄 1세를 말에서 떨어뜨리고 부상을 입혔으나,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공격을 멈췄다고 전해진다. 이 일로 굴욕감을 느낀 윌리엄 1세는 아들을 저주했고, 포위를 풀고 루앙으로 돌아갔다.

1080년 부활절, 마틸다 여왕의 노력으로 로베르는 아버지와 화해했으며, 이 휴전은 1083년 마틸다 여왕이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 궁정을 떠나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 등지를 수년간 방랑했다. 이 시기 그는 부유한 상속녀였던 토스카나의 마틸다에게 청혼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방랑 기사로 지내는 동안 로베르는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 아들 리차드는 그의 삼촌인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러스의 궁정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1100년 뉴 포레스트에서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 같은 해 윌리엄 러스 국왕 역시 사망했다. 로베르의 사생 딸은 나중에 생-생의 엘리아스와 결혼했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반항적이었던 로베르는 무인으로서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으나, 변덕스럽고 몽상적인 성격 탓에 실무적인 통치자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3. 3. 사생아 출생

로베르는 어머니 마틸다가 사망한 1083년 직후 궁정을 떠나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해를 보냈다. 그는 위대한 상속녀였던 토스카나의 마틸다에게 청혼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시기 방랑 기사로 지내는 동안 로베르는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그의 아들 리처드는 생애 대부분을 삼촌인 윌리엄 러스 국왕의 왕실 궁정에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 리처드는 1100년 뉴 포레스트에서 사냥을 하던 중 사고로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그의 삼촌인 윌리엄 러스 국왕도 사망했다. 로베르의 사생 딸은 나중에 생-생의 엘리아스와 결혼했다.

4. 노르망디 공작 즉위와 통치

장 조제프 다시가 상상한 안티오크 공방전 당시의 로베르 쿠르토즈


1087년 아버지 윌리엄 1세가 사망하자, 로베르는 유언에 따라 노르망디 공국을 상속받았다. 그의 동생 윌리엄 루푸스잉글랜드 왕국을, 막내 동생 헨리는 상속 대신 땅을 살 수 있는 돈을 받았다. 로베르는 상대적으로 통치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 때문에 영국 해협 양쪽에 영지를 가진 일부 귀족들은 그의 통치를 선호하기도 했다.

즉위 직후 로베르와 윌리엄 루푸스는 서로를 후계자로 삼기로 합의했으나, 1088년 윌리엄 루푸스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반란(1088년 반란)이 로베르의 미온적인 태도로 실패하면서 형제간의 갈등은 깊어졌다. 로베르는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라눌프 플람바르를 조언자로 삼기도 했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선포되자, 로베르는 노르망디 공령을 윌리엄 2세에게 담보로 맡기고 자금을 빌려 십자군에 참가했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세력(보에몽 등)과 합류하여 성지로 향했다.

1100년,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윌리엄 2세의 사망 소식을 들었으나, 그가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막내 동생 헨리가 헨리 1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뒤였다. 로베르는 왕위를 주장하며 잉글랜드를 침공했지만 실패하고 헨리 1세의 왕위를 인정해야 했다. 이후에도 헨리 1세에게 계속 대항하다가 1106년 탱슈브레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혔고, 노르망디 공작위를 빼앗긴 채 여생을 유폐되어 보냈다.

4. 1. 노르망디 공작 즉위

1087년, 윌리엄 1세는 망트 공방전에서 낙마 사고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장남 로베르를 상속에서 제외하려 했으나, 주변의 설득으로 노르만 영지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로베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인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 되었고, 둘째 동생 윌리엄 루푸스는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막내아들 헨리에게는 땅을 살 수 있는 돈을 남겨주었다.

로베르는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전투 중에 아버지를 죽일 뻔한 적도 있었고, 여러 차례 추방당하기도 했다. 추방 기간 동안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토스카나 여백 마틸데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무예는 어느 정도 갖추었지만, 변덕스럽고 몽상적인 성격 탓에 실무적인 통치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로베르의 상대적으로 약한 면모 때문에 영국 해협 양쪽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은 그의 권위를 무시하기 쉽다고 판단하여 그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버지 윌리엄 1세가 사망하자, 둘째 동생 윌리엄 루푸스가 가장 먼저 런던으로 가 윌리엄 2세로 즉위했다. 이후 로베르와 윌리엄 2세는 서로를 자신의 영지의 상속자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1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1088년 일부 남작들이 로베르와 손잡고 윌리엄 2세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1088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베르가 잉글랜드의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제때 나타나지 않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로베르는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라눌프 플람바르를 자신의 주요 조언자로 삼았다. 플람바르는 이후 윌리엄 루푸스 아래에서도 재무 고문으로 활동하며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많은 이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다.

4. 2. 통치 기간의 어려움



1087년, 아버지 윌리엄 1세가 사망하자 로베르는 노르망디 공국을 상속받았고, 동생 윌리엄 루푸스잉글랜드 왕국을 물려받았다. 막내 동생 헨리에게는 상속 대신 땅을 살 수 있는 돈이 주어졌다. 당시 로베르는 윌리엄 루푸스보다 더 약한 통치자로 여겨졌으며, 영국 해협 양쪽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은 그의 권위를 더 쉽게 무시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후, 로베르와 윌리엄 루푸스는 서로를 후계자로 삼기로 합의했지만, 이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1088년, 일부 남작들이 윌리엄 루푸스를 몰아내기 위해 로베르와 손잡고 1088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로베르가 잉글랜드의 반란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못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로베르는 통치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라눌프 플람바르를 자신의 조언자로 두었으나, 이는 그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반항적이었던 로베르는 성격이 변덕스럽고 몽상적인 면이 있어 실무적인 통치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통치 내내 어려움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형제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로베르는 여러 차례 윌리엄 2세와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나, 결국 양측은 서로의 후계자가 되기로 합의하며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선포되자, 로베르는 참가를 위해 노르망디 공령을 윌리엄 2세에게 담보로 맡기고 자금을 빌렸다. 이는 그의 재정적 어려움과 정치적 입지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세력(보에몽 등)과 합류하여 성지로 향했다.

1100년,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로베르는 윌리엄 2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막내 동생 헨리가 재빨리 헨리 1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뒤였다. 로베르는 왕위를 주장하며 잉글랜드를 침공했지만, 잉글랜드 제후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결국 헨리 1세의 왕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로베르는 잉글랜드의 반란 세력과 연계하여 헨리 1세에게 지속적으로 대항했다. 이에 헨리 1세는 1105년부터 노르망디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1106년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는 헨리 1세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혔다. 결국 로베르는 노르망디 공작위를 빼앗기고 남은 생애를 유폐된 상태로 보내야 했다.

4. 3. 라눌프 플람바르와의 관계

로베르는 라눌프 플람바르를 자신의 조언자로 삼았다. 플람바르는 이전에 로베르의 아버지 윌리엄 1세(정복왕 윌리엄)의 측근이었으며, 이후 로베르의 동생인 윌리엄 루푸스가 1100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재무 고문으로 활동했다. 플람바르는 능력 있는 재무 관료였지만 많은 이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5. 제1차 십자군 참여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선포되자, 로베르 쿠르토즈는 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 비잔틴 제국을 지원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군대를 조직했다.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다스리던 노르망디 공령을 동생 윌리엄 2세에게 10,000 마르크를 받고 담보로 맡겼다.

지중해 지도, 베르망두아의 위그 1세, 부용의 고드프루아, 타란토의 보에몬드, 툴루즈의 레몽 4세, 로베르 쿠르토즈, 불로뉴의 발두인의 경로가 강조되어 표시됨. 십자군 당시 주요 기독교 및 무슬림 제국도 강조되어 표시됨. 소아시아의 주요 전투가 표시됨.
제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들의 경로 지도


로베르는 처남인 블루아의 스테판 백작과 함께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겨울을 보냈고,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비록 다른 주요 귀족들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는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점령하는 도시를 황제에게 반환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로베르는 1097년 니케아 포위전을 시작으로 십자군의 주요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099년 예루살렘 점령과 이후 벌어진 아스칼론 전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력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외교적 수완도 보여주었다.

십자군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로베르는 1099년 9월경 성지를 떠나 귀환길에 올랐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경유하며 알렉시우스 황제로부터 제국에 남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겨울을 보내며 콘베르사노의 시빌라와 결혼하여 노르망디 공국을 되찾을 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로베르가 귀환하는 사이 1100년 8월 동생 윌리엄 2세가 사망했고, 막내 동생 헨리가 재빨리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노르망디로 돌아온 로베르는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1101년 동생 헨리 1세를 상대로 침공을 감행했으나,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알톤 조약을 통해 왕위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여러 차례 추방당했던 경험이나, 십자군 이후 왕위 다툼에서 보여준 모습 등은 그가 용맹한 전사였을지는 몰라도 현실적인 통치자로서의 자질은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5. 1. 십자군 참여 배경

1096년, 로베르 쿠르토즈는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여 노르망디를 떠났다. 그의 목표는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 비잔틴 제국을 지원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로베르는 자금 마련을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던 노르망디 공령을 동생 윌리엄 2세에게 10,000 마르크를 받고 담보로 맡겼다. 이 거래를 통해 로베르는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렇게 마련된 자금으로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성지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5. 2. 십자군 원정 과정

1096년, 로베르는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 비잔틴 제국을 지원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여 노르망디를 떠났다. 십자군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노르망디 공령을 형 윌리엄 2세에게 10,000 마르크를 받고 담보로 맡겼다.

로베르는 처남인 블루아의 스테판 백작과 함께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1096년에서 109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부유한 노르만 귀족인 콘베르사노의 제프리 백작의 딸 시빌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로베르와 스테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주요 귀족 그룹이었으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이는 로베르의 할아버지인 로베르 1세, 노르망디 공작이 과거 예루살렘 순례 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던 인연 덕분이기도 했다. 그들은 툴루즈의 레몽 백작을 제외한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처럼, 점령하는 모든 도시(과거 비잔틴 영토였던 곳)를 알렉시우스 황제에게 반환하고 그의 우위를 인정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1097년 6월 초, 로베르와 스테판은 니케아 포위전에 합류했고, 십자군은 6월 19일 니케아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로베르는 이후 모든 군사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099년 7월 예루살렘 점령 당시까지 남은 핵심 인물 중 하나였으며, 같은 해 8월 12일 아스칼론 전투에도 참전했다. 십자군 원정 완수는 로베르에게 개인적인 성공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십자군 내 다양한 세력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능력 또한 보여주었다.

1099년 9월경 성지를 떠난 로베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귀환했다. 알렉시우스 황제는 그에게 많은 선물을 주며 비잔틴 제국에 남아 봉사할 것을 제안했지만, 로베르는 이를 거절했다. 대신 그는 다시 남부 이탈리아로 가서 겨울을 보내고 시빌라와 결혼했다. 그녀가 가져온 상당한 지참금은 로베르가 노르망디 공령을 되찾는 데 필요한 자금이 되었다. 하지만 로베르가 아직 귀환 중이던 1100년 8월 2일, 형 윌리엄 2세가 사망했고, 동생 헨리가 재빨리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5. 3. 십자군 이후의 귀환

제1차 십자군에서의 활약을 마치고 로베르는 1099년 9월경 성지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귀환길에 올랐다.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황제는 그에게 많은 선물을 주며 제국에 남아 봉사할 것을 제안했지만, 로베르는 이를 거절했다.

대신 그는 남부 이탈리아로 가서 겨울을 보냈고, 그곳에서 콘베르사노 백작 제프리의 딸인 콘베르사노의 시빌라와 결혼했다. 시빌라가 가져온 상당한 지참금 덕분에 로베르는 십자군 참가를 위해 담보로 잡혔던 노르망디 공국을 되찾을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베르가 아직 귀환 중이던 1100년 8월 2일, 그의 동생이자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윌리엄 2세가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다. 로베르가 부재한 틈을 타 막내 동생 헨리가 재빨리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여 헨리 1세로 즉위했다.

노르망디로 돌아온 로베르는 플람바드를 비롯한 일부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의 부추김을 받아, 과거 형제간의 합의를 근거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했다. 1101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포츠머스에 상륙하여 동생 헨리 1세를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내에서 로베르에 대한 지지는 부족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앤설름은 공개적으로 헨리 1세를 지지했고, 헨리 1세가 즉위하며 발표한 자유 헌장 역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로베르 자신도 침공 작전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지 못했다. 결국 헨리 1세는 형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로베르는 알톤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는 헨리 1세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6.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과 유폐

1100년,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로베르 2세는 동생 윌리엄 2세가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막내 동생 헨리 1세가 재빨리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한 뒤였다. 로베르는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결국 헨리 1세의 왕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로베르는 잉글랜드 내의 반란 세력과 연대하며 헨리 1세에게 지속적으로 도전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갈등과 노르망디 내부의 불안정은 결국 1105년 헨리 1세의 노르망디 침공을 불러왔다.

1106년, 틴체브레이 전투에서 로베르의 군대는 헨리 1세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로베르는 포로로 잡혔고,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노르망디는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잉글랜드 왕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포로가 된 로베르는 남은 생애를 유폐된 상태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잉글랜드 윌트셔의 데바이즈 성에 20년간 갇혀 있었고, 이후 웨일스의 카디프 성으로 옮겨져 여생을 마쳤다. 1134년, 로베르는 80대 초반의 나이로 카디프 성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글로스터의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훗날 글로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6. 1. 헨리 1세와의 갈등

1100년,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로베르 2세는 동생 윌리엄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그가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막내 동생 헨리 1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한 상태였다. 이에 로베르는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현지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결국 헨리 1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로베르는 잉글랜드 내 반란 세력과 손잡고 헨리 1세와 대립했다. 이 때문에 1105년부터 헨리 1세에 의한 노르망디 침공을 받게 되었고, 1106년 벌어진 탱슈브레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혔다. 이 패배로 로베르는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박탈당하고 평생 유폐되었다.

6. 2. 틴체브레이 전투와 패배

로베르의 글로스터 대성당 묘지


1105년,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른 동생 헨리 1세와의 끊임없는 불화와 노르망디 내부의 혼란을 이유로 헨리 1세는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역사가 오데릭 비탈리스에 따르면, 1105년 부활절에 로베르는 존경받는 세의 주교 세를로의 설교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전날 밤 유흥에 빠져 늦잠을 자고 옷까지 도둑맞는 바람에 설교에 가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당시 로베르의 통치 능력 부족과 방탕한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진다.

결국 1106년, 헨리 1세는 틴체브레이 전투에서 로베르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로베르는 포로로 잡혔고, 노르망디는 잉글랜드 왕가의 소유가 되어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포로가 된 로베르는 처음에는 잉글랜드 윌트셔의 데바이즈 성에 20년 동안 투옥되었고, 이후 웨일스의 카디프 성으로 이송되었다.

로베르는 1134년 카디프 성에서 8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때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정복왕의 장남 로베르 퀴르토스는 글로스터의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훗날 글로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정확한 매장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전설에 따르면 주 제단 앞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무덤 위에는 사후 약 100년 뒤에 만들어진 늪 참나무 조각상과 훨씬 후에 제작된 구용사 문장 장식의 영구 상자가 놓여 있다.

로베르는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여러 차례 추방당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무인으로서의 자질은 있었으나, 변덕스럽고 몽상적인 성격 탓에 실무적인 통치자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 제1차 십자군 참가를 위해 동생 윌리엄 2세에게 노르망디를 담보로 자금을 빌렸고, 십자군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막내 동생 헨리 1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한 뒤였다. 왕위를 주장하며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이후에도 잉글랜드의 반란 세력과 연계하여 헨리 1세에게 대항하다 결국 노르망디 침공을 받아 틴체브레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6. 3. 유폐 생활과 죽음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한 동생 헨리 1세와의 끊임없는 불화와 노르망디 내부의 혼란은 결국 헨리 1세의 군사적 개입을 불렀다. 로베르가 잉글랜드의 반란 세력과 연대하여 헨리 1세에게 지속적으로 대항하자, 헨리 1세는 1105년부터 노르망디 침공을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투는 1106년에 벌어졌다. 헨리 1세는 틴체브레이 전투에서 로베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로베르를 사로잡았다. 이 패배로 로베르는 노르망디 공작위를 빼앗겼고, 노르망디는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잉글랜드 왕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전투 후 포로가 된 로베르는 남은 생애를 유폐 상태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윌트셔의 데바이즈 성에 20년간 투옥되었고, 이후 웨일스의 카디프 성으로 이송되어 여생을 보냈다.

1134년, 로베르는 80대 초반의 나이로 카디프 성에서 사망했다. 한때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정복왕의 장남은 글로스터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현 글로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정확한 매장 위치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전설에 따르면 주 제단 앞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무덤 위에는 사후 약 100년 뒤에 늪 참나무로 조각된 그의 초상이 놓였고, 이는 구용사의 문장으로 장식된 영구 상자 안에 안치되었다.

7. 유산과 후손

로베르 2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콘베르사노의 시빌라와 결혼하여 적자인 윌리엄 클리토를 낳았다. 윌리엄 클리토는 노르망디 공국의 상속자였으나,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고 결국 1128년에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이로써 로베르 2세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로베르 2세에게는 리처드, 윌리엄 등 최소 세 명의 사생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7. 1. 콘베르사노의 시빌라와의 결혼과 자녀

로베르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에서 콘베르사노의 시빌라와 결혼했다. 그녀는 콘베르사노 백작 브린디시의 제프리의 딸이자, 노르만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의 조카손녀였다.

시빌라는 당시 연대기 작가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으나, 아들 윌리엄 클리토를 낳은 직후 루앙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말름즈베리의 윌리엄은 가슴을 너무 꽉 조여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반면, 토르니의 로베르와 오데릭 비탈리스는 로베르의 정부였던 아그네스 지파르(Agnes Giffard)가 이끄는 귀부인들의 음모로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로베르와 시빌라 사이에는 아들 한 명이 있었으며, 로베르에게는 최소 세 명의 사생아도 있었다.

자녀
구분이름생몰년비고
적자윌리엄 클리토1102년 10월 25일 ~ 1128년노르망디 공국의 상속자. 플랑드르 백작 (기욤 1세, 재위: 1127년 ~ 1128년).
서자리샤르1079년경 ~ 1100년 5월1100년 5월 뉴 포레스트에서 사냥 중 사망.
기욤1079년경 ~ 1110년 이후리샤르와 동복 형제. 1106년 이후 성지로 가서 토르토사의 영주가 되었으나, 1110년 이후 기록에서 사라짐.
? ~ ?생-세안의 헬리아스와 결혼.



아들 윌리엄 클리토는 노르망디 공국의 상속자였으나 평생 불운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1세에게 맞서 노르망디를 되찾으려 두 차례(1119년, 1125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딸 앙주의 시빌라와의 첫 결혼은 숙부 헨리 1세의 방해로 무효가 되었다. 말년에 플랑드르 백작 지위를 상속받았으나 이마저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1128년 후사 없이 사망하여, 로베르 직계의 노르만 계승권은 단절되었다.

7. 2. 사생아들

로베르 2세에게는 알려진 사생아가 최소 세 명 있었다.

  • 리처드: 1079년경 태어나 1100년 5월 뉴 포레스트에서 사냥 중 사망했다. 그의 삼촌 베르네의 리처드 공작과 같은 해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 역시 사냥 관련 사고로 사망했다.
  • 윌리엄: 1079년경 태어났으며 리처드의 친형제이다. 1106년 이후 성지로 가서 토르토사의 영주가 되었으나, 1110년 이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1111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딸: 아르크 백작 Helias of Saint-Saens|생-세안의 헬리아스영어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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