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의 마틸다
1. 개요
플랑드르의 마틸다는 플랑드르 백작 발두인 5세의 딸이자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의 아내이다. 윌리엄 1세와 결혼하기 전, 브릭트릭이라는 남자를 짝사랑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윌리엄과의 결혼은 근친상간 논란으로 교황의 허가를 받아 이루어졌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을 지원하고 노르망디를 통치했으며,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했다. 1083년에 사망하여 캉의 노르망디 여성 수도원에 묻혔으며, 윌리엄과의 사이에서 로베르, 윌리엄 2세, 헨리 1세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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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어 | Mathilde |
|---|---|
| 네덜란드어 | Machteld |
| 배우자 | 예 |
|---|---|
| 왕위 계승 | 잉글랜드 왕비 |
| 대관식 | 1068년 5월 11일 |
|---|---|
| 대관식 유형 | 대관식 |
| 재위 기간 | 1066년 12월 25일 – 1083년 11월 2일 |
| 배우자 |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 (1051년/1052년 결혼) |
| 자녀 | 목록 참조 |
| 가문 | 플랑드르 가문 |
|---|---|
| 아버지 |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 |
| 어머니 | 프랑스의 아델라 |
| 출생일 | 1031년경 |
|---|---|
| 사망일 | 1083년 11월 2일 (52세경) |
| 매장지 | 캉, 노르망디, 사ント・トリ니테 수도원 |
| 자녀 목록 |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노르망디의 리처드 아델리자 세실리아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 브르타뉴 공작 부인 콘스탄스 블루아 백작 부인 아델라 잉글랜드의 헨리 1세 |
|---|
-
11세기 잉글랜드 사람 -
토스티그
토스티그는 11세기 잉글랜드 귀족으로, 노섬브리아 백작을 지냈으나 가혹한 통치로 폐위된 후 잉글랜드 침공을 시도하다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
11세기 잉글랜드 사람 -
고다이바 부인
고다이바 부인은 11세기 영국의 귀족 여성으로, 남편의 가혹한 세금 정책에 반대하여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며 세금 감면을 요구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
1083년 사망 -
증공
증공은 북송 시대의 문인이자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지방관을 역임하며 민생 안정에 힘쓰고 국가 재정 문제에 날카로운 지적을 했으며, 실질적인 논의 전개가 특징인 문장으로 서발과 잡기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
1083년 사망 -
문종 (고려)
문종은 고려 제11대 왕으로, 유능한 인재 등용과 과거 제도 정비, 여진족 정벌 및 국방력 강화 등의 노력으로 고려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문벌 귀족 사회의 폐단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
노르망디 공작부인 -
이트카 체스케 왕녀
이트카 체스케 왕녀는 보헤미아 국왕 얀의 딸로,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어머니이며, 노르망디 공작 장과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낳고 예술 후원자로 활동하다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
노르망디 공작부인 -
베렝겔라 나바라 왕녀
베렝겔라 나바라 왕녀는 나바라 왕국의 공주이자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의 왕비로, 정략결혼 후 리처드 1세의 사망을 깊이 슬퍼했으며, 잉글랜드 땅을 밟지 못했지만 말년에 수도원을 후원하며 신앙생활에 전념했고, 경건함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2. 로맨스 소문
마틸다가 젊은 시절, 플랑드르에 잉글랜드 대사로 파견된 앵글로-색슨족 테인 계급의 브릭트릭(알가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그에게 구애했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브릭트릭은 마틸다의 구애를 정중히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와스의 계승자들과 바스 연대기 계속 저자 등의 기록에 언급되지만, 그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몇 년 후 정복왕 윌리엄과 결혼하여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 마틸다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브릭트릭의 땅을 몰수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으며, 브릭트릭은 결국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로 여겨진다.
3. 결혼
마틸다는 플랑드르 백작 발두인 5세와 프랑스의 공주 아델(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당시 유럽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훗날 '정복왕'으로 불림)가 마틸다에게 대리인을 보내 청혼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사생아와 결혼하기에는 너무 고귀한 신분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윌리엄은 격분하여 직접 노르망디에서 브뤼허까지 말을 타고 달려갔고, 교회로 향하던 마틸다를 발견하자 그녀의 긴 댕기머리를 잡아 말에서 끌어내린 뒤 수행원들이 보는 앞에서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기록에서는 윌리엄이 릴에 있는 마틸다의 아버지 저택으로 쳐들어가 그녀를 찾아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때렸다고도 한다. 당연히 마틸다의 아버지 발두인 5세는 격노했지만, 칼을 뽑아 결투를 벌이려 하기 전에 마틸다가 나서서 "윌리엄이 아니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극적인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보다는 허구로 간주하며, 실제로는 플랑드르와 노르망디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양측 가문이 계획한 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윌리엄과 마틸다는 먼 친척 관계로 혈연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1049년 랭스 공의회에서 교황 레오 9세는 근친 관계를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051년 혹은 1052년 경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금지령은 1059년에 이르러서야 교황 니콜라오 2세에 의해 사면 형식으로 철회되었다. 이 사면은 당시 벡 수도원의 수사였던 란프랑이 로마로 가서 교황청과 협상을 벌인 결과였다. 교황의 승인을 얻는 조건으로, 윌리엄과 마틸다는 교황의 허락 없이 결혼한 것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노르망디의 캉에 각각 남성 수도원(오 옴므 수도원)과 여성 수도원(오 다므 수도원) 두 곳을 건립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매우 행복했으며 많은 자녀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동시대의 기록들은 윌리엄이 마틸다에게 매우 충실했다고 평가한다.
4. 노르망디 공작부인
윌리엄이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할 때, 마틸다는 자신의 자금을 들여 모라(Mora)라는 배를 만들어 남편에게 선물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로 떠나 있는 동안 아내 마틸다에게 노르망디 통치를 맡겼다. 마틸다는 당시 14세였던 아들 로버트 커토즈의 이름으로 공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으며, 그녀가 통치하는 동안 큰 반란이나 불안정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마틸다는 윌리엄이 자리를 비운 동안 총 여섯 차례에 걸쳐 노르망디의 섭정을 맡았다.
| 기간 | 비고 |
|---|---|
| 1066년–1067년 |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기간 |
| 1067년–1068년 | |
| 1069년 | |
| 1069년–1072년 | |
| 1074년 | |
| 1075년–1076년 |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마틸다는 1년 이상이 지난, 거의 2년 만인 1068년 4월에야 잉글랜드를 방문했다. 그녀는 1068년 오순절(성령강림절)에 잉글랜드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며, 이때 윌리엄도 왕으로서의 권위를 다시 한번 확인받기 위해 함께 왕관을 썼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 후에도 마틸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노르망디에서 보내며 공국을 다스리는 일에 힘썼다. 또한 자신의 고향인 플랑드르에 있는 그녀의 오빠의 이익을 지지하고, 그곳의 교회 기관을 후원했다. 마틸다가 윌리엄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 중 잉글랜드 땅에서 태어난 아이는 헨리가 유일하다. 헨리는 마틸다가 남편 윌리엄 1세의 북부 황폐화 군사 작전에 동행했을 때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5. 잉글랜드 왕비
마틸다는 1068년 5월 11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오순절 축제 기간 동안 요크의 앨드레드 대주교가 주재하는 의식에서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이 즉위식에서는 여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 가지 새로운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여왕이 신에 의해 신성하게 임명되었으며, 남편인 왕과 왕권을 공유하고, 자신의 권능과 미덕으로 백성을 축복하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권위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환호, 즉 라우데스를 통해 더욱 강조되었다.
오랫동안 마틸다가 바이외 태피스트리(일반적으로 프랑스어로 La Tapisserie de la Reine Mathilde프랑스어라고 불림) 제작에 관여했다는 설이 있었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재는 윌리엄의 이복형제인 바이외의 오도 주교가 의뢰하여 켄트주의 잉글랜드 장인들이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틸다는 윌리엄과의 사이에서 아홉 명 또는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윌리엄은 마틸다에게 충실했으며, 혼외 자녀를 두었다는 증거는 없다. 여왕으로서의 의무에도 불구하고 마틸다는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에 깊이 관여하여, 자녀들 모두 뛰어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딸들은 부부가 결혼을 인정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설립한 캉의 캉의 생트 트리니테 수도원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아들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캔터베리 대주교 란프랑코의 도움을 받았으며, 마틸다와 윌리엄 모두 교회를 활성화하려는 란프랑코 대주교의 노력에 동의했다.
마틸다와 윌리엄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드문 사례 중 하나는 장남 로버트에 관한 문제였다. 로버트는 용맹했지만 게으르고 나약한 면이 있어 아버지 및 형제들과 불화를 겪었다. 1077년, 로버트는 군사를 일으켜 루앙 성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외삼촌인 플랑드르 백작 로버트 1세에게 망명했다. 윌리엄은 마틸다가 망명 중인 아들 로버트에게 몰래 많은 돈을 보낸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080년 부활절, 마틸다의 중재로 윌리엄과 로버트 부자는 잠시나마 화해했다.
마틸다는 훗날 자신의 아들 헨리 1세 (잉글랜드)와 결혼하여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는 스코틀랜드의 마틸다의 대모가 되었다. 세례식 도중 아기 마틸다가 대모인 마틸다 여왕의 머리 장식을 자신의 머리 위로 끌어당기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어린 마틸다가 장차 여왕이 될 것이라는 징조로 여겨졌다.
6. 죽음과 매장
마틸다는 1083년 여름 병을 얻어 그해 11월 2일에 사망했다. 남편 윌리엄은 그녀의 임종과 마지막 고해성사를 지켰으며,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사냥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윌리엄은 마틸다가 사망한 지 4년 후인 1087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틸다는 캉에 있는 여성 수도원(Abbaye aux Dames, 생트 트리니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는 남편 윌리엄이 묻힌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Abbaye aux Hommes)과는 다른 곳이다. 마틸다의 무덤은 교회 뒤편에 있으며, 그녀의 묘비를 새긴 11세기의 매끄러운 검은색 석판(레저 석)으로 유명하다. 반면 윌리엄의 묘비는 19세기 초에 교체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틸다의 묘는 훼손되었고 원래의 관은 파괴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밀봉된 상자에 담겨 원래의 검은색 묘비 아래에 다시 안치되었다. 1959년, 마틸다의 불완전한 골격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대퇴골과 경골을 측정하여 생전 키를 추정했다. 조사 결과 마틸다의 키는 약 1.52m로, 당시 여성의 평균 키에 해당했다. 그러나 이 조사 결과가 약 1.22m로 잘못 알려지면서 마틸다가 매우 작은 키를 가졌다는 신화가 퍼지기도 했다.
7. 자녀
마틸다는 윌리엄 1세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기록에 따라 자녀 수에 대한 언급이 조금씩 다르나(최소 4남 5녀 또는 4남 7녀 등), 아들 넷을 두었다는 점은 일치한다. 아들들의 출생 순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만, 딸들의 수와 출생 순서에 대해서는 기록이 불분명하여 확실하지 않다.
7.1. 아들
마틸다는 윌리엄 1세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아들들의 출생 순서는 명확하다.
# 로베르
# 리처드
# 윌리엄 루퍼스
# 헨리
7.1.1. 로베르 2세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Robert, 1053년경 – 1134년 2월 10일)는 노르망디 공작이었다. 그는 콩베르사노의 제프리의 딸인 시빌(Sybil)과 결혼했다.
7.1.2. 리처드 (베르네 공작)
리처드( Richard영어, 1055년경 또는 1054년/1056년경 ~ 1069년경-1074년경 또는 1069년/1075년경)는 플랑드르의 마틸다와 윌리엄 1세의 둘째 아들로, 베르네 공작이었다.
7.1.3. 윌리엄 2세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William Rufus 또는 기욤, 1060년경 – 1100년 8월 2일)는 노르만 왕조의 제2대 잉글랜드 국왕으로, 뉴포레스트에서 사망했다.
7.1.4. 헨리 1세 (잉글랜드 왕)
헨리(1068년 후반 – 1135년 12월 1일)는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에디스와 결혼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루뱅의 아델리자였다.
7.2. 딸
마틸다는 윌리엄 1세와의 사이에서 최소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 아들들의 출생 순서는 명확하지만 딸들의 출생 순서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마틸다의 딸들은 다음과 같다.
* 아델리자
* 세실리아
* 마틸다
* 콘스탄스
* 아델라
* 아가사
7.2.1. 아델리자
아델리자(Adeliza영어, 또는 아델리다(Adelida영어), 아델레이드(Adelaide영어))는 1057년경 출생하여 1073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와 약혼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프레오(Préaux프랑스어)의 생 레제(Saint-Léger프랑스어) 수녀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7.2.2. 세실리아
세실리아(Cecilia 또는 Cecily)는 플랑드르의 마틸다와 윌리엄 1세의 딸이다. 대략 1058년경에 태어나 1127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기록에는 1054년경 출생하여 1125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녀는 캉에 위치한 성 삼위일체 수녀원의 원장을 지냈다.
7.2.3. 마틸다
마틸다는 윌리엄과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과 최소 5명 이상의 딸을 낳았다. 아들들의 출생 순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알려져 있으나, 딸들의 출생 순서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부족하다.
마틸다와 윌리엄 1세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로베르 (Robert) | c.1053 – 1134년 2월 10일 | 노르망디 공작으로, 콘베르사노의 제프리 딸 시빌(Sybil)과 결혼했다. |
| 리처드 (Richard) | c.1055 – c.1069-74 | 베르네 공작.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 아델리자 (Adeliza) | c.1057 – c.1073 | 해럴드 2세와 약혼했다는 설이 있으며, 프뢰(Préaux)의 성 레거(St Léger) 수녀와 동일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
| 세실리아 (Cecilia) | c.1058 – 1127 | 캉의 성 삼위일체 수녀원 원장을 지냈다. |
| 윌리엄 루퍼스 (William Rufus) | c.1060 – 1100년 8월 2일 |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으며, 뉴포레스트에서 사냥 중 사망했다. |
| 마틸다 (Matilda) | c.1061 – c.1086 | 마틸다 당쿠르(Matilda d'Aincourt)와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어, 실제로는 더 늦게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
| 콘스탄스 (Constance) | c.1062 – 1090 | 브르타뉴 공작 알랭 4세 페르장(Alan IV Fergent)과 결혼했다. |
| 아델라 (Adela) | c.1067 – 1137 | 블루아 백작스티븐(Stephen)과 결혼했으며, 잉글랜드의 왕 스티븐의 어머니다. |
| 헨리 (Henry) | 1068년 후반 – 1135년 12월 1일 |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첫 부인은 스코틀랜드의 왕말 콜룸 3세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에디스(마틸다)였고, 두 번째 부인은 루뱅의 아델리자였다. |
| 아가사 (Agatha) | 생몰년 미상 | 해럴드 2세,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 메인 백작 허버트 1세 등과 약혼했다는 설이 있으나, 결혼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델리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
7.2.5. 아델라
아델라(1067년경 – 1137년)는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와 결혼했으며,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의 어머니이다.
7.2.6. 아가사
아가타(Agatha)는 생몰년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부 기록에 따르면 1062년경 태어나 1080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 그리고 메인의 에르베르 1세 백작과 약혼하였으나,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미혼으로 사망하였다. 일부에서는 아가타가 언니인 아델리자 또는 동생 마틸다와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8. 계도
플랑드르의 마틸다는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 주요 귀족 가문의 혈통을 이었다.
* 부계
아버지는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이다. 할아버지는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4세이며, 증조부는 플랑드르 백작 아르눌 2세이다. 그 위로는 아르눌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모계
어머니는 프랑스 왕 로베르 2세의 딸인 아델이다. 외할아버지인 로베르 2세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두 번째 왕이며, 외증조부는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이다. 또한 외할머니는 콘스탄스이다.